정재승과 진중권의 크로스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정재승의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시선과 진중권의 철학과 예술, 인문을 아우르는 글의 방향을 따라가는건 퍽 즐거운 독서경험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많은 꼭지들의 담백한 정보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게 있다. 그것은 바로 레고 얘기를 하면서 진중권이 아들과의 일화를 얘기한 부분이었다. 혹자는 그 부분에서 진중권의 담백함을 봤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왠지, 어, 진중권도 못쓰는 글이 있네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못쓴 글은 아니었지만 에세이 전문(잉?) 독자가 보기엔 특별하거나 재미있지 않았다. 사람마다 잘 쓰는 글이 있다는걸 안 순간이었다.


 문제의 핵심을 뽑아내는 탁월한 직관력, 독특한 상상력, 허를 찌르는 유머가 아니더라도 '각자가 잘하는 글쓰기'란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잘 쓴 글'을 잘 쓸 자신이 없으니 내 나름대로 꾸준히 쓰면 되는 것이었다. 추천수에 연연하고 있지만 그럴 필요도 없으며(필요가 없다고 안 그런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하고 싶은 얘기를 쥐어짤 일도 없었던 것이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기 싫으면 안 쓰면 된다. 새해 들어 즐찾이 초큼 늘었다고 그분들이 심심하지 않게 해야한다는 과도한 의무감 때문에 페이퍼 양으로 승부를 보는 대신 내가 잘 쓸 수 있는 글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제 자기 전에 머릿 속에 떠오르는 책들로 페이퍼를 구성해봤고 그 내용이 퍽이나 만족스러워 흐뭇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던 터이다.

 

  헌데 어제 아침에 다락방의 페이퍼를 봤다.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 수놈을 떠올리는건 이 세상에 다락방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토록 독특한 페이퍼를 부지런하게 이미지를 첨부해서 올린걸 보니 페이퍼 쓸 의욕이 숑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독특함으론 다락방보다 나을 수는 없겠어. 독특함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나 사는 이야기'에 집중할 생각으로 한의원에서 방귀뀌다 간호사에게 혼난 아저씨 얘기를 생각해냈는데 냄새가 나는 것이다. 잘 풀어내면 재미있을만한 이야기인데 언뜻 떠올려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산골소녀투쟁기'의 산골소녀가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낸 것과 내가 쓸 글을 비교해보니 별로였던거다.

 그럼 나는 문장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글을 써보는거야. 헌데 하필이면 요즘 읽고 있는 책이 김혜리의 것이다. 맙소사.(김미려처럼) 대체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문장은 아름답고 글은 유려하게 흐른다. 나는 넘볼 수 없는 경지란게 있는거다. 물론 독자로서 이만한 책을 읽는 수고만으로 접하고 느낄 수 있는건 즐거운 일이지만.


 그럼 내가 재미를 느끼고 즐겁게 쓸 수 있는 글은 뭘까.

 

 흥미를 느끼는 타인들간에 둘러싸여 그들의 말을 적고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감을 잡아내고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써내려간 글.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고 잘쓰더라 싶다. '잘 쓴다'는건 순전히 내 기준이지만.

 

 어제 누군가 '별 게 다 비밀인 남자'란 제목의 페이퍼를 쓰라고 부탁을 했지만 나는 그 페이퍼 대신 그 페이퍼를 쓸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다음에 만나면 우리 사이에서 빛을 보지 못한 서로의 캐릭터도 발견하고 그동안 쟁여놓은 이야기들도 풀어놓고 싶다. 어렸을 때 모범생도 아닌데 학교와 집만 오갔던 것처럼 지금은 회사와 집만 오가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잠깐씩 그들과 한눈을 팔았으면 좋겠다. 하이킥에서 말한 것처럼 지리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건 짧은 일탈의 순간일 수 있으니까. 난 아직까지 그들과 있어야 좀 더 '나답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아이가 그들 안에선 무례하거나 비사회적인 누군가가 아닌 그냥 '아치'가 되니까. 나 역시 애면글면 사회인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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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05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봤어요. 생선을 잡고있는 노인이네요. 아치, 저 그림을 삽입한 노인과바다 페이퍼를 구상했던거에요? 써줘요, 써줘요!! 청새치로 독특한 페이퍼가 됐다면 그림으로 독특한 페이퍼가 되는거잖아요!! 바보. 아치는 바보야!!

그건그렇고,
비밀건은 어떻게, 나름 해결한거에요? 하핫

Arch 2012-02-06 09:18   좋아요 0 | URL
저건 책을 넣으려가다가 안 예뻐서 넣어본거에요. 노인과 바다는 문고본으로 읽은 기억밖에 없어서^^ 저 그림에서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다니, 맙소사!

비밀건은 해결 안 했어요. 뭘 해결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나는 '뚫린 입'이 되어버렸어요.

다락방 2012-02-06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말에는 거의 알라딘에 안들어오게 되는데(토요일은 술마시고 일요일은 쉬고) 아치는 토요일 밤에(!!)페이퍼를 남겼네요. 오오~

Arch 2012-02-06 17:39   좋아요 0 | URL
저는 이곳에 고립되어 있어서 술 먹을 일이 없잖아요^^ 저번에 다락방이 주말에도 페이퍼를 읽길래 이것도 읽겠네 했죠. 제가 다락방님 취향은 잘 몰라도 사이클은 조금 알잖아요.
 

 

 

 

 

 

 

 

 

 

 

 

 

 

 

 

 한 생명체가 지닌 삶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따질 때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지능, 이성 또는 감각이 아니라는 것이 싱어의 주장이었다. 지능이 높은 주체가 지능이 떨어지는 생명체의 삶보다 더 가치가 있을까. 생명체를 존중하고 그 생명체가 지닌 삶의 권리를 인정해주어야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생명체가 스스로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싱어는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라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자신의 논리로 받아들여 모든 생명체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쾌락과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동물은 인간과 원칙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입 안에서 느끼는 단순한 즐거움의 무게는 이를 위해 자신의 육신과 삶을 내놓아야 하는 동물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비하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다.

 

 싱어의 의견들은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신에 가득 찼지만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그만큼 격렬한 반론 또한 불러일으켰다. 도덕적인 경계가 이성 및 감각을 지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속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싱어의 주장처럼 고통을 고통을 느끼는 능력에 있다고 한다면 이때 도덕적인 경계는 어디에 있는걸까. 동물까지는 짐작할 수 있지만 물고기나 조개, 채소의 경우 고통을 느낀다는 것에 뚜렷한 경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물의 직접적 체험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언급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감정과 의도를 동물들의 내면적인 삶에 단순하게 투영시켜놓고, 이를 그들의 실제적인 내면세계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동물을 순수하게 기능적인 메커니즘으로 관찰하는 것도 단순한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내면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을 괴롭힐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의 감정을 유추하는 방법밖에 없다. 뇌연구자들은 인간을 포함하여 척추동물의 뇌가 반응하는 방식을 연구해본 결과, 척추동물의 뇌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양식의 반응 구조는 질적으로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체험과 각각 연관되어 있다는 추정에 도달하였다.

 

 뇌 연구자들은 각각의 척추동물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일치현상과 개연성이 높은 연관성을 일일이 검증해보았고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감정을 손쉽게 이입할 수 있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동물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돌고래를 관찰하고 있으면 돌고래의 표정에서 곧바로 미소를 연상할 수 있는 미러 뉴런이 작동을 한다. 하지만 ‘낯선’ 얼굴을 지닌 동물들은 인간의 미러 뉴런에 아무런 활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뇌연구로 동물들의 내면세계까지는 알아낼 수는 없다.

 

 생명체의 삶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자의식’을 유일무이한 척도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직관에 반할 때가 발생한다. 예민한 코끼리와 밀렵꾼 중 어떤 자의식을 더 높게 봐야할까. 싱어는 갓난아이나 정신적으로 중증 장애를 겪고 있는 인간의 가치를 평가절하할 의도가 아니라, 동물이 지닌 삶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불러일으킨 반향은 의도와는 달리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옳은가를 토론하는 경우에는 이성적인 측면뿐 아니라 본능적인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도덕적인 감정을 우리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하나 던지는 것에 비유하자면 중심에서 가까운 원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 다음 원에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애완동물, 그 다음 원에는 일상생활에서 보통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동심원의 맨 바깥에는 송어나 프라이드치킨 같은 것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도덕적인 동심원들은 임의로 확장하거나 순서를 바꿀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식용으로 이용되는 동물들이 원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것은 자연적인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배척하고 이들에 대한 관념을 인위적으로 조작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 유럽사회에서 이러한 도덕적인 감정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점에 올라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은 언제나 문화적인 감수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을 좌우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추상적인 개념 정의가 아니라 한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의 상태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문제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거나 구역질이 나지 않는 이유는 동물들이 도살될 때에 어떤 고통을 받는지를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러 뉴런은 도살장에서 죽는 송아지를 보면 반응을 하지만 일정한 모양으로 먹음직스럽게 각을 떠서 포장된 송아지 고기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묵을 지킨다.

 

 얼마만큼 육식을 멀리할 것인가는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결과를 바탕으로 개인이 각자 알아서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곰곰이 따져보면 육식을 반대하는 논리가 육식을 찬성하는 논리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는 점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물의 비릿한 냄새 때문에 고기를 못 먹다가 철분도 부족한 것 같고 유난을 떨기 싫어서 부러 사먹진 않지만 가끔씩 고기를 먹는다. 식품에 관한 책을 읽다보니 제정신을 갖고 뭔가를 먹는게 참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육식을 하지 않았음 하는 당위의 약발이 떨어져 피터 싱어와 리하르트의 책을 훑어봤다. 내가 싫어하는건 무엇을 먹을건가보다는 음식에 대한 탐욕과 과도한 낭비, 과식쪽이다. 나 역시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리하르트의 잘 다듬어진 생각을 통해 육식을 줄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 부분을 요약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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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실 옆에 건물을 올렸다. 작년 9월쯤 공사를 시작해 후다닥 끝나버렸는데 10년이나 된 사무동 건물이나 최신식 건물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10년을 아울러 변화가 없는 건축물을 짓는 설계가에 비해 군더더기로 더욱 난감해진 설계에도 인부들은 꿋꿋했다. 한번씩 커피셔틀을 하며 벽돌이 아닌 빔을 세우고 콘크리트로 어떻게 건물을 짓는지 캐물어도 콧방귀를 껴주시는게 또 어찌나 쿨하시던지. 

 그동안 애쓰셨습니다.

 한산한 오후에는 고사를 올린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다가 시간 맞춰 갔더니 슬픈 표정의 돼지가 구멍마다 돈을 꽂고 있었다. 귀에 꽂음 뭐가 좋고 코에 꽂음 뭐가 좋고. 얼굴 모양을 유지하려고 살짝만 데쳐서 바로 먹을 수 없다는 돼지는 끝까지 슬픈 얼굴이었다. 돼지 머리 뒤쪽엔 뼈와 혈관 등등이 뒤엉켜 있었다.

 절 대표로 에이미를 내세우자 푼수떼기 누구누구는 자꾸 날 부추겨 절을 하라고 한다. 나는 대표가 있다, 절을 할 수 없는 몸이다라며 버텼다. 고사가 끝나고 음식을 먹자며 우르르 몰려갔다. 얼굴은 알지만 낯선 타부서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머릿고기 누른 것을 김치에 싸서 꿀꺽꿀꺽 먹었다. 채식위주의 식생활은 이제 바야흐로 굳이 찾거나 사서 먹지는 않지만 있으면 먹는다주의로 바뀌는 것일까. 근무중 먹는 막걸리는 참말로 맛있었다. 나는 이렇게 나에게 관대하다.

 푼수떼기는 여기저기서 캬캬거리고 에이미는 뭘 만졌는지 모를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다.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 마디는 잘라져 있다. 남자는 연거푸 막걸리를 먹으며 내게 건배를 해왔다. 우린 친하지 않지만 쑥쓰럽지 않게 건배를 했다. 꽤 마신 듯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왼쪽에 있던 남자는 a를 봤다며 어서 결혼을 하란 말을 한다. 그놈의 오지랖은 나이탓인지 에이미 말대로 다크호스여서 기발한 참견을 해대는건지 알 수가 없다. 취기가 올라 알딸딸해진다. 왼쪽 남자의 말쯤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홍조가 아니라 갱년기 유사 증상이라고 하는 열기가 다시금 얼굴에 꽉찼다. 맞은편 전면거울에 떼뚱한 표정으로 부지런히 입을 오물거리는 네모진 내가 있다. 나는 그 광경이 퍽 생경하다.

 가끔 잠자리에서 노력하지 않는데도 잠이 와버려 황망히 잠이 들때면 나는 이렇게 살겠구나, 이렇게 어렵지 않게 잠들고 개운치 않게 깨면서 이렇게 살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막걸리가 먹고 싶은지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싶은건지 즐거운지 쓸쓸한건지 모른채 이렇게 살겠구나 싶은 순간 말이다.

 

* 일이 끝나고 막걸리와 김치 냄새를 풍기며 장구를 치러갔다. 장구를 치는 곳은 온갖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차 있다. 장구를 어깨에 매고 부지런히 쳤다. 알딸딸한 기운이 오랫동안 몸속에 남아 장단에 맞춰 피가 끓고 맥박이 뛴다. 나른하게 늘어졌던 기운들이 빠르고 느린 장단에 맞춰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다. 같이 풍물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안 나오기 일쑤라 나름 총무인 나는 살짝 서운하고 속상하다. 한달째 같은 장단을 질리도록 연습했다. 그런데도 단순한 리듬과 몸의 움직임이 참 신났다. 타악기의 울림은 깊고 부지런하다. 박자를 맞추며 오금을 폈다 접었다. 처음은 어렵지만 언젠가 내 몸에 맞을 것이다.

 

* 집에 가면 똥오줌 잘 가리고 식구들을 미친듯이 반기는 까만 미니핀이 있다. 이 녀석의 곰살궂음이 좋기보단 살짝 부담스럽다. 예쁜 똥을 싸고 개냄새가 안 나게 하기 위해(아직까지 내가 아는 이유는 이런 것) 맛없어 보이는 사료를 먹고 추운 집에서 낮동안 혼자 지내야하는 녀석이 안쓰럽지만 안쓰러움이 애틋하고 예쁜 맘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까만 미니핀을 집에서 기르려고 한건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a와 b에게 따뜻한 환대를 해주고 싶어서였다. 나랑 단 둘이 있을 때는 생각지 않았다. 단둘이 있을 때 이 녀석도 나도 어쩔줄 몰라 허둥지둥댄다. 새침한 까만 미니핀이었다면 나는 환대받기 위해 노력했을까.

 

* 지금 나는 우리 동네 까페에서 페이퍼를 쓰고 있다. 얼른 쓰고 집에 가야하는데 쓰고 싶은 말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쥐어짜는 느낌이다. 그럼 안 써야하는데 나는 기어코 페이퍼 하나를 써낸다. 빈번한 글은 글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조각조각 이어붙이고 검토하고 살을 붙여 멋진 글을 쓰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예전에 썼던 글을 보며 어떻게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었지라며 생뚱맞게 내 글에 감탄했던 글을 쓰고 싶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나의 최선이다. 일기장이 아닌 페이퍼에 쓰는 나의 최선이 이 글을 볼 누군가에게 전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렇게 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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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1-2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가 아치 동네 까페에서 쓴 페이퍼, 이맇게 쓸 수밖에 없던 페이퍼를 내가 읽었어요. 지금, 여기, 내 방에서요!

Arch 2012-01-30 10:15   좋아요 0 | URL
음, 다락방님이시구나. ^^

무스탕 2012-01-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월의 마지막 금요일에 쓴 글을 전 1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읽었어요. 작년에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 뒀다가 생각나면 해동시켜 야곰야곰 먹어치우는 약식을 앞에 두고요. 건포도랑 밤이랑 대추랑 마구 씹혀요. 누른고기만큼 맛있어요 :)
난요, 장구보다 꽹과리가 치고 싶어요. 꽹과리 치는 법좀 배웠으면 좋겠어요.

다락방 2012-01-28 18:37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무스탕님의 이 댓글을 읽는데 사랑이 막 샘솟아요. 사랑합니다, 무스탕님.

Arch 2012-01-30 10:26   좋아요 0 | URL
저도 약과가 좋아요. 장구 장단을 어느 정도 익히면 꽹과리도 금방 익힐 수 있을거에요. 누른고기에는 막걸리라 좀 많이 먹어버렸죠.

다락방은^^

무스탕 2012-01-30 15:29   좋아요 0 | URL
어므낫~ 월요일부터 핑크빛 폴폴 날리는 고백이라뇨 +_+
 
파수꾼
윤성현 감독, 서준영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파수꾼은 익히 소문을 들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기대치가 너무 높아 영화 감상에 방해될까, 혹은 앞서 쉽게 이 영화를 평가한 말들로 나의 감상을 대신해버릴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파수꾼은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물들의 심리며 컷의 전환, 분위기를 감지해내는 카메라의 시선이 참 괜찮은 영화였다. 물론 그럴듯함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딱 적당하게 자기 역량을 끌어내 연기하는 시퍼런 배우들뿐 아니라 선선한 영화의 공기에 대해 설명할 말을 좀 더 찾아봐야할테니까. 그럼에도 여러 면에서 회자되는 기태역 이제훈의 느낌은 정말 좋았다.


 남다은이 말했듯 폭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남자애들의 성장물이 아니란 점, 의도하지 않지만 어긋나버리는 진심과 어디서건 한명씩 있는 사회부적응자의 외향을 지닌 사람, 자신의 비겁함을 숨긴 채 최초의 발화자에게 죄를 묻는 순간 우정은커녕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자리조차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 직접 말할 수 없지만 빙 돌려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싶은 짖궂음, 이런 요소들을 선명하지만 구질구질하지 않게 표현하는 감독의 역량. 나는 결국 기태보다 희준이나 동윤이 옆에서 진심을 숨기고 심한 말을 뱉어버리는 위악을 봐버리고 말았다.


 오해는 잘못된 이해가 아니다. 기태도 친구들도 어떻게 하면 오해를 풀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오해를 풀려고 해도 맘처럼 될지는 알 수 없겠지만. 어쩌면 그들은 진심을 대신할 말을 찾지 못해 제 맘이 다치지 않으려고 더 기를 쓰고 오해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교훈을 찾기란 쉽겠지만 ‘파수꾼’은 ‘그런 영화’가 아니다. ‘파수꾼’은 여리다고, 통통 튄다고, 찬란하다는 수식어로 감싸여 정작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을 못했던 그들의 감정을 차곡차곡 포개다 스르르 풀어놓는다. 나는 결국 ‘스르르’에서 예기치못하게 맘이 풀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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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2-01-26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수꾼, 제가 작년에 본 영화 중 최고! 이제훈 부디 연예인이 아닌 배우로 계속 가길 바라고 있어요.

Arch 2012-01-27 16:10   좋아요 0 | URL
저도 서재에서 보고 '언젠가 꼭 보리라, 불끈!'이랬어요. 이제훈 참 좋죠~
 

* CCTV를 설치하기 위해 공구를 든 사내들이 돌아다녔다. 작업에 용이한 복장에 세련을 염두하지 않은 헤어스타일과 살짝 거친 말투. 드릴로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뚫고 배선을 위해 전기선 통로를 마련한다. 통로 안에 전기선을 넣는데까지 끝마친 후 일주일 후에 기기가 들어오는대로 카메라를 설치한다고 했다. 머리를 예쁘게 파마한 남자가 덕트를 떼내고 까치발을 세워 위쪽을 보는데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배렛나루가 보였다. 설렁설렁 납땜을 하며 그것을 유심히 지켜본건 아니고 살짝, 눈에 띄지 않게 봤는데 오랜만에 낯선 남자의 배를 본터라 한동안 심호흡을 해야했다(는건 거짓이고, 살짝 섹시하단 생각을 했다.)


*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고 있다. 한달 전부터 읽기 시작했고 중간 정도까지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다, 갔었다. 언더그라운드 얘기가 나오는 부분에선 하루키는 역시 잡문집이다, 이렇게 영민한 소설가가 있다니, 등등의 감탄을 했는데 이것도 한풀 꺾여 번역과 피츠제럴드 이야기는 설렁설렁 읽어내려가고 있다. 책을 진득하게 못읽는 성정 탓인지, 지난번 하루키의 여행법과 먼 북소리, 언더그라운드를 처음 호감과 다르게 끝까지 못 읽은 것처럼 하루키 징크스 때문인지 모르겠다. 첫장을 폈을 때 느꼈던 호감과 읽는 책이 사정없이 좋아지는 지점, 마지막 장까지 다 읽어내려가는데 텀이 긴건지, 끈기가 부족한건지 잘 모르겠다. 새 책에 과도하게 집중하고야마는 새 책 증후군인걸까.


* 이직 권유가 있었다.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확신이 부족했다. 고민 중에 요새 다시 새사람으로 거듭나겠다며 코 힝힝 풀고 담배 피우는걸 자제중인 에이미에게 '너는 아치가 이 일과 잘 맞는 것 같으냐'라고 물었다. 에이미는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해줬다. 배우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좀 더 잘하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방어적으로 그래도 맡은 일은 무리없이 잘하지 않냐고 했더니 그건 그렇지만 이곳을 나가서 비슷한 일을 하기엔 역부족이라고 한다. 동감. 그런데 이건 이 일이 나랑 맞지 않아서인걸까, 아니면 내 성정 자체가 그런걸까.


* 성정이 그렇다면 직장을 옮겨도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을까. 몇달 전에 손에 힘이 빠져 한의원을 찾았을 때 한의사분은 맥을 짚다말고 내 손을 꼭 잡고 남들이 하루 24시간을 산다면 나는 30시간 가까이 사는거라고, 사는데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타입이란 소리를 해줬다. (늙어보인다는 말을 이렇게 잘 포장하다니) 비유적으로 말해 각자 태어나면서 밧데리를 하나씩 차고 나오는데 100% 가득 찬 밧데리도 있고 70~80%만 차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방전되는 밧데리도 있다는거다. 쉽게 기운이 빠지고 쓸데없이 위축되고 자책이 일상이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거야? 그런걸까? 좋은 기운을 갖고 태어나지 못해 이 나이 먹도록 비실대는걸까.


* 성균관 스캔들 얘기를 다시 해보자면 정약용은 남장을 해서 성균관에 들어간 윤희에게 남녀가 유별하고 변명과 핑계만 일삼는 여자가 어찌 출사를 하고 백성의 삶을 돌볼 수 있겠냐는 얘기를 한다. 윤희는 사력을 다해 대사례를 치루고 한번도 누군가 자신을 믿어준적이 없다고, 자신도 좋아하는게 있고 잘할 수 있다는걸 처음 알았노라며 기회를 줄 것을 부탁한다. 나는 너무 뻔해서 반질반질한 장면에서 울 뻔 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생각하고 핑계를 대고 있었지 열심히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는 게 어떠냐고, 모두가 다 열심히 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자기계발을 해야 하고, 사회 생활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그냥 순간순간을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불평불만 덩어리가 돼서 모두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투덜댔다. 관계를 편하게 만드는 지나가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면서 소외됐다고 동굴을 파고 앉았던 것이다.


 한의원의 보약은 믿음이 있어야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나에 대한 믿음도 지금에 대한 믿음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보약은 원래 효과가 없는 플라시보, 위약인걸까, 그런데 나는 왜 한의원에 가면 기분이 좋아질까. 성정 때문인지 노력을 안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비슷한 문제로 늘 비슷하게 고민한다. 체질적으로 게으르니 손을 놔버린다거나 미친 의욕으로 노력을 하지 않는한 늘 왔다리 갔다리 하겠지.


 장구를 치고 집에 가서 미니핀이랑 이불 속에 들어가 한발짝도 안 나와야지. 잠도 푹자고 배도 따뜻하게 해야지. 오늘은 그 정도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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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1-2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데없이 위축되고 자책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는 걸 본인이 안다면, 그렇다면 그러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다고 해서 고쳐지는건 아니더라구요. 나도 그래요. 나도 내가 가진 강박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데, 그걸 알면서 좀처럼 극복이 안되요. 어떻게 해야하나, 잘 모르겠어요.

그래요, 아치. 잠도 푹 자고 배도 따뜻하게 해줘요. 그런데,
나 좀,

배렛나룻 .. 상상했어요. ( '')

Forgettable. 2012-01-26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배털에 반해서 남자를 꼬신적도 있지요.

다락방 2012-01-26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털 화이팅!

Arch 2012-01-26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털에서 빵터짐.

난 한참 배렛나룻인지 베렛나루인지 배렛나루인지 찾고 있었는데..

왠만하면 자책하지 말면서 살아야겠어요. 다락방~

숲노래 2012-01-2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음이 있으면 무얼 먹어도 보약이 돼요.
내 몸을 믿고
내 좋은 이웃과 동무들 삶을 믿으며
하루하루 즐기셔요~

Arch 2012-01-27 16:23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된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