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체가 지닌 삶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따질 때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지능, 이성 또는 감각이 아니라는 것이 싱어의 주장이었다. 지능이 높은 주체가 지능이 떨어지는 생명체의 삶보다 더 가치가 있을까. 생명체를 존중하고 그 생명체가 지닌 삶의 권리를 인정해주어야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생명체가 스스로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싱어는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라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자신의 논리로 받아들여 모든 생명체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쾌락과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동물은 인간과 원칙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입 안에서 느끼는 단순한 즐거움의 무게는 이를 위해 자신의 육신과 삶을 내놓아야 하는 동물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비하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다.

 

 싱어의 의견들은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신에 가득 찼지만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그만큼 격렬한 반론 또한 불러일으켰다. 도덕적인 경계가 이성 및 감각을 지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속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싱어의 주장처럼 고통을 고통을 느끼는 능력에 있다고 한다면 이때 도덕적인 경계는 어디에 있는걸까. 동물까지는 짐작할 수 있지만 물고기나 조개, 채소의 경우 고통을 느낀다는 것에 뚜렷한 경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물의 직접적 체험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언급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감정과 의도를 동물들의 내면적인 삶에 단순하게 투영시켜놓고, 이를 그들의 실제적인 내면세계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동물을 순수하게 기능적인 메커니즘으로 관찰하는 것도 단순한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내면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을 괴롭힐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의 감정을 유추하는 방법밖에 없다. 뇌연구자들은 인간을 포함하여 척추동물의 뇌가 반응하는 방식을 연구해본 결과, 척추동물의 뇌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양식의 반응 구조는 질적으로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체험과 각각 연관되어 있다는 추정에 도달하였다.

 

 뇌 연구자들은 각각의 척추동물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일치현상과 개연성이 높은 연관성을 일일이 검증해보았고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감정을 손쉽게 이입할 수 있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동물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돌고래를 관찰하고 있으면 돌고래의 표정에서 곧바로 미소를 연상할 수 있는 미러 뉴런이 작동을 한다. 하지만 ‘낯선’ 얼굴을 지닌 동물들은 인간의 미러 뉴런에 아무런 활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뇌연구로 동물들의 내면세계까지는 알아낼 수는 없다.

 

 생명체의 삶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자의식’을 유일무이한 척도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직관에 반할 때가 발생한다. 예민한 코끼리와 밀렵꾼 중 어떤 자의식을 더 높게 봐야할까. 싱어는 갓난아이나 정신적으로 중증 장애를 겪고 있는 인간의 가치를 평가절하할 의도가 아니라, 동물이 지닌 삶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불러일으킨 반향은 의도와는 달리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옳은가를 토론하는 경우에는 이성적인 측면뿐 아니라 본능적인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도덕적인 감정을 우리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하나 던지는 것에 비유하자면 중심에서 가까운 원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 다음 원에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애완동물, 그 다음 원에는 일상생활에서 보통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동심원의 맨 바깥에는 송어나 프라이드치킨 같은 것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도덕적인 동심원들은 임의로 확장하거나 순서를 바꿀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식용으로 이용되는 동물들이 원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것은 자연적인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배척하고 이들에 대한 관념을 인위적으로 조작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 유럽사회에서 이러한 도덕적인 감정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점에 올라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은 언제나 문화적인 감수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을 좌우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추상적인 개념 정의가 아니라 한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의 상태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문제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거나 구역질이 나지 않는 이유는 동물들이 도살될 때에 어떤 고통을 받는지를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러 뉴런은 도살장에서 죽는 송아지를 보면 반응을 하지만 일정한 모양으로 먹음직스럽게 각을 떠서 포장된 송아지 고기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묵을 지킨다.

 

 얼마만큼 육식을 멀리할 것인가는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결과를 바탕으로 개인이 각자 알아서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곰곰이 따져보면 육식을 반대하는 논리가 육식을 찬성하는 논리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는 점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물의 비릿한 냄새 때문에 고기를 못 먹다가 철분도 부족한 것 같고 유난을 떨기 싫어서 부러 사먹진 않지만 가끔씩 고기를 먹는다. 식품에 관한 책을 읽다보니 제정신을 갖고 뭔가를 먹는게 참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육식을 하지 않았음 하는 당위의 약발이 떨어져 피터 싱어와 리하르트의 책을 훑어봤다. 내가 싫어하는건 무엇을 먹을건가보다는 음식에 대한 탐욕과 과도한 낭비, 과식쪽이다. 나 역시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리하르트의 잘 다듬어진 생각을 통해 육식을 줄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 부분을 요약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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