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CTV를 설치하기 위해 공구를 든 사내들이 돌아다녔다. 작업에 용이한 복장에 세련을 염두하지 않은 헤어스타일과 살짝 거친 말투. 드릴로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뚫고 배선을 위해 전기선 통로를 마련한다. 통로 안에 전기선을 넣는데까지 끝마친 후 일주일 후에 기기가 들어오는대로 카메라를 설치한다고 했다. 머리를 예쁘게 파마한 남자가 덕트를 떼내고 까치발을 세워 위쪽을 보는데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배렛나루가 보였다. 설렁설렁 납땜을 하며 그것을 유심히 지켜본건 아니고 살짝, 눈에 띄지 않게 봤는데 오랜만에 낯선 남자의 배를 본터라 한동안 심호흡을 해야했다(는건 거짓이고, 살짝 섹시하단 생각을 했다.)


*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고 있다. 한달 전부터 읽기 시작했고 중간 정도까지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다, 갔었다. 언더그라운드 얘기가 나오는 부분에선 하루키는 역시 잡문집이다, 이렇게 영민한 소설가가 있다니, 등등의 감탄을 했는데 이것도 한풀 꺾여 번역과 피츠제럴드 이야기는 설렁설렁 읽어내려가고 있다. 책을 진득하게 못읽는 성정 탓인지, 지난번 하루키의 여행법과 먼 북소리, 언더그라운드를 처음 호감과 다르게 끝까지 못 읽은 것처럼 하루키 징크스 때문인지 모르겠다. 첫장을 폈을 때 느꼈던 호감과 읽는 책이 사정없이 좋아지는 지점, 마지막 장까지 다 읽어내려가는데 텀이 긴건지, 끈기가 부족한건지 잘 모르겠다. 새 책에 과도하게 집중하고야마는 새 책 증후군인걸까.


* 이직 권유가 있었다.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확신이 부족했다. 고민 중에 요새 다시 새사람으로 거듭나겠다며 코 힝힝 풀고 담배 피우는걸 자제중인 에이미에게 '너는 아치가 이 일과 잘 맞는 것 같으냐'라고 물었다. 에이미는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해줬다. 배우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좀 더 잘하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방어적으로 그래도 맡은 일은 무리없이 잘하지 않냐고 했더니 그건 그렇지만 이곳을 나가서 비슷한 일을 하기엔 역부족이라고 한다. 동감. 그런데 이건 이 일이 나랑 맞지 않아서인걸까, 아니면 내 성정 자체가 그런걸까.


* 성정이 그렇다면 직장을 옮겨도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을까. 몇달 전에 손에 힘이 빠져 한의원을 찾았을 때 한의사분은 맥을 짚다말고 내 손을 꼭 잡고 남들이 하루 24시간을 산다면 나는 30시간 가까이 사는거라고, 사는데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타입이란 소리를 해줬다. (늙어보인다는 말을 이렇게 잘 포장하다니) 비유적으로 말해 각자 태어나면서 밧데리를 하나씩 차고 나오는데 100% 가득 찬 밧데리도 있고 70~80%만 차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방전되는 밧데리도 있다는거다. 쉽게 기운이 빠지고 쓸데없이 위축되고 자책이 일상이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거야? 그런걸까? 좋은 기운을 갖고 태어나지 못해 이 나이 먹도록 비실대는걸까.


* 성균관 스캔들 얘기를 다시 해보자면 정약용은 남장을 해서 성균관에 들어간 윤희에게 남녀가 유별하고 변명과 핑계만 일삼는 여자가 어찌 출사를 하고 백성의 삶을 돌볼 수 있겠냐는 얘기를 한다. 윤희는 사력을 다해 대사례를 치루고 한번도 누군가 자신을 믿어준적이 없다고, 자신도 좋아하는게 있고 잘할 수 있다는걸 처음 알았노라며 기회를 줄 것을 부탁한다. 나는 너무 뻔해서 반질반질한 장면에서 울 뻔 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생각하고 핑계를 대고 있었지 열심히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는 게 어떠냐고, 모두가 다 열심히 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자기계발을 해야 하고, 사회 생활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그냥 순간순간을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불평불만 덩어리가 돼서 모두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투덜댔다. 관계를 편하게 만드는 지나가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면서 소외됐다고 동굴을 파고 앉았던 것이다.


 한의원의 보약은 믿음이 있어야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나에 대한 믿음도 지금에 대한 믿음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보약은 원래 효과가 없는 플라시보, 위약인걸까, 그런데 나는 왜 한의원에 가면 기분이 좋아질까. 성정 때문인지 노력을 안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비슷한 문제로 늘 비슷하게 고민한다. 체질적으로 게으르니 손을 놔버린다거나 미친 의욕으로 노력을 하지 않는한 늘 왔다리 갔다리 하겠지.


 장구를 치고 집에 가서 미니핀이랑 이불 속에 들어가 한발짝도 안 나와야지. 잠도 푹자고 배도 따뜻하게 해야지. 오늘은 그 정도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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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1-2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데없이 위축되고 자책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는 걸 본인이 안다면, 그렇다면 그러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다고 해서 고쳐지는건 아니더라구요. 나도 그래요. 나도 내가 가진 강박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데, 그걸 알면서 좀처럼 극복이 안되요. 어떻게 해야하나, 잘 모르겠어요.

그래요, 아치. 잠도 푹 자고 배도 따뜻하게 해줘요. 그런데,
나 좀,

배렛나룻 .. 상상했어요. ( '')

Forgettable. 2012-01-26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배털에 반해서 남자를 꼬신적도 있지요.

다락방 2012-01-26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털 화이팅!

Arch 2012-01-26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털에서 빵터짐.

난 한참 배렛나룻인지 베렛나루인지 배렛나루인지 찾고 있었는데..

왠만하면 자책하지 말면서 살아야겠어요. 다락방~

숲노래 2012-01-2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음이 있으면 무얼 먹어도 보약이 돼요.
내 몸을 믿고
내 좋은 이웃과 동무들 삶을 믿으며
하루하루 즐기셔요~

Arch 2012-01-27 16:23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된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