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과 진중권의 크로스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정재승의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시선과 진중권의 철학과 예술, 인문을 아우르는 글의 방향을 따라가는건 퍽 즐거운 독서경험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많은 꼭지들의 담백한 정보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게 있다. 그것은 바로 레고 얘기를 하면서 진중권이 아들과의 일화를 얘기한 부분이었다. 혹자는 그 부분에서 진중권의 담백함을 봤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왠지, 어, 진중권도 못쓰는 글이 있네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못쓴 글은 아니었지만 에세이 전문(잉?) 독자가 보기엔 특별하거나 재미있지 않았다. 사람마다 잘 쓰는 글이 있다는걸 안 순간이었다.


 문제의 핵심을 뽑아내는 탁월한 직관력, 독특한 상상력, 허를 찌르는 유머가 아니더라도 '각자가 잘하는 글쓰기'란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잘 쓴 글'을 잘 쓸 자신이 없으니 내 나름대로 꾸준히 쓰면 되는 것이었다. 추천수에 연연하고 있지만 그럴 필요도 없으며(필요가 없다고 안 그런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하고 싶은 얘기를 쥐어짤 일도 없었던 것이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기 싫으면 안 쓰면 된다. 새해 들어 즐찾이 초큼 늘었다고 그분들이 심심하지 않게 해야한다는 과도한 의무감 때문에 페이퍼 양으로 승부를 보는 대신 내가 잘 쓸 수 있는 글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제 자기 전에 머릿 속에 떠오르는 책들로 페이퍼를 구성해봤고 그 내용이 퍽이나 만족스러워 흐뭇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던 터이다.

 

  헌데 어제 아침에 다락방의 페이퍼를 봤다.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 수놈을 떠올리는건 이 세상에 다락방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토록 독특한 페이퍼를 부지런하게 이미지를 첨부해서 올린걸 보니 페이퍼 쓸 의욕이 숑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독특함으론 다락방보다 나을 수는 없겠어. 독특함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나 사는 이야기'에 집중할 생각으로 한의원에서 방귀뀌다 간호사에게 혼난 아저씨 얘기를 생각해냈는데 냄새가 나는 것이다. 잘 풀어내면 재미있을만한 이야기인데 언뜻 떠올려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산골소녀투쟁기'의 산골소녀가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낸 것과 내가 쓸 글을 비교해보니 별로였던거다.

 그럼 나는 문장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글을 써보는거야. 헌데 하필이면 요즘 읽고 있는 책이 김혜리의 것이다. 맙소사.(김미려처럼) 대체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문장은 아름답고 글은 유려하게 흐른다. 나는 넘볼 수 없는 경지란게 있는거다. 물론 독자로서 이만한 책을 읽는 수고만으로 접하고 느낄 수 있는건 즐거운 일이지만.


 그럼 내가 재미를 느끼고 즐겁게 쓸 수 있는 글은 뭘까.

 

 흥미를 느끼는 타인들간에 둘러싸여 그들의 말을 적고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감을 잡아내고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써내려간 글.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고 잘쓰더라 싶다. '잘 쓴다'는건 순전히 내 기준이지만.

 

 어제 누군가 '별 게 다 비밀인 남자'란 제목의 페이퍼를 쓰라고 부탁을 했지만 나는 그 페이퍼 대신 그 페이퍼를 쓸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다음에 만나면 우리 사이에서 빛을 보지 못한 서로의 캐릭터도 발견하고 그동안 쟁여놓은 이야기들도 풀어놓고 싶다. 어렸을 때 모범생도 아닌데 학교와 집만 오갔던 것처럼 지금은 회사와 집만 오가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잠깐씩 그들과 한눈을 팔았으면 좋겠다. 하이킥에서 말한 것처럼 지리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건 짧은 일탈의 순간일 수 있으니까. 난 아직까지 그들과 있어야 좀 더 '나답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아이가 그들 안에선 무례하거나 비사회적인 누군가가 아닌 그냥 '아치'가 되니까. 나 역시 애면글면 사회인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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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05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봤어요. 생선을 잡고있는 노인이네요. 아치, 저 그림을 삽입한 노인과바다 페이퍼를 구상했던거에요? 써줘요, 써줘요!! 청새치로 독특한 페이퍼가 됐다면 그림으로 독특한 페이퍼가 되는거잖아요!! 바보. 아치는 바보야!!

그건그렇고,
비밀건은 어떻게, 나름 해결한거에요? 하핫

Arch 2012-02-06 09:18   좋아요 0 | URL
저건 책을 넣으려가다가 안 예뻐서 넣어본거에요. 노인과 바다는 문고본으로 읽은 기억밖에 없어서^^ 저 그림에서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다니, 맙소사!

비밀건은 해결 안 했어요. 뭘 해결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나는 '뚫린 입'이 되어버렸어요.

다락방 2012-02-06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말에는 거의 알라딘에 안들어오게 되는데(토요일은 술마시고 일요일은 쉬고) 아치는 토요일 밤에(!!)페이퍼를 남겼네요. 오오~

Arch 2012-02-06 17:39   좋아요 0 | URL
저는 이곳에 고립되어 있어서 술 먹을 일이 없잖아요^^ 저번에 다락방이 주말에도 페이퍼를 읽길래 이것도 읽겠네 했죠. 제가 다락방님 취향은 잘 몰라도 사이클은 조금 알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