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의 노동


우에노 지즈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가사노동‘이란 개념의 발견은 사람들의 인식에 커다란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가사=노동‘이란 개념의 성립은 사람들에게 "가사노동도 노동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이론에서 비롯된 개념이란 장치는 인식이라는 영역의 대전환을 초래했다. 본말이 바뀌어 세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이론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가사노동‘이란 개념이 성립되어 유포되기 이전에는 가사가 ‘노동‘이라고 간주되지 않았다. 가사와 육아에 쫓기는 전업주부인 여성은 비록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더라도 세 끼 밥먹고 낮잠 자는 신분이라고 야유당한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생쥐처럼 부지런히 일하고 있어요."라고 이의를 제기하면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일 축에도 끼지 않습니다" 라고 일축당하기 일쑤였다. "가사는 일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래요"라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가사노동‘이란 개념은 여성에게 이론적인 무기를 제공했다. 가사노동은 비록 돈이 되지는 않더라도 노동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주부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대행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용하며 불가결한 노동인데도 여성에 대해서 아무런 법적·경제적 보상도 하지 않은 채 무권리 상태로 방치한다면 그것은 부당하게 보수를 지불하지는 ‘부불노동(unpaid labor)‘이 된다.
(중략)
‘사랑‘과 ‘모성‘이, 그것에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떠받드는 것을 통해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해 온 이데올로기 장치였다는 사실은 페미니스트의 ‘모성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서서히 드러났다. ‘사랑‘이란 남편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여성의 에너지를 동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이고, ‘모성‘이란 아이들의 성장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간주하여 여성들에게 헌신과 자기 희생을 종용함으로써 여성이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를 억누를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였다. 여성이 ‘사랑‘에 높은 가치를 두는 한 여성의 노동은 ‘가족의 이해‘나 ‘남편의 위로‘에 의해 쉽게 보답받는다. 여성은 ‘사랑‘을 공급하는 전문가이며,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핀치와 그로브즈는 여자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배려나 보살핌‘이 ‘사랑이란 이름의 노동(a labor of love)‘에 다름 아님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여성이 집안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 이떤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표현된다 할지라도, 여성은 분명히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대행시킬 수밖에 없는 노동을 하고 있다. 주부는 단지 그것을 ‘사랑‘이란 이름 아래 하고 있는 것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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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마인드> 


목차를 보고 글로리아 스타이넘부터 읽었다. 밑줄긋기. 


***

책소개
가즈오 이시구로로부터 "전세계에서 작가 인터뷰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엘리너 와크텔의 또 다른 인터뷰집. 세계적인 사상가, 작가,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수전 손택, 놈 촘스키, 조너선 밀러, 조지 스타이너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고 자기 분야를 확장하며 한 시대의 획을 그은 혁신가들의 ‘독창적인 정신’을 만날 수 있다.
목차

머리말・ 6
들어가며・ 12
조너선 밀러・ 21
제인 구달・ 83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31
조지 스타이너・ 165
데즈먼드 투투・ 217
수전 손택・ 241
아마르티아 센・ 285
글로리아 스타이넘・ 331
재레드 다이아몬드・ 373
올리버 색스・ 415
제인 제이콥스・ 449
움베르토 에코・ 491
메리 더글러스・ 533
놈 촘스키・ 581
아서 C. 클라크・ 613
해럴드 블룸・ 651
참고문헌 ・ 711



와크텔 : 남자보다 여자들이 베트남 전쟁에 더 반대했다는 건 저도 몰랐습니다.

스타이넘 : 네, 훨씬 더 반대했습니다. 더 일찍부터, 더 많이 반대했지요. 사실 특이한 일은 아니에요. 여자들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에 훨씬 더 회의적인데, 부분적으로는 남성성을 증명하도록 키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여성이 더 똑똑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폭력과 공격의 가치를 믿도록 세뇌당하지 않았고, 또 여자가 폭력의 주요 대상이며 폭력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와크텔 : 페미니즘은 왜 1세대, 2세대와 같이 세대별로 올까요? 그런 면에서 다른 운동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스타이넘 : 저는 운동에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매일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하지만 운동은 격렬하게 일어났다가 동화, 또는 분산의 시기를 거친 다음 다시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뛰어난 역사학자 게르다 러너는 어떤 운동이든 백 년 동안 계속되어야 지속적인 효과가 있다고 항상 말합니다. 저는 그런 장기적인 시각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단계를 인식할 수 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저는 인도의 여성 운동이 많은 면에서 간디에게 본보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종종 그렇듯이, 그 사실은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았지요. 인도의 여성 운동보다 데이비드 소로가 간디의 모델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저는 70년대 후반에 친구와 동지들을 만나러 다시 인도에 갔는데, 우리는 간디가 전 세계 여성들에게 아주 좋은 전술적 모범이라고, 그의 편지를 살펴보고 여성 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출판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간디와 함께 일했던 어느 나이 많은 여성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녀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우리 이야기를 끝까지 듣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간디가 준 교훈이 여성 운동에 유용한 것은 사실이지요. 간디가 아는 것은 전부 우리가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도에서도 대대적인 여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여성들은

조혼과 사티 (미망인을 죽은 남편의 시체와 함께 화장하는 풍습이지요) 등 여러 가지 병폐에 맞서 싸우면서 비폭력적인 방법을 지지했는데, 여성에게는 비폭력이 편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간디가 그 전술을 배웠지요.


와크텔 :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요, 아름답다는 것이 짐이 되기도 합니까?
스타이넘 :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경험은 남자들에 비해 외모가 우리 정체성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다 같이 그러한 관행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사회가 규정하는 대로 생긴 여성이 뭔가를 성취하면 외모 덕분에 남자들을 통해서 그런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하지요. 또 사회가 규정하는 대로 생기지 않은 여성이 뭔가를 성취하면 남자를 얻을 수 없어서 그러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기가 꺾이는 일이에요. 저는 가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제가 이룬 것이 외모 덕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기가 꺾입니다. 참 불쾌한 기분이지요. 정말 가슴이 아파요. 저는 이제 예순일곱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런 것도 사라질 줄 알았어요.

와크텔 : 쉰 살, 예순 살 이후의 삶은 "다른 나라" 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고, 또 늙었기 때문에 우울하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노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더 급진적으로 변했다고 하셨지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스타이넘 : 네, 그렇습니다. 저는 여자들이 보통 그런 경험을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대부분은 일반적인 패턴 남성의 패턴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역전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반항적이고 나이가 들면 더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패턴 말이에요. 여자들은 젊을 때 보수적이다가 나이가 들면서 반항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 경험상으로는 확실히 그래요.

와크텔 : 여성이 나이가 들면서 더 반항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스타이넘 : 문제를 더 많이 겪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여자라서 채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듣지는 않지만, 12년에서 15년 정도 지나면 유리 천장에 부딪치거나 핑크칼라의 밑바닥 일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남자들이 당신을 추월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니 급진적으로 변하게 되지요. 30년 동안이나 법을 바꾸기 위해 애쓴 끝에 요즘은 평등한 결혼을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다시 불평등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수록 여성을 급진화시키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이 자체도 물론 그렇지요. 아직까지도 나이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불이익을 줍니다.

와크텔 : 그렇다면 페미니즘 때문에 오히려 결혼이 독립적인 여성에게 더욱 현실성 있는 선택지가 되었군요.
스타이넘 : 저는 그렇게 될 거라고 항상 말했습니다. 60년대 후반에 사람들이 페미니즘이 이혼의 원인이라고 말하면 저는 이렇게 말했죠.
"아니, 이혼의 원인은 불평등한 결혼이에요." 페미니즘 덕분에 사상 최초로 사랑이 가능해졌을지도 모릅니다.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사랑처럼 보이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닌 경우, 의존이거나 선택지의 부족인 경우가 많아요. 그러므로 평등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서로가 만족스러운 관계라는 의미의 사랑은 페미니즘에 의해서 가능해졌습니다.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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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것은 언제나 사적인 일이며, 실컷 우는 것은 남몰래 하는 일이지만, 그리어는 우는 행위의 배후에 있는 슬픔이 개인적 현상일 뿐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라고 보았고,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사회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여전히 여자들의 가장 본질적인 자질들과 관심사에 대체로 냉담하고 멸시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걸 잘 알기에 나오는 반응이라고 했다.
그리어는 여자들이 우는 것은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며, 너무 많이 일하고 지쳤고 외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우는 것은 자신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고 남들의 필요를 보살피느라 자신의 필요는 계속 뒷전으로 밀리기만 하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의 남자들이 친밀함의 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없다는 느낌을 너무 자주 받기 때문에, 자녀들이 자라나 거리를 두기 때문에, 자신은 그 거리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게 당연시되기 때문에, 만성적으로 낮아지기만 하는 기대치와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여자의 감정이 지닌 힘과 강함은 병적이거나 히스테리컬하거나 질척질척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관계에 대한 여자의 관심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고, 여자의 존재의 핵심은 한 번도 제대로 봐주거나 알아주거나 온전히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여자의 진정한 자아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가치 있게 여기고 인정하고 숭배하는 수많은 것들과 어긋나 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자신의 사랑이 응답받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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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신자유주의 경제와 여성의 일터 

이런 점에서 보여주고 말하고 퍼포먼스하면서 상호작용하는 데 있어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런 식의 퍼포먼스를 해야 할까요? 남자들의 퍼포먼스는 상당히 다르지요. 왜냐하면 남성은 감정적 피드백이나 지지, 후원을 받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위 맞추는 존재‘처럼 노출하는 행위를 남성성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말솜씨, 허세, 과시, 카리스마, 능력 등으로 관객과 관중을 조종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방송을 합니다. 누구의 기분을 맞추고, 요구에 응하는 일은 잘 하지 않아요. 여자들은 유튜브에 자신의 요가 장면만 올려놔도 연락하고 추근대고 협박해오는 낯선 남자를 경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여전히 ‘보여주는 행위는 권력 작용입니다. 남성은 뭔가를 보여줌으로써 인기와 돈을 얻지만 성적 위협이나 폭력은 당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짚어볼 것은 최근 여성들이 많이 일하고 있는 심미노동(aestheticlabor) 분야입니다. 심미노동은 기업이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자의 신체를 개발하고 동원하며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노동자가 자신의 신체와 인성을 변화시켜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걸맞은 미학적 이미지를 구성해가는 노동을 의미합니다. 패션 리테일 숍, 호텔, 바, 고급 사교클럽 등에서 고객 응대를 하는 사람의 경우, 옷, 외모, 표정, 목소리, 억양, 제스처 등을 스타일 있게 표현해서 보기 좋고 듣기 좋게 매너 있는 신체를 갖춤으로써 고객의 미학적 감각을 자극 하여 이들의 소비를 끌어 내는 일을 합니다.

이처럼 낯선 환경에서 빠르게 동료들 안으로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는 이 여성들은 가짜 친밀성(fake intimacy)을 매우 자주 연기합니다. 실제 마음과 달리 이런 대사를 하면서요. "어머, 오늘 우리 팀장님, 너무 멋있으세요. "오늘 날씨 화창한데, 우리 그럼 또 옥상에서 티파티?"(웃음) 그런데 여성들의 이런 퍼포먼스가 매우 잘못된 메시지로 읽힙니다. 여성이 처한 이 구조적인 조건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성들이 왜 그런 방식의 친절과 세련됨을 수행하고, 빠른 시간 내에 친밀함을 보여주고, 옷을 예쁘게 입고, 초창기에 명랑하고 빠릿빠릿한 척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 여성들은 노동 시장의 구조와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가짜 친밀성, 연출된 친밀성으로 빨리 회사에 진입해서 일하기를 택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수치적 평등에 도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만큼 일터가 여성에게 ‘정의롭지 못한 위치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의 남성성은 집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성의 발휘는 공적 영역에서 남성들과 함께 있을 때, 남성 동성사회의 권력 전시장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다른 남성과의 관계에서 나의 힘을 과시하고, 남성 동성사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갖고, 남성들에게 인정받아 지위를 획득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남성들의 파워 게임이나 사나이 게임에서는 남이 보는 앞에서 대범하게 여성을 희롱하고 추행하는 전시적 성폭력이 매우 흔하게 벌어집니다. 자신이 남성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접근도로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하는 여성들이 대다수이고 일을 쉽게 그만두지 않을 것이며 능력도 있다면, 우리는 이제 게임의 룰을 바꾸는 데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요? 구조화된 여성 불평등은 이미 여러분이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여성으로서 우리 삶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한순간을 만들어보는 것. 즉 삶의 미학화, 일상의 미학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조금만 더 흔들려보고 조금만 더 다른 방식으로 이동해보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일과 노동, 우정과 연대, 취향과 살림살이와 경제력을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잘 결합해서 자존감 있는 노동자가 되고, 활력 있는 일상을 꾸려갈 것인가를 논의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여성들의 일 경험이 이미 바닥을 쳤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바로 거기서 뛰어오를 수 있어요. 바닥에서 뛰어오르는 활력과 힘을 믿어보면서 일터와 삶터를 재배열하고 변화시켜보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해도 계속 자기 정의를 내려가며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소수자가 스스로를 대변하는 소수자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가 무슨 의미냐는 질문은 이 표출 자체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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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히려 많은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페미니스트여야 하는가 아닌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되는가 아닌가, 이것은 페미니즘을 개인이 어떤 옷을 입을지 결정하는 문제처럼 다룬다. 이건 가짜 논의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에, 성별·피부색·성적 지향 등 생득적인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여성이라 돈을 덜 받고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해야 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확장된 규칙이 아니라, 인간은 존재하는 그대로 존엄하며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가장 근원적인 한 줌의 도덕이다. 페미니즘마다의 각론과 실천의 방식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페미니스트여야 한다는 것은 문명인으로서의 전제 조건이다. 민주주의자라면, 진보주의자라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바란다면,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바란다면, 깨어 있는 시민이라면,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페미니즘 없는 민주주의는 말하자면 동그란 세모 같은 것이다.

의외로 여성들도 오해하는데, 한국 남성들이 가부장제 안에 여성들을 갈아넣는 건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이기적이어서다. 차례와 벌초와 시가방문에 집착하는 남성들이 조상의 은덕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아내와 며느리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는 푸짐한 명절 풍경을 포기할 수 없는 것뿐이다. 적어도 한국의 명절 문화에서 전통적 가치란 허구일 뿐이다. 현대에도 이어갈 전통적 가치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단, 한국남성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근대 시민의 기준에서 고발하는 것이 명절 문화와 그 기저에 놓인 가부장제의 실체를 훨씬 잘 드러내줄 것이다.

사실 나는 남성들이 젠더 이슈에 둔감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정말로 둔하다면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서도 콧방귀를 뀌며 자신들의 천년 왕국을 그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젠더 이슈가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체화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에 대한 도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 남성들이 여성혐오를 유희로 즐길 자유, 불법 촬영물을 즐길 자유, 일상적 성희롱을 할자유를 지키기 위해 백래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도덕적 당위가 아닌 젠더 권력 때문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남성들에 대한 도덕적 설득 혹은 설복도 중요하지만, 우선 본인에게만 좋던 과거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체념시키는 것이 먼저다. 그들이 버티는 건, 단순히 본인들의 주장이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주장하는 게 옳은 것이 될 수 있던 시대를 살아와서다.

창작에 있어 동시대에 대한 민감성이란, 단순히 지금 이곳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있는 여러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까지 인식하는 능력이다. 즉 현실을 더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이면에 작동하는 구조와 권력의 메커니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리얼리티란 결국 세상을 읽는 성실성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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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8-03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근우 글 잘쓰죠. 진짜 시원함.

난티나무 2021-08-05 03:52   좋아요 1 | URL
저는 왜 위근우를 안 사고 박정훈을 샀을까요?^^;;;;;

라로 2021-08-0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성의 인류학자> 다 읽었습니다요. 역시 탬플 그랜딘의 스토리가 젤 좋았어요. 그전엔 버질의 이야기가 좋았지만,,결국엔 탬플 그랜딘의 이야기를 끝내며 눈물이 뚝..ㅎㅎㅎㅎㅎㅎㅎ
난티님 읽으실 책이 줄을 이은 것 같으니 서두르지 마십시요. 저는 덕분에 읽게 되어 감사해요.^^

난티나무 2021-08-06 01:27   좋아요 0 | URL
와! 시험도 치셨다는 글 좀전에 봤는데 벌써 다 읽으셨군요! 짝짝짝!! 저는 시작도 안(못)...ㅎㅎㅎㅎㅎ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