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대학교의 기든 에셸(Gidon Eshel)과 파멜라 마틴(Pamela Martin)은 동물성 식품 생산 과정에서 방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을 조사했으며, 전형적인 미국의 식단(그중 28퍼센트가 동물성인)은 같은 양의 칼로리가 포함된 베건 식단에 비해 한명이 1년에 약 1.5톤의 이산화탄소를 더 배출시킨다는 결과를 얻었다. 대조적으로, 보통의 운전자가 미국의 전형적인 자동차대신 좀 더 연비가 좋은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바꾸었을 때 1년에 줄일 수 있는 이산화탄소 방출량은 1톤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기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억제하는 데는 차를 바꾸기보다 베건 식단으로 바꾸는 편이 더 효과적인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다 하면 더 좋겠지만.)

대형 마트와 보통 식료품점에서, 우리는 모든 식품이 주류 식품업체의 상품이며(특별한 상표가 붙어 있는 것 외에는), 인도적, 지속 가능적, 환경친화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해야 한다. 특히 동물성 식품은 거의 전부가 공장식 농장에서 온 것이며, 그와는 다른 정보가 겉에 씌어 있는 극소수의 예외만있을 뿐이다. ‘완전 천연 제품이나 농장에서 갓 들여온‘ 따위의 문구에 현혹되지 말자. 그런 문구는 종종 공장식 농장의 상품을 치장하기 위해 쓰이는 상투적 문구들이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그 동물의 진실에 대해 알 책임이 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벌이는 일 중에, 농업만큼 이 지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다. 우리가 먹을거리를 구입하는 일은 거대한 글로벌 산업 시스템에 동참하는 일이다. 미국인들은 매년 1조 달러 이상을 식비로 쓴다. 자동차에 쓰이는 돈의 두 배 이상이고, 정부의 국방 예산에 비교해도 두 배 이상이다. 우리는 모두 식품의 소비자들이며,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식품업체들이 유발하는 공해와 연관이 있다. 60억 명의 인구에 미치는 영향 말고도, 식품산업은 매년 500억 이상의 인간이 아닌 육지동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전 생애를 구속받고 있으며, 계획에 따라 태어나 공장의 부품과 같이 살다가 살육되는 길을 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수십억 마리의 물고기가, 그리고 다른 해양 생물들이 바다에서 떠내어져,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토막 나고 있다. 화학물질과 호르몬제는 강과 바다에 흐르고, 조류독감과 같은 병이 번진다. 농업은 거의 모든 생명에 손을 뻗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내린 먹을거리 선택으로 빚어진 일이다. 더 나은 선택은 가능하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곧바로 나오는 반론이 있다. "인도주의는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동물을 걱정할 여유가 있으면, 불쌍한 인간들부터 먼저 챙겨라." 그러나 피터 싱어는 그것이야말로 위험한, 무시무시한 생각이라고 한다. 엄연히 고통을 느끼는(마음의 고통을 포함하여) 존재를 ‘우리‘보다 열등하며 그런 고통을 당해 마땅할 존재로 치부하는 생각, 그것은 흑인들을 ‘동물처럼‘ 사냥하여 사슬에 묶어 노예로 부렸던 인종차별주의자의 생각이 아닌가?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권리와 능력이 있음을 부정하고 그녀들을 집 안에만 묶어두려고 했던 성차별주의자의 신념이 아닌가? 싱어는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종(種)차별주의‘로 정의한다. 그리고 종차별은 인종차별, 성차별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비윤리이며, 비인도적인, 잔인한 사상이라고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0-12-10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만 읽어도 후덜덜하네요 ㅠㅠ 저도 최근에 이 쪽으로 관심이 생기고 있는데 실천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서 매일 반성 모드입니다.

난티나무 2020-12-10 15:19   좋아요 0 | URL
한번에 똭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천은 어려워요. 그래도 작은 것부터...ㅎㅎ
 















화와 분노의 강도는 항상 주관적으로 체험된다. 감정에는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은 사회화 과정에서 가족이나 배우자의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학습하며,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라면 아이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 ‘호출‘에 곧장 응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배우자가 이런 ‘상시대기‘ 상태를 이용할 때도 많다. 이런 상황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기는커녕 인지하기조차 어렵게 만든다. 끊임없이 무슨 일이 생기고 누군가는 뭔가를 늘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경우도 흔하다. 어차피 자유시간도 없다. 자신의 욕구 충족은 대개 ‘아이가 잠든 뒤‘나 주말, 방학 때 등으로 미뤄진다. 심지어 아이가 다 큰 뒤로 한없이 유예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충분히 컸을 때란 언제인가? 열 살, 열다섯 살, 스무 살, 아니면 서른 살?

경멸은 때로 비꼼과 냉소의 형태로도 나타나는데, 유년기에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는 특히 더 그렇다. 누적되다 못해 어느 정도 고착돼버린 분노가 신랄하고 빈정대는 언사로 표출되는 것이다. 빈정거림과 냉소는 당사자의 생각과 말에 후추 한 알 만큼이나 적은 용량으로 첨가되는데, 이때 화와 분개의 감정은 ‘농담‘의 가면을 쓰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쾌한 반응을 보여도 당사자는 "농담으로 한 소린데 뭘 그래"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기 일쑤다. 그 뒤에 숨어 있는 화의 의미와 정도는 차단되거나 축소된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이 직접 표출한 화에 대한 책임을 이런 식으로 면하려 드는데, 그 이면에는 비판적인 부모자아가 숨어 있다.

화를 인지하고 그 근거까지 파악했으면서도 ‘당신이 이러저러하니까 내가 화를 내는 거야‘라는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타인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충족되지 않은 나 자신의 욕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화가 나는 이유 역시 그가 내 욕구를 충족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욕구가 현재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만큼 중요한가? 현재 상황이 다툼을 벌이기에 합당한가? 아니면 욕구를 자제할 수 있는 상황인가?

우리에게는 분노할 권리가 있다. 화가 치밀면 언제든 화를 낼 수 있다. 다만 ‘그 분노가 누구 탓인가, 누가 분노를 유발했는가?‘가 아니라, ‘지금 이것은 누구의 문제인가?‘가 중요하다. 상대방의 행동거지를 두고 흥분하는 건 내 문제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도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남부터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일단은 내가 상대방의 행동거지 때문에 화가 나는 이유를 고민해보는 것이 좋다. 우리의 욕구 중 어떤 부분이 충분히 인지되지 못했는가?

화에 건설적으로 대처한다는 것은 남을 비난하거나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나의 욕구를 표출하고 내가 받은 실망과 상처를 내보인다는 의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들에게 스스로를 변호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며, 실제로 이는 일부 여성들이 성폭행을 막거나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나 강간범들의 행동은 좌시하고 여성들의 음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접근을 물리칠 책임을 오직 피해자에게만 지운다면 남자들에게는 강압적인 행동을 할 특권이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나 다름없다. 또한 페미니스트 캐사 폴릿의 글처럼 몸이 굳어버렸거나, 두렵거나, 평생 동안 몸에 배어버린 조신함 때문에 ‘바로 그 한마디‘를 내뱉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훈제연어처럼 누워 있는 여성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를 여성의 성관계에 대한 기본적 동의라고 보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심지어 여성이 싫다는 의사를 크고 분명하게 표현하더라도 남성은 귀기울이지 않을지 모른다.

2011년에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섹스를 피자 먹는 일에 비유해 유명세를 탄 파격적인 필라델피아의 교육자 알 베르나치오의 기사를 실었다. 섹스와 피자 먹기는 둘 다 내면의 욕망, 즉 굶주림과 욕구에서 출발한다. 양쪽 모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지금 당장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때가 있다. 만약 실행하기로 결정을 내릴 경우, 어느 정도 논의와 협상이 필요하며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선의의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페퍼로니를 좋아하지만 함께 피자를 먹을 사람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반반씩 나뉜 피자를 주문한다든지, 이번에는 여러분이 먹고 싶은 걸 주문하고 다음번에 상대방이 먹고 싶은 걸 주문한다든지, 완전히 다른 토핑을 선택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비유에는 누가 이긴다거나 누가 우위를 점유한다거나 하는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욕구, 상호간의 합의, 대화, 협력, 과정, 즐거움의 공유를 강조할 뿐이다.

아들을 둔 부모들은 아들을 앉혀두고 다양한 형태의 압력, 강압, 합의,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긋는 경계선을 극복해야 할 도전 과제로 생각하도록 촉구하는 풍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아야 한다. 또한 남학생들은 성적 대상화된 미디어와 포르노가 자신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여성을 공격, 폄하하거나 정복하지 않고도 남성적인 섹시함을 보여줄 수 있는 바람직한 사례를 접해야 한다. 남학생들도 상대방과 공유하는 즐거움, 상호간의 존중, 배려에 대해 알아야 하며,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야구선수 같은 사고방식에서 함께 피자를 즐기려는 사람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에 나처럼 페미니스트이자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며 십대 딸을 둔 엄마인 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딸들에게 기계적인 생식 과정만 가르치거나 원치 않은 성적 압력을 거부하도록 독려하는 것, 또는 강간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심지어 때가 되었을 때 피임약과 콘돔을 쥐여주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나는 부모는 딸들과 함께 여성의 몸이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자위와 오르가슴은 무엇인지부터 시작해 바람직한 섹스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친구는 주저했다. "걔네들이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겠어?" 친구의 대답이었다.

부모에게서 듣고 실어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듣겠는가? 아이들은 TV와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 영화관 화면에서 요란하게 울려대는 왜곡되고 잘못된 메시지가 아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 부모는 자녀의 성적 발달을 부정하거나 그에 대해 무조건적인 두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 아이들이 섹스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을 이해하면서도 존중하는 마음과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욕구를 받아들이며 복잡하고 다양한 뉘앙스를 가진 섹슈얼리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성착취를 '성노동'이라 부를 때, 우리는 피해자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들이 당한 피해에 거리를 두고 '나는 개입하지 않겠다'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 쉽게 말해서 돈 몇만 원을 내고 여자를 자기 배 밑에 깔고 자기 멋대로 이용해 그 여자의 가장 사적인 부분을 침해해 본 남자가 직장에서 자기 여자 동료를, 가정에서 자기 아내나 누이 혹은 딸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남자의 반이 성착취 경험이 있는 우리 나라의 성폭력 문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돈을 내면 여자를 성착취할 권리를 살 수 있다는 관념과 실천에 강력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 상업화된 성착취가 거의 모든 사회에서 확장되고 정상화된 것은 19세기 이래 여자들이 투쟁해 얻어낸 권리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남자 지배 체계가 동원한 '백래시'일지 모른다. "



"수전 브라운밀러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 "모든 여성은 강간의 피해자다. 실제로 강간당했든 당하지 않았든, 여성들에게는 언제 강간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도사리고 있다. 강간 가능성만으로도 여성의 행동 반경은 위축된다"라고 하며 남자 지배 사회가 여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강간을 사용함을 지적했다. 강간 뿐만 아니라 상업화된 성착취도 마찬가지다. 아무 남자나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창녀‘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여자들은 남자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재단한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나체 사진이나 성관계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하는 행위도 이 여성을 아무 남자에게나 ‘딸감‘ (남자의 자위에 사용되는 도구)으로 소비될 수 있는 여자로 ‘창녀화시키는 폭력 행위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남자는 여자에게 "네가 나의 요구를 거부하면 나는 너를 ‘창녀‘로 만들 수 있다"는 권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업화된 성착취가 있는 사회에서는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책 제목처럼 실제로 모든 여성은 까딱하면 저 ‘강간당해도 싼 여자‘ 집단의 하나가 될 위험이 있다. 가족의 병환으로 목돈이 갑자기 필요해서, 학생이라 풀타임으로 일할 수 없는데 비싼 등록금을 단시간에 벌어야 해서, 성폭력을 당해 자신의 몸이 더러워지고 무가치해졌다고 여겨서, 탈혼하고 아이를 홀로 부양해야 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여성들은 자신을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성산업으로 들어가는 길 하나를 건너게된다. 성산업이 있는 한, ‘창녀 취급‘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자란 아무도 없다."



"페미니스트 심리학자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남성 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여자 집단전체가 인질 심리를 느낀다고 분석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발간된 「여자는 인질이다. (2019, 열다북스)라는 책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저자들은 "여자가 남자와 연결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여자의 남자 사랑도 전부 생존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노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업화된 성착취의 남성 수요를 근절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가장널리 사용하는 전략은 좋은 성착취와 나쁜 성착취를 분리하는 것이다. 성착취 근절주의자들이 상업화된 성착취는 본질적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근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성노동‘을주장하는 사람들은 인신매매는 나쁘지만 ‘자발적인 성매매는 괜찮다고 한다. 성착취 현장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은 나쁘지만 ‘성매매‘ 자체는 괜찮다고 한다.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성매매‘는 나쁘지만 성인의 ‘성매매‘는 용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성착취를 용인할 수 있는 ‘성매매‘와 그렇지 않은 ‘성매매‘로 나누는 것은, 상업화된 성착취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위함이다. 근절주의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 주장은 괜찮은 성폭력과 나쁜 성폭력을 구분하자는 말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유흥주점, 룸살롱에서 여자를 접대부로 고용하는 것이 합법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옆에 앉혀 놓고 술 따르게 하고 성희롱을 하는 행위가 합법이다. 우리나라는 1962년에 제정된 식품위생법 및 그 시행규칙에서 유흥종사자를 처음 명시했고, 현재 유흥종사자는 법에서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부녀자‘로 정의되어 있다. 법 규정 상의 순화된 언어와는 달리, 실제로는 남자들이 얌전히 접대부 옆에 앉아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시거나 접대부에게 정중히 노래나 춤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이 유흥주점이 ‘성매매‘가 이루어지거나 알선, 연결되는 장소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수백,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남자가 성착취를 하는 이유나 양태는 변하지 않았다. 50년 전에 홍등가를 드나들던 남자나 요새 유흥주점에 가서 2차를 요구하는 남자나,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의 몸을 사서 대상화와 사물화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똑같다. 성착취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는 레토릭이 변했을 뿐이다.
이런 레토릭은 포주 논리이자 성착취남의 논리다. "먹고살 길 없는 불쌍한 애들 내가 돈 벌게 해 주는 거다"라고 말하는 성착취남과 성착취 피해 여성들에게서 세금을 걷겠다고 성착취를 합법화하는 국가가 무엇이 다른가? "매춘 여성은 민간 외교관이다"라고 한 정부 관리나 "성노동자는 성적 자기결정권과 주체성을 행사하는 당당한 노동자다"라고 말하는 여성학자가 무엇이 다른가?"



"성착취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피해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착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과 관계를 획득해야 한다. 아직 성착취 공간에 남아 있는 여자가 자신의 경험을 ‘일‘로 이야기하고 "나는 피해자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행위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학자 캐서린 맥키넌의 말처럼, 여전히 많은 경우에 '동의'는 남성이 제안하고 여성이 가부를 결정하는데, 이는 사실상 성적 관계에 대한 일종의 통제 형태다. 즉, 성적 관계에서 동의의 맥락은 상호간 의사소통을 한 후 내리는 선택이라기보다 여성의 근본적인 사회적 무력함을 미리 전제한다는 것이다. 맥키넌은 반쯤 얻어진 동의를 동의로 생각한다면, 왜 반쯤 거절된 것은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에 대해 되묻는다. 남성성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성별 권력 관계가 존재하는 한 '동의'는 사실상 평등한 관계에서의 선택이라기보다 권력이 전제된 관계에서의 수동적인 결정일 수밖에 없다. 특히 데이트 관계에서는 동의와 거부의 이분법적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연속적인 맥락이 존재하며, 동의, 제안, 강요의 형태는 동시에 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트 관계에 있는 여성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은 협상중이거나, 위태롭게 유지되거나, 쉽게 무시되거나, 비자발적으로 강제되는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폭력 연구자들이 재차 말해왔듯이 폭력은 '악(惡)'이 아니다. 폭력은 악이 아니라 '구조'다. 연애와 사랑 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회자되고 성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착취의 흔적을 지우려 하겠지만, 비대칭적인 젠더 구조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호명으로 만나는 이성연애가 착취적이지 않으려면 각고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자연스러운' 연애는 성별화된 연애의 수행이기 쉽다."


"한국에서 성매매는 '일탈'이 이나라 회식접대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정상적 삶'의 일부다. 이 같은 조건에서 성노동 및 성매매 비범죄화론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성매매 근절'이 불가능하다며 '수치심마저 갖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 면죄부를 준다."



"성매매가 본질적으로 폭력적 갑질 체험의 장인 바, 성매매 유경험자의 비율이 높은 사회일수록 청렴도는 떨어지고 인권 의식의 확산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서비스산업은 모두 인간의 상품화인데, 성매매도 그중의 하나일 뿐 다를 바 없다"라는 진술은 무책임하다. 성매매 종사자의 인권은 사회 전반의 복지 수준이 나아지고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산업 종사자들이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행위를 가치중립적으로 '성노동'이라 했을 때, 노동이 갑질과 왜곡된 성 인식, 배금주의와 부패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갑질과 부패는 반대하면서 노동만 인정할 방법이 있는가?
그런 세상에서 인권은 개선될 수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