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 캐서린 맥키넌의 말처럼, 여전히 많은 경우에 '동의'는 남성이 제안하고 여성이 가부를 결정하는데, 이는 사실상 성적 관계에 대한 일종의 통제 형태다. 즉, 성적 관계에서 동의의 맥락은 상호간 의사소통을 한 후 내리는 선택이라기보다 여성의 근본적인 사회적 무력함을 미리 전제한다는 것이다. 맥키넌은 반쯤 얻어진 동의를 동의로 생각한다면, 왜 반쯤 거절된 것은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에 대해 되묻는다. 남성성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성별 권력 관계가 존재하는 한 '동의'는 사실상 평등한 관계에서의 선택이라기보다 권력이 전제된 관계에서의 수동적인 결정일 수밖에 없다. 특히 데이트 관계에서는 동의와 거부의 이분법적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연속적인 맥락이 존재하며, 동의, 제안, 강요의 형태는 동시에 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트 관계에 있는 여성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은 협상중이거나, 위태롭게 유지되거나, 쉽게 무시되거나, 비자발적으로 강제되는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폭력 연구자들이 재차 말해왔듯이 폭력은 '악(惡)'이 아니다. 폭력은 악이 아니라 '구조'다. 연애와 사랑 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회자되고 성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착취의 흔적을 지우려 하겠지만, 비대칭적인 젠더 구조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호명으로 만나는 이성연애가 착취적이지 않으려면 각고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자연스러운' 연애는 성별화된 연애의 수행이기 쉽다."


"한국에서 성매매는 '일탈'이 이나라 회식접대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정상적 삶'의 일부다. 이 같은 조건에서 성노동 및 성매매 비범죄화론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성매매 근절'이 불가능하다며 '수치심마저 갖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 면죄부를 준다."



"성매매가 본질적으로 폭력적 갑질 체험의 장인 바, 성매매 유경험자의 비율이 높은 사회일수록 청렴도는 떨어지고 인권 의식의 확산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서비스산업은 모두 인간의 상품화인데, 성매매도 그중의 하나일 뿐 다를 바 없다"라는 진술은 무책임하다. 성매매 종사자의 인권은 사회 전반의 복지 수준이 나아지고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산업 종사자들이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행위를 가치중립적으로 '성노동'이라 했을 때, 노동이 갑질과 왜곡된 성 인식, 배금주의와 부패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갑질과 부패는 반대하면서 노동만 인정할 방법이 있는가?
그런 세상에서 인권은 개선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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