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교육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죽은 시인의 사회> <창가의 토토>에서 찾은 참 교육의 모습 -

 

고서 / 김선욱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친구들이 고깃배 주위를 맴돌며 죽은 고기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사이 우리의 지혜로운 갈매기 조나단은 더 빨리 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열심이다. 왜 다른 모든 갈매기들이 먹기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데도 조나단은 더 높이 빨리 날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까. 무리를 떠나 높은 창공을 힘차게 날아 오른다. 그런 조나단을 보고 다른 갈매기 무리들은 조롱을 하고 따돌린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외롭고 고독한 일이다.

 

준비된 제자에겐 알맞은 때에 스승이 나타나기 마련일까. 조나단은 설리반 스승을 만나 차원이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사랑의 빛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자기가 배운 사랑을 전하기 위해 조나단은 자기를 배척했던 갈매기 무리들 속으로 돌아온다. 예전의 자기처럼 빨리 날기 원하는 어린 갈매기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길을 안내해 준다. 사랑으로 존재하는 삶을 가르쳐주려는 것이다.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의 삶은 한편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우리들 눈 앞에 아름답게 펼쳐진다. 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갈매기 조나단이 불쑥 우리들 세상 속으로 날아와 힘차게 외치는 듯 하다. 인생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차원 높은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팅 선생은 지혜로운 조나단이 갈매기 무리들 속으로 돌아와 어린 갈매기들을 가르쳤듯, 모교인 웰튼 아카데미의 교정으로 돌아와 성공을 위해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있던 제자들에게 진정 깨어있는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아이비리그 진학을 위한 교육을 거부하고 현재에 존재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오랫동안 전통과 규율을 중시해 온 웰튼 교정에 키팅 선생이 불어넣은 카르페 디엠의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우리에게 인생의 참 의미를 생각해 볼 시간을 준다.

 

짧은 영화가 우리의 감성을 끓어오르게 한다면, 읽는데 꽤 많은 시간이 드는 책은 우리의 지성을 자극한다.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관한 바이블과 같은 책이 있다. 바로창가의 토토가 아닐까 싶다. 32개국 2,000만 독자를 사로잡은 베스트셀러. 이 책에서 고바야시 소사쿠 교장선생님은 우리에게 참 교육은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온몸으로 가르친다. 자신의 수업을 진지하게 듣던 한 여학생이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학교를 그만두고 사랑의 교실을 열었던 레오 버스카글리아 선생님의 에세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에서 참교육의 길은 사랑에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토토의 창가에서 우리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어린이 교육의 근본 원칙을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의 전형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우리 나라는 미쳐 있다. 온 국민이 교육 광풍에 휩싸여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교육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 결과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학원과 과외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환경에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면서 밝게 자랄 수가 없다. 지금 왜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이렇게 비극적인 삶으로 내몰고 있는지 조용히 반성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과연 명문대학을 나오면 행복이 보장되는가를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미국에서도 벌써 오래 전부터 명문대학 진학을 위해 아이들을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시켰던 모양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바로 아이비리그 진학률이 높은 웰튼 아카데미 입학식으로 시작된다. 입학식 날 문제의 존 키팅 선생이 전근을 왔다는 교장 선생님의 짤막한 소개가 있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가 아닐까. 존 키팅 선생은 첫수업부터 파격적이었다. 수업시간에 휘파람을 불며 등장한 키팅 선생은 학생들을 역사관으로 데리고 가 학생들의 머리에 지혜의 불빛을 비춰준다. 시의 한 구절을 읊어주며, 카르페 디엠이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 한 똑똑한 학생이 현재를 즐겨라고 대답한다. 학생들에게 선배들의 사진의 모습을 자세히 보라고 하며 그들 모두가 이미 죽어 사라졌다며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현재를 즐기는 삶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깨우쳐준다. 선배들의 사진을 쳐다보라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귀 기울여 보라고 한다. 그러고는 키팅 선생은 학생들의 뒤에서 귀신이 내는 소리처럼 조용히 외친다. 카르페, 카르페 디엠~!

 

창가의 토토에서 엄마는 토토를 데리고 새로 전학 갈 학교에 찾아간다. 엄마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토토를 받아줄 것인지가 걱정되었고, 또 잘 적응할지에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토토가 퇴학을 당하기 전 학교에 불려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토토의 유별난 행동들을 모두 들었다. 도저히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학교 수업을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엄마는 토토를 전학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엄마의 복잡한 심정은 조금도 아랑곳 않고 토토는 도모에 학원의 살아있는 나무로 만든 문을 넘어서면서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곧 이어 교장 선생님과 면담이 시작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무려 4간이나 토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준다. 어린 토토에게 최대한의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취할 수 없는 태도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관심을 갖고 들어준다. 토토는 교장선생님을 벌써부터 신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내일부터 등교를 하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말썽장이 토토는 도모에 학원으로 전학을 오게된다. 놀라운 사실은 토토는 스무살이나 되어서야 엄마에게 이전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이가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하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고 하니 엄마의 사랑은 지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모에 학원의 교장 선생님도 훌륭하지만, 엄마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 준다. 우리 엄마들이 과연 토토의 엄마처럼 아이들을 관용하고 인내해 줄 수 있을까.

 

우리 교육의 현주소, 무엇이 문제인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와 책 창가의 토토는 모두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아무 생각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행렬을 저지하고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참 교육은 무엇을 지향해야할까? 한 인간의 개성을 드러내고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도하는 것어야할까, 저마다의 타고난 개성을 무시하고 지향해야 할 인재상을 정해두고 획일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어야할까. 오늘날 교육은 점점 경제적 사회활동을 위한 준비로 전락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가 대학을 진학을 위한 준비 기간일 뿐이다. 대학은 또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전초 기지일 뿐이다. 더 이상 학문을 연구하고 지혜를 배우는 상아탑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의 목적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획일적인 교육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천재교육이 뭐니 해서 영유아기때부터 경쟁적인 교육 전쟁을 치르고 있다. 무조건 남보다 머리가 좋은 아이로 사육(飼育)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 명문 유치원에 보내려고 부모가 밤새워 줄을 서고 기다린다고까지 한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몇과목씩 과외를 하느냐 눈코 뜰 새가 없다. 공부에 내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미친 교육에 지쳐 자살하는 아이들까지 생기고 있다. 결코 남의 일이라고 수수방관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모든 부모들, 선생님들과 유관 교육 기관 관계자들 모두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인 것이다.

 

슬프게도 정작 부모들 자신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부모들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교육의 길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가 있겠는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어느 나라에선가 돼지들이 떼지어 낭떨어지로 떨어져 죽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다른 돼지들이 낭떠러지로 뛰어드니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뛰어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 가고 있는 길이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한 곳을 향해 떼어지 치달려가고 있다.

 

집단 무의식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고, 머리가 있어도 생각할 줄 모른다. 자연히 남들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대세이기 때문에 따라야 하고 남들이 하기 때문에 따라야만 한다. 스스로 삶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참으로 심각하다 할 수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획일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교 교육과 사회적 전통, 관습 및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다 보니 자연히 남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 것이다.

 

레밍쥐들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다고 한다. 마치 축제처럼 연례적인 행사를 벌인다고 한다. 떨어지면 죽게 되는 것인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뛰어내리고 싶은 집단적인 충동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레밍 딜레마란 책에 나오는 얘기다. 그만큼 사회적 규범은 구속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단체행동을 해 온 인류는 자연적으로 집단의식을 갖도록 프로그래밍 되었을 것이다. 하지 이제 인류가 직면하는 물리적인 위험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동물처럼 집단행동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오랜 습성이 남아서 남들과 비교하면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자신만이 바보처럼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위안을 삼을 수가 있을까. 이제 우리는 남들이 어떻게 하나 살펴보면서 집단행동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 무의식에 따른 행동 경향이 더 이상 변경거리가 될 수는 없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면 얼마든지 그런 무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척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다. 진정한 성공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인 만큼 큰 돈을 버는 것이 성공의 유일한 척도가 되어 버렸다. 이를 위해서 좋은 대학 나와야 하고 좋은 직장이나 직업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교육이 이런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된 것이다. 레밍쥐들이 무의식적으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축제를 즐기지만 결국 뾰족한 바위에 부딪혀 죽는 운명인 것처럼, 성공을 향해 뛰어내리지만 우리 모두 정신적인 죽음에 부딪히고 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살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가던 길 멈추고 서서 물어보아야만 한다. 머리를 좋게 하거나 공부만 잘 하게끔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 것이 진정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 과연 지금의 교육 방식이 바람직한 것인가. 우리가 교육의 목적을 더 이상 좋은 대학을 가는 것으로 삼지 않는다면 교육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행복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고, 즐겁게 공부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도모에 학원에서처럼 즐겁게 공부할 수 있고, 청소년들은 존 키팅 선생님에게서 현재를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삶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기존의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찍혔던 토토는 도모에 학원에서 잘 적응을 하여 행복한 학교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 얼마나 좋으면 학교 가고 싶어 안날이 날 정도겠는가.  토토에게는 그야말로 새롭고 놀라움으로 가득 찬 도모에 학원에서의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어서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 아침까지 기다리기가 지루했다. (35p) 도대체 도모에 학원에서 어떤 일이 있길래 토토가 이렇게 행복할까. 도모에 학원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 자리에 앉는 것도, 공부할 과목의 순서를 정하는 것도 자유스럽다. 학생 수가 적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방향을 정립할 수 있게 해 준다. 학생들은 국어든 수학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글짓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글짓기를 하고, 또 교실 뒤쪽에서는 자연을 좋아하는 아이가 알코올 램프에 불을 붙여 플라스크를 부글부글 끓이기도 하면서 뭔가를 폭발시키곤 하는 광경을 어느 교실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수업방식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 한명 한명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나 관심의 정도, 사고방식, 그리고 개성 같은 것을 점점 확실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에 선생님이 학생 개개인을 파악하기에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학생들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부터 해도 된다는 것을 기쁜 일이었고, 설사 싫어하는 과목이라도 수업이 전부 끝날 때까지만 어떻게든 해내면 되니까 그리 힘들게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자습 형식이 많았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선생님께 물으러가든지 자기 자리로 선생님을 불러 이해가 될 때까지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연습문제를 받아 다시 자습에 들어간다.. 이것은 그야말로 참된 공부였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말씀이나 설명을 듣고만 있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44p) 아이들을 위한 참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무엇을 잘 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많은지를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학교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의 개성을 발견하고 소질을 개발하는데 두어야 하지 않을까.

 

좋은 대학을 가는 목표 버리면 웰튼 아카데미에서처럼 참교육의 새 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 존 키팅 선장은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길로 안내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파격이었다. 영어 시간에 시에 대한 정의와 이론을 담고 있는 페이지를 찢어내라며 소리 높여 외친다. 깜짝 놀란 다른 과목 선생님이 들어와 볼 정도다. 하지만 하루 하루 학생들이 현재에 살며 자신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한편 일단의 학생들은 키팅 선생이 했던 것처럼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클럽을 만들어 시를 낭송하면서 학교 이곳 저곳에 자유로운 사고의 바람이 분다. 이제 이들을 중심으로 학교는 서서히 변화의 물결이 파도쳐 나가게 된다.  

 

창가의 토토에서 어린이 교육을 어떻게 지도해야만 하는가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어떤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즐겁게 뛰어놀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소질을 발견할 수 있는 탐색의 기간이어야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잘 할 수 있는 소질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정 부분은 개성을 활짝 발휘하기 위해 땀 흘려 연습하고 훈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더라도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대학에 진학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결국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혹은 대학까지 각 과정에 필요한 기본적인 교양 과목을 배우는 과정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고 개성을 꽃피워나갈 수 있는 자기 발견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인생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전인교육이 이뤄져야만 한다.      

 

참교육의 길은 과연 가능한가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다. 배불리 먹고, 명예를 얻는 사회적 성공을 떠나 차원 높은 존재의 삶이라는 자신의 길을 가는 갈매기 조나단이 따돌림을 당하고 배척을 당했듯 참교육의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사회 전체가 집단 무의식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심지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낙오자 혹은 사회 부적응자라고 매도 당하기 십상이다. 생각 없는 다수의 이런 오해와 편견을 무릅쓰고 자신의 길을 가려면 진정한 용기가 없으면 안 된다.

 

키팅 선생님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다른 여러 친구들과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의 멤버인 닐 페리는 키팅 선생님의 참교육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는 연극을 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의사로 만들어 성공적인 삶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대학을 가게 하려고 자식을 웰튼 아카데미에 입학시킨 것이라, 아버지는 닐이 연극을 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닐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고, 소질도 있는 연극 배우의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닐이 예정된 연극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끝내 아버지는 자식의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고 성공지향적인 교육을 위해 자식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기로 한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죽음으로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 웰튼 아카데미에서의 키팅 선생의 교육 혁명은 그만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하지만 진정한 삶을 살라는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멤버들과 같은 반 학생들의 가슴에 뿌리를 내린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우리 모두는 이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들이 진정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참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주기를 바라면서 비인간적인 교육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것이 성공적인 삶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레밍쥐들이 축제처럼 생각하고 하는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기가 죽음의 길이었듯 우리나라의 현재 교육도 죽음에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멈춰 서서 정말 깊이 반성해 보아야만 한다. 왜 우리가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고 있는가, 레밍쥐들이 물어야 했던 것처럼, 왜 우리는 좋은 대학 가기 교육에 목을 매다는가를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더는 생각하기를 미룰 수가 없다. 내일이면 누군가는 또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하는 교육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나는 참교육의 원칙을 창가의 토토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에밀에서 찾고 싶다. 루소는 아이들이 스스로 천부적이며 자연적인 본성을 배워나갈 수 있도록 지도하라고 한다. 그래야 한 인간이 온전한 인간으로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타고난 인간 본성을 활짝 꽃피우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는 정말 지혜로운 선생님이 아이 한 명만을 온전한 관심과 주의를 갖고 돌보아야만 한단다. 그래야만 제대로 지도하고 안내할 수 있으니까. 물론 오늘날 이러한 방법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에밀의 교육원칙을 통해서 우리는 교육이 그만큼 철저하게 이뤄져야만 한다는 깨달을 수 있다. 또 진정한 교육은 결코 거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처럼 훌륭하게 자란 에밀은 아마도 갈매기 조나단이 외치는 것처럼 차원 높은 존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키팅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현재를 즐기는 인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키팅 선생님의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카르페 디엠,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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