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망을 읽다
책과의 인연 - 소설 대망을 두 번 읽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더니, 한평생 농사를 지으시면서 고생고생하시던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셨다. 환갑도 못 지내시고 58세에 세상을 등지셨으니, 평균 수명을 80이라고 한다면 요절을 하신 셈이다. 돌아가신 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아버님은 내 속에 살아계신다. 나는 늘 돌아가신 아버님을 그리워한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책에 의하면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 못한 것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래 전에 읽은 책에서 이렇게 주장했던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무엇을 잘 못하여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아버님을 나의 가슴 속에서 떠나 보내지 못하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사람 좋으셨던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오늘날 내가 새벽에도 잘 일어날 수 있는 것도 다 아버님 덕택이 아닐까 모르겠다. 전에 일찍 일어날 때는 3시 20분에 일어나기도 했으며, 요즘에도 글 쓴다고 4시에서 4시 30분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누군들 새벽잠이 달콤하지 않겠는가. 다 일찍 일어나 버릇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일 게다. 아버님께서 살아계신다면 한번 여쭙고 싶은 궁금한 일이 하나 있다.
6월에 군에서 제대를 하여 다음해 3월에 복학할 때까지 집에서 놀았다.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집에서 쉬었다. 그 때 막내 여동생은 중학교를 다녔다. 어떻게 해서 그 책을 빌려보기 시작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궁금한데 여동생에게 학교에서 대망이란 책을 빌려오게 해서 열심히 읽었다. 저녁 때 하교할 때 책을 빌려오면 밤새 읽었다. 그 당시 책은 세로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불편했다. 책을 열심히 읽으면 새벽 4시경이면 다 읽을 수 있었다.
새벽 4시경 책을 다 읽고서 흐뭇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런데 참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아버님께서는 막 곤하게 잠이 들기 시작한 나를 6시에 발로 툭툭 차면서 깨우셨다. “얘, 자려면 아침이나 먹고 자라”고 하시면서 깨우는 것이었다. 겨우 막 잠이 들었는데 깨우니 얼마나 졸리겠는가. 그래도 아버님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눈비비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잠을 잤다. 그냥 자게 내버려두면 12시쯤에 일어나 점심을 먹으면 될 텐데 굳이 깨워서 아침을 먹으라고 하셨으니 그 땐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살아계신다면 왜 그러셨는지 여쭙고 싶다.
아무튼 나는 그 때 매일 대망을 읽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19권까지 읽었는데 19일이 걸렸다. 일요일을 빼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망을 읽었다. 그런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책을 다 읽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마지막 20권째 책은 읽지 않고 미뤄 두었다. 나중에 언젠가 때가 되면 읽겠다고 남겨 두었던 것이다. 대망은 재미나 스케일 면에서도 결코 삼국지에 뒤지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삼국지보다 훨씬 재미나게 읽었다. 그런데 이 무슨 얄미운 일일까.
몇 년이 지난 93년의 일이었다. 아버님께선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전날 서울에 살고 계신 숙부님댁에 다녀오신 후 들에 나가셨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이다. 쓰러지신 뒤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 작은 병원에서 손 쓸 수 없다고 해서 서울 신촌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아버님께서는 급하게 뇌수술을 받으시고 그 병원에 3개월간 입원해 계셨다.
그 때 나는 안산에 있는 컴퓨터 제조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밑에 여동생이 병원에서 자면서 병간호를 했다. 병 간호는 여동생이 했지만 나도 매일 병원으로 출.퇴근을 했다. 병원 안에 있는 벤치 같은 곳에서 자면서 3개월 동안 병원과 직장을 오갔다. 그 때 내가 다시 손에 잡은 책이 ‘대망’이었다. 이번엔 새로 나온 책을 사서 읽었다. 전철과 버스로 안산과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병원에서 자면서 병 간호를 하면서 책을 열심히 읽었다. 두 번째 읽는 것이었지만 참 재미있었다. 아버님께서 쓰러져 계시던 어려운 상황에 읽었던 책이라 더욱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참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걸어가는 것과 같으니 너무 조급해 하지도 말고 쉬엄쉬엄 걸어가라며 인내를 강조한 책이었다. 일본 나라시대를 통일하여 막부정치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은 나이 70세였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큰 뜻을 이룬 때가 남들은 이미 죽었을 법한 나이였으니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 뒤로 나는 인내를 가슴 속 깊이 새기며 살게 되었다.
지금 이 나이껏 살면서 우여곡절이 없는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나는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잘 인내하면서 위기를 슬기롭게 넘겼다. 사실 길고 긴 인생이라는 측면에서도 보면 때때로 겪는 고통과 위기는 성장을 위한 발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잘 견디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통에 힘겨워 하며 그릇된 길을 걷기도 한다. 그런 분들도 인생의 안내자가 될 좋은 책 한 권을 읽고 마음 속에 갈무리를 해 둔다면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정신을 날카롭게 벼릴 수 있는 한 권의 책은 벗삼아도 좋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대망을 읽을 때는 두 번 모두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의 말없는 가르침이 대망이라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고 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평생 인내할 때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늘 그런 가르침은 주기 위해서 아버님께서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살아 계신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