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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읽기 전부터 이 작품에 대단한 반전이 트릭으로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두 눈 크게 뜨고 한자 한자 정말 꼼꼼하게 읽었다. 반드시 트릭을 찾아내리라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품고. 결과는 역시 마지막에 가서 경악을 하고 말았다. 다 읽고 나서 앞장부터 다시 한 번 더듬어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추리소설에서 트릭이 사라진지는 오래되었다. 추리의 본고장인 영어권에서는 이제 트릭이 아닌 범죄와 수사기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트릭을 기본으로 하는 신본격 추리소설을 내놓고 있다. 이 작품은 90년대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최신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동시대 이미 트릭에서 벗어난 서구권과 비교해볼 때 일본은 여전히 트릭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들은 트릭을 하나의 작품 속 소재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작품 자체를 아예 트릭으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그런 독자의 뒤통수 때리는 트릭도 사용한다. 말이 안 된다고? 사기라고? 하지만 그건 이미 아가사 크리스티에 의해서 종식된 이야기다. 독자는 이제 작가가 설치한 트릭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한이 없다. 그저 읽고 놀라고 감탄하면 된다.
이 작품은 세 사람의 초점에서 작품을 이끌어가고 있다. 범인과 자신의 아들이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고뇌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잃고 자신을 보살펴주던 간호사를 범인에게 살해당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범인잡기에 나선 은퇴한 노경부가 각기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범인과의 접점을 향해 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처음부터 범인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미노루는 사랑에 대해 고뇌하다 사랑을 찾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다. 정말 프로이트가 보면 아주 좋아할만한 인물이다. 거기에 자신의 아들이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된 마사코는 전전긍긍할 뿐 자식에게 확인하지도 못하고 남편과 딸에게 의논도 못하면서 와해되는 일본 가족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히구치는 또 다른 일본의 외로운, 그러나 의지하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언니의 죽음에 죄책감을 갖은 동생과 함께 범인을 잡으러 다니는 모습에서 마사코의 집안에서 미미하게 있으나마나한 수수방관자의 모습으로 보여 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결정적인 순간 가족이 그래도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 같은 작가의 생각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외롭고 소외된 아버지들에게, 가족에게 당신들의 가정에서 자신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듯하다.
생각보다는 얇은 작품이다. 그리고 간단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덮고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이 작품이 왜 그렇게 대단하다고 회자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올해, 아니 지금 이 작품을 읽지 않는다면 무척 후회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를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타당했다고도 여겨진다. 약간 경계선에 아슬아슬 걸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소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것을 통해 나와 가족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혼돈의 세상에서 이 정도는 가르침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했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그럼 무엇일까? 그건 왜곡된 사랑, 채워지지 않은 사랑이다. 너무 쉬운 말이지만 각자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그 사랑을 어찌 이해하고 다 알 수 있을까?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다. 사랑 때문에 범죄자가 되는 사람도 있다. 사랑 때문에 절망하게 되고 그래서 인간의 탈마저 벗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랑,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미노루가 찾는 사랑을 마사코와 히구치의 사랑을 대하는 모습에서 약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세 사람의 구도는 완벽한 살육에 이르는 병을 담아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