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몸 대청소
프레데릭 살드만 지음, 김희경 옮김, 김서정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건강의 중요성이야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익히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자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자주 되뇌이고 머리 속에 두고두고 생각하는 건강을 위하여 실제 행하는 것은 거의 없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러실게다. 나 역시 그러했고. 물론 그런중에도 주변의 누군가는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거나 저녁마다 베드민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역시 문제는 실천이고 실행이다.
 
 이 책은 그런 건강에 대하여 생각의 방식부터 바꿔볼 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지침서이다. 제목부터가 [내몸 대청소]이지 않는가? "정리하기!쓸고닦기!버리기!마무리하기!"라는 일반적인 대청소의 순서를 그대로 옮겨와 매주 우리 생활 속에서 시행가능한 부분들을 하루하루 잘개 쪼개어 조목조목 잘 짚어주고 찔러준다.
 
 환자들 대부분이 적어도 1년에 1번 자동차 점검에는 열심이면서 자기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일에는 소홀하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87)
 
 그리고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나같은 이들이 많다는 것 역시 충격적이다. 나 역시 아프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경우에 해당되기에 이러한 예방의학 관련 책을 일찌감치 만나보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책에는 매일매일 한가지씩 개선하거나 고치거나 그만두어야할 것들에 대하여 꼼꼼이 소개하고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 '중독'의 경우를 통하여 책의 내용을 한 번 만나보자. 
 
 담배, 술, 텔레비전, 도박, 인터넷, 일, 비디오게임, 운동, 수집, 마약 - 쉽지는 않겠지만 중독에서 벗어나라! (102)
 
 2주차, 월요일에 해야할 일에 "지혜로운 사람이여 중독에서 벗어나라"가 있다. 위에 언급된 중독의 항목중 몇 가지가 자신에게 해당되는지부터 살펴보자. 나의 경우에 정말 다행히도 담배는 끊었고 - 딱, 1년이 넘었지만 - 텔레비전도 일요일 한 프로그램 외에는 고집하지 않고, 도박은 전혀 상관없고, 일에 대한 강도도 적절히 조정하고 있고…술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줄였으니 거의 완벽하게 중독에서 벗어난 것 같은데 '수집'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띈다.
 
 지은이는 위 문장외에는 '수집'과 관련한 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말이 '중독'과 같이 사용되는데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아, 수집에 관한 집착 역시 중독으로 간주되는구나', '나의 수집벽도 문제가 되는구나'를 이제서야 조금 느낀다. 근데 뭘 그리 수집하느냐구? 물론 이다.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어떤 계기가 있어 '땡기면' - 제목에 혹은 문장 몇 줄에,지은이에, 표지에, '혹(惑)'하면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실에는 읽어야될 책 수 십권과 읽지도 못할 책 수 십권이 매월 함께 쌓여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수집벽을 '뭐, 어때, 책인데, 책이잖아, 책은 무조건 선(善)이잖아'라며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함께 책을 좋아하던 아내가 지긋지긋하다며 책을 멀리하는 경우까지 왔는데도 여태 어떤 형태로든 한달에 30권 이상의 책을 모으고 있으니 미련한 집착임에 분명하다. 쌓여가는 책만큼 지식이나 지혜가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 배려 등이 줄어드는 것임을 이번에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뭐든지 지나치면 해가된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정한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그나마 다행인 것이 올해부터는 정말 꾸준하게 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 운동이라고 해보았자 아직은 하루 3~40여분 이상, 일주일에 4~5일, 집에서 걷는 정도이지만 이마저도 태어나서 40년 이상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꾸준하게 하는 운동이니 스스로 대견스러울 따름이다. 아니면 역으로 그만큼 운동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에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책에서 이야기되는 일상 습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4주간 * 5일 = 20일' 동안 하루 한가지씩 따라가며 챙겨보도록 권하는 것이리라. '하루에 한가지씩이라니 뭐, 쉽네'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의 소개는 달랑 하루씩이지만 그 행동을 습과화시키는 것은 한달 혹은 일년이 걸려도 모자라는 것도 있으니 곁에 두고 수시로 뒤적거리며 잊지말고 하루하루를 개선시키는 것만이 습관을 바꾸어 건강해지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물론 규칙적인 운동과 적절한 식사가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리라. 
 
 결국 개인의 습관은 개인이 노력하여 바꿔 나가야하는 것, 이 책은 그 길에 꽤 좋은 교재가 될 것이다. 다만 끝부분에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한 "찾아보기"가 없어 조금 아쉽다. 책 속에 등장하는 중요 사항들에 대한 '색인'정도는 첨부되어야, 필요한 항목에 대한 내용들을 쉬 찾아볼 수 있을 터인데말이다. 혹 개정판이 나온다면 반드시 "찾아보기"가 첨부되어야 할 터이다. 자, 그럼 나는 오늘도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의 생활을 위하여 운동하러 갑니다. 
 
 

2009.2.14. 밤, 근데 많이 먹고

         운동 조금 더 한다고 건강해질까나? 
 
들풀처럼
*2009-04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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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사 - 나운규와 수난기 영화
최창호 지음 / 일월서각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에서 소개되는 가장 중요한 영화인 나운규의 <아리랑>을 만날 수 없는 바로 지금의 모습이 고난의 우리 겨레사를 그대로 나타나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소중하고 중요한 영화가 우리에게 원본 1부 전해지지 않는 이 참담함에 우리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북한에서 발행된 첫 번째 <한국영화사>에 해당된다고 하니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다만 소개되는 작품들을 쉬 만날 수 없는 현실이 자구만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 고난의 그 시기, "민족수난기"에도 우리 겨레의 얼을 이어간 <아리랑>같은 훌륭한 작품들이 있었음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자존감이리라.

 하여 오늘도 나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훌륭한 영화라고 호평과 관객이 넘쳐나는 우리 독립!영화 <워낭소리>를 보러 가족과 함께 갈 것이다.

 우리 영화를 살리고 우리 겨레의 맥을 이어나가는 것은 후손인 우리들이 하여야만 하는 일이기에.

 

 

2008. 2. 14.  잘 만든 우리 영화 한 편이 여러사람의 가슴을 울립니다. 

들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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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 대량학살된 팔레스타인들을 위하여, 다른만화시리즈 02 다른만화 시리즈 2
데이비드 폴론스키, 아리 폴먼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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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Ⅰ. '학살' 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

 

학살 1 / 김남주

오월 어느 날이었다
일천구백팔십년 5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들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 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들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밤 12시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고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김남주, 실천문학사.

 

 

하마터면 결코 기억할 수도 없었을 그 시대의 일들이 이렇게 우리곁에 살아 있다.

1980년 5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학살'의 기억은 풍문속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몇 년 뒤 이같은 노래의 한 자락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우리를 내동댕이 쳤다.

격동의 80년대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잊지 않으려 그날의 '비디오'를, 글들을,

찾아 읽으며, 나누고 또 나누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사람사는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새날은 오는 듯 하였다. 

20세기의 끝자락, 민주주의는, 온전한 정치적 자유는

사람들의 움켜잡은 손에 거의 다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Ⅱ. '학살', "홀로코스트" 

 

어느날 영화를 보러갔다.

2차 세계대전중 일어난 독일의 유대인 대량학살."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학살의 내용보다 독일인이 유대인을 구해낸 실화라는 사실에 솔깃하여

만나러 갔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적어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사람이란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야마는건지..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학살'은 기억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영화를 보며 흥분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으리라.

하지만 80년 5월, 이 땅의 학살도 쉬 잊혀지는데

더 오랜 남의나라 이야기가 어찌 기억속에 여태 남아 있으랴...

 

학살은 학살 그 자체로 남아있는 사람들의 감상까지 죽여버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Ⅲ. 그리고 이 '학살'을 보라,  [바시르와 왈츠를]

 

학살은 쉬 잊혀지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쉬 말해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엇인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한 유대인들이

이제는 학살자가 되어 사람들을 죽여대고 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철저히 왜곡되고 은폐되고 있다.

자신들이 그만큼 역사속의 희생자임을 강조하던 이들이 보여주는 만행을 보라.

글이 아닌 그림으로, 사진으로 생생히 전해지는 학살의 기억들.

 

지은이는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한번 잊어보라고, 꽁꽁 숨겨두고 묻어두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리라고....

과학이 더 발전되어 정말 기억을 선택적으로 고를 수 있다면

그들은 이 학살에 대한 모든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리리라.

 

하지만 아직까지 신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문득문득 솟아나 어떤 계기로 하여금 잊어버리고 묻어버렸던 그 기억들을 찾아내도록 만든다.

그리고 남는 것은 정말로 잊고 싶었던 아픈 학살의 진실들이다.

 

레바논 민병대의 학살을 방조하고 실질적으로 도운 이스라엘 병사들의 기억은

이 책에서처럼 결코 지워지지 앉는다. 다만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불고 피냄새가 번지면 이윽고 기억속 장면들이 처참히 살아나

살아남은자들의 상처를 후벼판다.

우리는 이 책을 덮으려 하지만 덮을 수 없다.

마지막 장면의 절규하는 난민의 모습과 총상에 피흘리며 쓰러져 있는 젊은이들의 사진이

마치 그날 오월의 우리네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하여 이제는 그만 잊고 살아도 될 것 같았던

'학살'의 기억들이 오롯이 살아나 밤을 지새우게 한다.

 

우리는 우리네 형제끼리...

저들은 저네들끼리....

게다가 주인공인 이스라엘인들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에서

드디어 가해자로! 변한 것이다.

 

정녕 '학살'의 피해자가  '학살'자가 되는 일이 생기고 만것일까?

그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몽땅 잊었단 말인가?

이 책은 제발 그러하지 말자고 조심스레 반성의 기색을 내보이는

이스라엘 자신의 목소리일까?

 

에니메이션이 원작인 이 다큐멘터리만으로는 조금은 기대를 걸어도 좋으리라. 

하지만 최근 '뉴스 속 세계'에는

다시 자행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이야기가 이어진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악화되는 것인가?

책 한 편이 던져주는 '학살'의 아픔과 충격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리라.

 

끊이지 않는 국지전 속에 분단조국의 현실도 녹록치않게 악화되어가고 있다.

정녕 우리는, 사람들은 어디쯤에 서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지....

묻고 또 묻는 시간들이다.

 

'학살'은 결코 잊혀지지도, 끝나지도 않는다.   이런....젠 장.

 

2009. 2. 12.  불어닿는 저 바람처럼 흔들리는 깊은 밤

 


들풀처럼
*2009-03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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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하악 - 이외수의 생존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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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작가 이외수의 부담없는 에세이집, 삶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으로 이르는 소리, [하악하악]을 만나고 느닷없이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라니, 이건 또 뭔가,라고 하실 분이 있을게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여보자.
 
 그냥 인터넷에 '씨부리거나', '읊조리거나' 툭툭 던진 듯한 말들이 갖가지 민물고기들의 세밀화와 함께 등장하는 이 산문집은 그냥 한 번 읽고 던져두어도 아무런 부담없는 책처럼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내용들은 그런 수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라고 이 책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다. 비냄새가 섞여 있다. 나무들이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몸살을 앓고 있다. 세상은 오래전에 타락해 버렸고 낭만이 죽었다는 소문이 전염병처럼 떠돌고 있다. 그래도 지구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집필실에 틀어박혀 진부한 그리움을 한 아름 부둥켜안은 채 그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3' ) (13)
 
 역시 그답다. '꽃노털 옵하'(17)는 솔직히 이 책의 초입부터 이야기한다. '그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는 인터넷이라는 무색무취의 세상에 '감성의 씨앗을 파종'하며 젊은이들에게 잃어버리고, 잊고 있던, 혹은 채 모르고 있던 느낌들을 직설적으로 질러준다. 그리고 그 손가락질은 달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한다.
 
 재미있는 시리즈물도, 촌철살인의 잠언들도, 정신을 버쩍 깨우는 칼질같은 글들도 모두 그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그 소리들 틈새에서 나는 벌써 삼십년이 다 되어가는 그와의 만남을 떠올린다. 벼리고 벼른 [칼](1982)하나로 다가와 [들개](1981)처럼 나의 젊은날(1983년, 고2)을 물어뜯던 그의 글들을 이제는 하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찌른 비수로 나의 감성은 꽤나 충격을 받았던 느낌만은 생생하다. 그 상처들 속에서 나 역시 잘 자랐을 터이고... 이 책에는 그런 그의 감성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진실하면 모두가 詩입니다 깍두기의 팔뚝에 '차카게 살자'라고 새겨진 문신. 비록 맞춤법은 틀렸지만 새길 때의 그 숙연한 마음을 생각하면 깍두기도 그 순간은 시인입니다. ( '22' ) (31)
 
 하지만 솔직히 그의 이런 멋진 말조차 이제는 나에게 그때만큼의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왜? 나도 이제는 마흔을 넘어선, 어느정도 살아온, 나이인 것이다. 마흔, 불혹(不惑)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세파에 시달리다보니 왠만하여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옛 성인들도 알고 계셨다는 얘기 아닌가? 하여 이 책은 나같은 '중년'이 만나서 즐기기에는 조금 심심하다. 좀 더 자극적이고 '하악하악'한 것이라면 하던 일 제쳐두고 더 깊이 덤벼들겠지만 말이다. 하아하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진실을 못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진실을 보고도 개인적 이득에 눈이 멀어서 그것을 외면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이 죄일 뿐이다. ( '28' ) (37)
 
 하지만 위와 같은 손가락질에는 조금 '뜨끔'해지기도 한다. 하여 이 책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만나본다면 더 좋을 그런 책이다. 지은이가 이야기한 '그대'라는 대상도 인터넷을 종횡무진 누비는 누리꾼들, 아마도 당연히 젊은이일, 그들인 것이다. 그들이, 그대들이 이 이야기들 듣고 누리고 즐기고 공유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옵하'가 바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책을 보며 웃다가, '뜨끔'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훌쩍 책장을 다 넘겨 버린다. 어느새…. 선문답의 화두같은 그의 말들을 따라가다 욕도 얻어 먹고 같이 욕도 하며 차근차근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고개를 돌리니 그제서야 화가 정태련의 우리 민물고기 세밀화가 눈에 들어온다. 비슷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물고기들, 모양은 커녕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민물고기들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색다른 체험이다. 사진보다 더 정감이가는 세밀한 그림이라니….그리는 분의 노고가 오롯이 전해져 온다. 마지막에 여섯 쪽으로 총정리된 "이 책에 담긴 모든 민물고기들"(254~259)의 그림들은 참으로 고마울따름이다. 아마도 이 글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도 이 민물고기들이 살아가는 까닭과도 닮아 있으리라. 조용하게 자신의 몫을 감내하며 살아감의 소중함같은 그런 것 말이다.
 
 자, 그럼 이제 나의 분탕질을 갈무리 하여 보자. 처음 이외수라는 작가를 만나시는 분, 소설도 복잡한 것도 싫다, 좀 더 쉽고 간단한 것을 찾으시는 분들, 그냥 그의 손가락질을 따라가며 바라보고 이야기듣고 오시라. 그러면 동네 한바퀴를 그냥 수월하게 돌아본 기분을 느낄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책이지만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권하고픈 이 책. 물론 '꽃노털 옵하'께서는 이리 말씀하시리라. '괜찮네, 그냥 니들 알아서 즐쳐드셈' 이라고 하시겠지만.....
 
 젊은이여. 인생이라는 여행길은 멀고도 험난하니. 그대 배낭 속을 한번 들여다보라.  욕망은 그대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소망은 그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법.  젊었을 때부터 배낭 속에 들어 있는 잡다한 욕망들을 모조리 내던져버리고 오로지 소망을 담은 큰 그릇 하나만을 간직하지 않으면 그대는 한 고개를 넘기도 전에 주저앉고 말리라. 하악하악. ( '148' ) (151)
 
 

2009.2.12. 밤, 선생님, 곱게 늙으셨더군요.

              지난 "일밤"에서 말입니다.^^*
 
들풀처럼
*2009-03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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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2-1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좋게 읽었습니다. 어떻게 글 몇 자 되지도 않는데
그토록 해악과 재기가 넘치는지...낙서 같기도하고 아폴리즘 같기도 하고.^^

들풀처럼 2009-02-13 11:35   좋아요 0 | URL
네...저도 그리 생각하였답니다..ㅎㅎ
반갑습니다.^^*
 
히스토리아 대논쟁 1 - 도덕 & 지식인 히스토리아 대논쟁 1
박홍순 글.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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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여러모로 반갑고 기쁜, 그런 책이다. 먼저 "히스토리아 대논쟁"이라는 거창한 제목에 걸맞는 논쟁의 대담함과 스케일이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논점을 놓치지 않는 논의의 전개는 전적으로 오랜 세월을 현장에서 살아온 지은이의 경력이 적잖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 1권인 이 책,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가 격돌을 하고 '사르트르''리오타르'가 맞붙는다. 
 
 이러한 맞붙임만으로도 '어허, 대단한데'라고 생각할 수 있을 터인데 그들의 실제 사상과 논지들이 핵심을 잘 갈무리하며 펼쳐진다. 논쟁의 마무리에는 두 논자의 실제 저작물이 가려뽑아져 소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도 이 책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얼마만큼 이 논쟁들을 즐길 수 있느냐는 사전지식의 유무에 따라 조금은 좌우되겠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논지들을 얇은 - 두 논쟁에 겨우 200여쪽이니 한 논쟁당 100여쪽이라는 이야기이다.- 쪽 수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재미나게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갖는 큰 장점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비록 시리즈 1차분에 해당하는 3권의 책이 나왔지만 이 책들만으로도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한 개인이 각각의 논쟁들에 대하여 속속들이 깨우치고 이해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중간조정자, '박쌤'의 역할을 지은이는 그 명성에 걸맞게 잘 해내고 있다. 그러니 얼치기로 알던 이야기일지라도 우리들은 그냥 부담없이 따라나서면 되는 것이다. 이번 논쟁의 상대자가 '소크라테스'이든, '사르트르'이든 말이다. 자, 그럼 어설프게나마 이번에 다시 만난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3권이 시리즈중 이 책을 먼저 집어든 계기는 '사르트르'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나는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만났었고 귀를 기울였고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지식인은 '영원한 자기 비판이 있어야 한다',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또한 철저하게 연대를 맺어야 한다' ('원문읽기', 사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옮김) (196) 는 그의 말에 감명 혹은 소명의식을 부여받았다고나 할까? 1980년대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지던.... 
 
 그런데 그 시대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우리들을 지식인이라 여기도록 만들었던 그 모든 환경들은 이제 어떻게 변하였나? 이제 그들은, 우리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다. 그는 보편적 주체와 동일시될 필요도 없고, 창조라는 책임을 지기 위해서 인간 공동체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원문읽기',리오타르,[지식인의 종언]에서, 옮김) (201) 어, 그래..사실 나는 리오타르라는 이름을 이 책에서 처음 듣는다. 
 
 하지만 뭐, 어때. 내가 궁금한 것은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지금, 이 곳에서 어떻게 변해가고, 달라지고, 나아가고 있는지이지, 어떤 말을 어떤 이가 했는지를 외우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럼 없이 이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부딪혔다. 마치 20여년전의 그날처럼….
 
 그리고 이 책의 장점이 또 하나 나타나는데 논쟁의 고비에 "지식 넓히기"라는 별도의 심화 학습의 터가 펼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진행된 논쟁들을 정리도 하고 그 논쟁의 역사적 배경까지 살펴보게 된다. 어떻게? 지은이의 자상한 설명으로. 하여 '덕'과 관련한 두 철인의 논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한 방에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소트라테스의 윤리관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이중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덕(德)을 곧 지(知)로 바라본 소크라테스의 관점은 그 이전까지 그리스 철학을 지배하던 자연철학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지식 넓히기 1"에서 ) (37)
 
 윤리학의 측면에서 그(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역할과 함께 실천 및 습관화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악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든 덕은 참된 앎에서 나온다고 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점을 수정하고, 현실 속에서 참다운 존재를 찾고자 도덕의 의미를 실천적인 측면으로 확장했다. ( "지식 넓히기 1"에서 ) (40)
 
 지행합일(知行合一)설로 요약되곤 하는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에서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행하려는 의지임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더 크다. 그리하여 1편에 해당하는 '안다는 것과 행한 다는 것의 구분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2편의 지식인 논쟁인, '이제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그 뜻 그대로 존재하느냐'는 물음과, 언뜻 다른 이야기같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마도 이 부분이 지은이가 이 두가지 논쟁을 한 권에 모아놓은 까닭이리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 옳고 그름을 떠나, 지은이가 이 시리즈물을 펴내며 희망한 '자신의 머리와 가슴으로 문제를 의식하고 분석하며 해결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독자적 사고를 하는' ( "책 머리에"에서 ) (5) 본보기일 것이다. 그래서 이만큼 온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앞으로도 한 걸음씩 더 나아갈테니까….
 
 나 역시 예전 같으면 단순히 그래, 그래서 누구 말이 옳다는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 책을 보았겠지만 이제는 조금은 달라져서 그래, 이 부분은 이러한 까닭으로 타당성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흔한 양비론으로 빠져드는 것은 당연히 경계하며 논쟁을 따라가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지적한 '거대이론'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르트르의 견해에 전반적으로, 아직도 동의한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도덕은 그 자체, '앎'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에도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는 오늘밤도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존재를 믿고 따라간다. 그래야 사람사는 재미가 있을 터이니....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고 실천을 이끄는 나침반일 뿐입니다. 현실과 실천에서 이론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해서 이론이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 오히려 이론은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검증받고, 어떤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수정을 해나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 사르트르 ) (160)
 
 

2009.2.11. 깊은 밤, 다시 듣는 사르트르의 이야기,

                  아직도 나를 두근거리게 합니다.
 
들풀처럼

*2009-036-02-08

 

 



*논어(論語)의 學而篇(학이편)

* 學而第一(학이제일) -

"子曰 學而時習之不亦說乎아.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공자에게 있어서의 학(學)이란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며

"미지의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다.

 

공자의 일생을 통해 추구된 학(學)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학문"이 아닌,

"禮(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로

통칭되는 육예(六藝)를 말한다.

 

그것은 문무의 구분이 전혀 없는 매우 실용적인 개념이다.

 

"習(습)"은 學과 병치되는 독립된 개념이다.

"習"(익힌다)이라는 것은, 學이 미지의 세계로의 던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천은 반드시 "때"(時)를 갖는다는 것이다.

 

문무가 통합된 六藝(육예)를 익히는 과정이란 반드시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가 書(서)·數(수)를 할 수는 있으나 射(사)·御(어)를 할 수는 없다. 장년이 되어도 여름의 맑은 날씨에 말달리고 활을 쏠 수는 있으나 추운 겨울날씨에 빙판에서 말달리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배움의 익힘이란 내 몸의 모든 상태에 따라 그 익힘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요(身中時), 또 계절의 형태에 따라(年中時), 또 하루 중에서 아침,점심,저녁에 따라(日中時) 익힘이 달라질 것이다. 때를 잘못 타서 배우고 익히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평생을 통해 때를 맞추어 끊임없이 정진하여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뜻이다. "不亦說乎(불역열호)"라 한 구문에서 "亦"의 뜻도, 딴 즐거움도 있는데 이것 "또한" 즐겁다는 식으로 새기면 안된다. 여기서 "亦"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고 남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강조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亦"이 아니라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구가하는 것이다.


[출처] 논어(論語)의 學而篇(학이편) : "도올 김용옥" 해설을 옮겨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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