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대논쟁 1 - 도덕 & 지식인 히스토리아 대논쟁 1
박홍순 글.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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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여러모로 반갑고 기쁜, 그런 책이다. 먼저 "히스토리아 대논쟁"이라는 거창한 제목에 걸맞는 논쟁의 대담함과 스케일이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논점을 놓치지 않는 논의의 전개는 전적으로 오랜 세월을 현장에서 살아온 지은이의 경력이 적잖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 1권인 이 책,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가 격돌을 하고 '사르트르''리오타르'가 맞붙는다. 
 
 이러한 맞붙임만으로도 '어허, 대단한데'라고 생각할 수 있을 터인데 그들의 실제 사상과 논지들이 핵심을 잘 갈무리하며 펼쳐진다. 논쟁의 마무리에는 두 논자의 실제 저작물이 가려뽑아져 소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도 이 책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얼마만큼 이 논쟁들을 즐길 수 있느냐는 사전지식의 유무에 따라 조금은 좌우되겠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논지들을 얇은 - 두 논쟁에 겨우 200여쪽이니 한 논쟁당 100여쪽이라는 이야기이다.- 쪽 수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재미나게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갖는 큰 장점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비록 시리즈 1차분에 해당하는 3권의 책이 나왔지만 이 책들만으로도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한 개인이 각각의 논쟁들에 대하여 속속들이 깨우치고 이해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중간조정자, '박쌤'의 역할을 지은이는 그 명성에 걸맞게 잘 해내고 있다. 그러니 얼치기로 알던 이야기일지라도 우리들은 그냥 부담없이 따라나서면 되는 것이다. 이번 논쟁의 상대자가 '소크라테스'이든, '사르트르'이든 말이다. 자, 그럼 어설프게나마 이번에 다시 만난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3권이 시리즈중 이 책을 먼저 집어든 계기는 '사르트르'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나는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만났었고 귀를 기울였고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지식인은 '영원한 자기 비판이 있어야 한다',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또한 철저하게 연대를 맺어야 한다' ('원문읽기', 사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옮김) (196) 는 그의 말에 감명 혹은 소명의식을 부여받았다고나 할까? 1980년대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지던.... 
 
 그런데 그 시대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우리들을 지식인이라 여기도록 만들었던 그 모든 환경들은 이제 어떻게 변하였나? 이제 그들은, 우리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다. 그는 보편적 주체와 동일시될 필요도 없고, 창조라는 책임을 지기 위해서 인간 공동체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원문읽기',리오타르,[지식인의 종언]에서, 옮김) (201) 어, 그래..사실 나는 리오타르라는 이름을 이 책에서 처음 듣는다. 
 
 하지만 뭐, 어때. 내가 궁금한 것은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지금, 이 곳에서 어떻게 변해가고, 달라지고, 나아가고 있는지이지, 어떤 말을 어떤 이가 했는지를 외우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럼 없이 이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부딪혔다. 마치 20여년전의 그날처럼….
 
 그리고 이 책의 장점이 또 하나 나타나는데 논쟁의 고비에 "지식 넓히기"라는 별도의 심화 학습의 터가 펼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진행된 논쟁들을 정리도 하고 그 논쟁의 역사적 배경까지 살펴보게 된다. 어떻게? 지은이의 자상한 설명으로. 하여 '덕'과 관련한 두 철인의 논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한 방에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소트라테스의 윤리관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이중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덕(德)을 곧 지(知)로 바라본 소크라테스의 관점은 그 이전까지 그리스 철학을 지배하던 자연철학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지식 넓히기 1"에서 ) (37)
 
 윤리학의 측면에서 그(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역할과 함께 실천 및 습관화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악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든 덕은 참된 앎에서 나온다고 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점을 수정하고, 현실 속에서 참다운 존재를 찾고자 도덕의 의미를 실천적인 측면으로 확장했다. ( "지식 넓히기 1"에서 ) (40)
 
 지행합일(知行合一)설로 요약되곤 하는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에서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행하려는 의지임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더 크다. 그리하여 1편에 해당하는 '안다는 것과 행한 다는 것의 구분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2편의 지식인 논쟁인, '이제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그 뜻 그대로 존재하느냐'는 물음과, 언뜻 다른 이야기같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마도 이 부분이 지은이가 이 두가지 논쟁을 한 권에 모아놓은 까닭이리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 옳고 그름을 떠나, 지은이가 이 시리즈물을 펴내며 희망한 '자신의 머리와 가슴으로 문제를 의식하고 분석하며 해결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독자적 사고를 하는' ( "책 머리에"에서 ) (5) 본보기일 것이다. 그래서 이만큼 온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앞으로도 한 걸음씩 더 나아갈테니까….
 
 나 역시 예전 같으면 단순히 그래, 그래서 누구 말이 옳다는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 책을 보았겠지만 이제는 조금은 달라져서 그래, 이 부분은 이러한 까닭으로 타당성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흔한 양비론으로 빠져드는 것은 당연히 경계하며 논쟁을 따라가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지적한 '거대이론'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르트르의 견해에 전반적으로, 아직도 동의한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도덕은 그 자체, '앎'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의지'에도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는 오늘밤도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존재를 믿고 따라간다. 그래야 사람사는 재미가 있을 터이니....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고 실천을 이끄는 나침반일 뿐입니다. 현실과 실천에서 이론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해서 이론이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 오히려 이론은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검증받고, 어떤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수정을 해나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 사르트르 ) (160)
 
 

2009.2.11. 깊은 밤, 다시 듣는 사르트르의 이야기,

                  아직도 나를 두근거리게 합니다.
 
들풀처럼

*2009-036-02-08

 

 



*논어(論語)의 學而篇(학이편)

* 學而第一(학이제일) -

"子曰 學而時習之不亦說乎아.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공자에게 있어서의 학(學)이란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며

"미지의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다.

 

공자의 일생을 통해 추구된 학(學)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학문"이 아닌,

"禮(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로

통칭되는 육예(六藝)를 말한다.

 

그것은 문무의 구분이 전혀 없는 매우 실용적인 개념이다.

 

"習(습)"은 學과 병치되는 독립된 개념이다.

"習"(익힌다)이라는 것은, 學이 미지의 세계로의 던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천은 반드시 "때"(時)를 갖는다는 것이다.

 

문무가 통합된 六藝(육예)를 익히는 과정이란 반드시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가 書(서)·數(수)를 할 수는 있으나 射(사)·御(어)를 할 수는 없다. 장년이 되어도 여름의 맑은 날씨에 말달리고 활을 쏠 수는 있으나 추운 겨울날씨에 빙판에서 말달리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배움의 익힘이란 내 몸의 모든 상태에 따라 그 익힘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요(身中時), 또 계절의 형태에 따라(年中時), 또 하루 중에서 아침,점심,저녁에 따라(日中時) 익힘이 달라질 것이다. 때를 잘못 타서 배우고 익히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평생을 통해 때를 맞추어 끊임없이 정진하여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뜻이다. "不亦說乎(불역열호)"라 한 구문에서 "亦"의 뜻도, 딴 즐거움도 있는데 이것 "또한" 즐겁다는 식으로 새기면 안된다. 여기서 "亦"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고 남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강조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亦"이 아니라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구가하는 것이다.


[출처] 논어(論語)의 學而篇(학이편) : "도올 김용옥" 해설을 옮겨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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