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엄마 - 거의 행복한 어느 가족 이야기
무리엘 비야누에바 페라르나우 지음, 배상희 옮김 / 낭기열라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소재로 삼아 대화를 하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떠올려보면, 나는 내 지인들 중 아주 소수의 사람들과만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내가 더 개방적이어서도 아니고, 그네들이 더 폐쇄적이어서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분위기와 타이밍을 만들기 어려운 지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최근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합의법을 발의하였지만 금지법 또한 발의되었고, 그것이 통과되었다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논쟁 자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트랜스젠더의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주는 일조차도 얼마나 시끄러웠는가. 그네가 결혼을 한다고 할 때도 시끄러웠고, 입양 이야기가 나오자 또 시끄러워졌더랬다.

  작가가 자란 시대는 아마, 동성애는 병이고, 동성애자들이 이룬 가정은 불행하다고 믿고 있는 사회였을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 여기는 그때 그 곳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래도,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우리나라 청소년 소설 창작물에서 '동성애'를 다룬 것이 내가 읽은 것만해도 벌써 장편 하나, 단편 하나이다. 이경화님의 '나'가 성 정체성에 고민하는 청소년 이야기를 다뤘다면, 창비에서 내놓은 단편집 '라일락 피면'에 수록되어 있는 오진원님의 '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에서는 게이인 아버지와 그의 애인을 바라보는 딸의 시선에서 그려진 '가족'과 '사랑'과 '선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청소년기에 열린 시야를 갖는다는 것, 열린 마음을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동성애자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입양하고, 가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거의 행복한 어느 가족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우리는, 이 이야기가 '거의 행복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읽는다. 내용도 시간을 역행한다. 가장 기다리던 두 엄마의 결혼식부터, 두 엄마가 서로 만나서 남은 평생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까지. 추보식 구성이 익숙한 사람은 거꾸로 읽어도 좋다,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으니- 읽는 순서와 방법에 너무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좋다. 그만큼 내용도, 문장도, 구성도 빡빡하지 않고 촘촘하지 않으니 느긋하게 마음을 열고 읽자.
  그리고, 일기장처럼 펼쳐진 어느 날, 어느 순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저, 이 가족의 행복하고 따뜻한 기운을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5월 국제도서전 당시, 으레 당연히 들르던 창비에서 에디터가 '추천'을 연발하였던 작품. 뭐, 그럼에도 그때는 다른 책을 선택하였더랬는데, 올 여름, 정기구독하고 있는 창비어린이의 구독 기간을 연장하면서 선물로 받았고, 그리고 8월이 다 가버린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었다. 
  결론은- 그 때 그 추천 안 받아들여서 미안해요,랄까. 어우- 간만에 해피엔딩인 소설 읽으면서 코끝이 찌잉-했다.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가 미묘하게 맞물리면서, 지금 일어나는 이 일의 이유를 과거의 사건이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리멸렬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저 사건을 툭 던져놓고 독자들 입에서 탄성이 나오도록 한다. 그만큼 이 사건들은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사건은 치밀하고, 문체는 건조하지만 가독성도 최고, 흡입력도 최고인 수작이다.

  요즘 계속 번역물만 읽고 있는데, 장르가 장르다보니 듣보잡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좀 많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교열 엉망이라 읽으면서 비명 지르는 일이 비일비재인데, 이 책, 그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줘도 좋을 듯하다. 게다가, 해설에서 보자니 작가의 문체가 '건조하지만 유머러스한'이라고 하던데-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그 두 가지만 놓고 본다면, 번역자가 작가 문체를 고스란히 살렸다고 말해도 모자라지 않다. 짧고 툭툭 내뱉는듯한 이 건조한 문체에서 터지는 웃음을 잇새에 물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최악의 상황에 놓인 주인공을 동정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저 운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툴툴대는 주인공에게 오히려 피식대도록 만든다. 이 힘이 5대를 내려오던 '저주'를 끝내도록 만드는 힘이 아닐까.

  소년원에서 부당한 노동을 하면서 인권이 바닥에 떨어진 최악의 상황의 아이들이 성장하고 괴로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결국 '행동력'이라는 것도 생각해보게 하는 문제이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인권'의 문제는 비단 '소년원의 문제아'뿐 아니라, 인종에 대해서도, 권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소설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마땅히 '추천' 받을만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월 26일 하멜른
케이스 매퀸.애덤 매퀸 지음, 이지오 옮김, 오석균 감수 / 가치창조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문에 이 책이 소개되었을 때, 내 사랑 하멜른이 배경이라니 사야지,하다 잊어버리고 국제도서전에 가서야 구입했는데-(덕분에 엽서도 받았지만;) 읽은 건 8월이라니 좀, 안습이다. 그래도, 하멜른 가기 전에 반드시 다 읽고 가리라, 마음 먹었던 건 실행하였으니 다행이랄까.

  '1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뤼네부르크 사본에 처음 등장한다. 그 내용은 "서기 1284년 6월 26일,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의 축일인 이 날, 다색 옷을 입은 한 피리 연주자가 하멜른에서 태어난 130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쾨펜 지역의 칼바리로 떠났다"는 것이다. ...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뼈대가 만들어지고 살이 붙으면서 이 사건은 전설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초반에 마침내 그림 형제에 의해 구체적인 윤곽이 만들어진다.' 

  해설에 있는 이 내용을 읽고, 이 책 리뷰를 쓰기 전에 원본이나 다시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그림형제 동화전집을 꺼내들었는데- 좌절해버렸다. 그림형제가 출판한 '동화전집'에 수록된 210편의 이야기 중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없다. '독일 신화'에서 찾아야 하는 건지 대체 어디에 수록이 되어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여러 문헌과 정황상, 그림 형제가 수집하여 정리해놓은 건 사실인 것 같으므로 그냥 '그림 동화'에 포함시켜 버릴란다;

  줄거리는 사실, 민담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큰 뼈대는 다르지 않다. '다색 옷을 입은 피리 연주자'가 하멜른에 와서 취를 퇴치하고 그 후의 상황까지의 이야기인데, 그 피리 연주자가 왜 피리 연주자가 되었는지가 1장에 나오고, 그 후부터는 1284년 8월 22일부터 8월 26일까지의 사건이 치밀하고 촘촘하게 서술되고 있다. 피리 연주자가 왜 하멜른에 오게 되었는지, 하멜른 사람들이 피리 연주자를 왜 배신하였는지, 어째서 저주를 내리게 되었는지,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지- 끝까지 읽어내야만 아아-하는 탄성을 쏟아낼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픽션,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우리나라로 치면 '퓨전 사극'쯤 되는 걸까-) 추리소설, 내지는 마법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니 꽤 재미있었다.(오타는 그냥 좀 눈 감아주기로 했다. 한 두 개도 아니고 이건 뭐..;)
  '피리를 분다'는 행위로 동물을 조종할 수도 있고, 상대의 독을 내 몸으로 옮겨올 수도 있고,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다.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도 있고(이건 음악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행동 역시 조종할 수가 있다. 이런 중세 특유의 마법과도 같은 부분에서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떠올린 건 조금 억지일까. (물론, 유리알 연주가 어떤 마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있어서 '유리알 유희' 자체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마법과도 같았으니 뭐, 나에게만 그렇다고 치자.)
  요하네스가 입은 다색 의상의 색, 빨강과 노랑은 각각 '정의'와 '자비'를 의미한다. 얼핏 보면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신념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요하네스는 목숨을 걸어가며 피리를 분다.(그림 동화 중 '충신 요하네스'의 이름과 같은 건 그냥 우연일까-)
  이 소설 이면의 이야기는 아마, 요하네스, 클라라, 안셀름 모두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이 싸움을 시작하고 또 키우게 된 것일 게다. 농노이면서 무력하지만 인정하려들지 않아 가족을 고생시킨 아버지, 시장이면서 무력하여 시의회에게 속고 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아버지, 농노에게 자신의 아들을 낳았지만 인정하지 않았으며 폭압으로 농노를 괴롭히고 있는 아버지.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혹은 벗어나기 위해 세 아이들은 피리를 불고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이야기는, 해피엔드일까. 쥐떼로부터 하멜른을 구했고, 요하네스는 스승악사가 되었고, 사랑도 일도 탄탄대로일테지만, 아이들은 사라졌다. 법 앞에 심판 받아야 할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도망쳤다. 해피엔드일까. 

  두께나 크기에 비해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 좀 저어되지만,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고 있는 어두침침한 삽화도 마음에 들었고, 내용도 썩 불편하지 않았다.

덧, 별 세 개 반을 주고 싶은데, 알라딘은 반 개는 정할 수 없다. 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코와 소름마법사 2
발터 뫼르스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로써 발터 뫼르스의 작품이 세 번째이다. 리뷰 안 쓰고 넘어간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은 살짜쿵 넘기고; 처음, '꿈꾸는 책들의 도시' 1권을 읽을 때만해도 이 작가 스타일이 도무지 읽히질 않아서 고생했더랬다. 그랬던 것이 2권을 읽으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은 술술 읽혔고, 이번 책은 그보다 더 빨리 읽혔다.(역자가 바뀌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두행숙씨가,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과 이 책은 이광일씨가 번역을 하였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가 차모니아로 들어가는 입문서였다면, 그 뒤에 나온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과 이 책은 어느 특정 지역의 어떤 인물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에코와 소름마법사'는 발터 뫼르스가 아니라 '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주인공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작품을 번역하여 쓴 책을 표방하고 있으니, 이 곳이 이후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까. 전작들과 비교를 하자면, '꿈꾸는 책들의 도시'보다는 '루모의 기적'과 닮아 있다고 말해야 겠다. 그러니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만큼 재미있기는 해도 '꿈꾸는 책들의 도시'만큼 감동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플롯도, 캐릭터도, 차모니아도, 여전히 재미있다. 
  방대한 모험 이야기이며, 일종의 영웅 소설과도 같은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도 재미있지만, 코양이 '에코'가 살아남기 위해 바둥대는 그 처절하고 소소하기까지 한 생존일기도 무시할 수 없게 재미있다.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사건들은 정말 처절하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들어야 하는데, 에코가 만들어내는 사건들은 어쩐지 좀 아기자기한 느낌이 든다.(책 표지에 있는 카피,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 '깜찍한 모험' 그 자체인듯.) 그래도, 시종일관 이 코양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고, 에코를 죽이려는 소름마법사마저 때때로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서 갸웃거리게 만든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다 읽을 즈음에는 눈시울이 뜨뜻해져 있었는데, '루모'도 그렇고 '에코'도 그렇고,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모험을 끝냈을 때의 홀가분함이 있었고, 주인공에게 벌어진 일말의 비극이 사실은 그다지 큰 비극이 아니라는 점에서 '행복해짐'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거국적 사명감이 아닌, 소소한 일상을 되찾은 점에서, 만족이라고 해야할까.

  발터 뫼르스 특유의 장황한 판타지 세계에 대한 설명은 이제 익숙해져서 읽는데 전혀 무리가 없고, 그로테스크하고 전혀 예쁘지 않은 펜그림은 원래부터 좋아했고, 어이없는 부분에서 튀어나오는 오타는 그닥 비문이 나오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그래도 첫 페이지에서 '발터 뫼르스가 차모니아어에서 번역하고 삽화를 그리다'는 이왕이면 '차모니아어를'이라고 해줬으면 좋잖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흑 동화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방금, 책 뒤편에 적힌 출판사 블로그에 다녀오는 길이다. 너무 기본적인 단어에 오타가 나서- 잃다,와 오싹한,정도는 애교지 뭐. 문장 읽다 폭발해버린 '심령탐정 야쿠모'는 결국 5권이 나왔는데도 아직 4권을 끝내질 못한 걸. 
 
  거두절미하고, 취향이다.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하고, 기이하다. 출판사 블로그에 가보니, 작가의 성향이 '다크'와 '퓨어'로 갈린다는 것 같다. 이 책은 '다크' 계열. 그리고 나는, 이 작가의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와 'GOTH'도 살 의향이 있다. 
  뭐, 작가가 78년 생이라는 거, 우리나라 나이로 열 일곱에 데뷔했다는 것 등 빈정상하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장황한 스토리에 비해 결말에서 주인공의 심경 변화가 다소 허무하다는 것도 잊자. 이 소설은 그저 '왜?'와 '어째서?'를 살포시 접고 읽으면- 제법 찌르르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 왜 살인을 하는 거지? 기억을 잃은 내가 잃기 전과 지금의 나 사이에서 괴리를 느꼈다면 어째서 기억을 찾은 나와 희미한 기억 속의 나 사이에서는 고통스럽지 않은거지? 상처가 아물면서 죽어버리는 것은 평생을 살아갈 생명 에너지를 치유하는데 써버렸기 때문일까? 상처가 아문 나미는 그 에너지를 다 쓴게 아닌걸까? 죽지 않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거지? 
 
  제목인 '암흑 동화'는  주인공이 쓰는 글에서 따온 것. 주인공이라고 해야할지. 이 사람의 본명이 밝혀지는 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니까. 어쨌든, 생명과 신과 그 외 복잡한 것들은 묻어두고라도 살아있는 것들, 특히 신체의 '변형'에 대한 끝없는 상상력을 읽을 수 있어 그 또한 즐거웠다.
  줄거리 이야기를 후배에게 들려주었는데 그 아이가 갸우뚱 하여, 응 모티브는 영화 '아이' 같지,라고 선수를 쳤더랬는데, 눈을 이식 받고 유령을 본다,가 아니라 눈을 이식 받고 그 눈의 기억을 본다,가 맞다. 기억을 잃은 나미가 눈을 이식 받고 원래 주인의 기억을 보면서 그 사람이 되어간다고 느끼는 것은 마치, 월광천녀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 책, 처음부터 끝까지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서서 읽든 앉아서 읽든, 시뻘건 표지에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봤다는 것. 여러모로 자극적인 책이었다.

 
덧, 나 이 작가, 삽화 그려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중증이야 이거 진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