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작가의 같은 출판사의 책.
<동사의 맛>을 먼저 내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는 뒤에 냈다.

둘 다 딱딱하게 문법만 말하면 재미없어서 소설인듯 소설아닌 이야기를 책 속에 녹아냈다.

나는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가 더 재미있었고 유용했다.
그런데 이 두 책 중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를 먼저 읽었는데 이 책 읽고는 문장에 틀린거 없나?하고 신경썼다면, <동사의 맛>을 읽고는 내가 쓰는 동사에 비슷한 다른 동사는 없나? 하고 궁금해진다.

‘노났다‘가 어렸을 때 막연히 사투리라고 여기고 점 점 사용 안했던 것처럼, 지금 내가 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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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맛 -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한국어 품사 교양서 시리즈 1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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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노났다‘ 라는 말을 더러 들었다. 지금은 이 말을 거의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나도 ‘나눴다‘라고 대부분 쓴다. ‘노났다‘가 사투리인줄 알았거든.
정말 그랬다니깐.

그런데 ‘노났다‘는 엄연히 표준어란다.
‘노느다‘는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눌때만 쓴다.
‘노나, 노느니, 노느는, 노는, 노늘, 노났다‘로 쓴다.

나누다‘의 당하는 말은 ‘나뉘다‘와 ‘나누어지다‘ 두 가지다.
‘나뉘어지다‘라고 쓸 때가 있는데, 어법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낱말을 몇 겹으로 접어 놓은 것처럼 보여 지나치다.(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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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한국사 : 근대편 쟁점 한국사
이기훈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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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한국사 근대편>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가로로 배운 기분이었다. 우리가 배우는 연대는 보통 세로로 표기한다. 그러니 가로로 배운다는 것은 같은 주제로 넓게 본다는 의미이다.
가령 식민지의 5장 젊은이들, 오늘의 젊은이들은 1910년대 젊은이라는 개념이 생긴 부분부터 1930년대까지 변화된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현시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일제강점기와 연결지어 살펴보았다.
그 부분은 7장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대가, 8장 잘못 낀 첫 단추, 일본군 ‘위안부‘ 이다.
알게 모르게 생활 깊숙히 들어와 있는 친일문제로 우리는 골머리를 썩고 있다.
단적인 예가 국정교과서 논란이다. 거기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는 친일청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우리는 일본강점기 시대를 멀지 않게 느끼고 있다. 일본강점기가 결국 먼 과거가 아니다. 일본강점기가 멀지 않다면 조선시대도 그다지 멀지 않다는 얘기다.
멀게만 느껴지는 과거사들이 결국 하나같이 연결되어 있음에 우리가 과거를 잊어서는 안되며 과거에서 현재를 살고 미래를 배울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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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군 ‘위안부‘ 동원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위안부‘ 동원은 1930년대 파시즘 시기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동원이 본격화 했던 1937~45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역사적 쟁점으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부상하고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고 문제를 보는 시각도 변화해왔다. ‘정신대‘ ‘종군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등 피해자를 지칭하는 용어도 변화해왔는데, 이는 진상규명의 진척 및 시각의 변화를 반영한다.

2. 일본군은 왜 군 위안소를 설치했던 것인가?
ㆍ‘위안부‘ 제도는 남성을 ‘총알받이‘로 만들기 위한 장치였고,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만듦으로써 일본은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ㆍ군 위안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공창제가 깊숙히 연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근대적 공창제에서의 창기는 그야말로 성을 매매하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근대적 공창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매매를 국가가 관리한다는 것이다.
공창제는 남성의 성욕을 자연스러운 생리작용으로 여기게 만들면서 성매매와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만들어냈다.

3. 그들이 부인하는 역사적 사실
ㆍ일본군 ‘위안부‘는 조선에서만 동원되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여러 국가의 여성들이 동원되었다. 심지어 백인도 있었다.
하지만 만 21세 미만의 미성년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조선에서 동원된 여성들이 매우 높았다. 이는 일본의 ‘위안부‘들이 대체로 21세 이상의 성매매 경험자였던 것과 다르다.
그 이유는 ‘추업 사용 목적 부녀 매매 단속에 관한 국제조약‘ 및 ‘부인 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은 두 조약을 비준했느나, 식민지는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ㆍ군 ‘위안부‘의 동원 방법으로는 군과 경찰에 의한 납치, 인신매매 등이 거론되지만, 사실은 취업사기가 굉장히 많았다. 취업사기나 인신매매가 많았다는 점에 대해 일본정부나 우익들은 ‘위안부‘동원이 군이 개입하여 강제로 행한 것이 아니라 업자들의 소행이며, 이것은 결국 성매매였다는 논리늘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군과 경찰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개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료와 증언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ㆍ군과 경찰은 업자들의 선정과 허가뿐만 아니라 ‘위안부‘의 이송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위안소는 부대를 따라 이동했고, 전쟁 말기에는 별도 시설도 없이 참호, 산속, 동굴 등에서 ‘위안부‘들은 성폭력을 강요받았다. 폭탄 파펀, 총알 등이 몸에 박혀 전후에까지 고통받는 피해자들이 많은 것도 대다수가 폭격이 쏟아지는 중에 군인들과 같이 전장에 있어야 했던 상황 때문이다.

ㆍ패전 후에는 집단학살의 대상이 되었고, 유기된 경우에는 현지인들에게 일본인으로 몰려 복수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점령지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여성들 중 고국으로 돌아오길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도 정조를 훼손한 자신은 결혼도 할 수 없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오랫동안 침묵한 이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포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말부터이다. 전후 40년 동안 이 문제는 수면 아래 묻혀 있다가 1980년대 민주화의 여파 속에서 활발해진 여성운동의 노력으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ㆍ순결 이데올로기라는 한국사회의 가부장성이 이 문제를 지체시켰다.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해온 한국사회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럽혀진 죄인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위안부‘ 피해는 개인적 수치일 뿐 구조적 폭력으로 인식될 수 없었던 것이다.

5. 거꾸로 가는 과거사 청산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
ㆍ일본 국가가 책임지고 배상하라는 것
ㆍ재발 방지를 위해 이 내용을 교과서에 실어서 교육시키라는 것
ㆍ관련자들을 처벌하라는 것

그런데 일본의 우경화 시점부터 이런 주장은 받아들여지기는커녕 기존의 합의한 것마저 거꾸로 되돌리고 있다.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의 삭제에도 모자라 소녀상을 없애라는 것은 군 ‘위안부‘ 문제를 역사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것이지 후대에게 알리고 교육시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태도는 아니다.


이번 장은 영화 <귀향>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처음 주인공은 강제로 끌려갔지만, 주위에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자리를 준다고 해서 끌려온 아이들도 있었다.
영화에서 소개 된 위안소는 군이 설치했지만 경영은 민간업진들에게 위탁하는 군 전용 위안소이다. 이로 인해 위안소에 있는 여성들은 돈을 벌 수도 없는 지경일뿐만 아니라 성병이 걸려도 죽음으로 내몰리고, 전쟁이 끝나도 집단학살의 대상이었다.

1990년 ‘위안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활동으로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지만 당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 부분 또한 영화에서 잘 보여준다. 어려운 발걸음으로 주민센터에 갔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장면이나 알아듣지 못하는 공무원이며, 수근거림이 있던 분위기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일본이 무조건 잘못했지만, 지금 할머니들은 일본이 아니라 조국과 싸우고 있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요구를 듣지않고 마음대로 합의한 조국때문에 더 힘겨운 합의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할머니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바뀔 때라고 생각한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페미니즘은 거친것이 아니라 진정한 평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평등하지 않았던 때의 할머니들에게 우리의 관심이 그들을 돕는 작은 한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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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대기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0년이 넘었지만 오늘날까지 식민지배는 현재진행형이다.
단적인 예로, 박근혜 정권은 2013년 식민지배와 친일파를 미화하는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킨 것도 모자라 준 국정교과서로 밀어붙이려고 했다.
2014년에는 식민사관에 절어 있는 문창극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고, 이인호를 국영방송국 KBS 이사장으로 임명하고 역사왜곡 망언을 계속 늘어놓고 있다.

아직도 친일청산 문제에 직면하게 된데에는 해방직후에서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친일청산이 실패로 끝난데 있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청산을 방해하면서 대통령 장기집권을 꿈꿨고, 미국도 우리나라 개입을 위해 친일파를 이용했다. 친일을 넓게 보면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에 충성을 다한 충성심이 강한 집단이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이라는 우방국이 들어오자 다시 미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고, 미국은 이들을 이용하기에 적당했다. 그래서 친일청산의 실패로 친일파들은 기득권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박정희는 만주국의 신징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햐 친일군인 출신이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있다.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가 독재권력을 떠받치는 핵심이었다. 민주주의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노골적으로 친일파를 미화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2015년 법무부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린다고 만든 청소년용 동영상이 대표적이다. 이 동영상에는 모두 10여 명의 독립운동은 일제로부터 충성심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귀족원 의원이 되기도 한, 말 그대로 거물급 친일파였다. 그런 윤치호를 김구, 윤봉길과 같은 급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청소년에게 배포하려고 한 것이 대한민국 ‘법질서 확립‘의 주무부서인 법무부였다.


친일청산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아직도 우리 사회 내부에 친일청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는 친일청산이 빨갱이의 국론분열 조장행위라고 몰아붙이는 세력이 있는 한 친일청산은 완결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는 미래도 없다. 과거를 기억하고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려고 하는 이유는 과거 자체를 바꾸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를 위한 역사적 교훈을 얻는 데 기억과 청산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이는 친일청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뒤늦은 친일청산은 지난 시절 망각되었던 친일 문제를 다시 복원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기억하고 청산하기 위한 실마리를 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친일청산의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반민특위 와해 친일세력과 독재정권의 관련성을 밝히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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