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자. 천 오백 년을 훌쩍 거스르는 타임머신을 타고. 이 황홀한 과거 여행을 주선하는 이는 다름 아닌 <미실>과 <측천무후>이다. 아니 그것은 틀린 말이다. 김별아와 샨사라고 해야 옳다. 이 두 소설가로 인해 미실과 측천무후라는 걸출한 여걸을 만나게 됐으니 여행의 공은 마땅히 그들 몫이다.

  7세기 전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두 여성.

  일억원 고료의 국내 문학상을 거머쥔 <미실>이나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지지자를 끌어모은 <측천무후>는 분명 다른 소설이다. 그 진휘 여부로 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필사본 '화랑세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미실과, 사학계뿐만 아니라 영상업계에서도 제법 등장하는 측천무후. 전자는 화랑제도가 숨쉬고 있던 신라시대가 배경이고, 후자는 당나라 초기가 그 무대이다.

  문체에서도 두 작품은 차이가 난다. 우리글로 쓴 미실은 예스럽고 정갈한 문장이 적재적소에 적확하게 구사되고 있다. 고전에서 소재를 따와서 그런지 때론 장점 많은 그 문체들이 고삽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리 큰 단점이 될 수는 없었다. 불어로 발표된 것을 번역한 샨사의 측천무후는 그 담백하고 정갈한 면에서는 미실과 같으나 가끔씩 나타나는 몽환적 분위기는 독자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도 한다. 따라서 단단하고 정제된 문체라고 상찬하는 세계 언론에 그다지 동조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짚어낼 수 없는 번역문학의 한계 때문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 밴 공통점이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선, 실재했던 두 여걸의 이야기를 여성주의 입장에서 당당하게 이끈 점이 와닿는다. 미실과 측천무후는 본능에 충실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판에 박힌 듯한 요부나 비운의 주인공 역할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운명과 맞섰고, 거침없이 내달렸으며, 끝내 승리했다. 그 승리의 정점에서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야 말았다.

  그간 역사의 모든 주체는 남성이었다. 권력과 야망은 그들의 몫이었고, 복종과 굴종은 여성의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적 역사관에서 본다면 미실과 측천무후는 요부이자, 책략자요, 모사꾼이며 잔인한 모성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하지만 소설에서 그들은 당당한 열정과 솔직한 욕마응 숨기지 않은,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고자 했다.

  두 여인이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색공'의 형식디었다는 게 안타깝기는 하다. 성상납을 말하는 색공. 당시의 신분질서나 시대상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단순한 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라나 당이나 사정은 비슷했다.) 여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자발적이고도 고도한 정치적 행위였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

  누대의 왕과 왕실 남자들을 마음껏 휘둘렀던 미실과 측천무후. 그 둘은 남성중심의 질서에 모반을 꾀하고 스스로 중심이 되고자 했던 당찬 여성들이었다. 절대자로서의 고독들 안으로 잠재우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당돌한 갈망을 희구하던 주체적 삶의 선구자였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온당한 여성의 삶인가. 작은 것 하나에도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라면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이러한 근본적인 갈들 때문에 편두통이 따를지도 모른다.

  아직도 여성성에 대한 억압과 왜곡이 심심찮게 보이는 이 시대에 미실과 측천무후는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가게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여성상을 복원해낸 두 소설가의 다아나믹한 상상력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고대사를 사료의 한계 밖으로 끌어어 멋진 이야기로 윤색한 두 작가의 성지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은 심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음, 공경희 옮김 / 해냄 / 200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프라 윈프리의 게스트 하우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은 글을 쓸 확률이 높다. 비단 글쓰기 뿐이겠는가. 미술이든 음악이든 무릇 세상사와 밀접하지 않은 예술은 그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 해서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체험을 중요시한다.

 

 한데 진정한 글쟁이는 엉덩이가 질겨야 한다는 작가들의 충고를 추앙이라도 하듯,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하루 종일 의자나 소파에(더 진실하게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때가 많다. 직접 경험을 하기 위해 투사처럼 현장으로 나서지 않는 제 게으름을 탓하는 대신,  간접 경험도 경험이다, 는 배짱으로 케이블 티브 체널을 여기저기 돌려 보는 것이다.  왼종일 뮝기적거리면서(?) 얻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야 말로 간접 경험의 오롯한 소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이름하여 오프라 윈프리 쇼의 한 장면이다. 

 

  결혼을 앞두거나 남자를 사귀고 있는 고민녀들을 초대해 전문가가 상담을 해주는 장면이 눈에 띈다. 마침, 남자를 대하는 여성의 다양한 심리에 대해서 매우 궁금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이보다 더한 간접 체험은 없다. 쇼에 출연한 상담가는 꽤 현실감과 균형감이 있어 보인다.

 

  고뇌에 찬 여성 출연자들을 상담해주는 이는 의외로 남성이다.  한참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섹스 앤시티의 공동 작가 중 유일한 남자인 그렉 버렌트란다. 결혼 생활에 자신 없다고 말하는 마자, 언제나 할 일이 많은 남자, 이런 상대남을 만나는 여성들엑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이 책을 쓴 그렉 버튼의 속시원한 충고를 지켜보면서 나는, 바로 이거다 하고 박수를 쳤다. 비록 헐리웃 문화에 익숙한 충경이긴 하지만 우리의 남녀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적용시켜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날 밤 당장 책을 주문했다.

 

  주변에서도 이런 흔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갑이라는 여자 왈, 남편 될 사람과 공동명의로 신혼집을 등기하겠다고 했더니 시댁에서 파혼을 선언했어요.  남자 하나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데, 남자는 부모를 설득할 자신이 없나봐요. 끝내자네요. 어떡하면 좋아요?  을이라는 여자 왈, 제  약혼남은 진국이에요, 그야말로 진국!   절 잘 챙겨줄뿐더러, 뭐든지 솔선수범하죠. 일 처리도 깔끔하구요. 한데 술만 먹으면 폭력을 일삼아요. 그것 하나만 고치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만약, 두 고민녀 앞에 그렉 버렌트가 있었다면?  주저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여자는 환상을 가진다. 나이에 상관없이 주도권을 빼앗긴 쪽에서는 마음을 다친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 이 솔직대담한 카운슬러는 허구에 가득찬 여자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별 볼일 없는 상대에게 매달리는 헛똑똑이  여자들에게, 안절부절하며 헛된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바보 애인들에게 그렉 버렌트는 말한다. 여성들이여, 본질을 깨달아라. 제발 헛된 시간의 장난에 눈물 흘리지 말아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며, 나아가 얼마나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들인가를 깨치라고 충고한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이 명쾌한 대답을 얻기까지 여자들은(때론 남자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불편부당한 시간들을 견뎌냈을 것인가. 아픔이 진행되는 동안엔 어떠한 충고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더한 괴로움만 따를 뿐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렉 버튼의 충고를 눈치챈다.  사랑이 떠난 뒤에야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땐 이미 너무 늦었다.

 

  당당하고 멋진 삶을 꾸릴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여성들이여, 하잘 것 없는 상대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타인이 이끌어가는 삶에 이리저리 휘둘린 적은 없는가. 이런 우리의 연약한 인간성에 유쾌한 상담자 그렉 버튼은 다시금 호소한다.  -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탈 2008-06-11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고, 잡지 뒤에 실릴 글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별을 5개나 주셨네요 ~ ㅎ
 
에곤 실레 시공아트 12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15층짜리 아파트의 맨 위층에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이 말한다. 자신은 바깥 출입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닌데,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항상 15층에 멈춤 표시가 있더란다.  ' 그 집에 손님이 많이 오는 모양이죠?' 라고 말하는 이웃의 얼굴엔 불편한 끼가 역력하다. 당황스러웠다. 찔리는 게 없지 않았지만(논술 공부를 하러 몇몇이 드나들기는 한다.) 면전에서 무안을 당하니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실은 나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9층에 살 때 이런 문제로 시비거는 이웃이 없었으니 15층인들 무에 그리 다를까 싶었던 것이다. 소심한 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웃도 나름의 사정은 있을 것이다.

 
이중 자화상

  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이웃아주머니가 기왕에 나를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무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이웃의 불편을 헤아려 최대한 배려를 하려 애썼을 것이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한 '길들임'에 관한 단상이 떠오른다. 저번 동네에서는 서로의 존재가 용인되고 인정되는 '길들여짐'의 단계에 있었지만, 새로운 동네에서 그들에게 나는 낯선 국외자일 뿐이다. 서로 길들인 적 없는 관계에서 서로 상냥하게 배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게 바쁜 현대인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맨 위층에 살면서 엘리베이이터를 남보다 자주 사용하는 새 입주자라면 터줏대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관계에서는 1층이나 3층은 몰라도, 타인의 아까운 시간을 축내는 15층에서 자주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게 인간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생각하면 인간만큼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동물도 없다. 서로 길들여지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일단 길들여진 사이는 얼마만큼의 인간적, 사회적 모순이 있어도 그 관계는 매끄럽게 유지된다. 그러한 현상을 나는 인간 본능의 이중성에서 찾는다. 그날 저녁 에곤 실레의 '이중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표현주의 화가 중 뭉크나 클림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그림 세계는 여타 작가들 못지 않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중 인간이 부딪힐 수 있는 한계상황을 포착한 이중자화상을 들여다보면 인생 전반에 대한 그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림 속 실레는 두 개의 얼굴로 관객을 내려다본다. 경계와 호기심의 두 얼굴이 아래 위로 뺨을 맞대고 있다. 연필에다 약간의 수채화를 덧칠한 그의 이중자화상은 섬뜩하리만큼 이중적 인간 정서를  대변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힌다. 위쪽의 자화상은 호기심과 연민이 서린 눈빛이고, 아래쪽의 눈은 분노와 욕구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한 발   물러서는 경계와 두 발 다가서는 호기심의 눈을 가진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지불식간에 분열된 화가의 자아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관객들을 우롱하는 것만 같다. 두 개의 얼굴은 이 세상은 약간의 이완과 아주 많은 긴장이 필요한, 요지경 같은 곳이라 일깨워준다.  즉, 경계 없이 이완한 눈빛과 긴장하고 위태한 적의의 눈빛이 공존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해준다.

 

  아울러 모든 관계의 갈등은 서운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 눈빛은 가르쳐주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상대는 왜 이렇게 밖에 안 해줄까' ,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이는 왜 저렇게 생각할까', 사람마다 다르고, 그 다른 것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잠시 잠깐의 실수로 겉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도 치달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이 서운함의 정서를 극복하게 해주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실레의 이중 자화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중자화상을 제대로 깨치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일상이 보장될 수도 있으니까.  내 안에 숨 쉬는 이중 자화상을 잘 갈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뵈는 어떤 사람이 가르쳐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산은 아니다  (신경림, 산에 대하여)

  '슬그머니 빠져' 나온 산은 이제 고민하리라. 그 이웃에게 어떤 자화상을 그릴 것인가. 세상을 향한 경계와 호기심의 눈이 잘 조화된 그림이어야 하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1 - 개정판, 종합편,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 휴머니스트 교양을 읽는다 3
최병권.이정옥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 대입 수험생들이 철인삼종경기 출전자들에 비유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수험생들은 내신을 관리하고 수능을 준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논, 구술의 부담까지 떠안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웬만한 대학들의 입학사정에 맞추다보니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가 없다.

  특히, 논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학부모들을 사교육의 장으로 내모는데 일조를 한다. 정규과목에 편성되지 않아 그 실체가 모호한데다,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사고의 집적물을 글이나 말로써 표현해야  한다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사자인 학생들보다는 논술교육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세대인 학부모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할 수밖에 없다. 해서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논술학원에 드나든다.

  짬짬이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을 아는 지인들이 묻는다. 논술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학원에 보내야겠지요? 두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다. 그저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레 말할 뿐이다.  고작해야 '연습'이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여건 상 혼자 할 수 없다면 학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전혀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상식적이고도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고, 마음 한 구석엔 분노와 부러움과 자괴가 동시에 인다. 그것은 우리의 제도권 커리큘럼에는 전무한 논술교육에 대한 분노요, 교양인을 길러내는 선진국들의 논술 교육에 대한 부러움이요, 제대로 논술을 가르칠 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부끄러움이다.  학생들도 부담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부터 충분한 연습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창의적 사고의 확장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다. 

  프랑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 논술 시험을 소개한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부러움이 절로 인다. 그들이 말하는 평균적 교양은 우리가 보기에 지성인들의 철학적 경지를 말하는 것 같다. 도무지 고등학생으로서는 감히 탐색하지 못할 것 같은 주제들을 다양하게 접근한다.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는가, 노동은 욕구충족의 수단에 불과한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등의 질문이 입시문제라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고, 그것에 대한 다양하고 놀라운 답변들이 제시된다는 것도 더한 충격이다. 폭넓은 독서와 교양 교육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며 난해하기까지한 답변들이 즐비하다.

  그들에게 논술이나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교양적 차원의 논의이다. 생각하고 토론하고 논술하는 이러한 방식의 교육은 이미 나폴레옹시대부터 이어져왔다. 그러한 전통이 모여 프랑스인들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세계로 이끈 것은 아닌지.  그에 비해 따로 논술이나, 철학, 나아가 토론식 수업 한 번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외피만 빌려입은 논술교육이 제대로 자리잡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부족한 연습으로는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 옹골찬 알맹이에서는 한참 멀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논술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분위기이니, 언젠가는 앞선 그들처럼 우리네 교실 풍경에도 토론과 에세이가 난무하게 되는 걸 지켜보게 되지 않을까.  단지, 입시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평균적인 교양을 지탱해주는 수단으로서 논술이 대접받는 그 시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시멜로 이야기 마시멜로 이야기 1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글날이 엊그제였고, 소박하나마 한 때 한글 전용 운동을 한 전력이 있던 내가 이런 품위 없는 제목을 가져온 것에 대해 용서하시길. 출판계에 때 아닌 대리번역 의혹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더 나은 제목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백만 권 이상의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책 한 권이, 알려진 바와 다른 정보로 파문이 일고 있다. 한 일간지 칼럼의 의혹이 단서가 되어 시작된 이번 사태는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독자들에게는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출판사 측에서 해명자료를 내놓았지만 독자들로서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논란이 된 책은 내 책꽂이에도 얌전히 꽂혀있다. 아이들 책읽기 교재로 활용한 것이기에 남들보다는 많이 산 기억이 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일조를 한 셈이니 뒷맛이 씁쓸하기도 하다. 교훈과 감동이라는 어린이 독서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이 책은 비교적 유익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베스트셀러가 돼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의 목록에 이 책도 끼워두었다. 실제로, 누군가 어떤 책을 읽을까 물어오면, 이런 책만 피하면 된다고 말해버릴 정도였다. 

 

  나는 은근히 가르치려들고,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회적으로 동의를 구하는 책들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런 책들이 자기 계발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것도 의아했고, 어느 샌가 베스트셀러 상위를 달리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숫제,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로로 정착할 조짐까지 보이니 내 독서관에 대해 잠시 흔들리기까지 한다. 독자로서 새삼, 나는 까다로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백만 권 판매 신화의 주역은 마케팅이었는데, 그 매뉴얼은 유명인을 내세워 독자를 깨치는 것이었다. '제가 직접 번역했답니다. 당신의 교양을 높여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것입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우아하고 지적이며 세련되기까지 한 유명 아나운서를 번역자로 내세운 이런 방식은 분명 판매부수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대리번역이 아니라면 이 자체가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책 안 읽기로는 세계에서 거꾸로 순번을 세는 게 빠른, 야만적인 독서율을 자랑하는 우리네 독서시장에 이러한 기법은 불쏘시개 역할을 했으니, 문화를 사랑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출판사측에 감사패를 줘도 모자랄 일이다. 출판업이 자선사업도 아니데 상업적 이득을 도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한데 실은 전문 번역가에 의한 대리번역이었고(출판사측에서는 이중번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실제 번역가로 알려진 유명 아나운서는 홍보대사 역할을 했다니 번역자의 이미지나 명성만 믿고 책을 산 독자들로서는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 번역의 노고를 생각하며 역자 사인회(이 또한 해괴하다. 필자도 아닌 역자가 사인회를 여는 곳도 있는지.)에 참석해서 책을 산 사람들의 실망감은 어찌 또 보상할 것인가.

 

  하오나,

  이 사태를 보는 내 생각은 출판사나 번역 당사자들 못지 않게 독자들의 잘못도 크다도 본다.  대리번역을 일삼는 출판사의 행태도, 허영심에 물든 거짓 번역가의 소행도 결국은 독자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참에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이 아니라 좋은 책(좋은 말을 쓴 책이 아님을 강조한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는 물론 독자에게 달려있다. 좋은 책을 보는 눈이 커지면 허욕에 물든 출판 환경 때문에 분노할 독자는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세상에 좋은 책이 많아 즐겁고,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 나날이 절망한다. 저마다 즐기는 책이 다양하고, 사람마다 절망하는 작가가 다른 사회일수록 어느 한 책이 몰표로 밀리언셀러가 되는 일은 드물어지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베스트셀러가 이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모든 베스트셀러가 최고인 것은 아니다. 일찍이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데카르트 선생의 '삐딱선'미학을 신봉하는 의심많은 한 독자,  미심쩍게 등장하는 베스트셀러를 바라볼 때마다 이런 생각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