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지극히 낮으신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산책에서 출간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절판되어서 아쉬웠는데, 동일한 역자의 개정판이 1984BOOKS를 통해 출간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대표작인 이 책을 다시 구입해 읽을 수 있어서 좋고, 원제의 의미에 더 가깝게 <지극히 낮으신>으로 번역된 개정판의 제목이 마음에 든다.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삶을 감미로운 문장으로 그려낸 시와 같은 산문이다. 진리는 지극히 높은 곳이 아니라 지극히 낮은 곳에 있으며 진정한 기쁨은 충족이 아닌 결핍 가운데 있음을 드러내는 이 작은 책을 통해, 나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저자의 문장이 아니라 저자가 지닌 수도자의 마음에서 만났다.


  처음 읽었을 때도 좋아서 100자평을 남겼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며 재독할 때 더 좋은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읽으며 더 좋아지는 책은 많지 않아서, 인생을 살아가며 이 책을 가끔 한번씩 꺼내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라파엘 천사와 함께 떠난 어린 토비트의 여정,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개. 성경에 등장한 그 개와 같은 프란치스코의 삶을, 나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그와 같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까. 



교사는 자신이 책 속에서 찾은 말들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공기로 된 책 속의 말들을 배울 수는 없다. 우리는 거기서 때때로 상쾌함을 맛본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 세상이 끝난 뒤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 나는 너를 영원토록 사랑한다." 우리는 한 줄기 숨결과도 같은 이 말에 소스라치듯 놀란다. - P16

사실 성인(聖人)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스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성스러움이란 기쁨이다. 그것은 만물의 토대다. 모성애가 바로 이 만물의 토대를 떠받치는 무엇이다. - P29

"성성(聖性)은 유년기를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어른의 모습에서 어린아이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 영혼의 성장은 몸의 성장과는 반대로 이루어진다. 몸은 키가 자라면서 크는 반면, 영혼은 오만함을 잃으면서 커 간다. 성성은 성장의 법칙을 뒤집어 놓아, 어른이 꽃이라면 어린이가 열매다. - P47

감미로운 삶, 자기애. 이곳엔 ‘지극히 낮으신 분‘이 익명으로,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존재한다. 한 조각 하늘을 가르는 번개나 회개의 무덤에서 그분을 찾는 도덕주의자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 방식으로. - P55

그림자로 가득한 몇 마디 말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 하찮은 사건이 우리를 생명에 내어 주기도, 우리를 거기서 떼어 놓기도 한다. 하찮은 사건이 만사를 결정한다. - P67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어나 떠났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모두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어서는 순간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언어의 옷, 우정의 옷, 지혜의 옷은 잃어버렸고, 그들 모두 헐벗은 마음속에 무한을 받아들였습니다. - P85

일찍이 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그토록 철저히 말씀과 일치시킨 적이 없었다. 자신의 숨결을 그토록 철저히 하느님의 숨결과 하나 되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성서의 폭풍우 몰아치는 대목에선 그를 발견할 수 없으며, 그보다는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속삭이는 말들 속에 그가 있다. - P100

그는 자신의 몸을 ‘내 형제 당나귀‘라 부른다. 이것은 몸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것으로부터 초연해지는 방법이다. 어쨌거나 이 동반자와 함께 천국으로 가야 하니까. 참을성 없는 이 살덩이, 거추장스러운 욕구들과 함께. 자갈투성이인 가파른 길, 노새가 가는 이 길을 통해서만 영원한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 P115

예전의 소학교 아이들처럼 두 사람은 떨어져 있다. 그녀는 여자들 편에, 그는 남자들 편에. 외관도, 사는 장소도 다르다. 그러나 영혼의 끝없는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특별한 대화 상대를 찾아낸 기쁨으로 둘은 결합되어 있다. 그는, 그녀는, 모든 것을 듣는다. 침묵조차도. 침묵 속에서 스스로에게조차 할 수 없을 말까지도. 오라비와 누이. 그녀가 없었다면 땅 위에서 흐른 시간은 그저 시간에 불과했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 P128

어린아이의 마음은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태초에서 다시 출발해 사랑의 첫발을 떼어 놓는다. 이성적인 사람은 축적되고, 쌓이고, 구축된 사람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런 합산의 결과물인 사람과는 반대된다. 그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으며, 만물의 탄생과 더불어 매번 다시 태어난다. 공을 갖고 노는 바보, 혹은 자신의 하느님에게 이야기하는 성인(聖人)이다. 동시에 둘 다거나. - P140

기쁨이 무언지 알고 싶습니까? 그게 무언지 정말 알고 싶나요? 그렇다면 귀 기울이십시오. 밤입니다. 비가 내리고 나는 배가 고픕니다. 나는 밖에서 내 집 문을 두드리며 내가 왔음을 알립니다. 그러나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나는 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굶주린 채 밤을 보냅니다. 기쁨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 P152

바로 이 순간, 당신은 자신이 무엇 앞에 있는지 이해했다. 옴에 걸린 한 마리 더러운 개한테서 번져 나는 이 기쁨을 목격하며 당신은 알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거룩한 이미지‘를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 P16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름모모 2024-04-23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겨주신 글귀들이 진귀하네요. 놓치지 않고 읽고 가네요.^^

라파엘 2024-04-23 16:43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이번에 재독하며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초점을 두고 밑줄을 그었는데, 책에는 이 외에도 우리의 삶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통찰이 훌륭한 문장으로 곳곳에 표현되어 있어요... ^^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를 통해 우리는 결핍을 자각하며, 부재를 통해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된다. 충족이 아닌 결핍에서, 있음이 아닌 없음에서 길어낸 문장들이다. 저자의 삶이 자신의 문장과 다르지 않아서 더욱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자가 된 청소부 - 산다는 것과 초월한다는 것
바바 하리 다스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마음의 평화와 초월을 지향하는 수도자의 삶에 관한 일곱 편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진정한 초월은 현실의 생활을 떠나지 않으며 실제적인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엑소시스트
윌리엄 피터 블래티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장르의 작품이지만,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가 배경이 된다는 이유로 선택하여 읽은 책이다. 빙의를 핵심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신앙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컬트 분야의 대표적인 고전으로서 상당히 잘 쓰여진 소설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4-10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엇 이 책을 읽으셨군요, 라파엘 님!! 반가워요!! 💕

라파엘 2024-04-10 21:52   좋아요 1 | URL
예전에 다락방님의 리뷰를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오늘 읽었어요!! 다락방님의 글은 언제나 제게 많은 도움을 주어서 항상 감사해요!! 🥰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통제하기를 희망하지만, 앎이 존재의 본질에 다다를수록 오히려 우리의 알지 못함을 깨달아갈 뿐이다. 역사는 인간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정직한 탐구는 결국 어떤 실재도 독립적으로 단정적으로 설명할 수 없도록 만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3-03-25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제가 방금 <애프터 양>을 봤거든요? 라파엘님이 거기서 죽어요 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 미안해요!! 맨날 인공지능이라고 놀려서!!!!! 인공지능도 기억이 다 있고 그러더라고요. 물론 감정은 없지만 ㅋㅋㅋㅋㅋㅋㅋ 영화 her보다 천배는 좋았어요. 좋아하실거 같아서 부러 접속해서 댓글 달러옴!!!!

라파엘 2023-03-26 22:04   좋아요 1 | URL
쟝님!! 요즘 바빠서 이제야 댓글을 씁니다 ㅎㅎ 좋은 영화를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쟝님이 추천해주는 영화는 정말 다 제 취향에 맞고 좋더라고요!! <애프터 양>도 조만간 여유가 생길 때 보도록 할게요!! 쟝님도 요즘 바쁘시겠지만, 무리하지 마시고 항상 건강 잘 챙기세요. 늘 감사합니다~!!!! ^^

공쟝쟝 2023-03-26 22:27   좋아요 1 | URL
조용하고 사색적이고 연출이 섬세하면서도 정적이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영화는 정말 찾기 어렵잖아요? 물론 다른 사람들은 졸려함…ㅋㅋ 인공지능 양군에게 이입해서 보고 자신을 대하는 인간들에게 전하는 말을 레포트로 작성하시오ㅋㅋ

라파엘 2023-03-28 23:47   좋아요 1 | URL
역시 쟝님!! 똑똑하고 좋은 사람 😄

은오 2023-06-23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파엘 교수님 학생들 점수 매기시느라 바쁘십니까? 전 종강했는데 어서 돌아오시지요. 쟝님이 우릴 두고 떠났는데 라파엘님까지 안돌아오시면.......😫

라파엘 2023-06-24 19:14   좋아요 1 | URL
은오님,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어제까지 성적 마감하고, 이제 방학입니다!! 올해 중요한 일정이 생겨서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알라딘에서 활동하기는 해야지요. 명강보다 휴강이고 휴강보다 종강인데, 은오님 종강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