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보다 - 100 lessons for understanding the city
앤 미코라이트.모리츠 퓌르크하우어 지음, 서동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도시에는 많은 이들이 산다. 그러나 대부분 도시를 그냥 산다. 어떻게 도시를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적다. 도시를 주어진 것, 즉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도시기획은 자본과 권력의 편의와 (사적)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가 잦다. 공공의 것으로 공동의 공간인 도시는 공익을 외면해선 안 된다. 농촌이라고 다를 바 없겠지만, 도시는 공공성의 확장이다. 도시를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내 사는 곳이 도시라면 더욱 그렇겠다.

 

『도시를 보다』는 도시를 사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도시를 이해하는 100가지 코드’라는 부제는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물론 한계는 뚜렷하다. 서울과 같은 한국의 도시가 아닌 뉴욕의 소호를 다루기 때문이다. 소호의 도시생활을 구성하고 그런 생활을 토대로 도시의 코드를 구성하려는 시도라서 일부 괴리감도 있다. 그럼에도 소호에 초점을 맞춘 도시 코드가 마냥 이곳과 유리된 것은 아니다. 도시는 결국 사람이,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공동의 공간은 공통점을 지니게 마련이니까.

 

《도시 소공간의 사회적 삶》에서 윌리엄 화이트가 말했다는 “사람을 가장 많이 모으는 요소는 바로 사람”이라는 지적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책은 거기에 덧붙인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현상은 공공장소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생활의 기본적인 특징이자, 마을이나 도시에서 사회공동체가 형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끌림은 개인의 매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고 의지하는 경제·사회·전략·문화적 의존성에 따른 것이다.”(p.36)

 

책을 읽고 새삼 다가온 것은 도시와 사람의 관계다. 도시는 사람을 끌고, 사람은 사람을 끈다. 사람이 모여 도시를 만든다. 사람들로 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시의 운명인 셈이다. 그리고 도시는 어떤 특정한 코드를 잉태한다.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형성할 수밖에 없는 규칙도 생긴다. 공공의 공간은 그렇게 유기체처럼 변화한다.

 

『도시를 보다』는 상업적 공간으로서의 소호 혹은 상업적 코드에 많은 이야기를 할애한다. 그것이 상업주의에 매몰된 도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업이 없으면 형성될 수 없는 도시의 DNA를 제대로 짚은 것이다. 그러하기에 의당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노동이다. 거칠게 말해, 도시는 노동을 먹고 자란다. 산업화 시대 이후 도시는 농촌 혹은 도시 주변부의 노동을 흡수하는 블랙홀이었다. 상업과 노동의 집산지가 도시였다. 이농을 부추긴 것도 도시가 아니라 도시의 상업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유입은 도시의 형태를 하나둘 바꿔나갔다.

 

“도시는 ‘노동’을 필요로 한다. 삶과 노동이 얼기설기 엉켜 있다. 노점상은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한몫 거든다.”(p.34)

 

도시를 살면서 얻는 안정감의 일부에는 노동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살기 위해 노동력을 팔고자 도시로 향하기도 하겠지만, 도시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모든 현장이 도시를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책은 또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가 지역 안전에 기여한다고도 말한다. 작업복에서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고 그 안정감은 삶의 다양성에 무게를 실어 준단다. 틀리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노동과 도시는 서로에게 기대고 있다. 노동과 삶(생활)도 서로에게 삼투한다.

 

내가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누군가의 삶의 일부는 채워진다. 타인의 노동으로 내 삶의 조각도 완성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도시의 퍼즐이다. 그것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더라도 도시는 매일 같이 다른 퍼즐을 맞춰간다. 그래서 도시의 삶을 매일 같이 똑같다고 말하는 건 도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령,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의 구성은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생활과 노동의 관계란 타인의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고 자신의 노동을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 결과적 관계와 상호의존성 때문에 우리는 환경과 상호작용한다.”(p.66)

 

무엇보다 ‘도시를 보’는 나의 시선을 확장시켜준 것은 공유공간으로서의 도시에 대한 코드였다. 책이 인용했듯,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건축도시 형태론》를 통해 “공유지가 없으면 어떤 사회 시스템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내 보기엔 100개의 코드 모두가 아주 넓게 보면 ‘공유’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물론 산업화 이전 공유지는 저절로 존재했으므로 공유지를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도시는 공유를 강조해야 하며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사유지가 많을수록 도시는 죽는다. 그곳에 발을 디디는 사람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공유는 한편으로 네트워크를 조장한다. 이웃과 친구를 만든다. 광장, 놀이터, 교차로 등이 필요한 이유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소를 만들고 싶다면 음식을 제공하라는 윌리엄 화이트(《도시 소공간의 사회적 삶》)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 내가 커피를 만들고 음식에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보며 우리는 도시(의 속성)를 너무 모르고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알아야 진짜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도시의 모든 속성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공공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책이다. 함께 살고 있으므로.


“공공장소 개발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주요 조건은 차량보다 사람이 우선시되는 시설,

사회적 조화를 위한 긴밀한 네트워크,

인간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환경,

따듯한 햇볕을 쬐거나 그늘에서 쉴 수 있는 공간,

한적한 곳을 찾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장소,

그리고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과 뜻밖의 놀라움이 공존하는 미묘한 균형의 조화다.

그럼으로써 거리의 풍경 속에 다양한 활동을 담을 수 있다.”(p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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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 ‘인기 없는이라는 수식이 무색하다. 통렬하고, 신랄하다. 덧붙여 낄낄거리며 웃게 만든다. 우아하게 웃길 줄도 안다. 버트런드 러셀에 대한 새삼스런 감탄이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십여 년 전 유일하게 읽었던 책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인데, 다소 까다로웠다. 얇은 책임에도, 그의 글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런 얄팍한 나의 편견을 깬 것이 인기 없는 에세이. 물론 지금 다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보면, 예전만큼의 까다로움을 겪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의 입문서로도 이 책은 좋아 보인다.

 

우아하고 재치 있는 문장가, 능란하고 섬세한 논객이라는 책 뒷면 카피에 백배 공감한다.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한국의 많은 사회지도층, 특히 일부 국회의원 나리들의 언어가 떠올랐다. 막말의 향연(?)을 기본 장착해놓고,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하는 언어적 작태와 행동을 일삼는 그들 말이다. ‘지적 쓰레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쓰레기 말종나리들. 이런 말 지껄였다고 인신공격이랍시고 잡아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에이~ 설마???)

 

버트런드 러셀은 아마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 스스로 지껄인 깔때기에 콧방귀를 낄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그는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 재밌는 문장을 보자. “지구가 기나긴 세월에 걸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삼엽충과 나비를 낳아 기른 후에 인류는 네로와 칭기즈칸과 히틀러 같은 인간들을 낳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하지만 이는 짧은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p.41)

 

인류는 스스로 위대하다고 자부한다. 진화와 진보를 이룬 것도 사실이지만, 인류가 지구에 미친 패악과 해악은 또 어쩔 것인가. 러셀은 그런 자만심에 깨몽이라고 말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읽은 바는 성찰이다. 러셀은 인간에게 말종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돌아볼 것을 권하는 것이다. 다음 그의 말에서 그것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가 언급한 문명인의 조건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고 너그러울 때도 있고, 욕심 때문에 소심해질 때도 있으며, 용감해질 때도 있고 겁에 질려 비굴해질 때도 있다.어떤 이들은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얻었고, 어떤 이들은 최고의 지성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해하도록 도왔으며, 또 어떤 이들은 비상한 감수성에 이끌려 미를 창조했다.문명인이란 자신이 칭찬할 수 없는 경우를 마주할 때 비난하기보다 이해하기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다.”(p.245)

 

재밌다고 해야 할 런지는 모르겠는데, 1950년 첫 출간된 이 책이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오래 묵은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꼭 들어맞는 생생한 지적들이 흘러넘친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21세기가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라고 특별히 달라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정신적 성숙을 갈망하는 건,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이다. 러셀은 그런 사람의 한 명일 것이다. 더불어 유머와 위트까지 겸비한 극소수의 사람.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한국에서 이만한 논객, 여태껏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만 놓고 봐도 러셀의 지적질은 온전하게 타당하다. 자만심 혹은 자존심에서 비롯된 신념의 과잉은 허술한 일반화만 양산하고 있다. 사실 신념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이해타산, 즉 이권에 의한 이합집산에 불과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폭력과 이권이다. 러셀의 말마따나 정부의 헛소리에는 한계가 없다. 가령 국정원. 요원들의 폼 나는 정보 전쟁을 기대했다면 오산이었음을 우리는 똑똑히 확인하고 있다. 세상에 댓글로 정권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똥꼬나 핥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인간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과 신경쇠약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사실 여부는 그래서 상관이 없다.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뿐이다. ‘무언가 믿지 않으면 안 되는 동물이다보니, 불충분한 근거만으로도 믿음을 행하고 타인에 대해 낙인을 찍는다.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는 것이 다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다른 견해를 인정하라는 지당한 말씀이 나부껴도 우리는 다른 것에 대해서도 틀리다(무의식적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세계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일 뿐이다. 러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임에도, 우리는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동물이다. 성찰하지 못하는 동물의 숙명이고.

 

특정한 독단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는 당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을 벗어나 다른 집단이 지닌 견해를 알아보는 것이다.만약 여행을 할 처지가 아니라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도록 하라. 또 당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소속된 신문을 찾아 읽도록 하라. 당신이 보기에 그 사람들과 신문이 미쳤거나 심술궂거나 사악하다면, 당신 역시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p.219)

 

그래서 결심했다. 박씨 정권 혹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다른 집단이 가진 견해를 알아보자.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해보도록 노력하자. 그렇게 결심도 해보건만, 글쎄, 나는 수양이 아직 부족한지, 숨구멍과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들의 사고 체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들의 기준과 잣대로만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재단하는 저들의 행태가 아마도 그동안 그나마 어렵게 지켜온 훌륭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말 것 같다. 가령 피로 물들이며 매우 힘들게 쟁취했던 민주주의가 그렇고, 일부 삑살이도 있었지만 참교육을 위해 노력했던 전교조 교사들의 노력이 그렇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늘 품고 있는 질문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더 깊고 넓은 탐구와 관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문제는 성찰이며 사유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고, 그 불완전한 믿음을 너무 애지중지한다. 러셀의 말마따나 실질적인 해악 때문이 아닌 우리에게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모든 정신적 위험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한 인간이 하는 걱정의 태반은(90% 이상이었던가?) 일어나지도 않을 일 때문에 한다고 하지 않던가! 불안을 사서하며 미리 걱정하는 탓에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우스운 존재가 인간이다. 그것도 따지고 들면, 그렇게 주입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배후세력(자본 등)의 교묘한 조정이 따른다. 불확실한 미래의 선을 위해 비교적 명확한 현재의 악을 감내하는 무가치한 뻘짓을 우리는 버젓이 하면서 괴롭고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빌어먹을!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기묘한 혼합물이다. 인간은 밤이 지닌 화려함을, 봄꽃의 부스러질 듯한 아름다움을, 부모가 주는 사람의 부드러움을, 그리고 지적 이해의 황홀함을 느낄 줄 안다. 어쩌다 통찰력이 깃드는 순간이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서로가 지닌 것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을 때 어떤 질서를 따라야 하는지 꿰뚫어 보기도 한다.”(p.276)

 

비록 미국의 일국 체제를 주장한 오류(!)가 있다 한들, (그 배경과 맥락에 대해선 옮긴이가 충분히 설명했다) 이 책의 미덕은 감추기 어렵다. 특히 러셀의 철학 예찬은 지금 자본과 기득권이 주입하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상비약이 될 것이다. 성찰하고 사유할 것. 지금 우리가 잃은 삼평, 즉 평정과 평화, 그리고 평등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뭣보다 우아하고 재치 있는 문장으로 재미를 보장한다. 물론 일상에서의 실천은 독자 당사자의 몫이겠지만.

 

철학은 비단 수학 및 과학뿐만 아니라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 철학은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지평을 제공한다.사고의 대상을 넓힘으로써 철학은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해독제를 제공한다. 그리고 고통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예민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에게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을 보여 주는 것, 그것 또한 철학의 임무이다.”(pp.85~86)

 

물론 철학이 지적 발달의 한 단계이지 정신적 성숙과 상통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러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겐 가장 재밌는 챕터였던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에서 보듯, 세상에 지식인이라는 탈을 쓰고 뻘짓 하는 인간들, 쌔고 쌨다. 내가 속한 환경, 조직, 나라 등에 집착하기에 그들은 넓고 멀리 깊게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만하지 않고 불충분한 근거의 믿음을 전부로 여기지 말 것


러셀을 통해 나는 다시 나의 세계를 돌아다본다. 세상이 한 뼘 넓어진 기분이다. 작고 사소하지만, 이 기분을 일상에서 실천적 자세로 전환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다. 뜬금없지만, 전쟁이 없으면 좋겠다. 러셀의 이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인간의 사상과 에너지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세대 안에 세계 곳곳의 심각한 빈곤 문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p.105) 


단언컨대, 세상 모든 전쟁은 정부 권력 혹은 자본과의 협잡이 빚어낸 참극이자 정신적·육체적 학살이다. 세상에 성전 따위는 없다! 이건 불충분한 근거에서 비롯된 믿음이 아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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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 이른바 돈 많은 부잣집의 자제로 태어나 (경제적) 부족함 없이 살고 있음을 비유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부러움의 의미를 품고 그렇게 이야기한다. 나라고 다를까. 은수저 물고 한 번 태어나봤으면 어떨까. 허구 한 날 노동에 짓눌려 보낸 날이면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런데, 그 말, 참 흉포하다.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을 구조화한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일까. 그렇다면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대부분의 우리는 맨입으로 세상에 나온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을 감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평등에 쉬이 분노하는 것 같지만, 깊은 불평등, 구조적인 불평등에 대해선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 우리다. 고작해야 새치기 당할 때 눈을 부라리고 목청을 돋우는 게 고작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보니 불평등은 나름 정교하게 직조된 구조물이다. 인간 사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입한 협잡의 산물이다. 이 책은 명확하게 주장한다.

 

인간은 원래부터 불평등하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프레임이 경쟁과 질서였다. 피라미드 구조가 그것을 대변한다. 위로 향할수록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피라미드는 사회적 위계를 구조화했다. 불평등을 감수하도록 만든 셈이다. “반대와 저항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실패에의 투항과 체념의 고통을 견디기 쉽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도착점에서 만나게 되는 무시무시하게 부풀어 오른 엄청난 불평등을 감수하게 만든다. 요컨대 그것들은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고 심화되는데 이바지한다.”(p.88)

 

삼성의 이건희는 과거에 말했다. 1명의 천재가 1만 명(수치는 정확하지 않다!)을 먹여 살린다. 과격하게 말해서, 소수의 능력자에게 다수가 매달려 뒷받침해주고 떡고물이나 받아먹으라는 계시(?). 소수의 능력자와 다수의 비능력자로 세상을 단순 구획하는 발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것 또한 불가피한 것으로 여긴다


그 결과, 우리가 당면한 것이 격차사회. 인류 역사상 이렇게 격차가 커진 적이 없었다. 책이 수치로 제시한 부분은 놀랍다. 그렇게 경제성장 지상주의로 밀어붙이건만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된다는 낙수효과(트리클 다운)는 없다. 빈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커져가는 현실이다.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 계몽주의 시대, 더 나아가 헤겔이 살던 시대까지만 해도, 지구상에서 생활수준이 가장 빈곤한 지역의 두 배 이상인 곳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최고 부국인 카타르의 1인당 소득은 최빈국 짐바브웨의 428배에 이른다.”(p.10)

 

그럼에도 그 불평등에 대해 우리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다. 많은 부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기한다. 책을 읽자니, 우리가 현실적이라는 이름 앞에 얼마나 무릎을 꿇고 있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부정의의에 대한 교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셈이다. 현대판 미신이다.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이 조장한 주입식 세뇌작업! 그 믿음은 의외로 단단하다. ‘현실성이 없다라는 이름으로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는 능력을 잃게 만들었으니까. 상상하지 못하는 질서에 갇힌 세계의 언어적 표현이 현실감이다. 바우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외적 저항에 붙이는 이름이다. 장애물들의 저항이 강할수록, 장애물들은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p.41)

 

대중을 쉽게 현혹했던 피와 인종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나치가 공식적인 국가관으로 구현했다면, 불평등은 신자유주의가 공식적인 경제관으로 확립시킨 것이 아닐까. 인간 사이의 불평등이 정당한 근거가 없음에도, 이 허튼소리는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자리매김했다. 인간의 힘으로 맞서거나 바꿀 수 없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가 됐다. 어리석은 일반화다. 악랄한 조작이다. 인류가 전쟁을 피할 수 없고, 억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궤변과 같은 맥락이다. ‘경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 맞다.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단정의 근거에는 인간이 전쟁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그릇된 믿음이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정부가 행동에 나서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는 헛소리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불평등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로 정부는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다. 더 나아가 자본의 헛소리 영역은 정부조차 무력하게 만든다. 전쟁이든 불평등이든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릇된 미신이 가져온 부당한 믿음이다.

 

불평등 불감증에 걸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 여럿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질문이 아닐까. 불평등을 이대로 감내한 채 그릇된 미신에 종속돼 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질문처럼. GNP(국민총생산)GDP(국내총생산)의 수치에 배제된 부의 배분 방식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토록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풍요로워졌다는 세상에서 나는 왜 배제됐는가, 물어야 한다. 소수에게만 부가 편중되는데, 나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은 왜 자꾸 떨어지는가, 질문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믿음을. 사람들은 바로 이런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옳은 결론이다. 그리고는 이런 종류의 세상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결론짓는다. 잘못된 결론이다.”(p.47)

 

각종 경제위기 상황에서 더욱 창궐하는 긍정주의역시 경계해야 한다. 그 지긋지긋한 긍정 찬가는 모르핀이다. 불평등에 대한 거짓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긍정의 힘을 설파한다. 불평등 때문에 터질지 모르는 분노의 뇌관을 잠재우기 위함이다.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되레 불평등을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기이한 현상


그것을 깨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불평등에 희생당하고 있는 우리의 질문과 성찰이다. ‘슈퍼 갑의 사회를 깨뜨리는 출발은 을의 성찰이다. 바우만은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권한다. 어떤 식으로건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할 것. 책의 제목처럼 우선 질문하자. 회의하자.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우리의 불평등 불감증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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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 수업 - 친절하고 재미있는 강의실 밖 건축 이야기 썬 시리즈 1
권선영 글.그림 / 컬처그라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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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수업이다.

책을 보면서 함께 걷고 바라보았다.

아, 눈앞에 건축물이 펼쳐졌고, 그 건축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물론 그것을 상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는 것에 즉자적으로 감탄하고 놀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 그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좋았다. 당장 볼 수도 없는 것을 내 마음의 눈앞에 끌어들이는 일.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이 지닌 미덕이다.


이런 다정한 책이라니. 덩달아 건축수업을 받은 것 같다.

나도 건축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이며, 건축과 공간이 삶에 깊이 삼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은 삶을 반영한다. 삶은 건축에 의해 움직인다. 당대의 욕망과 시대정신, 이데올로기, 배경 등을 담는 것이 또한 건축이다. 그러니 건축가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공간을 축조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에겐 ‘건축주’라는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 좋은 건축을 하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다.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진행된 썬의 건축수업은 빤하다. 그런데 그것이 외려 성공적이다.

건축 초보자 혹은 건축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겐 그 빤한 것이 부담도 없고, 가뿐한 마음으로 따라가기에도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샤를 할아버지의 다정한 속삭임이, 직접적으론 건축을 말하지만 곧 삶에 대한 이야기여서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썬에게도 좋은 충고이자 위로가 됐겠지만, 훌륭한 건축가의 조건에 대한 샤를 할아버지의 말은 모든 좋은 것을 향한 충고이기도 하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듯이 건축도 남들이 시키는 일을 잘하기보다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가지고 그것을 세상에 펼칠 수 있으면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거란다.”


그리고 편지에서도 그것은 강조된다. “앞으로 주위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든, 기죽지 말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렴. 그게 항상 정답이란다. 영웅은 남이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길을 떳떳이 가는 사람이야. 너도 네 인생에서 영웅이 되렴.”(p.287) 이 빤하고 흔한 말이 열한 번의 건축수업에 동행한 나에게도 찡한 감정을 안겨줬다.

그 다정한 건축수업이 아녔다면 느끼지 못할 감정이었으리라.


건축이 좋아서 원래의 전공을 때려 치고 파리로 건축을 공부하러 간 썬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노력하고 시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진리.

그러나 현실은 그 열망과 정반대로 향하거나 심지어 짓누르기 일쑤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영웅 서사에서 그건 말도 되지 않는 행위니까.


소박한 영웅 서사를 차용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건축에 대한 거리감을 줄여준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건축이었다면 좀 더 실감나고 더 거리감을 좁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건축후진국 한국에선 흔히 만날 수 없는 건축물에 대한 일러스트까지 곁들인 세심하고 쉬운 접근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내겐 글로만 접했던 현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건물의 속살을 보여준 점도 고마운 점이다.

특히나 건축적 산책. 그 시적인 공간을 걷고 만지고 싶었다. “‘공간을 산책한다’는 의미로, 미로같이 복잡한 내부구조를 뜻한다. 공간 내부가 한눈에 파악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다닐 때마다 시야가 바뀌는 공간구조이다.”(p.69) 아, 생각의 산책을 유도한다. 공간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만든다면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생각 패턴을 만든다.


그러니 좋은 책은 상상하고 사유하게 만드는 책이다.

당연히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이 그렇다는 말이다.

《르 코르뷔지에》를 쓴 일본 건축가 도미나가 유즈루의 언급은 그런 면에서 내게 새로운 건축적 사유를 촉구한다. “건축은 공간 예술이지만 회화나 조각과는 달리 한 번에 파악되지 않고 음악처럼 운동에 따라 잇달아 일어나는 시간 예술이다. 시점의 이동과 함께 습득되는 현상이다.”


잊지 않기 위해 쓰자면, 오스마니앙 건물.

내가 아는 공간의 이런 건물이 떠올랐다. 파리 건물 대부분은 오스마니앙 스타일이라고 했다. 1850년대 오스망 시장이 파리의 도시 설계를 새로 하면서 지은 양식인데, 내가 아는 그 공간의 이런 구조가 궁금했었다. 유럽에서 볼 수 있는데 내 주변의 누구도 이것이 어떤 양식인지에 대해서는 몰랐는데, 그 궁금증이 풀렸다. 다 이 책 덕분이다.


한국, 특히 서울에 살면서 가장 큰 불만족의 하나가 미감(미적감수성)이다. 도대체 이 도시엔 그런 미학이 없다. 흉측한 건축(물)이 주는 혐오감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미적감수성을 다치게 할 뿐이다. 우리네 삶이 이렇게 강퍅하고 비루한 건 건축에도 분명 책임이 있다.

그저 높고 번듯하게 지으면 다 되는 줄 안다. 랜드마크는 또 어디서 들어서 그렇게 남발해대는지. 중요한 것은 건축과 삶(생활)의 조화다.

주위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가.

“할아버지는 건축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주위 환경을 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 건물이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 잘 안 어울릴 경우 어떤 요소 때문인지, 그 요소가 결국 그 환경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지. 하여간 살펴볼 것들이 많았다.”(p.95)


이 책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는 건축은 곧 삶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는 사람은 물론 방문하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들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갈 수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썬의 깨달음은 나의 것과 일치하고 있었다.

르 코르뷔지의 이 말을 새긴 이유다.

“건설의 목적이 건물을 지탱하는 것이라면, 건축의 목적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있다. 건축은 조화의 문제이며, 그것은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샤를 할아버지도 덧붙인다. “건축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가야.”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서도 분명 적용되는 지점이 있다. 마시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 감동시키는 것. 커피나무를 자라게 하는 대자연과 만물의 순환, 모든 커피노동에 관여하는 노동자들이 빚어낸 육체와 정신의 조화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리라.

좋은 건축가의 의도가 빚은 건물에서 맛있는 커피를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과 커피의 조화. 얼마나 향기롭고 감동적인가.


그리고 뭣보다 빛. 빛이 절묘한 화음을 연주하는 곳이면 좋겠다.

빛의 사용이 아주 특이하고 흥미롭다는, 르 코르뷔지에가 거의 마지막으로 설계한 건축물이라는 롱샹 성당이 가고 싶어졌다.

샤를 할아버지는 썬을 롱샹 성당에 데리고 가면서 훌륭한 음악회에 데리고 가겠다고 말을 했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빛으로 작곡한 교향곡, 롱샹 성당을 방문한 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공간 역시 빛으로 작곡한 교향곡이 흐르는 곳이면 좋겠다.

커피는 자신 있으니, 그 교향곡만 갖춰지면 된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자, 당신을 초대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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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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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다(물론 나도 포함된다). 스무 살이 넘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아주 드물게 예외적인 인간이 있을 뿐이다.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도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나에게 유리하면 사실은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실 따위는 개에게나 줄 먹이거리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여기의 ‘종북’이라는 딱지다. 종북(從北)이 말 그대로, ‘조선노동당과 그 지도자의 외교 방침을 추종하는 경향’을 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냥 자신(의 정치적 견해)과 다르면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유행’이 됐다. 다른 이유는 없다. 종북의 근거나 이유를 발견해서가 아니다. 그냥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종북이라는 유행어를 갖다 붙인다. ‘듣보잡’ 변희재는 그래서 낸시 랭에게 ‘종북’이라는 레떼르를 부여했다.   

 

밑도 끝도 없는 종북놀이를 보면서 지젝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줄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념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는 확고부동한 무언가가 있다. 삶의 맥락에서 다져온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에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사람은 신념을 바꾸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종북이 그런 것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가 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경제적으로 상층으로 올라서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수입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도표를 제시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당신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크단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마도 종북과 같은 딱지가 붙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자기를 기만해서라도.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도 그것을 설명한다. 긴장이나 불안 상태로서 경험하는 심리적 모순을 가리키는 ‘인지 해리’를 통해서다.

“인지 해리를 줄이려는 욕구는 우리가 새 정보에 반응하는 양상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자신의 편향을 확인받고 싶어 하며, 행복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 들어오는 정보를 기꺼이 조작하고 무시한다. 이런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강하게 일어나기에 이름까지 붙여졌다. 바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것이다.… 합리화하는 성향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증거는 종종 즉각 비판, 왜곡, 배제와 맞닥뜨리고는 한다. 더 많은 해리를 겪을 필요가 없도록 하거나 견해를 바꿀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p.246) 

 

이 책은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다. 인간뿐 아니라 생명이 기만과 자기기만을 통해 진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로버트 트리버스 저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도 들먹이면서 언급한다. 거칠게 말해서 인간은 속여야만 산다. 불편부당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기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이해하기 힘드니까, 종북이라고 레떼르만 붙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고, 생명일지도 모른다. 

 

로버트는 부모-자식 갈등 문제를 연구할 때 자기기만의 단초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책에도 그것을 일부 언급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혼내거나 매를 들면서, 혹은 사교육 등으로 내몰면서 부모들은 하나같이 외친다. “이게 다 네가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잘 되려고 이러는 거니? 다 널 사랑하니까 이런 거야.” 

 

진심 묻고 싶다. 정말로? 부모도 알 것이다. 깊은 자신의 내면에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용기나 준비가 안 돼 있을 뿐.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 기만과 자기기만을 이용해 아이의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권력을 쥔 자의 횡포다. 그러니 권력은 자기기만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권력은 자연 사람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사람이 달라졌다느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느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권력은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약화시킨다. 로버트는 권력이 자기기만에 작동하는 메커니즘도 언급했다.

 

“사람들에게 권력을 쥐었다는 느낌을 갖게 하면, 그들은 남의 관점을 취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놓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 결과 남들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이해할 능력이 줄어든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남에게 무신경하게 만든다.”(p.47)

 

권력을 쥐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던 사람이 남의 관점이나 감정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줄어드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하고 있다. 선거 전후의 정치인이 달라지는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없을 때래야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정성 원리를 고수하고, 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더 쉽다는 사실은 참 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기만과 자기기만이 스스로를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 요구되는 성찰의 지점이 있음을 방증한다. 성찰하거나 자기기만을 제어하지 못할 때, 자기기만이 야기하는 엄청난 파급에 대해서도 책은 언급한다. 전쟁이나 학살 등이 그것이다. 개인 생활에서야 경우에 따라 귀여운 행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집단이나 조직, 국가적인 자기기만이 이뤄지면 인류 전체에 큰 위협이 되는 사건이 된다. 인류 문명의 발생 이후 벌어진 모든 전쟁이나 학살이 그러했고, 최근 우리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전쟁이 아니다!)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등 인류의 대비극은 집단적인 자기기만을 토대로 한다.

 

“9/11 사건이라는 가짜 구실을 내세운 그 전쟁은 석유 및 관련된 경제적 자산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주둔 기지를 건설하고 맹방인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의도적인 선택에 따른 전쟁이자 공격전이었다. 물론 뻔한 거짓 핑계를 내세웠다. 훗날 이 전쟁은 기만과 자기기만을 수반한 어마어마한 군사적 실책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것이 확실하다.”(p.406) 

 

저자는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자기기만의 위험성을 경고했다.(“많은 종교가 지난 한 가지 결정적인 능력이 있다, 바로 독선이다.”(p.470)) 이것은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뿐더러, 종교나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기만이 우리를 점점 옥죄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온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기만의 언어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는다. 되레 실제 가르침을 소홀하게 만든다. 신성에 대한 믿음 여부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기만이 불러올 부정적인 영향이나 파국을 염려한다. 그러면서 자기기만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또한 개인적이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기만이 늘어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란다. 그는 자기기만으로 일련의 작은 편익들을 맛보다가 큰 코를 다친 경험을 종종 했다고 토로한다. 착각을 즐기다가 급격한 반전에 이른 경험들이다. 자기 과신에 취해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크게 대가를 치르기 전에 되돌아보고 성찰할 것. 명상, 기도, 친구와 상담자 등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자기기만을 통해 진화해왔다곤 하나 우리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고 로버트는 믿는 것 같다. 그 믿음 또한 자기기만이 아니길 나도 바란다.  

 

“자기기만은 쓰라린 결말로 이어질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아니라 잘못 판단한 전쟁과 경제 정책 같은 거대 사건들에도 들어맞는다. 우리는 남과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일시적인 혜택을 누릴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대가를 치른다. 나는 이것, 즉 무지의 비용은 나중에 치르는 반면, 자기기만의 혜택은 즉시 볼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일반 법칙이라고 믿는다.”(p.506)

 

다만, 이 책을 누구에게나 쉬이 권하지는 못하겠다. 띄엄띄엄 관심사에 따라 챕터별로 읽는 것은 나쁘지 않겠으나 가독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번역이 마냥 매끄러운 느낌도 아니다. 내가 지닌 과학적 상식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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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2014-03-0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파를 친일과 부유층 프레임에 가둬 깍아내리는 좌파도 다를꺼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