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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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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 제목부터 명확하게 의도를 밝힌다. 그렇다. 언론을 다뤘지만,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폭력의 자유다! 언론이 아닌 왜 폭력으로 제목을 잡았는지, 잡았어야 했는지, 책은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 한편으로 오욕이다. 명예를 더럽히고 욕되게 함. 근대화를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한, 일제강점기가 36년이나 지속된 것에는 언론도 한몫했다. 아니, 언론의 역할이 아주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한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양극화사회 혹은 격차사회로 진행된 것에 언론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라거나 목탁이라는 말, 당연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자니, 언론은 사회의 폭력이다. 권력(지배세력)에 빌붙어 주구 노릇을 하는데, 이게 전형적인 용역깡패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용역깡패 짓거리를 하면서 욕심이 생긴 거다. 명령 받아 움직이는 것도 신물이 난 것일까. 권력을 조정하는 권력 그 자체가 됐다. 정치권력의 비위를 맞추거나 주구로 존재하면서 특혜를 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권력이 된 경우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아닌 찌라시 깡패들이 그것을 대변한다.

 

세상은 본디 폭력과 이권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내게, 하긴 언론이라고 다를까마는 문제는 그들이 반성도 성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론이 맞는가. 좋은 언론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매일 바삐 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정당화할 뿐. 스스로에 대한 감시나 성찰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력으로 육화한 언론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됐다. 독자들이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느냐고? 에이, 농담하지 말자. 독자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독자의 신뢰를 잃으면 끝이라고 말하지만, 입 발린 소리요, 아주 늦게나 씨가 먹힐 소리다. 진짜 그렇다면 조중동은 이미 망하고도 남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문이었어야지.

 

책에 의하면, 권력과 언론, 불가근불가원이었어야 할 존재들이 밀착했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직전 생겨났던 언론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의 길을 확립하기 전에 권력에 굴종하는 법부터 배웠다. 동아일보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역사가 있다. 일장기 말소 사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그의 옷에 걸린 일장기를 지운 사건인데, 김종철 저자는 이것의 속살을 알려준다. 이것은 동아일보가 의도한 것도 아니요, 처음 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 편집기자의 의해 돌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는데, 동아일보는 이 기자를 파면했고, 당국에 백배사죄했다. 비굴했던 오욕의 역사인데도, 동아일보는 그것을 지운 채 현상만 놓고 자가발전하고 있다. 쪽 팔리지도 않은가?

 

동아일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신문이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자들에게 강력히 저항한 대표적 사건으로 일장기 말소를 내세웠다. 조선중앙일보가 훨씬 먼저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은 물론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가 총독부의 압력에 굴복해서,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젊은 언론인들을 강제 해직한 것은 덮어둔 채 동아일보사가 주도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랑했다.”(p.34)

 

문제는 뻔뻔함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의 독재정권들에 이르러 권력 지향적 야합을 일삼던 언론의 DNA에는 분명 뻔뻔함이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장성 넘치는 저자의 이야기에선 그것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아프다. 권력에 대한 부역을 일삼은 언론인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못한 역사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해체는 이 사회 전체를 지금에까지 왜곡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일 텐데, 언론계라고 다르지 않다. 저자도 그 지점을 아쉽게 토로한다. 혹은 비통하게.

 

반민특위의 강제 해체는 결국 부일 혹은 친일 세력의 영속적인 세습을 불러왔다. 조중동 같은 족벌언론에서는 지금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경영권과 인사권을 장악한 채 입맛에 맞는 정권과 결탁해서 온갖 특혜를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저자는 다른 책을 인용해 프랑스의 경우를 드는데, 우리의 역사가 왜 여전히 왜곡을 일삼고 권력의 입맛에 맞춰 흔들리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성찰과 반성을 못하는 사람, 조직에겐 청산이라도 필요했던 것인데, 우리의 역사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드골의 나치 협력자 대숙청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찾는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은 잘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주섭일, 사회와연대)


물론, 일부 언론인들의 바람직하고 당연한 저항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발표하거나, ‘언론의 정도를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뜻으로 사표를 냈으며, 제작에 불참했다. 정보기관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 뻔한 데도 자유언론실천의 깃발을 들고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결기가 있었고, 정신이 있었으며, 실천할 줄 아는 행동력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도,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언론에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패할 것을 알면서도, 산산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만 했던 비장미 섞인 낭만.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변곡점은 IMF 직후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판단해보는데, 이제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그냥 회사의 직원이자, 더 심하게 말하면 노예다. 세상에 대한 단독자였던 기자는 이제 한갓 회사 입장을 대변하는 타이피스트로 전락했다. 한 기자 친구가 내게 토로했었던 말이 생생하다. “말만 기자지, 왜 이렇게 비루한 걸까.” 비루한 기자. 이 어울리지 않는, 형용 모순이 지금의 기자를 대변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1970년대 겪은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근무환경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때는 기자들에게 단독자 정신, 기자 정신이 살아있었지만, 지금 대부분 기자들, 모르긴 몰라도 먹고사니즘의 노예다.

 

근무조건이 제일 낫다는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가장 불만을 품고 있던 것은 사주와 경영진이 사원들을 마름이나 가속(家屬)처럼 다룬다는 사실이었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사용자와 노동자가 아니라 봉건적인 상하관계가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pp.190~191)

 

이제 언론은 정치권력보다 자본의 노예다. 독립 언론을 선언한 몇몇 언론은 늘 자금압박에 시달린다. 독자들의 호응도 예전 같지 않다. 언론 전체의 신뢰가 떨어진 까닭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이 있다면, 저자의 말마따나 자유롭고 독립된 언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겐 박해와 탄압이 가해진다는 것. 참으로 슬픈 일이다. 비통한 일이다.

 


폭력의 자유는 현대 언론의 역사와 권력의 역사를 일제강점기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짚어보는 여정이다. 한때 언론인이었으나 재능과 능력도 딸리는데다, 자본과 권력에 예속돼 움직여야 하는 현실에 더 이상 자신을 끼워 맞추기 싫었던 나는 새삼 이 책을 읽고서 저자의 말에 절실하게 공감했다. “언론은 권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언론 자체가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p.595)

 

 

며칠 전 책을 덮은 뒤, 정독도서관에 갈 일이 있었는데,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표지가 있었다. 정독도서관 앞이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그만 침을 뱉었다. 누군들 이 책을 읽고 그러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언론의 길을 걷게 만들 수 있을까. 동아일보가 부당한 광고탄압을 받던 시절, 저자가 겪은 한 에피소드가 그것의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격려 광고를 내려는 시민들의 소리를 기사화하기 위해 일요일에 회사에 나간 저자. 어느 날 저녁,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머뭇거리며 사무실을 찾아왔다.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며 독재정권과 싸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무작정 서울에 상경해 하루 종일 시내를 걸어 다니며 행상을 하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가슴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언제 올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단언컨대,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그것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하고 문제제기 해야 한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저렇게 죽음의 길로 내모는 나라와 권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언론은 또 무엇인가? 돌아보고 성찰하며 되짚어 봐야 한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저자의 삶을 바꾼 것은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친일문학론(임종국, 평화출판사, 1966).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은 동아일보 사주이자 민족운동 지도자로 알고 있던 인촌 김성수의 적극적인 친일행각이었다. 위인으로만 알고 있던 자신의 직장 사주가 친일을 넘어 부일을 했다는 사실이 그를 황망하게 만들었고, 그는 진짜 언론인을 고민하며 이후 자신의 삶을 거기에 맞춰 살아온 것 같다. 이 책도 어느 누군가의 삶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진짜 언론인을 고민하는 사람이나, 고민하지 않았으나 고민하게 된 사람이나.

 

언론의 악행의 평전과도 같은 이 책을 보면서, 지금 찌라시 깡패들의 소멸을 생각해 봤다. 이들이 없어지면 시민들이 좋아할까? 어쩌면! 그때 그 시절처럼 말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1940812일부터 1945815일까지 민족지가 없는 언론의 암흑시대가 계속되었지만, 두 신문이 부르짖던 언론 보국천황 폐하 만세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 조선인들이 많았을 것이다.”(p.40)

 

아, 조중동이 문을 닫아도 분명히 새로운 포스트 조중동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 나도 안다. 그땐 그때 가서 또 생각해 보자. 폭력(과 이권)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간이니까. 새로운 폭력은 당연히 나온다. 독재정권(전두환)에 부역했었던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지닌 김훈의 말이 맞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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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예술가의 초상, 알폰스 무하 위대한 예술가 2
김은해 지음 / 컬처그라퍼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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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좋은 평전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질문이었다. 알폰스 무하에 대한 세세하고 꼼꼼한 기록으로서 이 책은 나쁘지 않다. 기록노동과 출판노동 등에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도 익히 짐작을 할 수 있다. 저자는 감동적인 예술 작품을 만났을 때의 충격을 표현한 '스탕달 신드롬'을 거론하면서 알폰스 무하의 삶과 예술을 충실히 기술한다. 무하에 빠진 저자의 감흥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노동에 대한 평가와 결과에 대한 평가는 별개다. 내게 이 책은 알폰스 무하의 입문서 격이었는데, 저자의 감흥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혼자 좋아서 블라블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감흥, 그 격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채 내뱉고만 있었다. 즉, 독자와의 밀당에 실패한 셈이다. 


좋은 평전의 조건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인물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시대나 당대의 사회와 어떻게 조화를 이뤘는지, 인물에 대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새로이 부각시키거나 비추면서 당시의 시대 배경이나 미시 생활사까지 복원해내는 것. 또 지엽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로 흥미를 자극하면서도 전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아울러, 읽기도 좋아야 한다는 조건도 붙을 것이다. 가독성 문제인데, 전반적으로 수식어가 많고 글이 길다. 아르누보의 특징인 '장식성'을 감안한 글쓰기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저자의 감흥만 따르기엔 지루하다.   


뭐니뭐니해도 평전은 인물에 대한 깊은 연구가 선행되면서 인물의 철학이나 사유, 사상 등이 독자에게 잘 전달돼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같은 언어권의 사람이 유리하다. 역사와 문화 등을 공유하고 인물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제대로 이해하고 붙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혹자는 주석이 많아야 한다는 점도 좋은 평전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주석을 통해 배우는 것이 의외로 많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면에서 《성공한 예술가의 초상, 알폰스 무하》는 성공적인 평전은 아닌 듯하다. 책은 때로 현실과의 접목을 위해 억지를 끌어낸다. 작가는 가령, 청년 무하의 사회 진출을 위한 출발과 오늘날 젊은이의 것을 비교한다. 이것은 범주의 오류다.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이 너무 다르다. 19세기나 21세기 모두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경쟁은 치열하다'는 말을 돌고 있다며 단순 비교를 하는데, 과연 적당한 비유일까. 뭔가 지금의 청년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자극은 적절하지 못하다. 청년 무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와 사회적 배경과 지금 한국의 상황을 비슷하게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틈만 나면 그림 삼매경에 빠졌던 한 소년이 학창시절에 재능이 없다고 통보 받아 자신이 사랑하는 미술을 시작조차 못할 줄 알았건만, 타인들의 평가에 구속됨 없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니 결국 승승장구한 아티스트가 된 이야기"(p.20)라는 소개는 분명 흥미롭다. 안타깝게도 그런 소개만큼의 전개가 안 됐다는 점이다. 책을 읽고 훅~ 당겨서 당장 전시회도 보러갈 생각이 들 것으로 기대했다. 아니었다. 


프랑스어로 신예술을 의미하며 19세기 최후의 예술사조를 뜻하는 '아르누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알폰스 무하라는 예술가를 만난 것이 소득이랄까. 아르누보의 전성시대였던 1890년~1910년이면,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혹은 좋은 시대)'였다. 과거에 없었던 풍요와 평화로 인해 문화예술이 번창하고 우아함이 넘쳐났던 시대. 무하와 맞물려 벨 에포크의 시대상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도 아쉬움이다. 


성공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렸으나, 책은 '성공한 평전의 초상'으로 남지 못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고야 말았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았으나, 내 느낌대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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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이탈리아 - 빠릿한 디자이너의 느릿느릿 이탈리아 관찰기
문찬 지음 / 컬처그라퍼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한국()과 이탈리아(),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한다. 둘 다 반도에 자리한 나라이며, 남북이 갈라져 있으며(나라가 갈라졌든, 정서적으로 갈라졌든), 사람들은 승질급하고 다혈질이며, 정이 많다는 점 등을 든다. , 그럴 듯하다. 그렇게 따지자면, 최고 권력자들에 대한 공통점도 나온다. 독재자가 등장했거나 또라이같은 작자들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잡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

 

비슷하다는 거, 거짓말이다. 개뿔이다. 억지로라도 비슷한 점을 찾고 싶어서 그렇게라도 끼워 맞췄을 수도 있겠다. 슬로우 이탈리아를 보니 그 점이 더욱 확연해진다. 한국엔 투철한 준법정신이 국가의 강력한 기강이자 근본인양 허구한 날 지껄인다. 이 나라의 도덕수준이라는 것이 거리에서 휴지 버리는 것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정도다. 이탈리아? 저자가 훑어본 이탈리아, 준법정신 따위는 개에게나 줘 버려~ (물론 개도 받지 않을 터이지만!)

 

대신 이들은, 물론 자본주의에 물든 것은 매 한가지이긴 하나, 성공이라고 일컬었을 때 그것이 금전적인 윤택함을 뜻하지 않는다. 자아실현이 성공이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하며, 자기 생을 자신이 기획하고 꾸려나가는 것. 남의 인생을 살지 않는 것이다. 잘 먹고 삶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을 삶답게 사는 것 아닐까. 프랑스어로 사부아 비브르(Savior vivre).

 

한국에... 그것,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미치도록 애 쓰고 용을 써야 가능한 무엇이다. 뭣보다 오지랖 넓은 남들의 혀 끌끌 차는 시선도 견뎌내야 한다. 잘 먹고 삶을 즐기겠다는 목표 아래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만큼만 일을 한다는 것,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알까? 이런 분위기가 만약 사회적으로 조성된다면, 게으르다고 타박하고 국가경쟁력 떨어진다고 기득권은 아주 개지랄을 떨어댈 것이다.

 

책은 부러운 이탈리아의 일면을 끄집어낸다. 이런 일기예보를 상상하니, 나는 당장이라도 이탈리아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오늘 밤 하늘의 별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지 예보해준다고 한다. 저자는 남부 타란토 항구에 머물 때, 기상캐스터의 약간 상기된 어조의 예보를 듣고 밤 산책을 나가 별비를 맞았다고 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나는 이탈리아와 한국은 명백히 다르다고 나 홀로 판결 내렸다. 기상캐스터의 옷과 미모에 매달리는 한국에서 별빛예보를 듣는다는 건 상상불가!

 

저자는 이탈리아인들이 개인을 중시하고 자신만의 기준을 갖게 된 연유를 르네상스에서 찾는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이끌어 가는 삶. 이런 정신을 싹트게 한 계기가 르네상스라고 하면서 깊은 것을 볼 줄 아는 이탈리아인의 안목을 언급한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출중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발굴하고 드러내 줄 안목을 지닌 사람이 없다면 그는 그저 장삼이사로 삶을 마감했을 터.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재능을 키우고 발휘하며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이탈리아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닌 사회 전체가 만들어냈다는 저자의 시각에 완전 동의한다. 비범함을 알아보고 지원하며 갈채를 보내줬기 때문에.

 

한국의 권력자들이 웃기지도 않은 것도 이런 지점이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키워야한답시고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깝죽댄다. 창조경제, 창의적 인재 육성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아니 사실은 별로 그럴듯하지도 않은 용어인데, 사람들을 현혹한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를 만들어낸 사회적 분위기와 환경 등은 고려하지 못한다. 눈을 현혹시키는 시각적 요소가 아닌 적합한 역할에 맞추는 이탈리아 디자인의 힘이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로부터 나온다는 저자의 깨달음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책을 읽으면 이탈리아, 발 딛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러나 전제는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서, 음식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탈리아에 대한 로망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초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발 디뎠던 이탈리아에서 내가 놀란 것은 오리지널 피자의 맛과 준법정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이후 이탈리아에 대한 허기는 책 등을 통해 때우고 있다. 이 책도 그 일환이지만, 직접 만나는 것보다 좋은 게 있을라고.

 

전반적으로 심심한 책이다. 이탈리아에 사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을 만나 그 이야기를 풀어냈으나 차라리 전공인 디자인이라는 창을 통해 이탈리아를 바라봤으면 어떨까 싶다. 여느 이탈리아 여행 책과 큰 차이가 없다. 비교할 건 아니지만, 박찬일 셰프의 어쨌든, 잇태리의 감질 맛 나는 이탈리아보다 맛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면, 굳이 이 책을 권하진 않겠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제시할 수도 없다. 다른 책을 읽거나 이탈리아로 가서 부닥치는 것이 훨씬 낫겠다. 따라서 책에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렵다.

 

어쨌든 저자도 이탈리아를 다시 찾을 것임을 예보(?)했다. 이탈리아를 다녀온 사람들이 다시 이탈리아를 찾는 이유도 제시한다. “. 느슨한 사회의 나른함을, 단단히 조여진 허리 벨트를 헐렁하게 늦추었을 때 느끼는 편안함 같은 이탈리아의 공기를 그리워하게 된다.”(p.27) 하긴, 잇태리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일삼던 박찬일 셰프도 그것이 반어법임을 은근슬쩍 드러내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혹시 이탈리아에 나쁜 감정이 있어서 절대 가볼 만한 나라가 아니야라고 반박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적어도 당신은 지옥 같은 한국을 떠나온 것이잖아라고 말하겠다.”

 

이 지옥 같은 한국, 아니 무간지옥 그 자체인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지 않겠나. 그 어디가 이탈리아라면 브라보! 먹기 위해 이탈리아를 가는 것도 좋겠다. 나는 다시 이탈리아를 간다면 그것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생에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맛있는 것을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 이탈리아와 나는 그것으로 통할 테니까. ‘라르테 디 아란자르시(어떻게든 만들어 내는 것)’을 외치면서. 내 오감을 열고 아템포(본디의 빠르기)’로 나는 이탈리아를 걷고 먹고 만날 것이다. 단언컨대 이탈리아는 가장 완벽한 먹거리가 있는 곳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았으나 내 느낌 그대로를 적었다. ‘주례사 리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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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컴퍼니 - 변화를 주도하고 성공으로 이끄는 혁신 전략
리사 보델 지음, 이지연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오염된 단어들이 있다. 변화가 그렇고, 혁신도 그렇다. 이에 따라붙는 창의나 창조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기업들은 이 단어(들)에 목을 맨 듯, 끊임없이 지저귄다. 그러나 안을 파고들면 내용이 없다. 동어반복에 좀 더 면밀히 따지고 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포장된 수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지. 니들 더 뺑이 쳐라. 떡고물 좀 떨어지게 해 줄 테니 회사 배 좀 더 불려봐라.

 

왜 그리 거칠게 말하나 싶을 텐데, 그들이 지저귀는 ‘혁신’의 공허함 때문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라는 말을 교묘하게 포장했다. 이윤을 더 뽑아내기 위함이다.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서 경쟁을 부추긴다. 혁신이라는 말로 포장된 ‘등골브레이커’의 면모다. 기업, 물론 돈(이윤)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윤인지, 그 이윤이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기업의 변화와 혁신이 단지 이윤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공허하다. 변화와 혁신의 기저에는 노동이 검토돼야 하나 대개의 경우, 이런 배려나 생각은 빠져 있다. 기업과 사회의 관계 또한 텅 비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킬 더 컴퍼니》는 기업의 혁신과 변화를 말한다. 그것을 위해 회사를 죽이라고 말한다. 경쟁자의 입장에서 나의 회사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한다. 그리고 회사에 만연한 좀비적 태도를 깨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세스와 방법을 제시한다. 나쁘지 않다. 어느 정도 회사가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회사는 불가피하게 관성에 의해 움직인다. 표준화된 절차와 문서 작업이 따르고, 형식적인 일들이 많아진다.

 

“회사의 리더들이 사람이 아니라 프로세스에 초점을 맞춘다. 모든 업무를 표준화하고 형식화하다 보니 회사에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리더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를 살핀다.”(p.63)

 

책은 그것에 메스를 대라고 말한다. 필요하다. 회사가 관성에 의해 그냥 굴러가게만 하다간 시장에서 낙오되고 말 테니까.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관성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더 이상 신경 쓰지도 않고 무사안일주의 문화가 퍼진다. 관료화가 점점 똬리를 틀게 된다. 회사는 순응과 효율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온순한 양 혹은 좀비로 전락한다. 노동자들의 주체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의사 결정 능력도 덩달아 감퇴되기 때문이다. 위험을 피하려는 문화가 바이러스처럼 휘감는다.

 

책이 강조하는 ‘생각하는 문화’, 나쁘지 않다. 저자는 그것을 ‘싱크잉크’라고 표현한다.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상적 회사를 지칭한다. 좀비 회사를 싱크잉크로 변화시키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탐구심, 호기심, 주인 의식, 창의적 문제 해결, 독립심을 심어주라고. 이것이 생산적인 혁신을 위한 기초를 놓는다고.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여기서 말하는 혁신의 내용은 결국 CEO와 임원, 주주들의 잇속을 챙기는 수단이다. 시장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편에만 치우쳤다. 노동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결여됐다. 회사를 죽임으로써 노동(자)의 성격과 질이 어떻게 바뀔 것이며, 사회 속에서 기업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는 없다. 혁신이라는 말을 오염시킬 뿐이다. 혁신은 사람(노동)과 사회와 함께 결부돼야 할 문제지, 기업 안에서만 얘기돼선 안 될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시장으로 환원하는 자세. 달갑지 않다. 기업 내 좀비문화를 바꾸기 위한 방법에서 좀 더 깊은 고민을 내포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업 내에서 시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할 수 없을까. 함께 공유하기 위해 만드는 그런 문화들. 생산성과 효율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자연스레 따라올 수 있는 기업 문화와 노동에 대한 사유. 


그래, 맞다. 경영기술서에 뭘 그런 것까지 바라다니, 나도 참 오지랖이긴 하다. 네가 대안을 내놓아라, 하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노동자협동조합을 꾸리는 일개 커피노동자가 세세한 그림까지 어찌 그리겠나. 다만 이 리뷰는 편향적이면서도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다. 예단이지만,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책이 건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리뷰를 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사소한 태클을 거는 반대 의견도 좀 있어야지. 책도 말하지 않았던가.

 

“최선의 정책은 동료나 부하들이 다수 의견에 공공연히 반대할 수 있고 심지어 반대하도록 권장되는 회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p.76)

 

또 하나의 사소한 우려라면,

이 책이 권하는 다양한 방법론이 또 하나의 프로세스가 되지 않을까?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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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아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영화 ①
쿠바의 연인
정호현, 오리엘비스 / 이오스엔터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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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영화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러할 수는 없죠. 체제 순응과 체제 강요(협조)적인 영화 또한 난무하니까요. 그러니,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향한 감각의 촉수를 벼려야 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기.
여기, 함께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역시 권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이 영화들, 마을과 시민을 잇는 '레가토(음과 음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을공동체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요?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은 차곡차곡 쌓여서 발현되는 법이거든요.

당신과 함께 마을감수성을 자랄 수 있게 하는 이 영화들, 보고 싶습니다.

 

<쿠바의 연인>

경쟁찬양지대로서 치열하고 지랄 같은 한국살이에 지친 여자(정호현 감독), 쿠바로 여행을 떠난다. 춤과 노래 그리고 여유, 이곳은 한국과 다른 낭만으로 다가온다. 금상첨화, 연하의 잘 생긴 쿠바남자 오리엘비스와 사랑에 풍덩! 두 사람, 결혼에 이른다. 지극히 한국적인 기준으로 적(성국)과의 동침이다!

이 영화, 뭣보다 쿠바의 마을풍경이 인상적이다. 그 남자 집에서 정류장까지 걸어서 5분인데, 30분이 걸리기 일쑤다. 이웃들과 일일이 손잡고 이야기하느라 그렇다. 정겹고 살갑다. 그런 마을살이에 젖은 오리엘비스의 말, 인상적이다. "돈보다도 삶을 사랑한다." 당연한 말인데도, 이 말이 생경한 이유? 따로 없다. 당신이나 나나 한국에 살기 때문이다. 맞다. 우린 지옥에 산다. 지옥에서도 찰나처럼 찾아오는 행복을 모르핀 삼아 우리는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해피해피 브레드>

마을카페를 꿈꾼다면, 이 영화가 주는 환상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훗카이도 츠키우라 마을의 카페 마니. 미치도록 눈이 시린 도야코 호수를 배경으로 따끈따끈 맛있는 빵과 향긋한 커피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카페 마니의 풍경이다. 마을카페가 어떻게 힐링캠프가 되는지 엿보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라.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는 잔잔하고 소박한 일상에서도 누군가는 치유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가끔은 카페 마니를 찾아, 지랄 같은 세상사 모든 것을 놓고 커피와 빵의 향연에 심취하고 싶다. 홀수도 좋고, 커플도 좋다.

 

 

 

<일 포스티노>

마리오는 망명 온 파블로 네루다의 전용 우편배달부(일 포스티노)다. 여자 마음을 얻기 위해 詩를 알고 싶던 그, 네루다를 통해 메타포(은유)는 물론 세상이 詩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 시상을 싣는다. 베아트리체와의 사랑도 함께다. 詩를 통해, 마리오를 통해 드러나는 세상, 감동적이다. 영화의 제목이 ‘일 포에타(시인)’가 아닌 ‘일 포스티노(우편배달부)’인 이유,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의 일 포스티노가 되고 싶다. 메타포다. 마을의 일 포스티노, 매력적이다.

 


<카모메 식당>

이 영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대와 관계의 영화다. 핀란드의 한 마을, 커피하우스를 연 사치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피붙이는 아니지만, 정붙이로서의 연대 혹은 대안가족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들은 끈적끈적하지 않다. 뭣보다 그들, 생이 외로운 것임을 알고,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혼자임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의지하는 것도 민폐가 아니다. 그들이 마을이다. 식당(카페)이 곧 마을인 것, 식당에서 마을을 엿볼 수 있는 것, 행운이자 축복이다. 커피를 맛있게 하는 주문을 알고 싶다면, 영화를 열어볼 일이다. 참고로, 카모메는 '갈매기'라는 뜻이다.

 

 

[함께 보아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영화 ①
[함께 읽어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책 ①
[함께 읽어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책 ②

 

(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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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함께 보아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영화 ①
    from 맺고,따고,볶고,내리고,느끼고,사랑하라! 2013-02-16 23:23 
    예전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영화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러할 수는 없죠. 체제 순응과 체제 강요(협조)적인 영화 또한 난무하니까요. 그러니,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향한 감각의 촉수를 벼려야 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기.여기, 함께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역시 권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이 영화들, 마을과 시민을 잇는 '레가토(음과 음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
 
 
saint236 2013-02-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 포스티노 우연히 본 영화이지만 재미있게 봤던 영화입니다.

책을품은삶 2013-02-24 11:1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제겐 영원히 잊지 못할 영화 중 한 편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