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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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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매체를 둘러봐도, 사진'들'이 쏟아진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담은. 20년 넘게 전봇대를 오르내린 전기공, 정해진씨는, "전기원 노동자 파업은 정당하다"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이에 동료들은 대오를 이뤄 힘겨운 투쟁을 펼치고 있다. 사진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서울 창전동 아파트 10층 높이의 교통 관제탑. 이랜드-뉴코아 조합원, 박명수씨가 30일 가까이 고공 투쟁을 펼치고 있다. 사진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기시감이 일어났다. 지난 2003년 고공크레인 위에서 목숨 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어느 일하는 아버지, 고 김주익씨.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서도 초등학생 세 아이에게 휠리스를 사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던 그였다. 고공크레인에 올라, 세상을 향해 절규하던 그의 모습(사진)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10여년을 거리에서 붕어빵을 팔던 노점상인이었다. 고 이근재씨. 고양시 지자체의 폭력적인 단속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료 노점상들은, 그의 영정사진을 펼치고선, 지자체의 폭력적인 단속에 저항했다. 사진은 어디에도 널렸다.

#2. 11월11일, '범국민행동의 날'. 이른바 '신자유주의와의 전쟁'이었다. '노동자' '농민' 등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일부가 주요 참가자였다. 그러나, 경찰은 집회를 원천봉쇄하고자 노력했고, 광화문 현장에서도 물대포와 소화기를 이용해 참가자들을 진압했다. 무력진압도 예사였다. 사진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 는 70년대 구호가 아직도 유효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1970년 고 전태일 열사의 외침 이후에도, 그 엄혹함과 야만성은 한치의 나아감이 없는 것은 아닐까,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부끄러웠다. 전태일 열사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건만, 70년대와 다를 바 없는 구호가 여전하다니.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면서, 수전 손택의 고민에 더욱 공감했다. 어느 미디어를 접하건, 차고 넘치는 사진들이지만, 그것은 대개 철저히 무관심하게 소비됐다.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수전 손택은 말하지 않았던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락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아울러 사라예보에서 만난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과연, 사진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성찰할 수 있을까. 수전 손택은, 최소한 20세기 초반에는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의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은 독자들에게 스스로 말을 걸게 하는데 실패하지 않았고, 아벨 강스의 영화, <나는 고발한다>도 전쟁의 참상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버지나아 울프 역시,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을 보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거나, 전쟁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 것은 도덕적 괴물의 반응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그 성찰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부터, 전쟁(혹은 전투)이 발생할 때마다 참상이 필름에 담겨지거나, 베트남전부터 텔레비전을 통해 이것이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면서, 그것은 이미지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9.11이 비등점이 된 것 같다. '영화보다 더욱 영화 같은 상황'이라는 인식은, 그 참상을 "마치 영화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지가 안겨다주는 충격이, 한편의 영상처럼 소화되는 단계. 어쩌면 사람들은 새로운 유희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존재인 셈이다.  

그렇다고 성찰만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찰만 바라는 것도 사실 폭력이 될 수 있다. 사진을 통해 누군가는 더욱 호전적이 될 수 있다. 성선설, 성악설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보다 강한 자극을 원한다. 그리고 내성이 길러진다. 수전 손택 또한 말하지 않는가.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맞다. 우리는, 대개 관음증 환자이고, 타인의 목이 잘려나가고, 유혈이 낭자한 것보다, 내 손에 피 한방울 나는 것이 더 아픈 법이다. 전쟁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소식이라면,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저 내 것이 아니길 바라는, 타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자기 보호의 본성일 수도 있다.

나는 두렵다.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라도.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괴물'이 돼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세계'를 보여준다고, 광고하는 미디어들은, 기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 국한된 무엇, 점점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가치판단에 의한 거리만을 보여준다. 전쟁의 참상, 타인의 고통을 말한다고 보여주는 것 또한 대상을 타자화하는 것에 불과한 사진들이 차고 넘친다. 수전 손택은 이것을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작금의 미디어들의 사진 전시는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닐까. 특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의 능력을 잃은. 주류 미디어들의 이 같은 결핍은, 결국 미디어 수용자들의 판단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있는가. 너무 뻔한 상투구다. 언제 어디서나 접하는 그런. 누군가는 역시나 그럴 것이다. 그게 오늘날만의 문제인거냐고.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돼 왔다고. 전쟁은 항상 있었고, 비주류의 고통과 투쟁도 존재했다고. 그럼에도 문제는, 사람들이 이미지가 건네는 공포에 점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또 사진에서 우리는, 세계를 사고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지에만 휘둘리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 빨간띠를 두른 노동자들의 투쟁은, 누군가에겐 이미 식상한 이미지가 돼버렸다. "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들이 왜 그렇게 빨간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섰는가에 대한 이해는, 다른 세계의 것이 돼버렸다. 수전 손택의 말은 뻔하지만, 그것이 희망일 수밖에 없음을 호소한다.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이미지로부터 무엇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미지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행위. 나는 그것이, 어쩌면 이 세계를 좀 덜 슬프게 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희망을 버려!' 어쩌면, 나는 그것이 더욱 현실적인 대답이 아닌가 싶다. 수전 손택은, 여전히 탈선적인 전쟁의 종말을 보고 싶겠지만, 나는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것이 자아내는 매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끔찍함을 동경하는 인류의 본성이 한순간에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윌리엄 해즐릿도 그러지 않았던가.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 그래서, 전쟁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지거나 최악으로 가는 것만 막아도 다행이다. 수전 손택은 그런 면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가이며, <<타인의 고통>>도 충분히 읽어볼만한 책이다. 어쩌면 그도, 세상이 극도로 나빠지는 것을 막자는 생각에서 이 책을 서술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희망을 버려!", 라는 말은 비관이 아닌 현실 긍정이며, 고독한 자기푸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사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미디어를 통해, 쇄도하는 이미지들의 공습에 좀더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이미지들의 폭격이 일으키는 문제점 중의 하나는, 엇비슷한 처지의 사람끼리도 고통을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기득권층이야 그런 셈치더라도, 마냥 태연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조금씩 발을 빼야 한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소식과 인류를 짓밟는 해악들이 온갖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다손,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는 것은 아니듯,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몸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자극에 반응하는 뇌가 아니라, 자극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슴이다. 당사자가 고통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고문과 폭력을 연구한 영문학자인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악은 그렇게 평범하다. 남의 고통엔 관심없는, 그래서 엄혹한 시대의 풍경은 '악의 평범함'을 잉태했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전쟁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것이 일상에서의 어떤 고통과 참사를 대입해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잇단 분신과 투쟁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는 눈길, 노동자대회 참가자들을 폭도로 모는 시선. 이 모든 것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와도 연결돼 잇지 않을까. "너의 불행과 아픔이 곧 나의 행복과 기쁨"이 이 시대의 명징한 징후가 아니라면,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존중하되, 동정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챙겨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타인의 고통>>을 그렇게 읽었다. 타자를 분석하거나 교정하지 말고 돌봄의 윤리를 갖는 시선이 필요함을. 전쟁은 결국 인류를 타자화하는 미친 짓이고.

최소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지가 제공한 최초의 자극에 휘둘리는 일은 곧, 우리 안에서 키운 괴물에 잡아먹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은 더 끔찍하고. 수전 손택의 과제는 그래서 새겨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는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을 것은 물론,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까지 생각해볼 것을 권유하는, 수전 손택의 나지막한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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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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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에쿠니 가오리 지음, 소담출판사 펴냄, 2004).
처음 제목과 마주 대했을 때 어떤 의미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주말이 몇 개라고 묻다니. 일주일에 한번 있는 주말도 감지덕지, 부둥켜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은 마당에, 몇 개냐니, 몇 개냐니. 놀리냐, 놀리냐, 이렇게 되레 묻고 싶다. 물론, 에쿠니 가오리의 주말은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인다.

우연히 받은 선물이다.
선물 준 사람은 가벼운 책을 골랐단다.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건조함’을 좋아하는 나로선, 나쁘지 않다. 아니, 감지덕지. 아~싸 가오리~ 외쳐야 할 판이다. 더구나 처음 접하는 가오리의 에세이. 어떨까? 소설과 다른가? 그 건조함은 여전해? 에세이 주제가 결혼생활 행간이라. 그의 소설 속 결혼은 당최 환상이라곤 없었으니. 이른바 ‘정상성’이라는 그닥 동의하지 않는 통념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내가 접한) 가오리 소설 속 결혼이야기. 다른 사람의 결혼(사)생활엔 관심 없지만, 괜한 호기심이 일더라. 그의 결혼(이야기)는 뭔가 다르리라? 자신의 결혼생활은 소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론은 아니. 별 차이 없다.
최소한 그가 내뱉은 결혼의 일상은 (내가 아는) 여느 결혼과 그닥 다르지 않더라. 다만 그는 명쾌하면서도, 답이 없다. 그가 말하는 결혼은 ‘옳다 그르다’도 아니고, ‘좋다 나쁘다’도 아냐. 그저 일상에서 길어 올린 감정을 덤덤하게, 혹은 건조한 문체 속에서도 애끓도록 묘사하더라. 왔다리 갔다리. 그는 수시로 변덕을 오간다. “결혼하고서 생활에 색이 입혀졌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결혼은 야만” 혹은 “결혼은 struggle”이라고 툭 내던진다. 그래, 그게 사람살이지. 그래서, 냉정과 열정사이.

이거 정신병 아냐?
그래, 그는 툭 내던진다. “애정이란 병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애정이 있기에 모든 것이 골치 아파진다.” 역시 병이다. 그는 결혼이 아닌, 한 남자에 대한 애정(병)을 담는다. 물론 자기애를 기반으로 한. 그 애정이 일상과 뒤섞인 ‘결혼’이란 어떤 형태. 제도보다는 약간 친근한.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면서도 울 준비는 되어 있다.

결혼을 않은(못한?) 나로선,
(결혼에 대한) 환상 또한 거의 없다고 내뱉곤 하는 나로선, 그의 결혼 감상기가 흥미롭다. ‘외간 여자’도, ‘외간 남자’도 아니다. ‘외간 결혼’을 만나본 셈이랄까. 하지만, 난 결혼도 안(못)했는 걸.^^; 그는 결혼에 대해,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뭐 당연하다. 그저 담담한 감상을 흩뿌린 에세이니까. 그러면서도 위험하다. 이 에세이는 심기도 하고, 깨기도 한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한마디로, 외줄타기. 결혼은, 미친 짓일 수도 있고, 행복한 짓일 수도 있지. 어쩌면 광우병 위험 부위 같은 것이거나 유기농 음식 같은 것. 마음의 작용, 그리고 일상과의 접목. 일곱 빛깔 사랑.

나는 어쨌든, ‘풍경’이란 챕터의 이야기들이 인상 깊다.
다른 풍경이기에 더욱 좋다는. 십분 공감할만하지. 그건 사람살이에 대한 일종의 통찰이지.
“그 렇게 오늘도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다. 그때까지 혼자서 쌓아올린 풍경에... 나는 남편을 타인으로 의식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바로, 웨하스 의자.

부부가 ‘일심동체’라거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나는 믿지도 않거니와,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변치 않겠다는 새빨간 거짓 맹세도 탐탁찮고. 물론 한 순간만큼은 진심임을 믿지만.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서로의 세계를 넓히면 것으로 충분하지, 무슨. 이심이체, 빙고. 세계는 그런 이해와 오해의 과정 혹은 정반합을 거치면서 넓어진다. 나의 작은 새.

가을이다.
결혼하기 좋은 계절? 진짜? 난 몰라. 그건 당사자 입장에서 내뱉은 말일 테고. 하객은 축의금 뺏기는 계절. 그래도 당신이 즐겁다면 기꺼이 내 줄 순 있지. 대신 밥이나 잘 내주쇼. 그리고, 결혼식장과 피로연이 끝나고 나오면, 낙하하는 저녁.

알코올 중독자의 알코올처럼,
알면서도 멀리할 수 없는 음식물을, ‘devil food’라고 알려주던 가오리는 결국 “남편은 아마도 나의 ‘devil person’이리라”고 전한다. 흠, 그것도 재밌네. 나쁜 걸 알면서도 멀리할 수 없는 사람? 아니면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악마의 유혹?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해!

에쿠니는, 나는, 묻는다.
당신에게 ‘devil person’은 누구지?
아니면, 당신의 ‘devil person’은 몇 명입니까?
완전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지만, ‘devil person’은 프라다를 입을까?

그래,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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