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원래 쓰다 - 호모커피엔스의 탄생
박우현 지음 / 이스퀘어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커피 생짜 초보에겐 좋은 책이다. 허나 나에겐 좀 더 깊었어야 했고, 촉이 더 날카로워야 했다. 아쉬운 책이다. 쓴맛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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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2disc) - 청각장애인용 자막 삽입
황동혁 감독, 공유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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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군가 그러더라. 살아서 지옥을 맛보는 것, 그게 바로 배우자의 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배우자 없는 나로선, 끔찍할 것이라는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도가니>를 보곤, 하나 덧붙였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살아서 지옥이었다.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데도 그것은 생지옥. 

내가 직접 당한 것이 아닌데도, 나는 아프고 아팠다. 

성폭행. 강간과 폭행. 그것도 권력과 위계에 의해 저항조차 불가능하게 이뤄진.

더구나 그 권력은 타인의 장애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발판으로 삼았다. 개새끼, 아니 개새끼보다 더 못한. 

 

나는 꽤나 극장을 찾는 편인데,

극장에서 그렇게 많은 탄식과 한숨이 흘러나온 것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살아서 겪어야 하는 지옥에 대한 공감이리라.

어쩌면,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도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것이 더욱 마음을 후벼팠다.  
과연 우리는 그것을 진짜 모르고 있었던가. 

<도가니> 개봉 직후 이른바 '여론'이 들끓었다. 그것은 공분.

실재 사건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그 지옥을 방조·방치한 것은 물론 지옥을 조장한 세력과 협잡 아닌 협잡을 한 법과 질서에 대해서도 그랬다.

세상에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지고 있냐며 미친듯이 들끓는데, 나는 그것이 더 불편했다.

삐딱한 성정 때문이겠지만 씨바, 지들이 사는 곳은 다 천국이가 사는 곳인가? 

진짜 몰랐단 말인가? 고개를 돌리고 있던 것은 아니고? 내 것만 후비느라 제쳐놓은 건 아니고? 

 

<도가니>. 단순 장애인 성폭행 사건이 아니었다.

지금 이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과 구조, 그것이 어떻게 약자에게 지옥을 조장하는지 보여준다. 

교육청과 시청은 사건이 벌어진 시간 등을 거론하며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책임을 미룬다. 당장 내게 닥칠 비판과 책임이 두렵다. 그러니, 그들에겐 은폐가 유일한 능사다. 

경찰은 교장(교사)와 짜웅하고, 돈독(이 오를대로 오른 끈적)한 관계를 유지한다.

주민들은 그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실체도 없는 '지역사회 발전'을 들먹이며 가해자를 두둔한다.

교회라고 다른가. 사탄의 무리 운운하면서 진실을 파헤치는 강인호(공유)와 아이들에게 돌을 던진다. 돈이라는 신종 예수에게 죄를 씻은 죄 없는 자들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변호사? 그가 변호하는 건, 지옥이다. 물론 있는 자들에겐 천국. 

 

동물농장이요, 동물의 왕국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동물들의 리더는 동지 운운하지만 실은 그 동지 동무를 착취하고 이용한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권이요, 내게 돌아와야 할 이득이다.

<도가니>의 그 어이 없음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기제다.

학교장, 교사라는 권위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 사랑의 매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법과 질서의 유지는 또 어떤가. 경찰, 검찰, 판사, 변호사는 그저 이름을 달리한 자웅동체다.

이른바 '뿜빠이(N분의 1)'의 논리가 물밑에 흐른다.

힘 없는 99%의 약자가 대면해야 하는 것, 결국 지옥이다.

 

들끓는 여론에서 또한 불편한 것은 처벌('도가니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 왜 그것에는 처벌만큼 비중을 두지 않는가.

 

당연히 도가니법의 제정(장애인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대책)은 <도가니>가 가져온 성취이자 긍정적인 영향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처벌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양 착각한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왜 그렇게 치유에는 인색한가. 

향후 사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 당한 사람은 치유가 되는가? 지옥을 맛본 것이 희석되는가?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서 지옥을 맛본 사람, 개인에 대한 치유 아닌가. 사회적인 치유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예방을 위한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선적인 치유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회적 시스템의 구멍과 불합리로 지옥을 맛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인 치유이며,

그것이 가능해야 정상적인 사회다.

그들이 맛봐야 했던 지옥은 혼자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옥이요, 우리의 수수방관이 빚어낸 무간지옥이다.

 

치유부터 신경쓰자.

용서는 지옥을 맛본 아이들의 부모도, 할머니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는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트라우마, 그들이 겪은 지옥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

정혜신·이명수 선생님의 '와락'이 아름다운 이유다.

물론 당연하게 그것은 개인들의 몫이 아닌 국가와 공동체의 몫이어야 한다.

개인이 그렇게 나서도록 하는 것, 역시 이곳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다.  

 

공분이 제대로 방향을 찾아야 한다. 표적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야 한다.

슬프고 화나고 분노하는 것이 가해자들에게만 향해선 안 된다.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본디 시스템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단순히 선거에서의 승리로 끝낼 게 아니다. 시스템과 세계를 갈아 엎어야 한다.

지금의 시스템은 아니다. 그래봤자 기득세력, 민주통합당도 아니다. 처벌도 신통찮지만 치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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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지음 / 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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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맛집 천국이다. 인터넷, 특히 블로그 등을 보면 그렇다. 너나할 것 없이 먹을 것을 탐하도록 포스팅하고 맛난 것을 먹었다고 자랑질한다. 향도 없고 맛도 볼 수 없는 것이 사진으로 덩그러니 폼을 낸다. 그러나 그 대부분, 나는 믿지 않는다. 맛집 블로그의 자기 과시적 소개 행태 때문이다. ‘맛집 소개’라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많은 그들은 ‘난 이런 걸 먹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다. 남들과 ‘구별 짓’고 싶은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브런치’라는 호명이 가진 의미와 비슷한 맥락이다. 과거 아점이라고 부르던 것과 천양지차의 무엇. 브런치는 뉴욕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상품이 됐다. 브런치를 즐긴다는 블로그 포스팅은 엇비슷하다. 유럽(미국)풍의 레스토랑이 우선 배경이다. 메뉴명은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다. 재료가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럴싸하게 조립한 음식이 흉내만 그럴싸하게 낸다. 그리고 우아하고 여유 있게 그것을 먹었다는 ‘포스’. 그것으로 충분하다. 블로거는 뉴욕 라이프스타일 종결자로 거듭난다. ‘구별 짓기’에 성공했다.


뭐, 그게 그리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문제는 맛에 대한 주체성이 담겨 있지 않다. 내가 골라 먹은 맛집이라는 형식, 표방하지만,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오로지 남은 건 스타일뿐이다. 사진을 통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면 그뿐. 재료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없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땀 냄새도 없다. 오직 소비하는 상품, 소비하는 장소, 소비하는 자의 쾌락만 배치돼 있다.


그건 ‘맛집’이 아니다. 줏대 없이 움직이는 혀에 의해, 소비하는 자의 쾌락만을 위해 복무하는데 무슨 ‘맛’을 가진단 말인가. 맛집만 60만개에 달한다는 시대. 어딜 가나 맛집 천국이다. 그러나 진짜 맛집은 없다. 언론과 미디어는 그걸 충분히 알고 블랙 커넥션을 형성했고(<트루맛쇼>에는 그것이 잘 나온다), 줏대 없고 무지한 일부 ‘맛집 블로거’들은 그것을 조건반사적으로 따른다. 주체성이 없다는 건 그것 때문이다. 그들만의 맛집, 사진의 구도만 달리할 뿐, 립싱크가 난무한다.


그런 욕망, 조선 사대부들의 것과 통하였느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조선 사대부들에게도 음식의 그런 맥락이 있었다. 소고기, 고귀한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었다. 문화인이라는 자부심까지 심어주기도 했단다. ‘구별 짓기’하면, 일가견이 있는 그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당시 백성들은 소를 사람 대신 땅을 갈아 곡식을 심게 해 주고, 무거운 짐을 운반해 주는 동물이라 고기까지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의 육식관은 사대부들에 비해 염치가 있었던 셈이다.


헌데, 사대부들의 이런 ‘소고기 사랑(?)’은 조선의 건국이 큰 역할을 했다. 새 나라 조선이 들어섬과 함께 가장 사소하면서 강력하게 일어난 변화는 밥상이었다. 육식 금지가 풀린 것이다. 물론 힘없고 돈 없는 백성들에겐 이런 변화가 약 올리는 처사였다지만. 없어서 못 먹었으니까.


“조선 건국이 민중들의 식생활에 끼친 변화는 토지 개혁으로 ‘이밥’(이성계가 준 밥)을 먹게 된 것과 육식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소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p.48)


오호, 재밌는 음식문화사인 것 같지 않나? 《조선의 탐식가들》이 주는 쾌락(!)이다. 음식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엔 늘 생존 이상의 무엇이 있다. 이 책은 음식에 늘 시대와 사회가 담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먹는 것이 곧 사람이다!


‘먹는 것 갖고 왜 그러냐?’고 우리는 묻곤 하지만, 사대부들에게 먹는 것이 곧 사람이었다. 즉, 정쟁 상대를 공격하거나 역모 죄인의 간악함을 까발릴 때, 식탐 버릇을 문제 삼았다. 그럼으로써 도덕성에 타격을 입혔다. 명분을 만든 셈이었는데, 방금 말한 대로 ‘먹는 것이 곧 사람’으로 치환됐다. 먹어서 남과 구별 짓는 행위와도 이는 통한다. 


《조선의 탐식가들》은 사대부들이 왜 우심적(소의 염통을 얇게 저며서 양념간장으로 간을 하여 구운 음식)을 좋아하는지 언급한다. 우심적에 담긴 이야기 때문인데, 이 음식엔 ‘당신을 왕희지처럼 여긴다’라는 뜻이 있다. 저자는 사대부들이 우심적의 맛보다 그런 호사가 더 즐거웠으리라 추정하는데, 브런치라고 다를까. 브런치의 맛보다 ‘뉴욕 라이프스타일을 즐긴다’는 호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권력싸움에서 패배하면, 먹는 것 갖고도 공격을 당했다. 재밌는 건, 탐식이 도덕적인 치명상이었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흠집 내기로도 익히 사용됐다고 한다. 탐식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행위였다. 물론 그런 분위기였기에 조선 시대 양반들의 탐식 기록은 많지 않다. 탐식이 까발려지거나 부풀려지는 건, 권력의 눈 밖에 날 때다.


“조선 시대의 간관들은 탐식을 하는 관료를 공개적으로 성토하기도 했고, 당쟁을 벌이는 관료들은 정적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집요하게 상대방의 탐식 습성을 물고 늘어졌다.”(p.279)


그럼에도 먹는 것, 그것도 많이 먹는 것은 조선시대의 ‘대세’였던 것 같다. 외국에 조선하면, 대식국大食國으로 알려졌다고 책은 전한다. 18세기 조선의 일상을 쓴 샤를 달레, 《조선교회사서설》을 통해 이리 말한다. “조선사람들의 큰 결점은 폭식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양반이나 상민이나 많이 먹는 것을 영예로 여기고, 어릴 적부터 많이 먹어 위장을 늘려 놓는다.”


이런 말, 들어본 적이 있다. 중국인은 음식을 혀로 먹고, 일본인은 눈으로 먹고, 조선인은 배로 먹는다. 조선인을 비하하기 위한 말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탐식에 대해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건, 아마도 중세 기독교의 칠거지악을 통해서가 아닐까. 정욕,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허영. 탐식이 특히 지탄을 받은 건, 다른 죄악까지 불러 모으는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탐식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죄의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탐식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순수하게 먹는 것에 대한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새롭고 진귀한 음식을 먹는 것, 지위와 권세를 확인하고 보여주는 기회였다. 조선에서 탐식은 소수의 권세가들이 누린 특권이었던 셈이다. 맛집 포스팅이 그렇게 끊임없이 이뤄지는 것, 물론 조선의 권세와 다르겠지만 다 숨은 이유가 있다.      


탐식에 대한 비판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인 한편 권세가의 전횡을 견제하여 관료층의 부패를 억제하기도 하는 기능도 했다. 아울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역할도 했다. 권세가에게 탐식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대다수 기층 인민은 기아에 시달렸다. 특권층의 호위호식을 통제하지 않으면 인민의 분노가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도 일자리, 일자리 얘기하지만, 그것은 곧 먹는 것과 직결돼 있다.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탐식을 건드리는 건, 지배세력의 자기 방어와도 같은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인민의 분노 게이지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고 볼 때 즈음, 권력은 재벌의 탐식(!)을 비판한다. 최근의 ‘재벌 빵집’건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 유지를 위한 임시방편이다. 시스템을 확실히 바꾸거나 뒤집지 않는다. 정부가 잊을 만하면 출총제를 꺼내드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조선의 탐식가(혹은 조선의 음식문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우리 사회와 연관 지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먹는 것,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어떻게 먹을 것인가!


《조선의 탐식가들》은 더 나아가 어떻게 먹는 것이 바르게 먹는 것일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우선 저자는 바르게 먹는 것과 관련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낯설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 또 하나는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에 송나라 시인 황정견의 식시오관(食時五觀), 즉 ‘음식을 대하는 다섯 가지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인용한다. 


․ 음식을 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노고를 헤아리고,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라.

․ 자신의 덕행이 완성되었는지 결여되었는지를 헤아려서 공양을 받아야 한다.

․ 마음을 절제하여 지나친 탐욕을 없애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특히 맛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까탈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 음식을 몸에 좋은 약으로 알고 몸이 파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먹어야 한다.

․ 군자는 도업을 먼저 행하고 그 다음에 음식 먹을 생각을 해야 한다.


뭐, 다른 건 각자 알아서 해석하기로 하고, 내가 꽂힌 것은 바로 첫 번째 마음가짐이었다. 음식을 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노고를 헤아리고,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라. 커피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늘 가슴 속에 품은 명제이다. 내가 공정무역 커피에 꽂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이유이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먹을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가’를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내가 생각하는 탐식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말한 ‘탐식의 유형’, 시도 때도 없이, 너무 섬세하게 맛과 호화로운 음식을 추구하며, 게걸스럽게 너무 많이 먹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이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욕망은 더 이상 죄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정적인 죄라고 할지라도, 이를 어긴다고 경찰이 잡아가지 않는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약속’처럼 대량소비와 탐식을 미덕처럼 여기기까지 한다. 저자의 현실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거대한 식품기업과 언론이 가르쳐 준 ‘맛집’의 충실한 고객으로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개개인의 모든 욕구를 억압하면서도 유독 식욕만큼은 제동을 걸지 않는다. 도리어 더 많이, 더 맛있게, 새로운 맛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p.330)


고로, 나에게 탐식은, 맛의 주체성을 잃고, 화학조미료가 이룬 ‘(감칠)맛의 평등’에 중독됐으며, 거대 브랜드(의 공세)에 아무 생각 없이 끌려 다니면서 ‘짱’을 외치는, 재료가 어떻게 왔는지조차 알 생각을 않는다는 뜻이다. 많은 맛집 블로거가 그렇다. 그럴듯해 보이면 그것으로 끝이다. 혀와 코가 줏대 없이 움직이는 한편 눈으로만 먹을거리를 대한다.


그것은 죄악이다. 저자는 다른 범죄와 달리 탐식은 남을 해치지 않고 자신에게 해를 입힐 뿐이라고 했지만, 블로그 등을 통해 자신에게만 미칠 해를 남에게 전파하고 있으니, 그건 죄가 아니고 뭔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 분별해야 하는 이유이다. 맛있다는 음식을 찾아가 먹는 행위가 미식이 아니다. 저자는 내가 좋아하는 황교익 음식문화칼럼니스트(《미각의 제국》《한국음식문화박물지》)의 말을 인용해 미식을 정의한다.


황교익 칼럼니스트는 탐식을,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이라고 했고, 미식을, “음식에 담긴 삶을 맛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당신이 이전에 가졌던 미식에 대한 개념,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 남까지 망치는 탐식을 하고 싶지 않다면, 음식에 담긴 삶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신이 세상에 사소한 애정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쉽다. 나는 세상의 일부이자, 세상도 나의 일부임을 안다면. 


다시, 미식을 생각한다


당연히 나는, 다산 정약용이나 성호 이익처럼 음식에 대해 지나치게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 아니다. 오랜 유배생활을 버텨 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개고기를 애호했다는 다산은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라면서 한 끼 식사에 재화를 낭비하거나 너무 많이 먹는 것을 경계했다. 평생 소식(小食)을 실천한 성호 이익도 부유한 집에서 하루 일곱 번이나 식사를 한다고 질타하면서 조선이 가난한 원인으로 음식 사치와 대식을 꼽았다. 


나는 그렇게까지 먹는 것에 엄격할 자신, 없다. 이 책을 읽고, 단지 시를 읊고 싶었다. 고려의 문신, 목은 이색은 ‘배부른 하증(중국 진나라 무제 때 재상으로 탐식의 대명사이자 전설적인 탐식가)보다 배고픈 시인이 낫다’는 의미를 담아, “방장(식전방장)이야 배부르게 먹을 줄만 알겠지만 / 굶은 배는 시를 토해 낼 줄도 아는 걸요”라고 말했다. 탐식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담은 것일 게다. 진짜 굶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좋은 재료로 만든 좋은 음식은 절로 시를 읊게 만든다고 믿는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도 지인이 보낸 미나리를 먹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고작 미나리 먹으면서 웬 호들갑이냐 싶을지 몰라도, 역시 이것도 은유 아니겠는가. 채소 하나라도 이런 정성이라면 ‘미식가’라는 호칭, 충분하다. 저자의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빈낙도의 삶에 허용된 착한 사치이자 청빈한 삶에 대한 메타포로 언급했던 ‘순챗국과 농어회’도 먹고 싶어졌다.   

 

이른바 ‘맛집 블로거’랍시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나, 맛집이랍시고 간판을 단 음식점들에게 《조선의 탐식가들》, 필독서 되겠다. 심리학에서는 식탐의 원인을 결핍감에서 찾는다고 한다. 미식과 식탐은 그래서 심리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한다. 어떤 결핍이든,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먹는 것에는 진짜 중요한 삶의 문제가 늘 내포돼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맛집 블로거들, 이젠 먹을거리를 통해 제대로 삶을 담아낼 때다. 저자에 의하면, 조선 사대부들, 식탐은 많았지만 조리법을 외면해 조리서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문자를 독점했던 양반층이 조리법에 관심을 뒀다면 조선의 음식문화, 훨씬 풍성하게 꽃피웠을 거라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아쉬움에서 느낀 바 있을 것이다. 맛집 블로거들이 탐식 아닌 미식의 자세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맛보는 공포의 육개장 같은 맛집 타령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개념을 탑재한 맛집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느낀 바가 없다고? 그냥 처먹고 뒤져라. 나는 그들에게 ‘악의 평범성’을 붙여주겠다. 고 투 헬(Go to Hell).

 

《조선의 탐식가들》, 재밌고 사유도 하게 만들어준다. 두 마리 토끼 잡는 것, 어렵지 않아요~! 앞서 언급했던 황교익 칼럼니스트의 저작, 《미각의 제국》《한국음식문화박물지》을 출판한 곳이 이 책과 같은 '따비'이다. 이들 저작물이 비슷한 맥락에서 출판된 것 같은데, 따비, 음식문화전문으로서 참 좋은 출판사로 여겨진다. 고맙다. 좋은 책들 내줘서, 내 세계를 넓혀줘서. :)

 

 

p.s. 커피와 두부의 공통점


이 책에서 하나 더 건진 것이라면, 커피와 두부의 공통점이다. 맛있는 두부를 만들려면 콩물을 끓이는 온도와 시간이 중요하단다. 즉, 몇 도의 온도로 몇 분을 끓이느냐에 따라 두부 맛이 달라진다. 커피라고 다르지 않다. 커피를 볶을 때, 커피를 추출할 때, 역시 온도와 시간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두부를 언제부터 먹었을까. 책에 의하면, 두부는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두부는 사찰에서 만들어 부처에게 공양하던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두부는 인민들이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고 한다. 콩을 갈고 콩물을 짜는 데 힘이 많이 들고, 뭣보다 인민들은 두부를 만드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콩물을 끓이는 온도와 시간, 불의 세기를 잘 조절해야 하는데, 숙달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잘 만든 두부는 사대부들 사이에 선물로 주고받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두부가 사대부가에 널리 퍼진 것은 제사상에 두부를 올리면서부터라고 한다.


커피도 귀한 음용수였다. 커피를 먼저 자신들의 음료로 받아들인 이슬람권에서는 커피를 다른 문화권에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철저하게 커피콩의 유출을 막았다. 아울러 커피의 초기 역사에서 수도원에서 커피가 제조됐고, 수도사들이 커피를 즐겼다. 이후 유럽으로 전파될 때도 커피는 왕과 교황, 귀족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물로 성가를 드높였다.


얼마 전, 나는 커피를 마시러 부암동에 갔다. 헌데, 이 책을 보니 조선시대 최고의 두부는 “서울 장의문 밖 사람들”이 만든 것을 꼽았다고 한다. 장의문은 지금 부암동 자하문의 다른 이름인데, 지금 부암동에는 최고의 두부 솜씨를 이어받은 두부집이 없는 대신 최고의 커피집 가운데 하나가 있다. 최고의 두부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최고의 커피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부암동에서 커피를 만들고 내리고 싶다.


아울러, 조선 중종 때 안동 선비 김유가 전통 요리법을 기록한 책, ‘수운잡방’의 이름을 딴 음식을 나의 커피하우스에서 대접하고 싶다. ‘진짜’ 맛집 블로거들에게. 참고로, 수운잡방이란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 대접하는 특별한 요리’라는 뜻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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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 문학의 비밀을 푸는 18개의 놀라운 열쇠
정여울 지음 / 이순(웅진)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우선, 나는 이 책을 온전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할 수 없다.

저자가 '정여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군가!

그녀, 한겨레에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코너를 연재하는 문학평론가이다.

나는 그것을 꼬박꼬박 읽는 독자로서, 뭣보다 이 코너가 주는 '망치 한 방, 전구 반짝'을 좋아한다.

말인즉슨, 그 글은 자주 세상의 진실과 마주대하게 만들고, 나를 성찰하게 한다. 

그녀의 글은 또한 미려하며, 번뜩인다.

가령, 몇 주 전에 봤던, 앞뒤 맥락없이 제시하지만, 이런 글 앞에 나는, '형님!'했다.

그리고, '사랑'을 다시 생각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청소년인문학>의 업그레이드판이다.

2주에 한 번 그녀의 글을 보는 것, 감질났는데, 이런 축복이 있나. :)

 

정여울은 "우리의 다채로운 삶을 담아내는, 크기도 문학도 일정하지 않은 그릇"인 문학에 대해 조곤조곤 말을 건다. 문학의 역할부터 문학의 기법, 문학의 내용 등 문학과 친구가 되고, 연애를 하는 법을 알려 준다.

콘셉트, 한마디로 이렇다. "문학아, 놀자~"

 

아~ 좋다. 《정여울의 문학멘토링》에 대한 나의 소감이다.   

책 덕분에 문학이랑 더 잘 놀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문학이랑 아삼육처럼 지낸 사이는 아니다만,

이전부터 문학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고, 이 책을 통해 그 힘을 확인한 셈이랄까.

 

뭣보다, 슬픔에 대처하는 문학의 자세.

얼마 전, 나는 거듭 언급했었다.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 본명 카렌 블릭센(Karen Blixen)). 

그녀, 우리가 영화로 더 익숙한, 영화의 원작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썼다.

이 책, 디네센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영화 내용처럼 그녀는 커피 농장을 일구다 말아먹었고, 사랑을 잃었다.

그런 '슬픔' 앞, 그녀는 이야기를 썼고, 이렇게 말했다.

 “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can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맞다. '문학의 힘'이다. 

정여울의 말처럼, "인간이 상처에 ‘아파하는 법’을 몰랐다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문학은 인류가 입었던 수많은 상처의 박물관이다. 또한 문학은 인류가 입었던 수많은 상처의 치료법이 숨겨진 지혜의 보물 창고다." (p.201)

 

그러기에, 문학은 쓴 사람은 물론이요, 그것을 읽는 사람에까지 치유의 권능(!)을 발휘한다. 상처는 문학을 통해 치유의 길을 걷는다. 물론 그것이 완전하진 않아도,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문학은 인간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의 눈물과 피를 먹고 자라나는 영혼의 원시림이다." (p.203)

 

정여울은 더 나아가, 문학의 '사회성'까지 언급한다. 문학에 드러난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로,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공감하게 만든다고. 

 

맞다. 프랑스혁명의 지적 동력은 루소 등이 쓴 찐~한, 당대로선 포르노소설에 가까웠다고 일컬어지는 '연애소설'이었다.

당대의 인민들은 그 연애소설을 통해 주인공이 처한 현실에 '공감'했고, 

그것이 혁명에까지 이르는 동력 중의 하나가 됐다. (by.《인권의 발명》)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공감의 촉매가 된다는 것. 그것이 또한 문학이 지닌 강력한 힘임을 이 책은 강조한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문학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타인의 아픔을 자발적으로 느낄 줄 아는' '공감의 능력'을 키우게 한다. 

 

"우리는 그렇게 문학을 통해 ‘나의 상처’를 넘어 ‘세상의 상처’와 교신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pp.208~209)

 

나 역시 문학 덕분에 위로 받고, 조금씩 슬픔의 늪에서 나를 건져올렸다.

많은 경우, 이별한 직후였다.

한 없이 아래로 침잠하던 나는 詩를 붙잡고 견디고 버텼다. 책과 함께 했다.

문학은 어떻게든 개별의 인간을 놓지 않는다. 손을 내민다. 눈을 맞춘다. 어깨를 빌려준다. 문학은 그래서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이다.  

 

당연하게도 책은, 개별의 슬픔에 공명하는 문학의 힘만 언급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상상력이 살아 숨 쉬는 보물창고”로서 문학이 문명을 어떻게 지탱했는지도 언급하고, 일상 속에서 기적을 발견해내는 능력을 문학을 통해 어떻게 배우는지도 알려준다.

문학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라면,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정여울은 문학 속 '악역'의 진짜 매력은 '얼마나 잔인한가'가 아니요,

'주인공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로 결정된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곧, 우리는 문학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됨을 의미한다.  

혹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를 묻는다.

물론 문학이 답을 줄리는 없다. 문학의 역할은 딱 그것까지다. 질문하기.

그것으로 족하다. 답까지 준다면, 그건 참고서(문제집)지, 문학이 아니다.

 

좀 과장하겠다.

우리는 문학이 있어서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즉에, 인류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어야 했으나, 문학이 그 시간을 늦추고 있다.

정여울은 그것을 18가지 지도로 설명을 했다.

당신도 읽어보면 좋겠다. 문학이 좀 더 가깝고 진득한 친구이자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엔 포기하지 않은 꿈이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묘사처럼.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의 잡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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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노동. 엄청나다.

모든 지성과 땀이 총력을 다해 이룬 결과이리라. 

그것은 저자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책을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 당사자들, 특히나 눈에 보이지도 않고, 기록으로 남을 수도 없는 사람들의 노고(노동) 역시 담겨 있다. 책은 단순하게, 지성만을 담은 결과물이 아니다.

 

그러니, 한 권의 책을 '까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안의 노동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노동 자체의 신성함과 별개로 노동의 결과물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노동과 그 결과물은 별개의 것이다. 영화가 그렇듯 책도 마찬가지다. 

 

사실, 좋은 것만 말해도 부족할 판국이다. 세상에 얼마나 좋은 책이 많은가 말이다.

나쁜 책 혹은 쓰레기라고 불려도 시원찮을 책까지 시간과 공을 들여 말하는 건, 피곤한 일일 수 있겠다. 

 

이 책, 《리딩으로 리드하라》. 그래도 말해야겠다.

저자가 나름 책을 위해 쏟은 시간과 노력, 노동은 분명 존재하고 인정하겠지만,

그 결과로 나온 이 책, 설익다못해 썩었다.

주장을 펴기 위해 조사하고 알아봤다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조악하고 비약 투성이다.

 

특히, 위험하다.

불온해서 위험하다면야, 이 불한당 같은 체제를 바꿀 수 있는 동력인가 해서 반가워하겠지만, 

이 위험은, 이런 경우다.

고기가 썩었는데, 어떻게든 팔려고, 나쁜 것을 감추기 위해 소스 등으로 간을 듬뿍쳤다. 

마음의 복통을 일으키고, 삶을 혼선에 빠트릴 위험.

고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도축업자가 아니라, 어설프게 칼만 들 줄 아는 정육점 종업원이 칼놀림을 하는 경우라고나 할까.   

 

그래, 왜 이런 비유를 했는지 나도, 근거를 들어야겠다.

 

《리딩으로 리드하라》가 그토록 강조하고자 했던 인문고전. 

요즘 이른바 '대세'의 일환으로 자리잡은 장르인데, 백번 양보해서 강조하는 것,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방법론이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다. 더 나아가, 알맹이도 없다. 

 

이 책, 지겹도록 '천재'를 들먹인다. 강박관념처럼 천재에 집착한다. 

우리가 그토록 천재를 열망했던가, 착각할 정도로, 이 책은 '천재 나팔수' 노릇을 한다. 

평범한 아이가 어떻게 천재가 됐고, 천재가 세상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데, 그 천재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거의 오롯이 인문고전. 다른 이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이 힘들게 찾아낸 결정적인 무엇도 아니요, 무조건 인문고전을 많이 읽었단다. 그것이 다다.

 

책의 너스레는 한마디로 호들갑의 극치다. 한 구절을 보자.

 

"...1만 엔권 지폐의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 게이오 대학을 창립한 위대한 교육가로 칭송받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네 살이 되도록 전형적인 시골 촌놈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스물 다섯에 에도(동경)에 게이오 대학의 기원이 되는 학당을 열 정도로 진보한 지식인으로 변신했다. 약 10년 사이에 바보에서 천재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는데, 비결은 다름 아닌 지독한 인문고전 독서였다." (p.48)

 

하급무사의 아들. 전형적인 시골 촌놈의 삶. 이것들이 어떻게 '바보'로 단정지어질 수 있는지, 모른다. 저자만 알려나?

 

그리고 게이오 대학의 기원 학당을 연 진보한 지식인. 그것을 천재로 단순 설명한다. 그가 말한 천재가 당최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이렇듯 엉뚱한 논리와 결론으로 늘 치닫는다.

우리 교육의 문제를 들먹인다. 초중고 12년 교육을 받고도 지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인재가 되기는커녕 바보가 되어 사회에 나오는 문제.

배우면 배울수록 무능한 사람이 되고, 시키는 일만 하는 바보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에 뿌리를 둔 잘못을 지적하면서, 책이 내린 결론은 고작 이렇다. 

"학교는 다녀야 한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최고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

 

시스템을 거론하는가 했더니, 그 결론이라는 것이 최고의 학교를 다니라는 충고다.

돈과 권력이 있어야면 이른바 '명문'도 다닐 수 있는 현실을 모르는 건지, 한심한 충고다.

책은 아예 맛이 가기로 결정한 양, 한 방 더 날린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는 없다!"

 

빈민들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교육 프로그램인 클레멘트 코스의 사례를 들면서 책은 아래와 같은 억지주장을 편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문맹을 천재로 만든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지능이 낮은 아이를 천재로 변화시킨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평범한 학생들을 아이비리그 졸업생들보다 뛰어난 인재로 만든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둔재를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다. 

 

나는 이 책이 말하는 '천재'라는 단어가 무엇을 가르키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둔재고 지능이 낮아서 그런가 본데, 책에 의하면, 나는 인문고전 독서가 부족한 탓일 게다.

 

그러면서, 책이 내놓은 확신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만일 철학고전 독서교육이 제대로 정착하면 우리나라는 유대 민족보다 더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함은 물론이고 천재들을 지속적으로 길러내게 될 것이라고."(p.84)

 

철학고전 독서교육이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정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것이 천재, 노벨상 수상자와 어떤 관련을 맺는지, 알 수가 없다. 책은 그저 우격다짐이다. 

 

아울러, "인간은 본래 천재로 태어난다는 것이 교육학의 정설"(p.92)라고 주장하는데,

교육학 전공한 분들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진짜 그런지, 나는 궁금하다.

 

이 얼치기 인문고전 동기부여 책은 천재 타령을 부자 타령으로 옮기며 자폭한다. 

 

돈, 지금 시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책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인문고전 독서와 돈을 결부시킨다.

저자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자본주의니 부자니 투자니 하는 말을 싫어함을 전제로 하고 이 말을 꺼낸다.  

 

"세상에는 인문고전 독서에서 얻은 사고력과 통찰력을 '돈'과 관련된 쪽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이 세계 경제학계와 금융계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을."(p.113) 

 

인문고전을 통해 사고력과 통찰력을 기르고 얻을 수 있겠다. 

그러나 돈과 관련된 쪽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 다른 문제다. 그런 사람들이 경제학계와 금융계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 그게 인문고전의 사고력과 통찰력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인문고전이 그저 '클렌징 폼'이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포장'일 수도 있다.

 

인문고전이 돈을 벌게 해 준다는 식의 주장은, 인문고전의 힘을 강조하거나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인문고전의 힘을 개무시하고 되레 좁게 만드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도 비약한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이 인문고전 독서광이자 저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문고전 독서로 다져진 사람들의 두뇌에서 나왔다. 이는 인문고전 독서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향을 알 수 없고, 부를 쌓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p.114)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지금 그 부작용이 '미친놈 널뛰기'하듯 불거져 나오는 상황이고,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면서 새로운 시작이 요구되는 시점인데, 책은 오히려 그런 움직임에서 역행한다.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의 본질조차 모르는 '무식쟁이'임을 스스로 토로한 셈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자세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또 있다.

  

우리가 맞닥뜨렸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책은, IMF가 이런 시절부터 인문고전 독서광이었던 천재 경제학자의 머릿속에서 탄생했단다.

그래서, 그 경제학자 이상으로 인문고전 독서에 미친 경제학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IMF위기 때 우리나라가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거란다.

기똥차다. 이런 논리의 비약, 인문고전 독서가 알려준 혜안인가?

 

물론, 커밍아웃이 없는 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맹렬한 신도임을 고해성사한다.

신자유주의의 거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대한 반쪽 평가('현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철인적 지도자')만 언급하고선, "신자유주의의 역사는 곧 인문고전 독서가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책은, 욕 먹는 한이 있어도 외치겠다고 부득불 우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 왜 케인스나 하이에크보다 더 위대해지거나 동등해지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서구 경제학자들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섬기는 데 만족한 듯한 모습을 보였느냐고.

서구 경제학보다 우월하거나 동등한 한국만의 경제학을 만들지 못하면 영원히 금융 종속인 상태로 살아갈 거라고.

 

"한국 경제학계의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또는 이순신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 영웅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제넘은 이야기들을 했다. 혹시라도 반감을 가진 독자들은 내 치우친 열정을 용서하기 바란다."(p.125)

 

그건 열정이 아니다. 과도한 비약이다.  

또라이도 불온하면 좋은데, 이건 불온이 아니라 체제순응적 깔때기 짓이다.  

 

나는 의심까지 한다. 재벌가에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은 설마 아니겠지? (실제로 저자는 강연에서 재벌그룹 일환에게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했다고 말했다!)

책은 이병철, 정주영을 제대로 섬긴다. 이병철이 '인재경영'이란다. 『논어』에서 비롯됐단다.

정주영은 '의지경영'으로 추켜세운다. 『채근담』과『대학』 등의 고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단다.

그리고 경영자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이병철, 정주영 이상의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은 인문고전을 읽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이상한 주장은 곳곳에서 등장한다. '천재'만큼은 아니겠지만, 인문고전 쫌 읽었다는 양반이, "수신修身은 내팽개친 채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바뀌어야 한다는 식의 어려운 주장을 내세우는"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공부는 젬병이다. 그래놓고선 천재의 뇌구조를 들여다봐서 얻은 결론이, 고작 부자 되세요?  

 

그래, 책의 말마따나,

나는 '돈 있는 사람만 대접받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부자는 갈수록 더 부자가 되고 빈자는 갈수록 더 빈자가 되는 우리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다.

떨리는 목소리로 감히 묻고 싶다고 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그래, 말해주마. "《리딩으로 리드하라》 읽고 있다. 토 나올 뻔 했다."

 

더 나쁜 건, 첩첩산중인건, 종교적 근본주의자 면모까지 덧붙인다는 거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받고 천재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 중 불행한 삶을 산 이들은 『성경』을 부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p.103)

 

책은 그 예로, 감옥을 들락날락하고 여자를 사귀지 못하는 성격장애로 고생했다는 등의 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를 든다. 더불어, 『성경』을 부정했기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시대의 천재들도 많다고 덧붙인다.

 

대체, 어떤 조사를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나는 책이 담은 멘탈을 심히 의심한다.

하긴, 책은 진짜 자신의 생각 따윈 없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만 내세우고 싶은 거다.

인문고전을 읽는 것만으로 천재가 되고, 화폐를 긁어모으고, 리드할 수 있게 되는 사회?

조까라 마이싱. 인문감수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면서 있는 척 위장하는 게 더 나쁘다.  

 

인문고전의 진짜 힘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다.

뭣도 모르면서 찌껄이는 건 나도 매 한가지겠지만, 책의 주장은 한 없이 위험하다.

보아 하니, 꼴통 신자들 이미 양산해 놓고 있는 모양새다.

아마도 책이 말한 주장대로 따르자면,

이들이 이지성을 멘토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천재들이 될 터인데, 심히 관심 끊을란다.

리드 잘 해보시고, 나는 빼주시라.

 

마성의 김꽃두레(tvn 코미디 빅 리그 <아메리카노>의 안영미 캐릭터)가 말한다.

"이런, 리딩으로 초딩 되는, 허~접 같은 경우를 봤나~" (꼭, 꽃두레 톤으로!)

부릉부릉, 할리라예~

 

별 한 개도 아까우나, 백만 스물 두 번 양보하여, 인문고전 독서를 권장했다는 점에서, 에라~ 선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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