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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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읽었다. 은밀한 욕망이었으니까. 벌건 대낮, 그 욕망을 들춰내기에 나는 용기가 없었다. 아니, 밤이 적당했다고 해야 하겠다. 일흔이라는 나이가 지닌 욕망 때문에. 인생의 황혼에 다다른 일흔. 하루의 시간에 대입하자면 밤이 적당하겠다. 그 일흔이 은밀하게 욕망하는 시간은 열여덟. 밤은 낮을 원하고 있었다. 달은 해를 꿈꾸고 있다. 그러니, 일흔의 은밀한 욕망을 만나는 시간은 밤이어야 했다.

은교. 그 이름이 그렇게 은밀한 것인지, 나는 처음 알았다. 불멸의 내 젊은 신부, 내 영원한 처녀. 이적요는 은교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괴테가 떠올랐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팔십을 넘어서도 창작활동을 계속 했다. 여든 둘, 그는 《파우스트》2부를 탈고했다. 60년 이상, 괴테의 창작의 샘에선 물이 솟은 셈이다.

섣부르게도 나는 그 창작의 근원 중 하나로, ‘사랑’을 놓는다. 아니 ‘욕망’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그것. 그러니까, 사랑은 욕망의 다른 형태!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괴테 연애사의 한 정점은 1823년. 그의 나이 일흔 넷, 굳이 순서를 붙이자면 여덟 번째 여인, 울리케 폰 레베초를 만났다.

범인의 시선에서 놀라운 건, 당시 울리케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괴테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누군가는 (더러운)스캔들, 노망, 주책, 추문이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글쎄.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랑은 당사자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일흔 넷과 열아홉. 제 아무리 대문호이자 예술가였던 괴테지만, 모르긴 몰라도 힘들지 않았을까. 오죽했으면 괴테, 당시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통해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라고 읊기도 했다. 《은교》에 나와 있다. A. 앙드레가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에서 읊조린 시구.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이적요의 마음이리라.

 

어쨌든 괴테와 울리케,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괴테는 여든 셋에 생을 마감했다. 이후 더 놀라운 건, 울리케. 그녀는 아흔다섯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글쎄, 괴테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열아홉에 받은 일흔 넷의 사랑이 어떻게든 그녀의 생애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괴테의 이런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내게, 열여덟 은교를 향한 일흔 이적요의 욕망을 추하다고 덮을 일은 아니었다. 사실, 은밀하다고 혼자서만 펼칠 것도 아니었다. 그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본디 그런 것이다. 이적요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그것이 국민시인의 옹색한 변명이자 자기 옹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적요가 말했듯, 사랑은 갇힐 수 없는 무엇이고, 본래 미친 감정이다. 동의한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사회의 시선 운운하는 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진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단정한다.

다만 은교와 이적요의 문제는, 각자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 넘을 수 없는 벽은 그것이다. 그럼에도 이적요의 이 짧은 고해성사는 가슴을 덜거덕거리게 만든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p.11) 

‘본시창(본능은 시궁창)’이라지만, 나는 그 시궁창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꽃이 핀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이른바 도덕 등의 사회적 잣대를 들어 삿대질하거나 뒷담화를 구시렁거릴 것이다. 비루한 그들만의 잣대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 아니다. 사랑은 오롯이 당사자의 것이거늘. 오지라퍼들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입방아를 찧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흥분하고 있었나 보다. 책에는 그 어떤 농익은 연애보다 더 은밀하게 내 몸을 휘감는 관능(혹은 욕망)이 있었다. 늙는 것은 죄가 아니고, 그 욕망은 자연이었다. 사회주의운동을 한 혁명 전사,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자연이 아니다. 꿈이요, 목표다. 그러나 사랑은, 생피처럼 더운 욕망은 자연 그 자체! 이적요의 몸 깊은 곳에서 솟은 샘물. 이적요가 지닌 자연. 그것은 또한 우리 각자가 지닌 자연이다.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젊음이 지닌 아름다움이 자연이듯, 늙음도 자연이요, 사랑이라는 욕망도 자연이다. 은교의 옴씬한 발목 인대에 시인의 욕망이 꿈틀댄 것도 자연이다. 그것이 지옥일지라도 자연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욕망하는 것을 멈추지 못함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이므로 어찌할 수가 없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갈망에 감정이입을 한 것은 그런 이유였으리라. 은교는 곧 나의 연인이었다. 나는 이적요와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은교를 향한 욕망은 또한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건 이적요마냥, 은교가 로리타라서 그런 게 아니다. 나도 영원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소모적이고 쓸쓸하며 슬픈 동물인 남자였기 때문일까. 영원에 가까운 여자를 향한 갈망이었던 걸까.


밤은 그것을 꿈꾸게 하기에 충분하다. 누구에게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욕망이 있다. 나라고 다를까. ‘사회’라는 틀 안에서 우리 각자의 짐승(욕망)은 꼬리를 내리고 있을 뿐이다. 이적요는 그것을 말했다.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빌리지도 않고, 자연 그대로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파괴하거나 해악을 미치게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찾았다. 욕망과 본능을 무시한 죄인이었던 자신의 거짓 인생을 내팽겨 쳤다.

『은교』는 단순히 은밀한 욕망의 이야기가 아니다. 은교도 단순히 열여덟 소녀가 아니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불온한 상상을 불러오면서 예민한 감각의 촉을 세우게 한다. 직접적인 섹스(장면)보다 더 끈적끈적하다. 불가능한 꿈을 향한 우리 깊은 곳의 은밀한 욕망을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하기도 한다. 목표를 꿈으로 착각하고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김훈이 그랬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의 날선 진실이 가진 욕망보다 대담한 노출을 한 여자가 애인의 허리를 안고 활보하는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낀다고. 그래서 성적 매력이 거리를 활보할 때라야 나라의 힘과 겨레의 기쁨이 드러난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볕이 뜨거워지는 시간이 좋다. 음란하다고, 변태같다고 찌푸려도 어쩔 수 없다.

 

은교가 없는 이적요의 하늘, 혼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을 것 같다. 힘도 기쁨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원할 수가 없다. 숏팬츠와 레드룩으로 무장한 은교의 모습, 그것이 자연이요, 생의 활력이다. 싱싱한 행복이다.


이 책, 관능적이다. 그래서, 밤에만 읽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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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만 명을 어떻게 죽일까? -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진실이 중요한 이유
앤디 앤드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에이미팩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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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속는 것이 거짓말이라지만, 사람들은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으면 믿는다. 세월 먹으면서 뼈저리게 절감한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건 ‘사실’ 여부와 상관없더라. 객관적 사실을 들이댄다고 사람들이 바로 마음을 바꾸는 건 아니다.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호소해봐야 그건 넋두리일 뿐이다. ‘쇠귀에 경 읽기’는 그래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사실은 늘 변함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삶이 반드시 사실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신봉하는 건, 삶의 근거는 (자신의) 믿음이다. 즉, 가치(관), 지각, 생각, 관념 등이다. 사실을 폄하하자는 건 아니지만, 사실은 현실을 이루는 날 것의 질료에 불과하다. 현실 자체가 아닌 셈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접하고 난 뒤 그것을 해석할 따름이다.


거짓말을 ‘잘’ 하는 것이 정치인(꾼)의 미덕이 됐다. 어쩌다 그리 됐을까? 표절 안 했다고 우기던 자식이나 제수씨를 추행 의혹이 있던 놈 모두 국회의원 당선자가 됐다. 그리고선 탈당을 했다. 탈당의 변(명)이 우습다. ‘박근혜’라는 거짓말 고수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란다. 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란다. 아니, 대체 그 당에게 부담이 될 것은 무엇이며, 박근혜라는 작자에게 폐가 될 것은 무어란 말인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탈당이 아니라,(혹은 출당 여부가 아니라) 국회의원 당선자 직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 당은 그런 수준의 작자들이 버글버글한 오합지졸들 아니던가. 초록동색이 탈당이니 출당을 거론하는 걸 보니 우습고 화가 난다. 그리고 궁금했다. 대체 우리는 왜 자꾸만 거짓말에 속는 것일까?


《How do you kill 11 million people?(1,100만 명을 어떻게 죽일까?)》는 그 이유를 알려준다. 제목의 1,100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숫자)이다. 정확한 숫자는 11,283,000명. 1933년부터 1945년까지.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죽은 이들. 이 기간 희생된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한 전사자 5,2000,000명은 여기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 숫자, 지금의 서울시민 숫자다. 어마어마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당시 히틀러는 측근들에게 이리 말했단다. “사람들은 생각이란 걸 안 해. 그러니까 뻥을 크게 치라고. 쉽고 간단하게 말해. 계속 말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들은 그걸 믿는단 말이지.”(p.53) 별 볼일 없던 우익청년 히틀러가 가진 핵심적인 무기였나 보다. 거짓말! 그는 자서전을 통해서도 이리 언급했다. “엄청난 규모의 대중들은 아주 작은 것보다는 거대한 거짓말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


저자 앤디 앤드루스는 책의 제목으로 드러난 질문의 답을 단순 명쾌하게 지른다. Lie to them(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라)!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몰랐었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가 독가스를 마셨다고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등에서 독가스로 죽은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그리 믿고 싶었던 건가보다.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러나 그들, 수용소로 강제 이주된 것이 아니었다.


‘악의 평범성’으로 알려진, 일명 ‘마스터(Master)’로 불렸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그는 1941년 12월 ‘최종 솔루션’을 실행하라는 지시문을 하달 받고, 다국적 기업의 총수처럼 과업을 수행했다. 웅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열정적인 스태프들을 고용했으며, 전체 프로세스를 면밀히 모니터링 했다. 목표를 위해 회심의 일구로 던진 전략은 거짓말이었다. 이런 말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유태인 여러분! 러시아 군이 동부 전선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보호 조치를 이렇게 급박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는 점 사과드립니다. 불행히도, 설명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의 안녕만을 원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직업을 갖게 될 것이며, 부인들은 살림을 하고 자녀들은 학교에 가게 될 것입니다. 풍요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p.45)


많은 유태인은 자발적으로(?) 발걸음을 뗐다. 수용소로 향했다.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곤 아주 극소수를 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저 말. 어디선가 많이 접한 말 같지 않나? 기시감 말이다. 특히나 저 풍요로운 삶. 747공약을 들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다는 감언이설이 ‘오버 랩’ 된다.


아니나 다를까. 히틀러는 더 나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다른 것을 약속했다. 이른바 ‘더 밝은 미래’다. 2007년 대선, 이명박 후보의 가장 강력한 선동(?)은 이것이었다. “경제! 확실히 살리겠습니다.” 당시의 홍보물은 그것을 ‘사실’로 적시하고 있다. 구호는 ‘전 국민 성공시대’. 단 한 명의 실패나 낙오도 없는 성공이 일상화된 꿈같은 유토피아.


유권자들은 대체 무엇에 혹했던 것일까? 경제가 죽기라도 했다고 믿었던 것일까? 국민 모두가 성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일까?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었던 것일까? 4년이 넘게 흘렀다. 살리겠다던 경제, 어떻게 살렸는지 궁금하다. 전 국민은 성공은커녕 한숨만 늘고 불행해졌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물론 이명박 정권의 거짓말 덕분에 덕을 본 아주 극소수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4년 전 경제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명박은 좀 더 윤택하고 풍요로워지고 싶은 사람들의 강력한 욕망과 딱 맞아떨어졌다. 부자가 되고 싶은, 돈만 많으면 언제든 행복해질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감언이설을 곁들여. 평범한 우리는 거의 홀라당 넘어갔다.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권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여겼다. 믿음으로, 생각으로, 관념으로.


그러니까, 이명박도 알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이란 걸 안 한다는 것을. 큰 뻥을 치면 된다는 것을. 쉽고 간단하게, 계속 말했다. 사람들, 그냥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을 것이다. 꼭 이명박과 당시 한나라당의 지지자가 아니라도 말이다. 히틀러도 그랬다. 당시 열성적인 히틀러 지지자들은 독일 국민(7970만)의 10% 가량인 850만 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평범한 독일 국민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히틀러에 철저히 놀아났다.


지금-여기라고 다를까. 우리는 이명박에게 희롱(!)당하고 추행(!)당했다. 거짓말에 속았다. 거짓말쟁이 권력자와 평범한 사람들의 관계.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목소리를 닫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식자층에 속하는 대다수의 주류들은 임금만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만족했다. 이제껏 향유했던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 그 뒤에서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도사리고 있던 뱀과 같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했다.”(p.55)


나치 독일의 이야기인지, 지금 우리의 이야기인지, 똑같다. 방관과 침묵. 거짓말쟁이 권력자들은 그런 순간을 파고든다. 다시 말하지만 악의 평범성. 기존 질서에 의해 피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하는 건, 그 질서와 체제가 행하는 살인에 동참하는 일이다.


우리가 부른 업보다. 그렇다고 눈물만 훔치고 후회로 땅만 치고 있을 순 없다. 생각을 해야 한다. 믿고 싶어 믿기보단 진실만을 말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앤디 앤드루스는 그것이 누군가에게 통치를 맡기는 자들이 기초적으로 갖춰야 할 판단기준이라고 일깨운다. 우리 모두에게 효과적으로 거짓말하는 것으로 정치가 되는 풍토. 그것을 바꾸는 것. 무엇보다 권력의 주체가 아닌 세상을 진짜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는 보여줍니다. 자기의 이익이 충족되는 한 온순한 양처럼 지도자의 뒤를 따라 걷는 국민들, 그들이 어느 순간 화들짝 깨어났을 때 도착한 그곳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곳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p.85)


꿈에서 깨어나니 우린 망망대해에 있다. 힘들게 만회하고 있던 민주주의를 잃어버렸고, 자유는 가출했다. 누군가의 자유를 심대하게 침해할 정도로 한 국가가 변질되는 데 그리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지난 4년, 충분히 알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유를 되찾고 집 나간 민주주의를 되돌아오게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똑똑한 CEO가 필요하지 않다. 지능이 아닌 인격. 모든 것은 인격이 바탕이 돼야 한다. 법조계, 의료계, 교육계 모두 마찬가지다. 리더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지능 아닌 인격!


저자는 인격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에게 권력을 줘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인격파탄자에게 권력을 줘봤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왔는지 이젠 안다. 머슴이고 일꾼이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이들의 키치적 거짓말에, 그 무섭고 지속적인 뻥카에 더 이상 속지 말 것. 도덕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작자의 말장난에 휘둘리지 말 것.  

 

책은 1,100만 명을 죽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알려주는 한편으로 1,100만 명을 죽이는 질서에 평범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지침서다.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다. 그건 12월을 향한 것만이 아니다. 계속 우리는 묻고 요구해야 한다. 알고 속는 건, 이쯤이면 충분하다. 복지, 경제민주화, 일자리. 새빨간 누리내 나는 당의 거짓말이다. 물론 민주당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고! 


“이제는 리더들에게 더 높은 가치기준을 요구해야 할 때이며, 설령 그것이 그들의 처지를 위태롭게 할지라도 진실만을 말하도록 요구해야 할 때입니다.”(p.103)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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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세계사 - 수렵채집부터 GMO까지, 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톰 스탠디지 지음, 박중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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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정무역 커피하우스를 운영한다. 하고 많은 커피 가운데, 나는 공정무역 (유기농 혹은 자연산)커피를 택했다. 동티모르 사메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 멕시코 치아파스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 에티오피아 시다모 사람들(과 자연)이 만든 커피가 그것이다. 설탕(시럽) 또한 파라과이의 공정무역 유기농 비정제 설탕을 쓴다.


우리는 그렇게 가능하면 공정무역과 유기농을 쓰고자 노력한다. 이리 한다고, 나를 윤리적 인간이나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지는 말라. (나는 공정무역 제품 소비를 ‘착한 소비’라고 일컫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는 그저,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다. 공정무역 제품을 택했다는 것. 유기농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 또한 그것들을 소비자들에게 연결시켜준다는 것. 왜 정치적 선택일까?


공정무역은 기존 자유무역 체계가 지닌 극심한 불평등과 불공정, 거대 자본의 횡포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한다. 즉, 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주(자본)와 거대 커피회사(와 유통업체)의 뱃대지를 불리는 일에 더 이상 동참하기 싫다. 그런 의미도 품고 있다. 저임금 (커피)노동자와 그 가족의 지속가능한 삶과 우리가 하나의 연결된 세계임을 인식하는 것 또한 내가 공정무역 커피를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멕시코 치아파스 커피는 특히 멕시코 혁명군 사파티스타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 것이다.  


유기농도 그렇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우려이자 무차별적 생산을 위한 땅과 식물에 대한 자본의 학대에 반대하는 의미다. 유기농이 몸에 좋다고 선택했다기보다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것도 생각해보자. 대형 마트의 확장이나 이용을 보이콧하는 행위. 거대 커피체인을 이용하지 않는 행위. 이는 거대 식품복합체 중심의 시스템에 반대 혹은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 이들의 확장이 인간과 사회를 획일화 시킨다고 본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앗는다. 그들은 싸고 질 좋은 상품을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소비자들의 선택과 사유를 앗아가는 교묘한 정치적 행위다.   


식량 선택의 정치학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의 황교익 선생은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라고 했다. 나는 완전 동의한다. 왜? 어렵지 않다. 누가 더 먹고 누가 덜 먹을 것인지, 누가 좋은 것을 먹고 누가 나쁜 것을 먹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다. 그것이 무엇이든 먹는 것을 놓고 핑퐁하는 것이 또한 정치다. 그러나 한국인, 오랫동안 속았고 여전히 속고 있다. 먹는 것이 정치와 상관없다는 세뇌(!) 때문이다.


그런 족속들이 있다. 먹을거리 선택이 비정치나 탈정치로 여겨지길 바라는 족속들. 지금의 먹을거리 유통과 판매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비춰지길 바라지 않는다. 왜 먹는 것 갖고 그러냐고 되레 반격한다. 식량의 정치학에 우리가 제대로 눈을 떠야 할 이유가 그것에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니까!


《식량의 세계사》는 식량이, 먹는다는 것이 왜 정치적인지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한다. 식량이라는 창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고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책에 의하면, 식량은 사회 변모, 사회적 조직, 지정학적 경쟁, 산업 발전, 군사적 충돌, 경제적 팽창 등에 촉매 작용을 했다. 즉, 문명의 기반이자 권력의 시초였다. 이 말을 보자.

 

“화폐가 발명되기 오래전에 고대사회 전체를 통틀어 식량은 곧 부였고, 식량의 지배는 곧 권력이었다.”(p.5)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법, 아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였었다. 먹을 것을 지배하는 자가 곧 권력인 것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해 아랍권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혁명.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곧잘 표현됐지만, 그 궁극은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였다. 민주주의는 곧 먹을 것과 통한다. 우리의 1980년대도 그랬다.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탄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말도 그것을 표현한다. “비교적 언론 자유가 보장된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국가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한 적은 없었다.” 

 

먹지 못하면 인류는, 아니 어떤 인간도 삶을 유지할 수 없다. 먹는 것 자체에 대한 근심이 비교적 덜 한 지금의 한국, 식량에 대한 논의나 사유가 건강 측면에 치우친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식량이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어떤 식으로 바꿨고, 우리 역사에서도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사유가 없으니, 많은 우리는 먹을 것을 너무 우습게 본다.

 

그런 면에서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의 발명에만 기댄 것이 아니라, 설탕과 감자가 산업시대의 동력으로 역할을 했다는 이 책의 관점은 신선하고 타당해 뵌다. 즉, 노동자들에게 설탕과 감자라는 저렴한 먹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산업혁명은 쭉쭉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 없이 산업혁명은 완수되지 못했을 것이므로.

 

아울러, 식량 무역 경로가 ‘세계화’의 단초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식량만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었다. 문화와 종교도 바다를 건넜다. 특히 특히 향신료를 둘러싼 이전투구는 흥미진진하다. 아랍의 향신료 무역 독점을 깨트리려는 유럽의 열망이 신세계의 발견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곧 유럽-아메리카-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이 이뤄진 한편 식민시대를 열었다.

 

“유럽 국가들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식량은 인류 역사에서 그다음의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미쳤다.”(p.6)

 

물론 그전에 농사가 있었다. 농사는 결국 땅을 착취하는 일이라는 내 생각에 이 책은 좀 더 깊은 역사를 들려준다. 주2일 노동(?)이면 충분했던 수렵채집민의 생활을 주7일 노동으로 바꾼 것이 농업이었다. 생활방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수렵채집이 다채롭고 여유 있는 삶을 만들었다면 농사는 정착을 빌미로 단조롭고 고된 삶으로 인류를 몰아넣었다. 

 

그렇다. 농사는 자연적인 일이 아니었다. 세계를 변화시켰고,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방식은 또 어떻고. 《식량의 세계사》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식량에서 자연산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대부분 식량은 선택적 품종 개량을 거친 결과물이다. 식물이나 동물 모두 마찬가지다. 당근이 원래 지금의 주황색이 아닌 흰색이나 보라색이었다면, 쉽게 믿어지는가? 옥수수도 자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란다. 허허. 내가 그리 좋아하는 옥수수가 품종 개량을 한 변태라니, 놀랍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문명을 부양한 세 가지 식량은 밀, 쌀, 옥수수란다.

 

저자는 이렇게도 단언한다. “만약 농업이 오늘날에 발명된다면, 사람들은 이 새로운 기술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농업은 문명의 근거다. 길들여진 식물과 동물이 현대 세계의 기반 자체를 만들었다. 문명적 인식의 기반을 농업에 두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새삼 재밌는 건, 농업이 계층을 분리했다는 주장이다. 농업이 집중화되면서 부자와 빈자, 지배자와 농민으로 나눠졌다. 오늘날 누가 누구보다 재산을 더 많이 가진 것이 일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가 존재한 이래 대부분 기간 이런 일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농업의 확산으로 식량으로 부와 권력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워졌다.

 

하긴 음식점을 놓고서도 우리는 이미 계층적 분화의 모습을 본다. 아주 값비싼 음식점과 싸구려 분식점. 식량은 분리하고 구분하는 역할을 오래 전부터 해왔던 것이다. 식량이 곧 부였고, 식량을 지배하는 것이 곧 권력이었으니까.

 

“식량에 대한 지배가 곧 권력이었던 까닭은, 사람과 동물을 먹여 살리는 식량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p.57)

 

헌데, 이 책이 내놓은 역사적 사실 하나는 지금의 풍경과 너무도 다르다. 거물. 이른바 권력층이자 (오피니언) 리더였을 텐데, 당시의 거물은 남보다 더 일찍, 더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이건 기본이요), 남에게 부를 나눠줄 때에야 존재감을 빛내고, 반드시 큰 잔치를 베풀고 신용을 쌓아야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집단을 부양하고 재분배를 통제하는 능력으로 지위를 평가받았다.

 

하다못해 멜라네시아에서는 집단을 부양하지 못하거나 너무 많은 몫을 차지하는 지도자는 쫓겨나거나 피살될 가능성까지 있었단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를 보라. 지도층의 위치에서 부패하고 사적인 부를 뒷주머니에 축적한 이명박(으로 대변되는)을 '거물'로 둔 우리들. 쫓겨나거나 피살될 가능성, 있나?

 

다시 식량 선택의 정치학으로 돌아가서. 왜 식량이 정치인가. 문명의 시작부터 식량의 정치적 위치를 조목조목 알려준 책은 1791년을 일단 주목한다. 식량을 이용해 폭넓은 정치적 쟁점을 드러내는 방법이 본격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예제를 반대한 사람들은 설탕을 보이콧했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를 부리며 생산된 설탕. 그 설탕을 보이콧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노예무역의 지지자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한 것은 아니나 노예제를 조장한 데 일조했다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고 반성의 의미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설탕 불매!

 

나는 이 정치의 시즌에, 다시 정치를 생각한다. 먹을거리를 재차 생각한다. 아, 역시 식량은 독특한 정치적 위력을 지니고 있구나! 어떤 먹을거리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톰 스탠디지(《식량의 세계사》저자)의 말마따나, 사회적 신호 표시의 유력한 유력한 수단이다.

 

우리는 먹어야 산다.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산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엄청나게 많은 먹을거리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는 선거보다 훨씬 만흔 저치적 표현의 기회를 가진다는 말과 동의어다.

 

먹을거리를 선택한다는 것. 투표를 대체할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먹을거리 선택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임을 알 때, 우리는 좀 더 좋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향한 발걸음임을 자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것이나 먹겠다는 생각, 이제는 버릴 때가 됐다. 개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턱 대고 거대 자본의 프랜차이즈에 가선 안 되겠다. 무조건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단순해 보이는 식량의 선택이 거대자본이 돌리는 착취구조에 협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존 질서에 의해 피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비록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 것이라도 작금의 질서와 체제가 행하는 살인에 동참하거나 방조하는 일이다.

 

《식량의 세계사》는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정치적인 선택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담긴 정치적 인문학적 성찰이다.  

       

“식량 선택의 결과와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나아가 더 넓은 사회적 우려에 대한 피뢰침으로 작동하는 소비재라는 식량의 이례적인 지위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즉, 여러분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지니고 있건 간에, 그 정치적 견해에 따라 여러분이 꼭 구입하거나 또는 절대 구입하지 않는 종류의 식료품이 있게 마련이다.”(p.272)

 

18세기 프랑스의 미식가,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의 말로 끝맺자.

“국가의 운명은 어떤 식량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는 멘붕(멘탈 붕괴)된 작자들의 미친 짓이고, 해서는 안 될 더러운 작태였다. 그 FTA를 몰아붙인 이들에게 '거물'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줄 순 없다.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99%의 시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 식량 선택만큼 또 하나 중요한 시즌이 온다.

 

4월11일, 우리가 4년 동안 먹을 식량(?)을 선택하는 날이다. 강정마을과 구럼비 바위도 그렇고, FTA도 그렇고, 보편적 복지도 그렇고. 잘 선택하고 볼 일이다. 단순히 권력의 주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세상과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돼야 한다. 먹을 것 고르듯이!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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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원래 쓰다 - 호모커피엔스의 탄생
박우현 지음 / 이스퀘어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커피 생짜 초보에겐 좋은 책이다. 허나 나에겐 좀 더 깊었어야 했고, 촉이 더 날카로워야 했다. 아쉬운 책이다. 쓴맛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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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지음 / 따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세상은 맛집 천국이다. 인터넷, 특히 블로그 등을 보면 그렇다. 너나할 것 없이 먹을 것을 탐하도록 포스팅하고 맛난 것을 먹었다고 자랑질한다. 향도 없고 맛도 볼 수 없는 것이 사진으로 덩그러니 폼을 낸다. 그러나 그 대부분, 나는 믿지 않는다. 맛집 블로그의 자기 과시적 소개 행태 때문이다. ‘맛집 소개’라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많은 그들은 ‘난 이런 걸 먹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다. 남들과 ‘구별 짓’고 싶은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브런치’라는 호명이 가진 의미와 비슷한 맥락이다. 과거 아점이라고 부르던 것과 천양지차의 무엇. 브런치는 뉴욕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상품이 됐다. 브런치를 즐긴다는 블로그 포스팅은 엇비슷하다. 유럽(미국)풍의 레스토랑이 우선 배경이다. 메뉴명은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다. 재료가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럴싸하게 조립한 음식이 흉내만 그럴싸하게 낸다. 그리고 우아하고 여유 있게 그것을 먹었다는 ‘포스’. 그것으로 충분하다. 블로거는 뉴욕 라이프스타일 종결자로 거듭난다. ‘구별 짓기’에 성공했다.


뭐, 그게 그리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문제는 맛에 대한 주체성이 담겨 있지 않다. 내가 골라 먹은 맛집이라는 형식, 표방하지만,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오로지 남은 건 스타일뿐이다. 사진을 통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면 그뿐. 재료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없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땀 냄새도 없다. 오직 소비하는 상품, 소비하는 장소, 소비하는 자의 쾌락만 배치돼 있다.


그건 ‘맛집’이 아니다. 줏대 없이 움직이는 혀에 의해, 소비하는 자의 쾌락만을 위해 복무하는데 무슨 ‘맛’을 가진단 말인가. 맛집만 60만개에 달한다는 시대. 어딜 가나 맛집 천국이다. 그러나 진짜 맛집은 없다. 언론과 미디어는 그걸 충분히 알고 블랙 커넥션을 형성했고(<트루맛쇼>에는 그것이 잘 나온다), 줏대 없고 무지한 일부 ‘맛집 블로거’들은 그것을 조건반사적으로 따른다. 주체성이 없다는 건 그것 때문이다. 그들만의 맛집, 사진의 구도만 달리할 뿐, 립싱크가 난무한다.


그런 욕망, 조선 사대부들의 것과 통하였느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조선 사대부들에게도 음식의 그런 맥락이 있었다. 소고기, 고귀한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었다. 문화인이라는 자부심까지 심어주기도 했단다. ‘구별 짓기’하면, 일가견이 있는 그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당시 백성들은 소를 사람 대신 땅을 갈아 곡식을 심게 해 주고, 무거운 짐을 운반해 주는 동물이라 고기까지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의 육식관은 사대부들에 비해 염치가 있었던 셈이다.


헌데, 사대부들의 이런 ‘소고기 사랑(?)’은 조선의 건국이 큰 역할을 했다. 새 나라 조선이 들어섬과 함께 가장 사소하면서 강력하게 일어난 변화는 밥상이었다. 육식 금지가 풀린 것이다. 물론 힘없고 돈 없는 백성들에겐 이런 변화가 약 올리는 처사였다지만. 없어서 못 먹었으니까.


“조선 건국이 민중들의 식생활에 끼친 변화는 토지 개혁으로 ‘이밥’(이성계가 준 밥)을 먹게 된 것과 육식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소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p.48)


오호, 재밌는 음식문화사인 것 같지 않나? 《조선의 탐식가들》이 주는 쾌락(!)이다. 음식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엔 늘 생존 이상의 무엇이 있다. 이 책은 음식에 늘 시대와 사회가 담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먹는 것이 곧 사람이다!


‘먹는 것 갖고 왜 그러냐?’고 우리는 묻곤 하지만, 사대부들에게 먹는 것이 곧 사람이었다. 즉, 정쟁 상대를 공격하거나 역모 죄인의 간악함을 까발릴 때, 식탐 버릇을 문제 삼았다. 그럼으로써 도덕성에 타격을 입혔다. 명분을 만든 셈이었는데, 방금 말한 대로 ‘먹는 것이 곧 사람’으로 치환됐다. 먹어서 남과 구별 짓는 행위와도 이는 통한다. 


《조선의 탐식가들》은 사대부들이 왜 우심적(소의 염통을 얇게 저며서 양념간장으로 간을 하여 구운 음식)을 좋아하는지 언급한다. 우심적에 담긴 이야기 때문인데, 이 음식엔 ‘당신을 왕희지처럼 여긴다’라는 뜻이 있다. 저자는 사대부들이 우심적의 맛보다 그런 호사가 더 즐거웠으리라 추정하는데, 브런치라고 다를까. 브런치의 맛보다 ‘뉴욕 라이프스타일을 즐긴다’는 호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권력싸움에서 패배하면, 먹는 것 갖고도 공격을 당했다. 재밌는 건, 탐식이 도덕적인 치명상이었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흠집 내기로도 익히 사용됐다고 한다. 탐식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행위였다. 물론 그런 분위기였기에 조선 시대 양반들의 탐식 기록은 많지 않다. 탐식이 까발려지거나 부풀려지는 건, 권력의 눈 밖에 날 때다.


“조선 시대의 간관들은 탐식을 하는 관료를 공개적으로 성토하기도 했고, 당쟁을 벌이는 관료들은 정적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집요하게 상대방의 탐식 습성을 물고 늘어졌다.”(p.279)


그럼에도 먹는 것, 그것도 많이 먹는 것은 조선시대의 ‘대세’였던 것 같다. 외국에 조선하면, 대식국大食國으로 알려졌다고 책은 전한다. 18세기 조선의 일상을 쓴 샤를 달레, 《조선교회사서설》을 통해 이리 말한다. “조선사람들의 큰 결점은 폭식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양반이나 상민이나 많이 먹는 것을 영예로 여기고, 어릴 적부터 많이 먹어 위장을 늘려 놓는다.”


이런 말, 들어본 적이 있다. 중국인은 음식을 혀로 먹고, 일본인은 눈으로 먹고, 조선인은 배로 먹는다. 조선인을 비하하기 위한 말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탐식에 대해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건, 아마도 중세 기독교의 칠거지악을 통해서가 아닐까. 정욕,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허영. 탐식이 특히 지탄을 받은 건, 다른 죄악까지 불러 모으는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탐식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죄의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탐식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순수하게 먹는 것에 대한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새롭고 진귀한 음식을 먹는 것, 지위와 권세를 확인하고 보여주는 기회였다. 조선에서 탐식은 소수의 권세가들이 누린 특권이었던 셈이다. 맛집 포스팅이 그렇게 끊임없이 이뤄지는 것, 물론 조선의 권세와 다르겠지만 다 숨은 이유가 있다.      


탐식에 대한 비판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인 한편 권세가의 전횡을 견제하여 관료층의 부패를 억제하기도 하는 기능도 했다. 아울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역할도 했다. 권세가에게 탐식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대다수 기층 인민은 기아에 시달렸다. 특권층의 호위호식을 통제하지 않으면 인민의 분노가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도 일자리, 일자리 얘기하지만, 그것은 곧 먹는 것과 직결돼 있다.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탐식을 건드리는 건, 지배세력의 자기 방어와도 같은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인민의 분노 게이지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고 볼 때 즈음, 권력은 재벌의 탐식(!)을 비판한다. 최근의 ‘재벌 빵집’건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 유지를 위한 임시방편이다. 시스템을 확실히 바꾸거나 뒤집지 않는다. 정부가 잊을 만하면 출총제를 꺼내드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조선의 탐식가(혹은 조선의 음식문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우리 사회와 연관 지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먹는 것,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어떻게 먹을 것인가!


《조선의 탐식가들》은 더 나아가 어떻게 먹는 것이 바르게 먹는 것일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우선 저자는 바르게 먹는 것과 관련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낯설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 또 하나는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에 송나라 시인 황정견의 식시오관(食時五觀), 즉 ‘음식을 대하는 다섯 가지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인용한다. 


․ 음식을 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노고를 헤아리고,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라.

․ 자신의 덕행이 완성되었는지 결여되었는지를 헤아려서 공양을 받아야 한다.

․ 마음을 절제하여 지나친 탐욕을 없애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특히 맛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까탈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 음식을 몸에 좋은 약으로 알고 몸이 파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먹어야 한다.

․ 군자는 도업을 먼저 행하고 그 다음에 음식 먹을 생각을 해야 한다.


뭐, 다른 건 각자 알아서 해석하기로 하고, 내가 꽂힌 것은 바로 첫 번째 마음가짐이었다. 음식을 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노고를 헤아리고,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라. 커피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늘 가슴 속에 품은 명제이다. 내가 공정무역 커피에 꽂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이유이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먹을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가’를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내가 생각하는 탐식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말한 ‘탐식의 유형’, 시도 때도 없이, 너무 섬세하게 맛과 호화로운 음식을 추구하며, 게걸스럽게 너무 많이 먹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이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욕망은 더 이상 죄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정적인 죄라고 할지라도, 이를 어긴다고 경찰이 잡아가지 않는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약속’처럼 대량소비와 탐식을 미덕처럼 여기기까지 한다. 저자의 현실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거대한 식품기업과 언론이 가르쳐 준 ‘맛집’의 충실한 고객으로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개개인의 모든 욕구를 억압하면서도 유독 식욕만큼은 제동을 걸지 않는다. 도리어 더 많이, 더 맛있게, 새로운 맛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p.330)


고로, 나에게 탐식은, 맛의 주체성을 잃고, 화학조미료가 이룬 ‘(감칠)맛의 평등’에 중독됐으며, 거대 브랜드(의 공세)에 아무 생각 없이 끌려 다니면서 ‘짱’을 외치는, 재료가 어떻게 왔는지조차 알 생각을 않는다는 뜻이다. 많은 맛집 블로거가 그렇다. 그럴듯해 보이면 그것으로 끝이다. 혀와 코가 줏대 없이 움직이는 한편 눈으로만 먹을거리를 대한다.


그것은 죄악이다. 저자는 다른 범죄와 달리 탐식은 남을 해치지 않고 자신에게 해를 입힐 뿐이라고 했지만, 블로그 등을 통해 자신에게만 미칠 해를 남에게 전파하고 있으니, 그건 죄가 아니고 뭔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 분별해야 하는 이유이다. 맛있다는 음식을 찾아가 먹는 행위가 미식이 아니다. 저자는 내가 좋아하는 황교익 음식문화칼럼니스트(《미각의 제국》《한국음식문화박물지》)의 말을 인용해 미식을 정의한다.


황교익 칼럼니스트는 탐식을,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이라고 했고, 미식을, “음식에 담긴 삶을 맛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당신이 이전에 가졌던 미식에 대한 개념,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 남까지 망치는 탐식을 하고 싶지 않다면, 음식에 담긴 삶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신이 세상에 사소한 애정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쉽다. 나는 세상의 일부이자, 세상도 나의 일부임을 안다면. 


다시, 미식을 생각한다


당연히 나는, 다산 정약용이나 성호 이익처럼 음식에 대해 지나치게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 아니다. 오랜 유배생활을 버텨 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개고기를 애호했다는 다산은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라면서 한 끼 식사에 재화를 낭비하거나 너무 많이 먹는 것을 경계했다. 평생 소식(小食)을 실천한 성호 이익도 부유한 집에서 하루 일곱 번이나 식사를 한다고 질타하면서 조선이 가난한 원인으로 음식 사치와 대식을 꼽았다. 


나는 그렇게까지 먹는 것에 엄격할 자신, 없다. 이 책을 읽고, 단지 시를 읊고 싶었다. 고려의 문신, 목은 이색은 ‘배부른 하증(중국 진나라 무제 때 재상으로 탐식의 대명사이자 전설적인 탐식가)보다 배고픈 시인이 낫다’는 의미를 담아, “방장(식전방장)이야 배부르게 먹을 줄만 알겠지만 / 굶은 배는 시를 토해 낼 줄도 아는 걸요”라고 말했다. 탐식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담은 것일 게다. 진짜 굶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좋은 재료로 만든 좋은 음식은 절로 시를 읊게 만든다고 믿는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도 지인이 보낸 미나리를 먹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고작 미나리 먹으면서 웬 호들갑이냐 싶을지 몰라도, 역시 이것도 은유 아니겠는가. 채소 하나라도 이런 정성이라면 ‘미식가’라는 호칭, 충분하다. 저자의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빈낙도의 삶에 허용된 착한 사치이자 청빈한 삶에 대한 메타포로 언급했던 ‘순챗국과 농어회’도 먹고 싶어졌다.   

 

이른바 ‘맛집 블로거’랍시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나, 맛집이랍시고 간판을 단 음식점들에게 《조선의 탐식가들》, 필독서 되겠다. 심리학에서는 식탐의 원인을 결핍감에서 찾는다고 한다. 미식과 식탐은 그래서 심리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한다. 어떤 결핍이든,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먹는 것에는 진짜 중요한 삶의 문제가 늘 내포돼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맛집 블로거들, 이젠 먹을거리를 통해 제대로 삶을 담아낼 때다. 저자에 의하면, 조선 사대부들, 식탐은 많았지만 조리법을 외면해 조리서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문자를 독점했던 양반층이 조리법에 관심을 뒀다면 조선의 음식문화, 훨씬 풍성하게 꽃피웠을 거라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아쉬움에서 느낀 바 있을 것이다. 맛집 블로거들이 탐식 아닌 미식의 자세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맛보는 공포의 육개장 같은 맛집 타령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개념을 탑재한 맛집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느낀 바가 없다고? 그냥 처먹고 뒤져라. 나는 그들에게 ‘악의 평범성’을 붙여주겠다. 고 투 헬(Go to Hell).

 

《조선의 탐식가들》, 재밌고 사유도 하게 만들어준다. 두 마리 토끼 잡는 것, 어렵지 않아요~! 앞서 언급했던 황교익 칼럼니스트의 저작, 《미각의 제국》《한국음식문화박물지》을 출판한 곳이 이 책과 같은 '따비'이다. 이들 저작물이 비슷한 맥락에서 출판된 것 같은데, 따비, 음식문화전문으로서 참 좋은 출판사로 여겨진다. 고맙다. 좋은 책들 내줘서, 내 세계를 넓혀줘서. :)

 

 

p.s. 커피와 두부의 공통점


이 책에서 하나 더 건진 것이라면, 커피와 두부의 공통점이다. 맛있는 두부를 만들려면 콩물을 끓이는 온도와 시간이 중요하단다. 즉, 몇 도의 온도로 몇 분을 끓이느냐에 따라 두부 맛이 달라진다. 커피라고 다르지 않다. 커피를 볶을 때, 커피를 추출할 때, 역시 온도와 시간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두부를 언제부터 먹었을까. 책에 의하면, 두부는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두부는 사찰에서 만들어 부처에게 공양하던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두부는 인민들이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고 한다. 콩을 갈고 콩물을 짜는 데 힘이 많이 들고, 뭣보다 인민들은 두부를 만드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콩물을 끓이는 온도와 시간, 불의 세기를 잘 조절해야 하는데, 숙달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잘 만든 두부는 사대부들 사이에 선물로 주고받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두부가 사대부가에 널리 퍼진 것은 제사상에 두부를 올리면서부터라고 한다.


커피도 귀한 음용수였다. 커피를 먼저 자신들의 음료로 받아들인 이슬람권에서는 커피를 다른 문화권에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철저하게 커피콩의 유출을 막았다. 아울러 커피의 초기 역사에서 수도원에서 커피가 제조됐고, 수도사들이 커피를 즐겼다. 이후 유럽으로 전파될 때도 커피는 왕과 교황, 귀족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물로 성가를 드높였다.


얼마 전, 나는 커피를 마시러 부암동에 갔다. 헌데, 이 책을 보니 조선시대 최고의 두부는 “서울 장의문 밖 사람들”이 만든 것을 꼽았다고 한다. 장의문은 지금 부암동 자하문의 다른 이름인데, 지금 부암동에는 최고의 두부 솜씨를 이어받은 두부집이 없는 대신 최고의 커피집 가운데 하나가 있다. 최고의 두부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최고의 커피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부암동에서 커피를 만들고 내리고 싶다.


아울러, 조선 중종 때 안동 선비 김유가 전통 요리법을 기록한 책, ‘수운잡방’의 이름을 딴 음식을 나의 커피하우스에서 대접하고 싶다. ‘진짜’ 맛집 블로거들에게. 참고로, 수운잡방이란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 대접하는 특별한 요리’라는 뜻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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