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아침 저녁 서늘한 느낌이 좋다. 공기도 투명해졌다. 담장 너머 감나무의 감이 색을 더해간다. 회사 마당의 모과 열매도 노랗게 익을 준비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모과불(佛)」 읽기를 올린다.
하나의 열매에는 그 열매가 맺히기까지 지나온 과거가 다 들어 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산다는 것이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불태워가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은가. 추억은 과거와 현재의 나를 들락거리며 몸의 말단까지 향기로 채워놓는다지 않은가. 그리하여 현재는 추억으로 방부 처리된다. 그런데 말이지, 몸 안팎을 들락거린 시간과 공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불태워져야 하는 게 아닌지.
고영민의 시 「모과불(佛)」(시집 『공손한 손』, 창비, 2009년)에는 정교한 관찰과 경험의 배후에 만상의 원리를 독특한 시선으로 끌어잡아 앉힌 감동이 있다. 삼라만상에 서로 들고남이 없는 것이 없다 했는데, 모과만큼 독특하게 이를 완성시켜 내는 열매도 없지 싶다. 한 번쯤 설풋 익은 모과를 책상머리나 승용차 안에 모셔 둬본 사람은 안다. 향기 덜한 모과가 스스로 빛깔을 들이고 향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한쪽부터 검게 썩어가며 몸 전체가 고스란히 말라 가는 것을. 모과는 숱한 과일들과는 달리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썩으면서 짓물러 몸 허물지도 않는다.

내가 일하는 회사 마당에 오래된 모과나무 한 주가 서 있다. 모과 열매가 온전히 몸 태워 숯이 되는 과정을 열 해째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서 모과를 사랑하게 되었다. 열매처럼 둥근 육질의 줄기가 탈피하는 모양이며, 여름마다 매미 울음소리를 열매마냥 나무 전체에 매달고 있던 모과나무. 우수수 가을잎 다 털어내고 크고 노란 모과만 남겨진 가지를 보는 재미는 쉽게 대할 수 없는 장면이다.
3연 18행의 시 「모과불」에는 이러한 모과의 한 해와 여러 해의 과정이 고스란히 열매 하나로 ‘등신불’이 된다. 그 모과의 열반과정에는 시인 자신이 들고나던 시간과 공간 역시 중첩된다.
설풋한 모과 하나를 주워다가
책상에 올려놓았다
저 흉중에도 들고나는 것이 있어
색이 돋고 향기가 난다
둥근 테두리에 들어 있는
한 켠 공중(空中)
가끔 코를 대고
흠, 들이마시다보면
어릴 적 맡은 어머니 겨드랑이 냄새가 났다
<고영민 詩 「모과불(佛)」, 1연>
덜 익은 모과 열매 “하나를 주워다가/ 책상에 올려놓”고 바라본 경험과 관찰과 시인 자신의 과거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다. 설풋한 모과가 저 스스로 “색이 돋고 향기가” 나는 과정을 읽어내는 눈은 천상 시인이다. 모과 한 알의 “저 흉중에도 들고나는 것이” 있다 했으니, 사람 역시 스스로 “색이 돋고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해야 함이 분명하다. 아, 그것은 “둥근 테두리에 들어 있는/ 한 켠 공중”이었으니, 사람 역시 한 켠 공중을 둥근 몸 안에 넣고 살아가는 것을. 문득 코를 대고 그걸 확인해 보니 “어릴 적 맡은 어머니 겨드랑이 냄새가 났다.” 경험이 없고 사실을 모르면 절대로 쓸 수 없는 시구이다. 시인의 둥근 몸 테두리 안에 넣은 “한 켠 공중”이 이 한 줄에 고스란히 함축되어진다. 추억과 향수의 응집. 모과의 울퉁불퉁 둥근 몸 가득 냄새와 색을 채워 넣고 있었던 셈이다.
모과의 얼굴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 소리
<같은 詩, 2연>
흉중에 들고나는 것들로 스스로 색과 향을 만들던 모과가 이제 숙성의 시기를 지나 썩음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 썩음의 과정은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 곧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 소리”를 추억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현재에 되살려 놓는 것이다. 세상 모든 열매가 그러하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벼 이삭에도 태양과 폭우와 땀 냄새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도저한 과정의 응축된 시적 표현이다.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이 연에서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모과의 얼굴 한쪽”의 ‘얼굴’이었다. ‘얼굴’을 생략하고 그냥 “모과의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라고 해도 무난하다. 그럼에도 ‘얼굴’이 쓰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한 몸을 태운 등신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등신불은 다비와 달리 화기(火氣)가 직접 닿지 않고 기름 부음으로 완성된다. 몸 사름은 머리부터 시작한다.
내 방 허공중에
매일 하루치의 제 것을 조금씩 꺼내 피워두던
모과 하나가
말끔히 한 몸을 태워
검은 등신불로 앉아 있다
<같은 詩, 3연>
“얼굴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하던 모과가 이제 온몸 말끔히 태워버렸다. “매일 하루치의 제 것을 조금씩 꺼내” 시인의 “방 허공중에” 피워두던 모과. “한 여름의/ 그늘 냄새, 매미소리”와 같은 “모과 속에 들어 있던 긴 시간”뿐만 아니라 그 시간만으로 모자라 흉중에 들고나는 것들로 “색이 돋고 향기”를 만들던 모과가 제 몸 안의 것들을 조금씩 꺼내놓았다.
번 것을 내어놓는 자선 행위로 자신의 완성 시기를 준비한다. 채웠던 것을 비워내는 자연의 섭리. 그렇게 매일을 조금씩 꺼내 피워두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씩 썩기 시작하며 “말끔히 한 몸을 태워”간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그 자리에 “검은 등신불로 앉아 있다”.
인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편이다. 마음 한 켠을 따스하게 데우는 손이다. 채우고 비우는 일. 마침내 다 비우고 더 이상 비울 것 없는 상태로 남는 일. 시인은 모과를 대신 보여줌으로써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등신불은 자신의 몸을 부처님께 바치는 소신공양이되 몸을 태워 형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그대로 보존하는 ‘육신불’이라는 사실도. 다 비운 몸을 보여준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