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대체로 일 년을 주기로 피고 진다. 그러나 한 뿌리, 한 가지에서 피어났을지라도 지난 해 꽃과 올해 꽃이 같지는 않다. 꽃은 대기의 기운과 자연 조건을 품어 안고서 태어나고, 짧은 기간 동안 생을 온통 밝히다가 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피는 꽃을 노래하고, 지는 꽃을 슬퍼한 것은 일기일회(一期一會), 핀 꽃을 다시 대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의 시 」(시집 !, 문학동네, 2006년 초판1)을 읽고선 죽음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탄생의 찬란함에 소름이 끼쳤다. 꽃은 세상 어떤 곳, 어떤 순간에도 피어나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상징과 의미를 지녔기에 예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꽃이라는 이유로 다 그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모름지기 시인의 몸속에 들어온 꽃이란 일생일대 한 번 피고, 한 번 죽는 절대성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시를 짓게 하는 이유가 되었을 때는 말이다.

수많은 꽃 가운데 이런 꽃을 보신 적 있는가. 꽃을 다룬 수많은 시 가운데 이런 시를 읽은 적 있는가.

 

4연으로 이루어진 은 죽음으로써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시인의 절대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진 시이다. 그리고 그 환하게/ 뼈 부러지게피어나는 기쁨은 반드시 죽음을 담보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죽음을 전제한 태어남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얼마나 절절하겠는가. 반드시 온 힘 기울여 태어났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 생을 꽃피울 것이다. 사람 역시 일생일사(一生一死)의 생명체이다. 그런데도 꽃보다 풀보다 조금 더 오래 생명을 지속한다고 간절함과 소중함을 망각하고 대충대충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 에이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 <문인수 , 1>

 

글 쓰는 이는 백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수많은 불면의 날을 견디고와 같은 흔해빠진 레토릭(수사)이 실은 진정한 사실이라는 점을 글을 쓰는 이들은 대체로 공감하고 인정한다. 서화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지 앞에서의 공포와 안 써지는 글의 화풀이 대상으로 백지를 구겨 던져버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이야 초고는 물론 창작 전반이 컴퓨터에서 직접 이뤄지기도 하지만, 썼다가 지우고 또 쓰는 과정이 단지 종이에서 모니터로, 펜에서 자판기로 옮겨갔을 뿐, 글 쓰는 행위와 글을 쓰는 작가의 심사는 변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고지나 백지에 직접 펜으로 글을 쓰던 문인들의 집필실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겨던진 수많은 종이 뭉치들로 어지럽혀지곤 했다. 창작의 고통의 증거인 동시에 그 결과로 나온 글들이 왜 빛날 수밖에 없는가를 확인시켜주는 물증이기도 하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 에이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이 얼마나 생생한 날것의 현장 표현이가. 시인의 당시 심사와 그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치솟았던 심사가 순간, 잠시, , 멈추었다간 문득 한 장면에 집중한다. 이 순간을 ,” 한 자로 잡아챘다.

시를 쓰면서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장면과 상황의 전환이다. 자칫 상투적이게 될 수 있고, 지나치게 상세하게 하다보면 느슨해져 긴장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아슬한 경계 지점과 긴장을 탈 줄 알아야 한다. 순간적 방심을 푹 찌르고 들어가는 예리한 칼날은 언어 자체보다 시인의 감각에 있다. “,” 이 한마디는 검객의 칼날처럼 한 치 빈틈을 헤집는다.

시인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구겨 던진 종이 뭉치가 웬 관절 펴는 소리가나듯이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구겨 던진 종이가 부풀어오르다 그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시인의 심사가 에이포 용지를손아귀로 꽉 꽉 꽉 구겨” “냅다 방구석으로 던진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그 으깸이 뿌드드드 드드하고 관절 펴는 소리로 부풀어오르는 것이다. 구겨짐이 폄으로, 압축이 부풂으로의 이행이다. 그리고는 이내 잠잠해진다.” 긴장감이 잔뜩 내포된 잠잠함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 듯한 징조이다.

 

            

 

종이도 죽는구나.

- <같은 , 2>

 

구겨 던져진 종이가 부풀어오르다, 다 부풀어오른 순간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죽음은 모든 상황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종이가 생성해낸 기쁨의 절정이 담겨진 죽음이다. 죽어서 오히려 살고, 죽음으로써 생명을 탄생시킨 역설이 고스란히 자리해 있다. 캄캄한 밤하늘을 번쩍 하고 가르는 섬광과도 같다. 무겁고 튼튼한 뚜껑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다.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장벽을 타넘는 비월이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2연이 왜 이토록 번뜩이고 중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어지는 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사전 장치와 배경과 전후 연결과 비약의 디딤돌 역할을 이 한 행으로 모두 처리해준다.

 

그러나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 <같은 , 3>

 

시인은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서 던져진 에이포 용지뿌드드드 드드”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면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지는 것을 종이의 죽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죽음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시인 자신에게 되물을 정도이다. 시인은 충분히 알고 있다. “입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는지를.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는지를. “말이 되기까지 마음 밑바닥에,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눌어붙어 견디고 기다려야 했던 시간, 시 한 편으로 태어나기 위해 말이 빠져나온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시인은 너무도 훤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뻤던 것이다. 시만이 아니라 무릇 세상 태어나는 모든 것이 그러하지 않은가. 땅 위에서의 일곱 날을 위하여 칠년을 땅 속에서 기다려온 매미의 찬란한 울음이 그렇고, 세한을 견디고 피어난 매화가 그렇다.

 

이 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부풀어 오르다 잠잠해진 종이에서 죽음을, 산도를 힘껏 빠져나온 생명을 읽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는 종이를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순간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그것이 을 완성시켜주는 대목이다.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은 입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눌어붙어 견디다가 마침내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힘껏 빠져나온, 그토록 환하고 뼈 부러지게 기쁜 일이다. 견딤과 절망과 암흑의 과정을 거치고 나와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대부분의 꽃이 그러하다. 어느 꽃이 더 아름답고, 덜 아름답고를 논하기 전에 꽃으로 피어나는 것 자체가 이미 뼈 부러지게기쁜 일이다. 꽃 피는 일을 한 분야에서의 성공이나 빛나는 창작의 결과물로 비유할 수도 있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마음 속에, 일상 속에 피는 꽃이 얼마나 많은가.

 

         

 

누가, 날 구겨 한번 멀리 던져다오.

- <같은 , 4>

 

그러면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죽음에 이를 테니. 그리하여 입 콱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힘껏 빠져나와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기쁜 그런 꽃으로 피어날 테니. 그렇게 하고 싶나니, 부디.

문인수 시인은 그런 마음을 단지 마지막 한 행으로 드러냈지만, 필자가 보건데 이미 시인은 구겨 던져진 종이 뭉치를 주목하는 순간, 벼락같은 깨침으로 자신이 구겨 던진 에이포 종이 뭉치에 자신을 함께 구겨 던진 것이다. 동시에 관절 펴는 소리를 내며 뿌드드 부풀어오르는 종이 뭉치가 시인 자신을 일으켜 세워 입 콱 틀어막힌마음 밑바닥의 무거운 절망과 기나긴 암흑을 빠져나오게 한 것이다.

 

은 그야말로 섬광과도 같은 깨침이 번쩍하고 눈앞을 환하게 밝히는 시이다. 이러한 통렬함을 문인수 시인의 시 여러 곳에서 발견한다. 도식적 상황에 빠지지 않는 시적 번뜩임을 확보한 시들이다.

에서의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라든지, 마지막 행 !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와 같은 구절은 시적 울림을 저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서부터 천천히 끌어올려 마침내 펑 터뜨려준다. 해방이다. 카타르시스다.

시어의 미묘한 운용은 시적 울림을 가속화시킨다. 1연의 뿌드드드 드드의성어를 한 번 띄어씀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살려낸 것, 이어지는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의 반복도 그러한 효과를 고조시킨다. 3연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에서는 일부러 어휘를 중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의미효과를 더욱 살려냈다. 또한 입 콱 틀어막힌1연의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쥔과 연결되면서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빠져나온 말(, , )의 발산(發散)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 편의 시, 한 편의 서화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이 꽃이 피는 과정과 닮았다면, 이 시는 그야말로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를 힘껏 빠져나온 뼈 부러지게기쁜 절창의 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