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도착한 <창비> 봄호를 뒤늦게 뒤적거리다가 이상국 시인의 시 2편을 읽다. <강변역>과 <Jangajji Road>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시에 너무 힘을 주었다. 시는 세상을 읽는 것이다. 힘준다고 잘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딱 자신 만큼의 눈으로 바라보고, 보는 그 만큼 자신에게 다가온다. 반성한다.

 

이상국 시인의 시는 편하다. ‘편하다’는 말은 시창작의 고뇌와 깊은 사유 없이 손쉽게 시를 전개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상국 시인은 생활 속에서 시적인 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늘 견지하는 것은 물론, 시의 구조를 세우고, 시어를 다스리는 데도 심혈을 기울인다. 그의 시를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치열한 조탁 과정을 거쳐 나온 시이기 때문이다.

 

         

 

강변역
        - 이상국 詩
 
강변역 물품보관소 옆 벽에는
 
밤눈*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추운 노천역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의 바깥이 되어주고 싶다는 시다
 
나는 그 시 때문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
 
바깥이란 말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 시의 바깥에 오래 서 있고는 했다
 
* 김광규의 시
                         - <창비> 2013년 봄호

 

8연 8행의 <강변역>은 울림이 크다.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으면서 ‘바깥’이라는 단어가 지닌 사유의 진폭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느낀다. 이 시는 ‘바깥’이라는 단어로 집결된다. ‘바깥’이란 단지 외부, 겉, 변방 등의 표면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생애를 상징할 수도 있고, “강변역 물품보관소 옆 벽에” 걸려 있는 김광규 시인의 시 <밤눈>처럼  “추운 노천역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를 춥지 않게 감싸주려는 존재일 수도 있다.
시인이 “그 시 때문에 볼 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바깥이라는 말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시 <봄밤>을 감싸주는 ‘바깥의 바깥’이 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시 <봄밤>을 읽으며 자신의 바깥에 대하여, 자신이 바깥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바깥인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텍스트 밖에서 의미를 찾아보자면 자녀를 방문하여 그들의 바깥이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들의 바깥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볼 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자식에게 갈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간 것이다. 속초에 거주하는 시인은 서울 사는 자식 집에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탄다. 그 버스가 도착하는 동서울터미날 근처에 ‘강변역’이 위치해 있다. 결국 “그 시 때문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는 것은 꼭 그 만큼 서울행을 한 것이고, 자녀에게 볼일이 있어서, 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찾은” 횟수와 등가가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창비> 봄호에 함께 수록된 이상국 시인의 또 다른 시 <Jangajji Road>와  시집 《뿔을 적시며》에 수록된 <혜화역 4번 출구>와 같은 다른 시편들을 읽고 함께 연관지어 본 데서 생겨난 것이다.

텍스트를 벗어나지 않고 시 <강변역> 안에서만 찾아보면 ‘바깥’이란 시인의 마음이다. 대상의 바깥이 되어주고 싶은 것, 사랑하고 연약한 것을 안쪽으로 보호해주는 바깥이고 싶은 것이다.

 

이상국 시인의 시가 지닌 강점은 스토리가 있고 재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군더더기가 적고, 울림이 크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곳곳에서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나의 내면을 보게 된다. 깊이 공감하고 그의 시에 매혹된 것이다. 내가 그의 시를 통하여 나 자신을 보는 것처럼 그는 세상 풍경을 통하여 자신을 본다. 현대의 물상과 표정을 통하여 과거를 추억하기도 한다. 그에게 현대는 어쩌면 과거를 돌아보는 거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가 지닌 궁극적 지향점에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Jangajji Road
        - 이상국 詩
 
강변역을 떠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낙타를 갈아탄다
이 길은 천리 밖 동해를 떠난 내가
月谷에 깻잎장아찌를 전해주는 길
실크로드의 어딘가에 敦煌이 있었던 것처럼
낡은 벽화로 가득한 이 동굴에서
나는 대개 경전을 읽거나
눈을 감고 면벽한다
月谷에는 자식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故國이다
스쳐가는 역마다 지푸라기 같은 사내들과
아이를 못 낳는 계집들과
핸드폰을 든 행자들이
티끌처럼 아우성을 친다
험준한 산악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 데만
예순해가 더 걸렸다
月谷은 西에 있고
동쪽에서 살던 일을 다 잊지는 않았으나
月谷에 이르면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곳은 발굴될 것이다
나는 고단한 낙타에게 물을 먹이고
해 지는 풍경을 보고 싶었으나
주린 낙타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막무가내
사막의 풍진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경전을 덮고 月谷을 향하여
지금 미아역을 지난다고 문자를 날리는데
스크린 도어가 닫히고
언뜻언뜻 맞은편 동굴 벽에
그림자 같은 내 모습이 지나간다
                        

                         - <창비> 2013년 봄호

 

지하철을 낙타로 비유하고, 지하철이 지나는 터널에서 돈황석굴을 연상한다. ‘Jangajji Road’는 궁극적으로 삶의 길이자 문명의 길이다. 개인사로 비춰보면 “험준한 산악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 데만/ 예순해가 더 걸”린 길이다. 그 개개인의 ‘장아찌 로드’가 더해져 문명과 교역과 역사를 형성하였다. 그는 동쪽으로 돌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고국은 월곡, 자식이 살고 있는, 장아찌가 도달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아찌로 상징되는 이 땅의 모든 아비와 어미의 길은 자식에게 가닿아 있다. 그것은 어떤 문명로드보다 험준한 고난의 길이고 종착이 없는 길이다. 그 길에는 수많은 역경이 놓여 있다. 그러나 끝내 도달해야 할 가장 숭고한 길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대목은  모르는 척, 중요하지 않은 척 슬그머니 언급하고 지나치는 “그리고 언젠가 이곳은 발굴될 것이다”라는 시구이다. “월곡은 서(西)에 있고/ 동쪽에서 살던 일을 다 잊지는 않았으나” 결국 천리 밖 동쪽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자신의 생과 사유와 저작과 흔적이 나중에 발굴되고, 주목을 받고, 돈황학처럼 연구될 것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식이 살고 있는 월곡이 고국이요, 동으로 돌아가지 못하여도 후회되지 않는 이유이다.
‘장아찌 로드’는 단지 천리밖 동쪽에서 출발하여 강변역을 거치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낙타를 갈아타고 월곡에 이르는 외적인 길이 아니다. 자신의 고국이 된 자식에게 향하는 길이요, 자식에게 먹이를 물어나르는 어미, 아비의 길이다. 앉으나 서나 걱정인, 자식의 건강과 번성이 세상 무엇보다 기쁜 부와 모의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장아찌로드’를 ‘부정고도(父情古道)’라고 부를 수도 있지 싶다. ‘장아찌로드’는 부정(父情)의 전파, 부정이 향하는 경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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