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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부터 읽어온<닥터 지바고>에서 1차 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유리 지바고가, 남편 찾아 전선에 나온 간호사 라리사(라라) 기사로바(안티포바)와 처음 만나는 소도시의 이름은 '멜류제예보'였다. 번역하는 내내 그랬다. 지난 달에 교정 보면서도 놓쳤다. 논문 한 편 읽다가 아차 싶어 다시 찾아 보니 이렇다. 이런 맹목이. 정녕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다.

 

통상 지명(도시, 마을)은 '-o' 어미가 많아서('바르이키노', 이런 식) 이런 실수가 반복된 것 같다. 게다가 러시아어는 격이 변하기 때문에 통상 '멜-프'는 뒤에 다른 어미를 단 채 나온다. 주격(대격)으로 나오는 경우는 저 두툼한 책에서 딱 한 군데. 영역본도 마찬가지. 어찌 보면 '멜-보'나 '멜-프'나 뭐 그리 중요한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은 항상 성실하게, 까칠하게!^^;; 에효, 또 뭘 얼마나 많이 틀렸으려나. 어느 인터뷰에서, 혹시 다시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느냐, 있다면 뭐냐, 라는 식의 물음에 "전부 다요!"라고 대답한 정영목 선생님의 이 책들, 사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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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전공자로서 오랫동안 강의를 해 오면서 '문학과 윤리' 역시 많이 다루어온 주제였다. 소위 '정치범'인 도-키를 전공한 만큼 '문학과 정치(혁명)' 만큼이나 많이 얘기했던 것 같다. 교양 수업이라면 주로 수업 말미, 나보코프를 다룰 때다. 문학과 정치는 아무래도,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불가코프 등  소비에트 소설을 읽을 때 얘기된다.

 

 

 

 

 

 

 

 

 

 

 

 

 

 

 

 

 

 

 

 

 

 

 

 

 

 

 

오랜만에 여러 권을 가져와 봤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원래 나보코프는 대단히 지적이고 문학적인(!) 작가인데, 유독 <롤리타>가 문제적, 선정적이다. 이 소설 때문에 그는 응당 적잖은 스캔들에 휩싸였다. 얼핏 기억나는 에피소드로는, 당시 그가 일했던 학교(콘웰 대학이었나?)의 학부모들이 저런 놈한테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고, 저런 놈한테 배우도록 할 수 없다고 항의한 것이다. 얼핏 보면 <롤리타>는 소아성애를 다룬 소설이고, 자세히 봐도 물론 그런 요소가 없지 않다, 아니 출발점이기도 하다. 자, 이런 문제적인 소설을 쓸 때 작가에게 요구되는 가장 근본적인 자질은 무엇일까.

 

아, 물론, 문학적 재능이다. 그야 말해서 뭐하나. 하지만 소재와, 그와 맞물려 스토리의 전개가 그그렇다 보니, 이런 경우는 작가는 그 무엇보다도 윤리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더더욱 윤리적이어야 한다. 수업에서도 몇 차례 강조했거니와, 이건 러시아의 귀족작가이자 극히 지적인 작가였던 나보코프만이 감당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소아성애를 다룸에 있어 도덕성과 품격이 빠진다면, 그것은 그냥 포르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작가 자신의 전기. 그는 말하자면 정말 깨끗한(^^;;) 작가였다. 평생 공부하고 강의하고 소설 쓴 작가, 남는(?) 시간에는 테니스 치고 나비(인시류) 채집하러 다닌 학자였다. 이런 말하면 그렇지만, 사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비슷하게, 도-키. 존 쿳시(쿠체)의 소설에서는 도-키를 괴상히 병리적인 사람으로 그렸는데(그래서 그 소설이 싫었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 도-키는 우리가 흔히 갖는 몇몇 약점(자존심 강하고 발끈하고 속되고 등) 외에 큰 문제는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의 소설 속에서 암시, 때로는 묘사되는 성도착증은 전혀(!) 없었다.(그런 걸로 알려져 있다.) 소설 속에서는 가령 <악령>에서는 미성년자 강간, <미성년>에서는 비행청소년들 사이에서 약간의(?) 동성애 등이 나온다.

 

 

 

 

 

 

 

 

 

 

 

 

 

 

최근 '미투'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지만, 문학(예술) 쪽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사실 어떤 대목은 새로울 게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는 것이 더 참담하다. 한데, 놀라운 것은 엄연한 범죄인 행위들이 '문학-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미화, 권장된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이십대 초반, '너 소설 쓴다며? 소설 쓰려면 여러 남자랑 자 봐야 되는 거 아냐?' 라고 묻던 어떤 남자-아저씨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경우도 똑같은데, 아, 내가 행실이 옳지 못했구나, 만만하게 보였구나, 하는 자책 같은 것이 따른다.) 특히 이들은 '퇴폐-타락'을, 가령 보들레르나 툴루즈 로트렉의 경우 같은 미적 개념('데카당스')이 아니라, 현실 속의 도덕적 행위에 갖다 붙이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문학을 한다면 더 윤리적이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그것에 대한 더 민감한 자의식을 갖고 있어야지, 그걸 오히려 활용하려 든다면, 정녕 너무 추한 것이다.

 

*

 

이십대 초중반, 옛 남자 친구가 시인 지망생이어서 현대시를 많이 읽었다. 그 중 한 권. 내용은 거의 떠오르지 않지만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이미 역사가 된 이십대가 고스란히 소환되는 듯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최근 그의 모습을 보기가 참...ㅠ.ㅠ 

 

 

 

 

 

 

 

 

 

 

 

 

 

 

 

덧붙여, 김기덕. 그의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어도(우선은 <나쁜 남자>를 비롯해 보고 있자면 너무 힘드니까) 홍상수 감독과 더불어, 우리 영화계에 참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는데, 넘 슬프다...ㅠ.ㅠ (언젠가 동생이 가족 행사차 모호텔에 있다가 마침 부국제(?) 때문에 그곳에 와 있던 김기덕 감독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온 기억이 있다. 정말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쩝.) 혹자들은 '맨날 그런 영화가 찍으니까~~'이라고 말하던데, 그럼에도, 나는 저 나보코프나 도-키의 경우처럼 생각해왔다. 문학(영화도 마찬가지리라) 속 세계가, 작가의 사생활의 반영은 결코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우리 내면의 암흑을,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조건화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천재 아니다. 그리고 어떤 천재성도 기본적인 윤리를 뚫고 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남에게 피해주는 행동 하지 않기'는 초등생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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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8-04-06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쎄, '지적'이라기보다는 시건방지다, 발랄하다, 뭐 다른 수식어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요즘은 밥벌이용 책 말고는, 소설책을 빠른 시일 내에 완독하는 일이 드문데, 아, 재미있었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 이런 것이었구나.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멜리 노통브 책을 읽는 게 없나 보다 싶다. 헐, 놀라워라. 이 소설은 그녀의 데뷔작인데, 이십대 작가다운 발랄하고 오만한 총기가 넘친다. '그 후'가 궁금해지기도 하는, 즉, 작가가 나이 들어가면서 어떻게 변할지 귀추가 주목되기도 한다. 

내용 자체는 연골암, 이라는 희귀암에 걸린, 그래서 기고만장(^^;;) 한, 노벨상까지 받은 연로한(83세?) 작가가 두세번(?의 인터뷰를 한다. 첫 부분에서는 그냥(?) 지적인 소설,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읽혔다. 그런데 인터뷰와 인터뷰이의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 사실 맛만 볼 생각이었는데, 책장이 계속 넘어가는 것이었다. 노작가는 무척 괴팍하고 냉소적인 엄청난 뚱보로서 많은 작품을 썼는데, 일부러(!) 미완성작 하나를 남겨놓는다. 아니, 일부러 미완성으로 발표한다. 이게 나름의 키워드.

마지막 인터뷰(기자는 '니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갖고 있다)에서 드러나듯, 그 소설의 제목이 바로 <살인자의 건강법>. 동시에, 노작가의 유년(조실부모, 외가에서 성장, 외사촌 누이와의 미묘한 관계 등), 무엇보다도 살인과 방화 등이 얘기된다. 이 부분, 지나치게 신화적, 상징적인데, 너무 그래서 거의 판타지 같다.  롤리타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 신화적 공간 속의 소년 소녀처럼 사랑하는 사촌들, 그들은 성인이 되는 것을, 성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 독특한 '건강법'을 유지한다. 잠 안 자기(거의 두 시간만 잔다 ㅠ.ㅠ), 괴상한 음식만 먹기(가령 독은 없으되 얄궂는 버섯 등 - 왜 이리 사냐 ㅠ.ㅠ) 등등. 그러던 어느 여름날(년도까지 자세히 언급된다)  강가에서 수영을 하던 중 소년은 소녀가 초경을 시작한 것으로 발견, 그 자리에서(30분이라니, 헐) 소녀를 교살한다.  

다시금 인터뷰. 결말은 익히 예상 가능한 대로, 니나가 노작가를 교살해주는 것으로 끝난다.

스토리도 재밌고 문체도 마음에 든다. 이런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작위적(=판타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분량 역시, 조금 더 발라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독자로서는 좀 있다. 이후에 그녀는 어떤 소설을 썼는지. 

 

 

 

 

 

 

 

 

 

 

 

 

 

 

 

소설은 직접 읽어봐야 알 것이지만, 책 표지를 장식한 상당한 미모가 나이와 함께 양질전화되는 모습은 금방 확인된다. 중년이 돼도 '와쿠'는 남아 있다^^;; 그리고 저 레드립!

 

 

이 소설을 알게, 또 읽게 된 것은 어느 젊은 평론가 덕분인데,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최근 몇년간 읽은 (경)장편 중 제일 마음에 든 소설이다. 아멜리 노통브 소설을 읽은 뒤의 감상도 그렇다. 팔은 안으로 굽는 모양이다.  스토리도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인물군도 다양하고 생기롭다) 정말 발라낼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딱 필요한 말, 필요한 문장만 쓰였다. 작가가 얼른 새로운 경장편 한 편을 더 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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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8-04-06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자의 건강법... 제목부터 땡기네요..오호...

추천해 주시는거죠? ㅋ
 

쉽지 않다. 잘 쓴 장편을 찾기가 말이다. 잘 쓴 단편은 넘치는 것도 같다. 적어도 한 주(3시간)에 쓸 한 두 편의 단편을 고르는 것은 힘들지 않다. 문단 시스템도 단편을 쓰도록, 또 고르도록 편성되어 있고 소설창작 수업도 그렇게 가는 것 같다. 문제는 장편. 어쩌면 고루하게도, 모름지기 소설이란 장편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게 참 유감이다. 고전 읽는 수업(각종 어문학과 문학 수업이 다 이런 식)이 아니라 소설 쓰는 수업에서 장편을 읽기가, 또 평하기가 쉽지 않는 거다. 그럴 수록 한 두 편을 엄선하는 데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분량이 만만한 경장편으로 기운다. 이런 시스템에 문제는 없는지, 물론 반성해볼 필요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읽어본 경장편 중 으뜸은 김영하다. 

 

 

 

 

 

 

 

 

 

 

 

 

 

 

김영하 소설은 어지간히 다 읽었지만, <살인자의 기억법>은 작가의 창작 전체를 놓고 봐도 수작, 심지어 걸작인 것 같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래 아마 김영하의 장기가 제일 발휘된 소설. 한데 이 소설과 어느 프랑스 소설이 영향 관계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읽어보려고 주문해봤다.

 

 

 

 

 

 

 

 

  

 

 

 

 

 

또 다른 경장편의 견본으로 황정은 소설도 좋았다. 그녀는 여전히 많은, 좋은 소설을 쓰고 있다. 한데, 이건 정말 개인적 취향인데, 다소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왠지 재독하게 되지는 않았다. 단편은 그런 감상성이 짧으니(?) 아마 그쪽으로 읽게 될 듯하다.

 

 

 

 

 

 

 

 

 

 

 

 

 

그 밖에 뭐가 있나. 최근 읽었거나 읽으려고 샀거나 '눈팅'만 해뒀더가 한 장편을 뽑아본다. <홀>은 <식물애호>라는 상당히 잘 쓴 단편의 장편 버전이라, 구미를 자극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작품 자체로는 재미 있었으나, 흔히 말하는 문학성이랄까, 이런 측면에서 할 말이 많지 않은 것이 나로서는 문제다. 천명관,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어째 이번 장편은 애매(?)하다. 왠지 <... 브루스 리>의 따분한 재탕일 것 같은 느낌. 이제 그는 '남자(만)의 세상'(느와르 장르의 소설적 변용 같은)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결혼은 하셨는지... ㅋ 

 

 

 

 

 

 

 

 

 

 

 

 

 

 

 

또 어떤 장편 소설이 있으려나. 이렇게 검색을 해봐야 할 정도니 이건 뭔가 이상한 것 아닌가. 한편 외국 작가들이 쓰는, 그래서 국내에 번역되는 소설은 거의 다 장편이다. 우선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에 이어 <나를 보내지 마>. 내 입장에서 '취향 저격'이라고 할 소설이 아님에도(나는 건방진 작가를 좋아하는데 이 작가는 너무 겸손하다!^^;;), 작품의 무게와 주제의식,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배여 있는 장인정신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둘 다 일인칭. 그럼에도 흔히 일인칭 장편에서 우려되는 자의식의 과잉, 서사의 불균형 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보다 더 부각되는 것은 주제의식이다. 우리 인간 모두의 메타퍼로서 (대저택의 집사에 이어) 장기기증자-클론들. 사실 이거 엄청 살 떨리는 얘기인데, 너무 담담해서 더 무섭다. 1차 기증을 끝내고 회복되면 또 2차 기증으로, 그리고 회복되면 또 3차 기증.이 클론들이 이식 전에 주로(오직?) 하는 일은 그 기증자들을 간병하는 일. 이거야말로 정말 우리 인간과 삶의 메타퍼다. 불쌍한 것들.(Poor creature?)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같은 뜻인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도 뒤적여 보았다. 그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어봤으나 좀 지루했던 것 같다. 소련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소재로 쓴 <시대의 소음>은 어떤가. 이게 무척 칭찬 받은 소설임에도, 나는 참 별로였다. 아무래도 '영혼의 형식'이 아니다. 저 엄정하고 점잖은,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영국식 세계관과 문체에, 광기와 혼돈의 육화인 러시아-소련의 예술혼을 담아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나의 개인적 생각이고, 이런 시도 자체가 문학적으로 얼마나 유의미한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문학의 소재, 문체, 시도 등은 다양할수록 좋다.

 

 

 

 

 

 

 

 

 

 

 

 

 

 

덧붙여, 이 소설 읽다보니 영국인들의 우주주의, 최대주의랄까, 그런 것을 또 한 번 상기하게 됐다. 선진국-제국다운 (참 시건방진^^;;) 담대한 시도이다. 오래 전 도스-키를 공부할 때 도-키 평전의 모범이었던 <도스-키>의 저자 역시 영국인 러시아역사학자이다. 그를 두고 오래 전 강의실에 김윤식 선생이 하셨던 말씀을 대략 복기해본다.  "러시아 역사를 연구하다 보니, 저 미개한 야만의 땅에 이토록 기똥찬(기막힌) 천재 작가 하나 있더라, 그래서 이 위대한 역사학자가 그 바쁜 와중에 평전을 하나 써주시고~ "

 

 

 

 

 

 

 

 

 

 

 

 

 

 

 

미뤄두었던 독일 소설도 한 번 펼쳐본다. 영화로 먼저 봐서 소설책에 좀 미안한 느낌. <책 읽어주는 남자>의 경우에도 인물, 스토리 모두 좋지만, 이 정도 좋은 소설은 적지 않고, 이 소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시나 주제의식인 것 같다. 전에도 쓴 것 같은데 바로 법과 정의, 죄와 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다.  

 

 

 

 

 

 

 

 

 

 

 

 

 

 

대학 시절에는 프랑스 소설을 많이 읽은 것 같은데, 요즘은 뭐가 읽히는지. <개미>를 처음에만 좀 좇아갔기 때문에 아예 놓친 것도 같다. 어느 순간부터 너무 가볍다, 라는 느낌도 들었던 듯하다. 하지만 어쩌면 실은 내가 너무 무거워진 것은, 그래서 처져 버린 것은 아닌지. 잠깐 반성해보는데 이것이 바뀔 수 없는 진리인지라 더 슬퍼진다.

 

 

 

 

 

 

 

 

 

 

 

 

 

 

 

장편의 역사를 더듬고 장편의 질을 높일 필요가 있어보인다. 말이 쉽지, 현실이 녹록치 않다. 작년에 비교적 정독, 재독한 장편들. 참 갈 길이 멀고나.

 

 

 

 

 

 

 

 

 

 

 

 

 

 

 

*

 

그래서 우리는 고전을 대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적어도 지금 시간낭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은 적다. 그럼에도 이 소설, 정녕 안습, 노잼, 극혐이다.^^;; 번역이 참 좋은데, 이 좋은 번역이 아까울 정도의 소설. 역시 벨린스키의 평(졸작)은 진리.  곁다리로, 아이의 발달센터 근처에 커피숍 하나를 새로 발굴(?)했다. 하지만 참, 입에 맞는 떡이 없다. 커피도 맛있고 전망도 좋고 다 좋은데 오후 1시에 문을 열고, 무엇보다도, 이 엄동설한에 무척 추운 것이다. 이런 것이다. 그러니 투덜대지 말자. 핫팩을 배에만 붙이지 말고 등에도 붙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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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쭉 수수께끼였다. 파벨 표도로비치 스메르쟈코프. 석사논문에서도 그에 대해 많이 썼다. 아마 이제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써보는 중이다. 아무리 '구원'하려고도 해도 도무지 구원할 수 없는 캐릭터다. 왜냐면 그가 그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그에 앞서 이반에 대해 썼으나, 뜻밖에도(-_-;;) <게재불가>를 받아, 그것도 심사결과를 너무 늦게 주셔서, 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게 나와야 스메르쟈코프 논문이 나가는데, 또 그래야 도-키 연구서를 꾸리는데.(음, 하지만 꼭 그래야 하나?) 아무튼 무척 의기소침했다. 그 여파도 있고 겸사겸사 날도 춥고 이삼일 자리보전하다가 일어났는데, 목디스크의 여파로 왼팔이 너무 아파 또 의기소침해졌다. 대학 시절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동기의 위암수술까지 전해듣고 더 의기소침해졌다. 앞으로 더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는 건 이 모든 것이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라는 것. 과연 (희망만큼이나 허망한) 절망.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의 정조를 써본다. 바로, 증오. 다 싫어! 스메르쟈코프는 그것의 육화인 것 같다.

 

 

 

 

 

 

 

 

 

 

 

어머니가 중증자폐(1급)였던 것을 상기할 때, 또한 그의 여러 자질을 볼 때 분명히 그런 성향이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자폐가 정신(지적)박약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게 더 무섭다. 변호사 페츄코비치의 성격화가 제일 적확하다.

 

저도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가서 그를 만났고 대화도 나눴지만, 그가 저에게 불러일으킨 인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건강이 허약하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성격이나 마음에 있어서는, 오 아니올시다, 이 자는 절대로 검사측이 단정 지은 것처럼 그렇게 허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저는 그에게서 겁이라는 것을, 검사가 우리에게 그토록 특징적으로 묘사해준 그런 겁쟁이 같은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순진무구한 측면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제가 발견한 것은 순진함 밑에 감춰진 무서울 정도로 의심이 많은 성격, 그리고 극히 많은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적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사생아라고 생각했던 만큼(그런 증거가 있습니다) 자기 주인나리의 정식 자식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처지를 증오했을 수도 있습니다.”(3, 479-480)

 

마지막, 그의 자살에 대한 해석. 아이를 보내고 머리를 감는데 저 마지막 문장을 떠올라, 아, 가슴이 서늘했다.   

 

하지만 검사측은 그렇다면 왜, 대체 왜 스메르쟈코프가 유서에서 자백을 하지 않았는가? 라고 외칩니다. “어떤 일에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또 다른 일에선 그렇지 않았단 말입니까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말입니다, 양심이란 이미 뉘우침을 뜻하는 것인데, 자살자에겐 뉘우침이 있었을 리 없으며 오직 절망만이 있었습니다. 절망과 뉘우침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절망은 일체의 타협을 거부할 만큼 악의로 가득 찬 것일 수 있으며, 따라서 자살자는 자기 목숨을 끊으려는 그 순간 자기가 평생 동안 질투해온 자들을 두 배로 증오했을 지도 모릅니다.”(3, 484-485)

 

뉘우침”(회개)이 아니라 절망”, 그리고 죽기 직전에 그 동안 질투해온 자들을 두 배로 증오했으리라는 변호사의 말이 너무 격하게 공감되어, 그래서 너무 격하게 슬프다. 조시마의 말대로 진정한 지옥은 '사랑의 부재'이다. 그 스스로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못하는) 것만큼 무서운 지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옆집 아가씨 마리야 콘드라-나가 스-프를 사랑하지만, 스-프는 그녀에게도 절대적으로 무관심하다. 그저 청자가 필요하고 거처가 필요하니 활용할 뿐. 이건 자폐와는 전혀 다른, 정녕 도-키만이 창조할 수 있었던, 우리 인간 본성의 아주 깊은 심연인 것 같다.

 

그냥 독자로서 세상에 어떻게 이토록 외롭고 무서운 인물이 있을 수 있는지 놀랍고, 연구자로서 이 인물이 시사하는 문제가 너무 흥미로워 놀랍고, 소설가로서 도-키는 어떻게 이런 인물을 창조할 수 있는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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