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섬은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자갈길의 종착지는 연못이었다. 흐르는 강물과 달리 몹시 탁하고 적막했다. 그 위로 푸른 연꽃 이파리들이, 또 그 위로 흰색과 자주색 연꽃들이 동동 떠 있었다. 연못 가두리의 물은 개구리밥으로 덮여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부들도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수초들은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 마냥 수면 아래서 흐느적댔다. 그 위를 물방개와 장구애비들이 휘젓고 있었다. 연못 건너편으로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높은 성채가 서 있었다. 하지만 볼품없이 높기만 할 뿐, 애매하게 방치된 폐가처럼 씁쓸하고 서글퍼 보였다. 담쟁이 넝쿨이 담벼락을 뒤덮어 벽돌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벽돌의 틈새에는 눅눅한 이끼들이 음침하게 끼여 있었다. 대체로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참 초라한 성채였다.

 

, 이제 구경은 그만 하고 내리렴.”

떡붕어 아저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이렇게 무거워진 거냐?”

땅바닥에 두 발을 내딛자 소영이도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새로운 몸을 얻은 기분이었다. 길게 자란 머리채를 흔들며 길어진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성큼성큼 걸음도 내딛었다. 이제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저씨 우리 저기서 사는 거야?”

왜 마음에 안 들어?”

소영이는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빛도 들어온다며? 변소에 구더기도 없다며? 그럼 됐어. 아저씨, 이제 우리 헤엄쳐야 돼?”

연못가에서 걸음을 멈춘 소영이가 물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연못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를 더듬었다. 볼록하고도 거칠게 돋아난 옹이 위에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château d'if’라는 문자도 있었지만 보호색을 입은 곤충 같아 간신히만 알아볼 수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을 집게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성 저 편에서 거대한 다리가 내려왔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저쪽 하늘에서 이쪽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리는 소영이 바로 앞에서 철커덕 내려앉았다. 소영이는 아저씨를 한 번 올려다 본 뒤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진홍색, 하얀색, 검정색의 커다란 물고기들이 소영이 곁을 지나갔다.

우아! 물고기 되게 많다! 아저씨 쟤들도 잡아먹으면 맛있어?”

쟤들은 저렇게 놀라고 있는 거야.”

왜 어떤 물고기는 잡아먹고 어떤 물고기는 그냥 놀게 내버려둬? 불공평하잖아?”

떡붕어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얼굴의 살갗이 아주 미세하고 재빨리 경련을 일으켰다.

 

둘은 이미 다리를 다 건너왔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저절로 열렸다. 두 개의 문짝이 밖으로 쩍 갈라지면서 성의 내부가 드러났다. ‘우아!’를 외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소영이도 당혹스러울 만큼 누추한 공간이었다. 천정은 나지막하고 군데군데 페인트가 떨어져 나가 지저분했다. 홀 바닥에는 여기저기에 해묵은 먼지와 쓰레기가 눈에 뜨였다. 청소를 하다 말았는지 물동이와 밀대걸레도 한쪽 벽에 세워져 있었다. 그 맞은편에 다양한 크기의 종이 박스가 쌓여 있었다. 그곳에는 조그만 방이 하나 있었다. 방문의 절반이 유리로 되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탁자 위에 먹다 남은 과자와 커피 잔, 꽁초가 가득 담긴 재떨이가 보였다.

저 방엔 누가 살아?”

아무도 안 살아.”

그럼 빈 방이야?”

아니, 관리실이야.”

그게 뭐야?”

관리인이 있는 곳이고, 관리인은 이를 테면 문지기와 같은 거야.”

이 말에 소영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반문했다.

문지기라면서 왜 문을 안 지켜?”

그때 성문이 열리면서 우체부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여러 개의 소포가 들려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떡붕어 아저씨가 P항에서 부친 낚시 장비였다.

그거 307*호에 온 거죠?”

, . 그럼 그쪽이 떡붕어 아저씨? 소포 왔습니다!”

우체부는 이렇게 외치면서 무척 기뻐했다. 두드릴 대문이 없어, 당장 옆에 있는 관리실 문을 탁탁 두드리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거구에 한꺼번에 80킬로그램 정도는 거뜬히 들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어릴 때는 거인이라며 놀림과 따돌림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도 그의 꿈은 가로수가 호젓하게 심어진 포장도로 위에서 천천히 시간을 음미하며 낙엽을 쓰는, 몸집이 왜소한, 심지어 여자처럼 가녀린 청소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그가 거구여서도 아니고 이곳에 가로수길이랄 것이 없었던 까닭에 실현할 수 없는 꿈이었다. 대신 그는 이 섬의 유일한 우체부가 되었다. 지나치게 큰 몸집에 대한 해묵은 열등감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아침부터 그는 불끈 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리며 우체부 아저씨요!”라고 목청껏 외쳤다. 초인종이 버젓이 있는데도 이러는 건 그의 습관이었다. “최도승씨, 편지 왔습니다!” “한훈탁씨, 소포요!” 이런 말을 덧붙일 때 그의 얼굴에선 흐뭇함이 배어나왔고, 온 몸에선 생기가 샘솟았다. 사람들이 편지나 소포를 건네받을 때는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상대방이 몸을 돌린 뒤에는 그 뒷모습을 5초 정도 감상했다. 우체부의 빈틈없는 하루일과에서 성은 늪과 같은 것이었다.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소포나 편지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우체부를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다들 집을 비웠거나 혹은 비운 척했다. 무엇 때문인지 작당이라도 한 듯 우편물을 받는 일만은 문지기가 해야 된다고 암묵적인 원칙을 세웠다.

 

, 이건 됐고, 젠장, 또 아무도 없군.”

우체부는 매번 겪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또 화를 냈다. 그는 투덜거리며 관리실 옆 벽에 박힌 버튼을 눌렀다. 저쪽에서는 즉각 응답이 왔다.

누구세요?”

우체부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요!”

문 앞에 두십시오.”

아니, 그러다가 도둑이라도 맞으면 어떡합니까? 분실도 분실이지만 누구든 수령자가 사인을 해야 되는데요?”

직접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우체부 아저씨가 직접 사인을 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지 말고 잠깐 내려 오셔서,”

우체부는 말이 길어졌다. 문지기는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했다. 결국 우체부가 제풀에 지쳐 꼬리를 내렸다. 우체부는 내키지 않는 듯 우편물을 관리실 앞에 내려놓으며 툴툴거렸다.

대체 뭐 하는 양반인지, .”

하지만 떡붕어 아저씨는 무사히 배달된 낚시 장비를 매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신인의 행복과 감사에 전 표정을 보자 우체부는 관리인으로 인한 짜증이 싹 녹는 기분이었다.

 

성을 마지막으로 오늘 그의 일과도 끝났다.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몸집이 어린 계집아이만큼 작고 지능도 딱 그 수준인 아내가 해주는 밥을 배불리 먹고, 점점 아비 못지않게 덩치가 커지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흘리고는 죽은 사람처럼 잠들었다.

 

*

 

소영이가 성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른 아침부터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달랬다. 출장을 가야 된다는 것이었다. 소영이는 자기 혼자 집을 지켜야 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넌 다 컸어. 충분히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는 나이라고.”

이 말에 소영이는 의젓한 척 굴며 눈물을 닦았다.

아저씨, 또 배 타고 가?”

.”

그 다음엔 또 멀미나는 버스 타?”

아니, 기차.”

그거는 멀미 안 나?”

글쎄, 그건 모르겠다. 태어나서 차멀미 하는 사람은 너밖에 못 봤거든.”

아저씨, 나 기차 탈래. 나도 데려가줘.”

소영이의 얼굴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다음번엔 꼭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서 성을 나갔다. 소영이는 처음에는 훌쩍 거렸지만 금세 그의 존재를 잊었다.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의 집이 좋았다. 낮이면 햇빛이 환하게 들고 밤이면 검푸른 하늘빛이 포실한 이불처럼 깔리는 아늑한 집이었다. 소영이의 방은 벽에 손을 댈 때마다 조금씩 커지더니 급기야는 운동장처럼 넓어졌다. 소영이는 방을 빙빙 돌며 뜀박질을 했다. 방구석에 놓여있던 줄넘기를 들고 놀기도 했다. 벽을 향해 공도 던졌다. 공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벽은 또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때마다 방은 세로로, 혹은 가로로 조금씩 더 넓어졌다. 소영이는 모서리를 향해 공을 힘껏 던졌다. 이번에는 그 쪽 모서리만 저 혼자서 뒤로 쑥 빠지면서 방이 사다리꼴 모양이 됐다. 정확히 맞은편 모서리를 향해 똑같은 힘을 써서 공을 던져봤다. 그러자 이번엔 그쪽으로 방이 확장됐다. 졸지에 방은 평행사변형이 돼버렸다. 소영이는 방을 키우고 넓히는 놀이에 흠뻑 빠졌다.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선반도, 옷장도, 창문도, 장판도 다 소영이를 따라 키득키득 웃어댔다.

 

다음날, 소영이는 옷장 문을 열었다. 옷 대신 텅 빈 넓은 공간이 나왔다. 소영이는 옷장 안으로 들어가 봤다. 안쪽 벽에 손을 대자마자 벽이 문으로 바뀌었다. 곧 소영이의 방과 똑같은 방이 나왔다. 그곳에는 아직 뒤집기조차 할 수 없는 갓난아이가 손발을 놀리며 누워 있었다. 그 아이에게 세상은 얼굴위로 보이는 천정이 전부였다. 소영이는 살그머니 다가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자기를 10년 전으로 되돌려 놓은 것 같았다.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아이의 눈썹 위에 보일 듯 말 듯 자그마하고 연한 점이 그려져 있었다. 왠지 그 점이 소영이를 무척 슬프게 만들었다. 소영이는 얼른 옷장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다시 옷장 문을 열자 톱밥과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가득, 구더기와 지렁이가 꿈틀대고 있었다. 소영이는 얼른 옷장 문을 닫고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갓난아이는 온데간데없고 파스텔 톤의 타일이 깔린 텅 빈 욕실이 나타났다. 욕실 벽 위쪽엔 조그만 창문이 뚫려 있었다. 햇빛과 바람을 맞는 곳이었다. 소영이는 의자 위로 올라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팔꿈치 부분까지 창틀을 넘어버리자 갑자기 온 몸이 바깥으로 확 빨려나갔다. 겨드랑이가 가려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날개가 돋아났다. 소영이는 두 팔을 쫙 뻗고 손을 구부려 날개 끝을 살짝 잡았다. 그렇게 손으로 날개를 움직이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고개를 높이 쳐들자 성의 꼭대기가 보였다. 그것은 날카로운 바늘 모양새로 하늘을 꿰뚫고 있었다. 소영이는 그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힘껏 손짓을, 날갯짓을 했다. 아무리 해도 몸이 그리로는 비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영이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움직였다. 급기야 균형을 잃고 밑으로, 밑으로 끊임없이 추락했다. 추락의 최종 지점은 욕실의 타일 바닥이었다. 성탑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당장은 목이 너무 말랐다.

 

소영이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신선한 우유와 여러 종류의 과일 주스가 있었다. 반찬도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야채박스에는 참외와 포도, 딸기가 가득 들어있었다. 이제 냉장고에선 어떤 놀라운 일이 있을까. 소영이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얼굴이 시려올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영이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놀랍게도, 이건 그냥 냉장고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 물건보다 더 신기한 건 없었다. 10년 평생 냉장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소영이는 잠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 덕분에 꼬박 일주일을 잠 속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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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1983, 미송 양은 여덟 살이었다. 미송 양의 아빠는 농산물공판장에서 일했다. 집과 공판장 사이에는 무척 넓은 시장과 무척 큰 공원이 있었다. 점심때마다 미송 양은 아빠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기 위해 머나먼 길을 걸어갔다. 이 일이 미송 양은 참 좋았다. 동네 밖을 벗어날 수 있는,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미송 양의 가족은 마당이 넓은 집에 혹처럼 붙어 있는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다. 주인집은 방이 세 칸이나 되었는데, 주인아줌마와 영신이 언니 단 둘만 살았다. 주인아저씨는 선원이라서 늘 바다에 나가 있다고 했다. 미송 양은 그를 본 적이 없었지만 왠지 덩치가 크고 얼굴이 시커멓고 턱과 목에 수염이 잔뜩 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집채만큼 커다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일에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먼 바다를 가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아빠의 도시락을 들고 살가운 봄바람을 맞으면서 시장을 가로질러, 또 공원을 에둘러 공판장에 가는 것과 비슷할까.

 

언니, 아빠 따라 바다에 나가본 적 있어?”

언니는 한 번도 없다고 말했고, 미송 양은 실망했다. 바다라는 곳은 공판장과는 전혀 다른 곳인 모양이었다.

에이, 언니 따라 멀리, 멀리 나가보고 싶었는데.”

이 말에 영신이 언니는 피식 웃었다.

그럼 교회에 가볼래? 거기도 무척 멀거든.”

정말? 얼마나 먼데?”

버스 타고 한참 가서 또 한참 걸어야 되지.”

우아!”

미송 양은 어서 빨리 일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일요일 아침, 미송 양은 엄마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예쁘게 묶어 올리고, 어깨 끈이 달린 주름치마를 입었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양말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도 신었다. 영신이 언니와 함께 289종점까지 가는 내내 미송 양은 달떠 있었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낯선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미송 양의 눈을 훑고 지나갔다. 울긋불긋한 간판들의 행렬도 끝이 없었고, 거리를 오가는 낯선 사람들의 무리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미송 양은 커다란 눈 안에 집어넣겠다는 듯, 작은 머릿속에 아로새기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뜯어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미송 양은 차들이 앞뒤로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길 위에 섰다.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 저도 모르게 영신이 언니의 손을 꼭 잡게 됐다. 모든 것이 너무 크고 너무 넓고 또 너무 많았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마당은 미송 양의 집 마당의 서너 배는 족히 돼 보였다. 건물도 무척 높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신이 언니는 미송 양을 교회 안, 2층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초등반 예배실 앞에서 미송 양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네가 더 빨리 끝날 거야. 어디 가지 말고 등나무 밑에 얌전히 앉아 있어. 알겠지?”

미송 양은 영신이 언니를 올려다보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이 언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목사님이라 불리는 할아버지의 말은 길고도 길었다. 설교와 기도와 찬송가 사이로 아이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꾸지람을 했다. 아이들은 웃음을 참아야 하는 상황이 웃겨 더 많이 웃어댔다. 미송 양은 이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 그랬기에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함께 떠들고 웃을 친구가 없는 미송 양은 심심하다 못해 외로워졌다. 미송 양에게 필요한 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3층에 있는 것이 확실한 영신이 언니였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미송 양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등나무 아래, 벤치 주변은 낯선 사람들로 북적댔다. 당연히, 영신이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미송 양은 언니와 한 약속을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를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길기만 했다. 마음이 초조해지자 집에 가고 싶어졌고, 그 바람이 커지자 오줌이 마려웠다. 미송 양은 교회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1층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어둡고 길었다. 간신히 화장실을 찾아낸 뒤에는 줄이 길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미송 양은 3층으로 올라갔다. 중등반 예배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자, 말꼬리처럼 묶어 올린 머리채가 통째로 위로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미송 양은 자기 옆에 서 있던 한 아줌마에게 물었다.

저어기요, 중학생 언니들 벌써 끝났어요?”

방금 끝났는데, ?”

미송 양은 황급히 고맙다는 말을 하고선 다시 등나무 벤치로 달려갔다.

등나무 주변의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신이 언니는 이번에도 없었던 것이다. 언니가 자기를 버렸든, 길이 어긋났든 어쨌거나 이제는 혼자 힘으로 집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7년을 간신히 넘긴 미송 양의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었다.

 

*

 

홀로 걷는 낯선 길은 어딘가 서늘했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이 쌀쌀해지고 세상의 색깔이 약간 흐릿해진 까닭인지도 몰랐다. 미송 양은 앞만 보고 걸었다. 오직 ‘289’라는 숫자만이 미송 양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교차로가 나오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도 가도 길은 낯설기만 했고, 또 동시에, 가도 가도 제자리인 것 같았다. 바다 위를 헤매는 선원 아저씨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조그만 미송 양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들끓었다. 여동생과 실잣기 놀이를 할 때처럼 그 생각들을 순서대로 붙잡아 예쁜 모양으로 엮어보려고 했지만, 이 역시 실잣기 놀이처럼 도무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미송 양의 눈앞에는 초록색 버스들로 뒤덮인 새카만 아스팔트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하지만 미송 양이 감당해야 할 인생은 실로 길고 험난한 것이었다. 아스팔트길은 찾았지만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른쪽 왼쪽 모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난감했다.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고 발바닥과 종아리가 사정없이 아려왔다. 미송 양은 계속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달려오는 버스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미송 양이 몇 걸음을 떼놓기가 무섭게 버스는 이내 저만치 멀리 가버렸다. 미송 양은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절로 숙여진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미송 양의 맞은편에서 어떤 아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덩치가 무척 크고 얼굴이 시커멓고 턱은 물론 목덜미까지 시커먼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꼭 상상 속의 선원 아저씨 같았다.

 

미송 양은 그에게로 달려가 다짜고짜 물었다.

아저씨, 289버스 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289? 아니, 어린애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영신이 언니 아빠가 선원이라서 늘 바다에 나가 있는데요, 나도 멀리 나가보고 싶어서 영신이 언니 손잡고 교회에 왔는데요, 우리 집은 289종점이구요

다 좋은데, 그 영신이 언니는 어디 있어?”

 

오랜 고독과 불안에서 해방된 미송 양은 울먹이며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미송 양의 손을 잡았다. 엄마와 아빠가 늘 조심하라고 했던 모르는 사람과 함께 걷는 낯선 길은 뜻밖에도 어딘가 따사롭고 포근한 구석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은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나왔다. 버스가 도착하자 아저씨는 미송 양을 안아 올려 버스에 태워주었고 버스 운전수에게 동전 하나를 건넸다.

애가 길을 잃은 모양인데, 종점까지 좀 태워다 주세요.”

그러곤 미송 양을 쳐다보았다.

종점까지만 가면 혼자서 찾아갈 수 있겠지?”

!”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미송 양은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잠에서 깼을 때 버스는 이미 종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미송 양은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달려갔다. 남동생을 등에 업은 엄마가 여동생과 함께 대문 밖을 초조하게 오가고 있었다. 영신이 언니는 그 옆에 힘없이 서 있었는데,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금 막 경찰서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우리 딸 기특하기도 하지! 그 먼 길을 혼자 어떻게 찾아왔을까!”

 

미송 양은 굶주린 배를 채운 뒤에야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제야 중대한 사실이 상기되었다.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 어떡하지, 엄마?”

미송 양은 속이 상해, 양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옆에서 미송 양의 치마를 개고 있었는데, 호주머니에서 오십 원짜리 동전 두 개가 절묘한 화음을 내며 앞을 다투어 떨어졌다.

! 차비도 있었구나! 그 아저씨 만나면 꼭 고마웠다고 말하고 오십 원, 아니 백 원 다 줘야지!”

 

하지만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05/ <서울대동창회보> 20106월 제 387

 

 

-- 가장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 

  고전적인 형식의 성장소설-가족소설의 초고를 잡아놓은 터에, 정확히 그 초고를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터에 콩트 청탁이 들어왔고, 그 버리기로 결심한 초고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건져냈다. 분량을 맞추기 위해 말들을 많이 버려야 했다. 그 당시에는 좀 아까웠지만 지금 보니 지금의 크기가 딱 제격인 것 같다.  '미송'이란 이름은 2010년 2월에 태어난 조카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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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눈을 뜬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해산물 시장으로 갔다. 상인들과 손님들이 북적댔다. 막 잡아 올린 생선들이 신선한 비린내를 풍겼다. 곳곳에 물이 가득 담긴 대야가 보였다. 연체동물은 대야에 갇혀 있기 싫어 가끔씩 물을 거슬러 밖으로 기어 나왔다. 문어, 낚지, 오징어, 꼴뚜기, 주꾸미 등이 발에 채였다. 저쪽에선 해삼과 멍게가 쥐죽은 듯 잠자고 있었고 또 저쪽에선 대게들이 집게발을 꽁꽁 묶인 채 서로들 싸우고 있었다. 새우들은 수족관 안에서 유유자적하게 헤엄을 치며 놀았다. 난생 처음 보는 경관에 소영이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덩이 오막살이를 떠난 날부터 계속 만화경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마침내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데리고 바닷가로 나왔다. 바다 바람을 맞으며 둘은 선착장을 향해 걸었다. 바람 한 점 없이 화창하고 아침녘의 신선한 기운이 유쾌했다. 바다가 곁에 있는 남쪽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여름날이었다.

아저씨 저것도 강이야?”

소영이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떡붕어 아저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아이가 아예 말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줄곧 두려웠던 것이다.

저건 바다야.”

바다?”

그게 뭐야?”

저거.”

그것은 구덩이 오막살이 근처의 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넓고 크고 푸른 물, 아니, 물의 땅이었다.

우리는 저기를 건너갈 거야.”

으악! 정말? 어떻게?”

저걸 타고 건너는 거야.”

아저씨는 저 멀리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조그만 장난감 같은 것을 가리켰다.

저건 또 뭐야?”

.”

그게 뭐야?”

저거.”

치이, 아저씨 바보야. 말하는 거 잘 못해. 이제 아저씨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어볼 거야.”

정말 그러기로 다짐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궁금한 것이 생겼다. 소영이는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쌓아둔 얘기를 한꺼번에 다 풀어놓겠다는 듯.

아저씨, 아저씨, 아까 거기 사람들 많은 데, 물고기도 정말 많은 데, 거기 말이야, 그거 그 사람들이 직접 다 잡은 거야? 아저씨처럼 낚시해서 잡는 거야, ?”

아니, 그건 다 그물로 잡은 거야.”

그물? 그게 뭐야?”

저거.”

떡붕어 아저씨는 조그만 어선 위에 드리워져 있는 그물을 가리켰다. 그러곤 소영이를 안아 올렸다.

우아, 세상이 높아졌다! 하늘도 가깝다!”

소영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떡붕어 아저씨의 품안에서 까불어댔다. 그는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여객선에 올랐다.

 

파도가 거의 일지 않아 운항하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배는 금방 P항을 떠났다. 저 멀리로 철제다리와 해산물시장이 아스라이 보였다. 햇빛이 은근히 환하게 들어, 객실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선창 밖으로 보이는, 너울처럼 일렁이는 쪽빛 바다의 움직임도 다정스러웠다. 떡붕어 아저씨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해 봤다. 더불어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상상해 봤다. 마땅히 그 어떤 것도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떡붕어 아저씨는 습관적으로 한 손을 들어 수염을 쓸었다. 잡초처럼 무성한  것이 그 속에서  벌레들이 우글거릴 것 같았다. 아저씨는 옆에서 곤히 잠이 든 소영이를 남겨두고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로 갔다.

 

소영이는 오랜 시간 잠에 푹 빠져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햇빛이 선실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느닷없이 찬물 세례를 받은 양 온 몸이 서늘해졌다. 소영이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떡붕어 아저씨의 짐이 보이자 그제야 안심이 됐다. 소영이는 조그만 선창에 코를 박고 바깥을 내다봤다. 시퍼런 물이 출렁거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구덩이 오막살이도, 가짜 대궐도, 강가도, 아무것도! 소영이는 울컥했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떡붕어 아저씨가 사색이 되어 소영이 곁으로 달려왔다.

으악!”

? 무슨 일이야?”

아저씨는누구야?”

소영이는 한참동안 들여다본 뒤에야 떡붕어 아저씨를 알아봤다.

, 아저씨였구나. 난 아저씨가 나 버리고 가버린 줄 알았어!”

소영이는 또 다시 울음을 쏟아냈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다독이며 선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갑판 위로 뜨거운 햇빛이 무자비하게 꽂혔다. 갑판이 물결의 흐름을 타며 조금씩 흔들거렸다. 짭짤한 바닷바람의 움직임이 몸으로 느껴졌다. 하얀 갈매기들이 떼 지어 창공과 바다를 갈랐다. 잔잔한 바다를 보며 떡붕어 아저씨는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은 온통 낚시로 가득 차 있었다. 올 여름이 끝나기 전에 통통배를 탈 생각이었다. 갑자기 자기 허벅지에 몸을 바싹 붙이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너무 신기해서 눈을 깜박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잠깐 이 아이의 앞날에 대해 생각했다.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어 또 다시 낚시 생각에 잠겼다. 이쪽은 성과가 많았다. 통통배를 타고 사량섬으로 들어가 사흘을 머무른다, 갯지렁이와 크릴새우를 준비한다, 우럭과 도다리가 많이 잡힐 거다 등등. 그의 알찬 명상을 소영이가 깨버렸다.

 

아저씨, 지금까지 아침이 몇 번이나 왔어?”

?”

그 동안 아침이 몇 번이나 왔냐고?”

떡붕어 아저씨가 대답을 못하고 뭉그적댔다.

치이, 아저씨 바보야. 내가 말해줄까, ? 세상의 모든 아침이 한꺼번에 다 왔어. 아저씨, 나 목말라.”

조금만 참아, 이제 다 왔어.”

목말라!”

자꾸 말하면 더 목마르니까 좀 참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우아, 저건 뭐지?”

 

배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조그만 점 하나가 보였다. 점은 급속도로 커져, 어느새 청신한 초록빛 섬이 됐다. 초록빛 곳곳에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박혀 있었다. 그 지붕들 뒤로, 푸른 숲 한가운데 높게 솟은 성채가 나타났다. 배는 그리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마다 소영이는 몸이 쑥쑥 늘어나는 걸 느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뼈마디가 콕콕 쑤시고 살갗이 팽팽하게 땅겼다. 눈도 아려왔다. 머리카락도 쑥쑥 자라는 모양이었다. 고무줄로 묶어놓은 꽁지머리의 끄트머리가 어느새 등을 건드렸다.

앞으로 저기서 살 거야.”

, 아저씨 나 죽는 거 아니었어?”

햇볕이 따가워 반쯤 감겨진 아이의 눈에는 침착하고 평온한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

, 아니었구나. 나는 내가 죽는 거라고 생각했어.”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의 손을 잡고서 섬에 첫발을 내디뎠다. 떡붕어 아저씨는 선착장의 매점에서 노란 보리차 한 잔을 사주었다. 소영이는 찬 보리차를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켜고 조막만한 손으로 입을 훔쳤다. 그리고 남은 보리차를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아저씨도 마셔. 왜 돌멩이 밖에 없어? 배에서 볼 때랑 너무 다르잖아!”

떡붕어 아저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자갈들이 발에 채였다. 소영이는 또 칭얼댔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등에 업었다. 소영이는 또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아, 세상이 높아졌다! 하늘이 가깝다!”

 

다시 초록빛 세상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짙은 초록색 벽돌로 지은 높은 성채가 보였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를 업었다 안았다 걸렸다 하면서 며칠 밤낮을 쉼 없이 걸었다.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의 등에서, 또 품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아침이 시작됐다. 성채는 여전히 멀리 있었다. 그 때문에 여전히 웅장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          *         *

 

 

1부가 끝났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2부가 이어집니다.

소박한 밥상, 찾아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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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는 열흘이 넘도록 침침한 방안에서 혼자 잠들었다.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있어 주는 것과 구덩이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무척 달랐다. 소영이는 한밤중에 곧잘 깨어났고 어둠 속에서 엉엉 울었다. 똑같은 방인데 느낌이 너무 달라졌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어둠이 싫었기 때문에, 또 밝은 빛을 더 오래 보기 위해 소영이는 일찍 일어나려고 애썼다. 눈에는 핏대가 섰다. 얼굴 가득 희뿌옇게 피어있던 마른버짐은 이제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밥알은 꺼칠꺼칠한 흙 알갱이 같았다. 뱃속은 늘 따끔거렸다. 며칠 째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소영이는 성냥개비처럼 깡말라버렸다. 밤에도 낮에도 어떤 무섬증과 허함이 기승을 부렸다. 7년도 안 되는 인생에 처음 맛보는,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오늘 주인이 남긴 말은 밤새도록 뾰족한 가시처럼 소영이의 머릿속을 쑤셔댔다. 소영이는 어서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구덩이 오막살이의 아침은 떡붕어 아저씨의 등장으로 시작됐다.

아저씨! 왔구나!”

소영이는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뱃속과 목구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질문이 터져 나왔다.

아저씨 집 변소엔 구더기 안 살아?”

우리 집에선 구더기는 톱밥이나 신문지 속에만 살아.”

아저씨 방에는 낮에 햇빛이 들어와?”

눈이 부실 정도지.”

밤에 전깃불 켜도 돼?”

낮에도 켜도 돼.”

그럼 나 아저씨 집에 갈래. 어디야?”

좀 멀어.”

강 너머야?”

아니, 더 멀어.”

! 절벽 너머에 있구나?”

아니, 그보다도 더 멀어. 가면 여기는 다시 못 올 지도 몰라.”

?”

왜냐고? 너무 머니까.”

할머니 보고 싶으면 어떡해?”

여기 있어도 다시는 못 본다니까.”

? 왜 자꾸 거짓말해?”

거짓말이 아니니까 더 문제다, 요 녀석아.”

아저씨는 소영이를 납득시키는 걸 포기하고 방을 둘러봤다. 챙길 짐이라곤 전혀 없었다. 서랍의 옷가지와 물건을 다 꺼내도 배낭 하나면 충분했다.

 

이들이 구덩이 오막살이를 나서기 직전에, 기적처럼 주인이 또 나타났다. 그는 떡붕어 아저씨에게 조그만 종잇장을 내밀었다. 며칠간의 방세와 물세, 전기세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명세서였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주인은 이 돈을 받지 않겠노라고 생각했지만 떡붕어 아저씨의 낚시 장비를 보고서 마음을 바꿨다. 그의 명민한 판단력은 전적으로 옳았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 자리에서 주인에게 돈을 쥐어주었다. 주인은 3570원을 정확히 거슬러 주었다. 떡붕어 아저씨가 됐다고 거부해도 소용없었다. 돈 계산에 정확을 기하고 또 그 내역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이 주인의 인생의 가장 보람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구덩이 오막살이를 떠나며 소영이는 훌쩍거렸다. 저 멀리, 다슬기 할매의 가짜 대궐이 눈에 들어오자 또 훌쩍댔다. 마침 비닐하우스 가게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할매의 모습도 보였다. 걸음을 뗄수록 할매는 점점 더 작아져 마침내는 조그맣고 새카만 다슬기로 변해버렸다. 소영이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꼭 쥔 떡붕어 아저씨의 손을 놓지도 않았다. 이제 자기에게 밥을 줄 사람은 이 사람 밖에 없었다.

 

*

 

한참을 걸어서야 소영이와 떡붕어 아저씨는 신작로 길에 도착했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먼지를 뒤집어써서 회색 옷을 걸친 깡마른 거인처럼 보였다. 둘은 거기서 한참을 기다렸다. 소영이는 다리가 아파 떡붕어 아저씨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침내 언덕 너머에서 뽀얀 먼지가 일면서 버스가 나타났다. 떡붕어 아저씨가 소영이를 안아 올렸다. 난생 처음 타보는 버스에 소영이는 온 몸이 울렁거렸다. 기름 냄새가 코를 찔러댔고 버스는 심하게 덜커덩거렸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들어 오는 산바람이 시원했다. 이제 구덩이 오막살이는커녕 그 근처의 공장 굴뚝도, 아파트 옥상도 보이지 않았다.

 

읍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정말 장날이었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땀을 뻘뻘 흘렸다. 장터에 깔린 물건들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탐스럽게 익은 사과와 토마토가 쨍쨍 내리 쬐는 햇볕 아래서 바싹바싹 말라갔다. 오늘 새벽 밭에서, 또 산에서 캐온 푸성귀들은 축축 늘어져 갔다. 나무판자 위에 놓인 자반고등어에서는 짜디 짠 비린내가 진동했다. 수내 마을에서 내려온 한 농부는 파장 무렵, 그 자반고등어 한 손을 최대한 헐값에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려면 돼지고기가 팔려야 했다. 토막을 내놓은 그의 돼지고기 위에는 파리들이 새카맣게 붙어 있었다. 농부는 종이부채와 손을 수시로 써가며 파리를 쫓았다.

 

아들 녀석은 아비의 근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난생 처음 구경하는 장터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발을 뗄 때마다 쓰레기와 돌멩이가 툭툭 걸려들었다. 그 어느 것도 이 새카만 시골 소년의 활약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발밑에 뭔가 물컹하고 큼직한 것이 밟혔다. 소년은 얼른 발을 떼고 고개를 숙여 보았다. 생쥐 치고는 너무 크고 들쥐 치고는 좀 작은, 짙은 회색 쥐였다. 소년은 신이 나서 쥐꼬리를 손으로 잡았다. 그러곤 쥐꼬리를 빙빙 돌리며 시장 바닥을 누볐다. 어른들이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질렀지만 누구 하나 다가갈 생각도 못했다. 그때 소영이가 떡붕어 아저씨와 함께 그 곁을 지나갔다.

! 말라깽이! 성냥개비! 바보야!”

소년은 뭣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희죽거리며 이렇게 외치더니, 소영이를 향해 죽은 쥐를 획 집어던졌다.

으악!”

소영이는 잽싸게 몸을 피했다. 너무 놀라 대거리를 할 엄두도 못 냈다. 죽은 쥐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주위로 파리와 날파리가 잔뜩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그 쥐를 밟고 지나갔다.

 

시외버스터미널은 장터를 가로 질러, 조금 더 걸어간 곳에 있었다. 도로 주변에 노점상들이 일렬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삶은 계란과 귤을 그물망에 넣어서 팔았다. 군밤도 보였다. 소영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도 났다. 떡붕어 아저씨는 터미널 안에서 김밥과 우동을 사주었다. 배가 좀 꺼져갈 때 아저씨는 조그만 약병을 건넸다. 처음 맛보는 독한 약물에 소영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르스름한 액은 목구멍을 넘어가기도 전에 곧장 게워버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찼다.

 

먼 길이 시작됐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를 태운 버스는 도중에 5분 여 정도 정차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소영이는 거의 목숨이 끊어진 사람처럼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먹은 것을 다 토했다. 그렇게 기진맥진하여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버스는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고 있었다. 잘 자란 푸른 벼들이 가득한 논이 소영이 곁을 재빨리 훑고 지나갔다. 창밖 구경도 잠시, 소영이는 또 한 차례 멀미를 하고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고 버스는 어둠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번에는 음식물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싯누런 물만 나왔다. 헛구역질을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잠이 쏟았다.

 

상쾌한 햇살이 막 쏟아질 때 버스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원래 오늘 저녁에 바로 배를 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좀 가혹한 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를 잃은데다가 난생 처음 동네 밖을 떠나 이 머나먼 길을 온 소녀에겐 말이다. 소영이는 작은 진흙 인형처럼 오그라들어버렸다. 사실 떡붕어 아저씨도 지쳐버렸다. 그는 선착장 근처 여관에서 방을 하나 빌려놓고서 우체국을 찾아가 낚시 장비를 소포로 부쳤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떡붕어 아저씨는 완전히 뻗어 버렸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어쩌자고 선뜻 이 아이를 데려 왔을까. 앞으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아니, 남자 혼자 계집애를 키우는 것만큼 엄청난 지옥이 어디 있을까. 이런 생각들은 모두 떡붕어 아저씨의 길게 자란 턱수염 속에 묻혀 버렸다. 산골에 머문 한 달간 면도날 한 번 대지 않고 내버려뒀더니 그야말로 괴기스러운 신선의 몰골이 됐다. 소영이는 잠꼬대를 하고 몸부림을 치며 그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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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떡붕어 아저씨는 하루 종일 강을 끼고 살았다. 떡밥을 쓰지도, 그물을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수확은 형편없었다. 손에 넣은 몇 안 되는 물고기들은 모두 상처를 입은 채로 다시 강물 속으로 보내졌다. 다음날엔 비가 왔다. 떡붕어 아저씨는 속이 훤히 비치는 비닐 우비를 입고 강가로 나왔다. 물속으론 들어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자리를 옮겨가며 낚싯대를 지켰다. 떡붕어는커녕 입질 한 번 제대로 하는 녀석도 없었다. 다음날도 비가 왔다. 그래도 떡붕어 아저씨는 강가를 지켰다. 미꾸라지와 싱싱한 산 지렁이를 미끼로 준비했다. 운이 좋아 메기가 물렸다. 떡붕어 아저씨는 신이 났다. 하지만 정작 잡고 보니 아직 살날이 제법 많이 남은 녀석이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대로 풀어주었다. 다음날엔 날이 갰다. 이틀간 계속해서 내린 비로 강물이 눈에 뜨일 정도로 불어났다. 떡붕어 아저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맛보는 뜨거운 태양이 낚시의 맛을 돋웠다. 덩달아 떡붕어 아저씨의 온 몸이 휘청거릴 만큼 힘이 좋고 커다란 가물치가 걸려들었다. 아저씨는 가물치를 품안 가득 안고 강가로 나왔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구덩이 오막살이를 찾아갔다.

 

땅 속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길게만 느껴졌다. 구덩이도 그 사이에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마당에 이르러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덩이가 더 깊어졌는지 어째 하늘이 더 푸르러보였다. 떡붕어 아저씨는 구덩이 오막살이의 가장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소영이의 방이 보였다. 부엌문은 열려 있었고 소영이의 할머니는 문지방 앞에 발을 모은 채로, 대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생생한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다. 소영이는 그 석고상의 다리 위에 머리를 얹은 채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비스듬히 세워진 소영이의 등 위에는 할머니의 손이 얹혀 있었다.

아저씨!”

거의 절규하듯 외치면서도 소영이는 몸을 일으키진 않았다.

아저씨, 할머니가 차가워. 등을 쓸어주지도 않아. , 울 거야!”

그러고는 할머니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연탄집 아줌마가 나타났다.

소영아, 밥 먹어야지!”

소영이가 얼굴을 들었다. 눈물범벅이 돼 있었다. 연탄집 아줌마는 당황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몸에 선뜻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 사이에 떡붕어 아저씨의 품에서 커다란 가물치가 툭 떨어졌다. 살이 시커먼 흙바닥에 닿자 가물치 역시 당황하여 온 몸을 비틀어댔다.

 

어차피 오늘내일 하던 사람이었지만 있던 사람이 없어지는 일은 충격이었다. 구덩이 오막살이는 숙연한 가운데 분주해졌다. 배추집 아들이 냉큼 달려가 다슬기 할매를 불러왔다. 할매의 손에는 딸랑이 장난감 같은 물건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그 동안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소영이 할머니를 방바닥에 곱게 눕혔다. 전깃불도 켰다. 순식간에 방안이 밝아졌다. 할머니의 얼굴이 이렇게 환해 보인 적이 없었다. 소영이는 팅팅 부운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슬기 할매는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딸랑이를 울리며 할머니의 몸을 향해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현관 문 앞에 줄 지어 서서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다슬기 할매가 밖으로 나오자 다들 차례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영이 할머니에게 한 번씩 절을 올렸다. 그 일이 끝나자 연탄집 아저씨와 사과집 아저씨가 할머니의 몸뚱어리를 거적때기로 둘둘 감았다. 그들이 거적때기를 어깨에 들쳐 메고 나오자 구덩이 오막살이는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숨과 온기가 사라진 소영이 할머니는 구덩이 한 가운데의 뜰에 묻혔다. 쌀집 아줌마는 귀한 쌀알을 뿌렸고, 배추집 아줌마는 푸르고 싱싱한 배춧잎 하나를 얹었다. 연탄집 아줌마는 아직 태우지 않은 새카만 연탄을 곱게 부숴 그 가루를 뿌렸다. 조장집 아줌마는 아저씨가 뇌물로 받아온 막걸리 한 사발을 뿌렸다. 사과집 아줌마 역시 제일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를 한 입 베어 소영이 할머니의 무덤 위에 놓았다. 소영이는 평소와는 다른 왠지 모를 숙연한 분위기에 놀라 잠깐 울음을 그쳤다가 이내 곧 엉엉 울었다. 사람이 차가워지고 손을 움직이지 못하면 땅속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왠지 무섭게 느껴졌다.

바보, 울긴 왜 울어? 작년에 우리 할아버지도 여기 묻었잖아. 그래서 지난 가을에 감이 그렇게 맛있던 거야. 너희 할머니 때문에 올 가을에도 감이 맛있을 거야. 뚱딴지도 더 잘 자랄 테고.”

배추집 아들이 소영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오빠 바보야. 감이 맛있으면 뭐해! 뚱딴지 꽃이 예쁘면 뭐해! 우리 할머니 죽었단 말이야!”

소영이는 악을 쓰며 말했다.

여기 땅 속에 있는 거라니까. 네가 감을 맛있게 먹으면 할머니도 좋아할 거야.”

오빠는 똥쟁이, 똥자루야!”

소영이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동안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떡붕어 아저씨가 잡아온 가물치를 다듬었다. 얼큰한 가물치 매운탕 앞에서 다들 또 한 번 숙연해졌다. 밥상은 구덩이 오막살이에서 방이 제일 큰 조장집 안방에 차려졌다. 오늘 큰일을 치룬 다슬기 할매가 상석에 앉았다. 가물치의 머리와 살이 연한 가슴팍 부분은 할매 차지가 됐다.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국에 밥을 말아먹을 때 소영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

 

할머니가 죽은 뒤에도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소영이에게 밥을 주었다. 자기 아이들이 못 입는 옷도 갖다 주었다. 하지만 소영이의 방세를 내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주인이 등장했다.

 

구덩이 오막살이의 주인은 참 착하고 건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건물이 참 많았고 그의 일은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공장지대 옆에 지어진 5층짜리 아파트도 그의 것이었다. 구덩이 오막살이는 그의 건물 중 가장 저렴한 곳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자기 건물을 돌며 무슨 문제가 있나, 없나를 점검했다. 기물을 파손한 자는 문고리 하나라도 배상을 해야 했다. 야심한 시각에 건물 주위에서 노상방뇨, 고성방가 하는 사람은 한 시간씩 이어지는 그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이 설교가 너무 곤혹스러웠기 때문에 재범은 절대 없었다. 이렇게 그는 자기 건물의 안팎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방세에 관한 한, 그는 날짜를 어기는 일이 절대 없었다. 늘 정해진 날짜에 장부를 들고 세입자 앞에 나타났다. 세입자들도 그의 성실성과 꼼꼼함을 높이 사, 그가 나타날 시각에 하얀 돈 봉투를 준비해두었다.

 

주인은 시간표를 꼼꼼히 따져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시간에 구덩이 오막살이에 나타났다. 최근 구덩이 오막살이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어서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다. 자살도, 사고사도 아니었지만 사람이 죽어나간 방은 그 자체로 골치였다. 방 구석구석에 밴 산송장 냄새는 방향제를 아무리 뿌려도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구덩이 오막살이, 그 중에서도 지하 단칸방에 떨어지는 인생들이란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과 습기와 곰팡이는 그들이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슬픈 실존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세를 놓으려면, 눈 가리고 아웅 식이라도, 장판도 깔고 도배도 새로 해야 했다. 드디어 행동을 취해야 할 때가 왔다.

 

방세는 소영이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몇 달이나 밀려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독촉을 하지 않았다. 대신 보증금에서 월세를 꼬박꼬박 깎아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죽기 직전 이미 그 보증금도 바닥났다. 그런데도 주인은 무려 칠일을 그냥 참아주었다. 할머니가 죽은 뒤엔 애도 차원에서 무려 사일을 더 참아주었다. 이 정도면 죽은 자도 부활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 더 이상 사태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주인은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 소영이에게 이 원칙을 열심히 설명했다.

알겠지, 방세를 내지 않고 계속 남의 방에 사는 걸 패륜이라고 하거든. , 네가 여기 계속 있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겠지? 하지만 네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겠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냔 말이야?”

맞아. 다슬기 할매가 그랬어. 나는 시집도 못 보내고 식모살이도 못 보내고 학교도 못 보낸대.”

그래, 그래, 하지만 고아원에는 보낼 수 있거든.”

그게 뭐야?”

엄마 아빠 없는 애들이 가는 곳이란다.”

엄마 아빠는 원래 없었어.”

휴우, 엄마 아빠가 원래 없었을 수는 없거든.(여기서 주인은 한숨을 내쉬고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이런 것까지 너한테 설명해줄 시간이 없어서 유감이지만, 어쨌거나 너는 지금 고아원에 가야 해.”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너처럼 돌봐줄 어른이 없는 애들이 가는 곳이야.”

나는 돌봐줄 어른 있어! 할머니 있잖아!”

너희 할머니는 죽었잖아?”

우리 할머니 죽었어. 그래서 저기 있잖아!”

소영이는 구덩이를 가리키며 악다구니를 썼다. 그러자 기어코 다슬기 할매가 나섰다.

 

문디 가시나, 이년이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노! 이봐, 자네 말인데,”

다슬기 할매는 옆에 서 있던 떡붕어 아저씨에게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여태 장개도 못 갔제? 자 데려가서 좀 키우다가 색시 삼아. 자가 머리가 좀 모자라긴 해도 상이 좋다. 자 눈썹 안에 새카만 점 보이제? 저게 지금은 조그만 해도 커질 거야.”

저 점이 뭐예요? 돈 자루라도 갖다 줘요?”

떡붕어 아저씨 대신 주인이 관심을 보였다.

머시라, 돈 자루? 아니, 이 영감이 오뉴월에 씨불알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아이참, 할머니 아이들 앞에서 무슨 그런 쌍스러운 말을 하고 그러세요! 그리고 이 할머니 정신 줄을 놨나, 내가 왜 영감이에요? 아직 육십도 안 됐는데.”

주인은 버럭 화를 냈고 다슬기 할매는 대거리를 했다. 둘 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구덩이 오막살이가 들썩거렸다.

그뿐이 아니다. 사주에 경금이 있어, 경금이. 잘만 키우면 크게 될 기다.”

경금? 금이니 그건 돈이라는 거 아니요? 시치미 떼지 말고 좀 말해 봐요!”

또 다시 주인이 까불어댔고 다슬기 할매는 또 역정을 냈다. 그 사이에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 손을 잡고 구덩이 쪽으로 걸어갔다.

 

너 아저씨 집에 갈래?”

떡붕어 아저씨가 물었다. 소영이는 왠지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할머니 여기 있어. 나 아무 데도 못 가.”

여기 있어도 할머니는 다시 못 보는 거야.”

거짓말이야. 할머니 구덩이 밑에 있어. 좀 있다가 구덩이 밑에서 나올 거야. 할머니 일어나면 봐야 해. 할머니 안 일어나면 내가 구덩이 팔 거야.”

네가 여기 있어도 구덩이는 사라질 수 있어.”

에이, 또 거짓말이야. 구덩이가 어떻게 사라져?”

떡붕어 아저씨는 여기서 말문이 막혔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강가로 돌아갔다. 밤에도 그는 낚싯대를 걸어놓고 그 옆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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