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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1:18-19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 할아버지 시대에는 교회 가는 날을 ‘거룩한 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분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갔습니다. 우리 아버지 시대에는 예배드리는 날을 ‘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분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교회 가는 날을 ‘일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편한 옷을 입고 교회에 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예배드리는 날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고 신앙도 약화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면 일요일이라 부르든, 주일이라 부르든, 거룩한 주일이라 부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한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도 만드셨고 우리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바로 우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한 번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은 죄가 없고 깨끗하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부모가 자녀와 살기를 바라듯이 하늘나라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죄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생각으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말로 거짓말하고 욕하고 짜증내고 행동으로 싸우고 훔치고 하나님 말씀 안 듣고 교회 안 다니는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까? 있을 겁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로마서 3장 23절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으려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때어났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도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죄를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뿌리가 있어 죄의 싹이 나게 마련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헤어져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고 깨끗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을 통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함’은 죄를 용서하는 겁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을 통해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해주신 놀라운 일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어떻게 회복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대속 받았습니다. 대속은 남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거나 속죄함이란 뜻입니다. 아이가 잘못했는데 엄마가 벌 받는 게 대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대속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8-19절을 통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금이나 은 같은 없어질 보석으로 대속된 것이 아니라 아무 죄도 없고 깨끗하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 받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화목은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움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졌지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워졌습니다. 그것이 화목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8절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화목제이니 우리도 화목제가 돼야 합니다. 우리는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피이스 메이커가 돼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칭의를 받았습니다. 칭의는 옳다고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의로와서 옳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그것이 칭의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옳다고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접’이란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오서오세요.’ 라며 맞아들이지 문을 ‘쾅’ 닫고 ‘나가세요.’ 라고 돌려보내지 않잖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을 영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영접한 후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히브리서 13장 5절을 통해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시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장 6절을 통해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시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신 분이 계시다면 또 다른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을 통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백’이란 ‘죄를 용서해주세요.’ 라고 스스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러분이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르는 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있는 낭떠러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옳다고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 졌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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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8:13-14 죽이면 살리니

할아버지는 사재를 털어 교회를 개척하고 죽도록 충성한 장로님이고, 아버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한 목사님이라면 과연 아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영접했다면 구원받을 겁니다.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입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조상들이 아무리 신실한 신앙인이라도 후손들이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조상들이 아무리 우상 숭배를 했어도 후손들이 믿으면 구원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닌다고 무조건 구원받지 않습니다. 직분을 맡는다고 구원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즉 마음속에 모셔 들여야 구원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영접해야, 마음속에 모셔 들여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생각으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죄입니다. 말로 욕하고 거짓말하고 짜증내는 것이 죄입니다. 행동으로 싸우고 훔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까?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로마서 3장 23절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저나 여러분이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으려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죄를 짓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는 저나 여러분이 지은 죄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헤어져서 살아야 하는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신 완전하신 분입니다. 죄가 없고 깨끗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왜 피 흘리고 돌아가셨을까요?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2절을 통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을 통해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의 죄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첫째,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는 형벌을 초래합니다. 세상 사람이 죄를 지으면 교도소에 갑니다만 교인이 죄를 지으면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2장 8절을 통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제를 유의해 주십시오. ‘구원을 받았으니’는 과거시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심판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비참하게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한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한번 죽습니다. 산부인과에서 한번 태어나면 수명이 다해 한번 죽고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서 밤낮으로 고통 받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그러나 산부인과에서 한번 태어나고 교회에서 또 한 번 태어나면 육체적으로 한번 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에서 고통 받는 형벌을 면제받습니다. 두 번째 죽음을 면제받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둘째, 우리는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겁니다. 죄는 지금 존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지만 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3장 15절을 통해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되’는 미래시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란 기초위에 신앙의 집을 지으면 구원을 받는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게 되지만 나무나 풀이나 초목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 불난 집에서 몸만 빠져나온 사람처럼 미래에 구원을 받지만 상을 받지는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죄의 존재로부터 해방받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셋째, 우리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습니다. 죄는 조폭처럼 세력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귀가 대장이고 귀신이 부하입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5장 2절을 통해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현재시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도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죄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 주변사람들을 선동해 우리가 죄를 저지르도록 부추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현재 죄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고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것이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습니다. 구원은 과거도 중요하고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현재 죄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하려면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마귀는 교인을 쓰러뜨리려고 굶주린 사자가 어슬렁거리듯이 교인 주위를 배회합니다. 마귀는 교인을 실족시키려는 역사적인 사명을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8장 13절을 통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으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죽습니다. 여기서 ‘육신’은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본성대로 살면 죄를 짓고 죄를 지으면 죽게 됩니다. 육체적으로도 죽고 영적으로도 죽습니다. 수명이 다해서도 죽고 지옥에 떨어져서도 죽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죽으면 삽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님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 죄를 지으려는 인간의 본성을 죽이면 살게 됩니다. 육체적으로도 살고 영적으로도 삽니다. 우리의 주적은 마귀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가 죄를 지으라고 부추깁니다. 마귀는 우리가 생각으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라고 부추깁니다. 말로 욕하고 거짓말하고 짜증내라고 유혹합니다. 행동으로 싸우고 훔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방해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마귀에게 지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마귀는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물과 기름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죄와 공존할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향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다면 죄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거룩한 무리입니다. 성도는 죄에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떠나려면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마귀에게 인질로 잡힌 우리를 구하려는 경찰특공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멀리하십시오. 여러분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떠나십시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범죄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성령님은 여러분을 마귀로부터 구출하는 경찰특공대입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을 의지한다면 성령님은 실수 없이 마귀로부터 여러분을 구출해 낼 겁니다. 여러분은 죄악된 본성을 죽이십시오. 그러면 거룩한 본성이 살아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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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1-8 그의 말을 들으라.

1. 도입 예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과학의 대중적 이해 담당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만들어진 신]이란 책에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주목했는데 그는 종교는 강자에게는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며, 약자에게는 삶의 위로이자 희망이 되어왔다. (이것이 인간에 의해 왜곡된 종교의 모순이다. 종교를 통해 상처를 주고, 종교를 통해 위로 받는 삶!) 신이 사라진 이후의 사회가 오히려 더 희망적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신학 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라스 교수는 [도킨스의 망상]이란 책에서 도킨스의 논의를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똑같이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였지만 한 사람은 창조론을 반박했고 또 한 사람은 무신론을 비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사람은 똑같은 세상에 살았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또 한 사람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창조론을 신봉하겠지만 안티 크리스천이라면 무신론을 옹호할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사람도 있는가하면 아직까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2. 본문 질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은 모세였고 모르는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모세는 예수님과 여러 면에서 닮았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출애굽기 34장 29절에서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만 마태복음 17장 1절에서 예수님은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높은 산은 헐몬 산이거나 다볼 산이라고 알려졌습니다. 흔히 예수님이 올라가신 산을 변화 산이라고도 말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셨는데 출애굽기 24장 9절에서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만 마태복음 17장 1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모습이 달라졌는데 출애굽기 34장 29절에서 모세는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만 마태복음 17장 2절에서 예수님은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모세가 먼저 나왔고 예수님이 나중에 나오셨지만 모세는 조연이었고 예수님은 주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굴과 옷이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신18:15)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말4:5)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을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겁니다.(마16:21,17:22-23,20:17-19) 모세는 살아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죽어서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세는 엄청난 특권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우리들도 살아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을 가졌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특권을 자주 누려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고 말했습니다.(마17:4) 베드로는 높은 산에 초막 세 채를 짓고 함께 살자고 제안했는데 그것은 너무도 철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높은 산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자고 떼썼습니다. 베드로가 영광을 누리려 하듯이 우리는 ‘멸시천대 십자가는’ 주님께 지우고 ‘존귀영광 모든권세’는 내가 차지하려하고 합니다. 잘 되면 내 탓이고 안 되면 예수님 탓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고 나서 부활의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변화 산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기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갈보리 산에서 지옥의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죽음이 없는 생명은 불로 연단 받지 않은 쇠처럼 조금만 사용해도 무뎌지게 됩니다. 학생이 커닝해서 얻은 성적은 나중에 드러나기 마련이잖아요? 베드로가 너무 철부지처럼 행동하자 하나님께서 빛난 구름으로 그들을 덮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7:5) 하나님은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올라오시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해 주셨는데, 17장 5절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예수님의 신분도 확인해주시고 예수님의 권위에 복종하라고도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인해 주셨는데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나 무서워 엎드렸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워집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마17:7) 예수님은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됐으니 우리 힘으로 설 수 있다고 고집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이 손을 잡아야 걸을 수 있는 어린아이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도 아니고 엘리야로 대표되는 예언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죄가 있고 없고를 가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언적인 신앙은 체험이 있고 없고를 나눕니다. 신앙은 말씀이 표준이지 체험이 우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포도의 당도를 높여주듯이 ‘영광이 있기 전에는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줍니다.

3. 적용 질문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신분을 알고 있는 모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지자 천국이 임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높은 산에서 머물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만 모르는 사람은 철부지처럼 행동합니ㅏ.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36절을 통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다고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헤어져서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 적용 예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생화와 조화처럼 모습은 비슷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조화는 아무리 예쁘고 화려해도 향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화는 아무리 못생기고 볼품없어도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아무리 못생긴 호박꽃이라도 생화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한 양귀비꽃이라고 조화일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생화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향기를 풍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남편이 때로는 이웃 집 아줌마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여러분의 약점을 후벼 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향나무는 자신을 자르는 도끼날에 향기를 토해낸다고 합니다. 우리는 향나무가 도끼날에 향기를 묻히듯이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은 피의 보복을 하기 때문에 오늘도 테러의 공포에서 떨지만 악을 선으로 갚은 다윗은 사울이 죽자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예루살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원하는 사람은 고난이 없는 영광은 거절합니다. 반드시 수고의 땀방울을 흘립니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습니다. 도끼날에 향기를 묻힙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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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1:4-9 그것을 보면 살리라.

1. 도입 질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다 보니 교회의 종탑 위에 십자가를 높이 세웁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며 저기에 교회당이 있구나 하고 압니다. 교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만 성단 중앙에 십자가를 배치합니다. 십자가가 설교와 성례전의 중심이란 의미입니다. 교인들은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겁니다. 나는 교인이라는 표시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인데 원래 십자가는 사형도구였습니다. 로마제국은 노예나 중범 죄인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피와 물을 쏟으며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십자가형이 너무 끔찍하다 보니 나중에는 폐지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가 죄를 씻는 도구가 됐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십자가는 사형도구에서 기독교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죄를 씻는 도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2. 본문 질문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상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백성들은 왜 마음이 상했을까요?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에돔 땅으로 돌아가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고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벼가 여물기 위해서는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야 하듯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백성들은 조급증에 걸려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20장 5절을 통해 백성들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라고 원망했습니다. 백성들이 종살이가 너무 힘들다고 간청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애굽에서 탈출시키셨는데 그 은혜도 잊고 광야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매일 먹게 되자 만나는 하찮은 음식이라고 싫어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니 내 봇짐 내놓아라.’ 한다고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고 먹을 것도 줬더니 종살이할 때를 그리워하며 먹을 것이 형편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남의 은혜를 잊고 불평하지는 않는지요? 옛말에 네발 달린 짐승은 배신하지 않지만 두발 달린 짐승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3장 10절을 통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죄를 지으려는 나쁜 마음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죄를 씻어내야 합니다. 백성들이 원망하자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자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내리셨습니다. 물이 없자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오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걸어 다녔지만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신8:4)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셨지만 또 다시 불평을 늘어놓자 불뱀들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불뱀은 사막에 사는 불살모사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뱀은 고대세계에서 지혜와 죽음을 상징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 예수님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지혜로운 동물이었습니다. 뱀은 또한 죽음의 동물이었습니다. 뱀은 독이 있어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눈꺼풀이 없어 불가사의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뱀은 저승사자를 연상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사자인 불뱀들을 보내셨고 많은 백성들은 죽었습니다. 그제야 백성들이 회개했습니다. 민수기 21장 7절을 통해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것이 죄라는 것을 자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일서 1장 9절을 통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말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때리시지만 회개하면 싸매십니다.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불평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지도자는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21장 8절을 통해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았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은 사람들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자 모두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자 불뱀들을 보내 징계하셨지만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자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자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여기서 장대 위에 달리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14-15절을 통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입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21장 8-9절과 비교됩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모세가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놋뱀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세는 놋뱀을 장대에 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놋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3. 적용질문
사람이 뱀에 물리면 독이 혈관을 타고 서서히 퍼져 몸이 퉁퉁 붓고 온몸이 마비되어 결국 심장마비로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세상적인 가치관이 점차 우리를 세뇌시켜 돈을 준다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죄를 짓다가 결국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가 놋뱀을 매달아 죽었던 사람들을 살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이 두 번째로 태어나는 장소입니다. 첫 번째는 산부인과에서 태어나고 두 번째는 십자가에서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한 번 태어나면 육신의 생명이 한 번 죽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 지옥에서 두 번째로 죽습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습니다. 산부인과에서 한 번 태어나고 십자가에서 또 한 번 태어나면 육신의 생명이 한 번만 죽습니다. 십자가는 죽어가는 우리를 살립니다.

4. 적용예화
프란체스코는 우물에서 물을 깃는 하인을 지켜보았습니다. 하인은 큰 물통을 내려 물을 담아 올리면서 항상 나무토막 하나를 물통에 넣었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프란체스코가 하인에게 물었더니 하인은 “물을 퍼 올릴 때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아 물이 밖으로 흘러넘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다 보면 물통 안의 물이 흔들리듯이 너무 자주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 안에 십자가 막대기를 넣으면 물이 출렁거리지 않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걱정거리로 가득 찼습니까? 그 안에 십자가를 넣으십시오. 마음이 안정될 겁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미움으로 넘쳐납니까? 그 안에 십자가를 넣으십시오.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뀔 겁니다. 혹시 여러분이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3장 17절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여서 세상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구원의 방법인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감사할 조건을 찾으십시오. 십자가는 용광로처럼 여러분의 걱정과 미움을 녹여서 강철 같은 믿음을 만들어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보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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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0:2-13 반석에게 명령하여

1. 도입 예화
어떤 부자가 애지중지하게 기르던 ‘개’가 없어졌습니다. 부자는 하인에게 잃어버린 개를 당장 찾아오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하인은 입을 삐죽이며 “저는 주인님의 종이지 개의 종은 아닙니다. 그러니 개를 찾으러 갈 수 없습니다.”라고 거역했습니다. 주인은 화를 꾹 참으며 “내가 갈 데가 있으니 가마를 대령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인은 가마를 대령했고 주인은 가마에 올랐습니다. 하인은 “주인님, 어디로 모실까요?”하고 질문했습니다. 주인은 점잖게 “잃어버린 개를 찾으러 간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인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맨몸으로 갔을 텐데 잔꾀를 부렸기 때문에 주인을 가마에 태우고 개를 찾으러 가게 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순종할 때 보다 더 고생하게 됩니다. 성경에도 불순종해서 낭패당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2. 본문 질문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 진을 치고 가나안 땅을 공격하기 위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수령 1명씩을 선발해 정탐꾼으로 보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40일간 두루 탐지하고 돌아와서 가나안의 성읍은 견고하고 주민들의 신장은 장대하여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고 지휘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2세대들이 가데스에서 물이 부족하자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20장 3-5절을 통해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불평했습니다. 백성들은 왜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이 광야에서 고생시키느냐 며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수많은 기적들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자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내리셨습니다. 물이 없자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오게 하셨습니다. 광야에 사는 사나운 아말렉 족속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40년 동안 걸어 다녔지만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신8:4) 하나님은 지금까지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셨는데 백성들은 지금 당장 물이 없다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 다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나마 애굽이 좋았다고 했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지는 않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지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불평덩어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53장 6절을 통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려는 죄의 속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죄의 싹을 가지고 있습니다. 싹이 있으면 가지가 나오듯이 죄의 싹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주셔도 조금만 불편하면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백성들이 불평을 쏟아내자 모세는 어떻게 했을까요?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계시는 회막 문에 엎드렸습니다.(민20:6)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도자는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호소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20장 7-8절을 통해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내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면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울진에서 목회할 때 교회에 물이 부족하여 지하수를 팠는데 암반을 뚫고 들어가니 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뚫으라고 하시지 않고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반석이 물을 내게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명령하면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시겠다고 말씀입니다. 물을 내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달리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20장 10-11절을 통해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게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호통을 친 다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물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반석에게 물을 내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기적의 주체는 하나님이신데 모세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높였습니다. 존귀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하지 사람이 가려채면 안 됩니다. 또한 모세는 반석에게 명령하지 않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하나님은 르비딤에서는 물이 부족하자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지만(출17:6) 가데스에서는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20:8)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꾸 반역하는 백성들에게 화가 나서 그랬는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기적들이 행동을 통해 나타나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불순종했지만 그를 생각하셔서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백성들과 짐승들은 물을 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모세를 징계하셨습니다. 불순종하면 항상 책임이 따릅니다. 민수기 20장 12절을 통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은 말씀으로도 반석을 터뜨려 물을 내실 수 있는 분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과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3. 적용 질문
1) 오늘 본문을 보면 출애굽 2세대들은 매일같이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 기적에 감사하지 못하고 물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놨습니다. 우리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받은 복을 세어보지는 않고 없는 것만 아쉬워하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보십시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위축됐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용기를 냈잖습니까? 사울은 골리앗을 보았기 때문에 겁을 집어먹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물맷돌로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었잖습니까? 우리도 집채만 한 파도를 볼 게 아니라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내 생각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등산을 하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이 사람은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나뭇가지를 붙잡았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살려 주세요!’하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살고 싶으면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나뭇가지를 놓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죽을까봐 너무 힘들었지만 나뭇가지를 놓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자기 생각을 움켜쥐지는 않습니까? 모세도 하나님이 입으로 명령하라고 하셨는데 손에 지팡이를 잡고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불합리해 보여도 그대로 순종해야지 사람이 더하거나 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을 가두면 안 됩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3장 17절을 통해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경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머리로 알 뿐만 아니라 몸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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