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7:1-8 그의 말을 들으라.

1. 도입 예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과학의 대중적 이해 담당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만들어진 신]이란 책에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주목했는데 그는 종교는 강자에게는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며, 약자에게는 삶의 위로이자 희망이 되어왔다. (이것이 인간에 의해 왜곡된 종교의 모순이다. 종교를 통해 상처를 주고, 종교를 통해 위로 받는 삶!) 신이 사라진 이후의 사회가 오히려 더 희망적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신학 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라스 교수는 [도킨스의 망상]이란 책에서 도킨스의 논의를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똑같이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였지만 한 사람은 창조론을 반박했고 또 한 사람은 무신론을 비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사람은 똑같은 세상에 살았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또 한 사람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창조론을 신봉하겠지만 안티 크리스천이라면 무신론을 옹호할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사람도 있는가하면 아직까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2. 본문 질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은 모세였고 모르는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모세는 예수님과 여러 면에서 닮았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출애굽기 34장 29절에서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만 마태복음 17장 1절에서 예수님은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높은 산은 헐몬 산이거나 다볼 산이라고 알려졌습니다. 흔히 예수님이 올라가신 산을 변화 산이라고도 말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셨는데 출애굽기 24장 9절에서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만 마태복음 17장 1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모습이 달라졌는데 출애굽기 34장 29절에서 모세는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만 마태복음 17장 2절에서 예수님은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모세가 먼저 나왔고 예수님이 나중에 나오셨지만 모세는 조연이었고 예수님은 주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굴과 옷이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신18:15)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말4:5)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을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겁니다.(마16:21,17:22-23,20:17-19) 모세는 살아서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죽어서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세는 엄청난 특권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우리들도 살아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을 가졌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특권을 자주 누려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고 말했습니다.(마17:4) 베드로는 높은 산에 초막 세 채를 짓고 함께 살자고 제안했는데 그것은 너무도 철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높은 산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자고 떼썼습니다. 베드로가 영광을 누리려 하듯이 우리는 ‘멸시천대 십자가는’ 주님께 지우고 ‘존귀영광 모든권세’는 내가 차지하려하고 합니다. 잘 되면 내 탓이고 안 되면 예수님 탓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고 나서 부활의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변화 산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기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갈보리 산에서 지옥의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죽음이 없는 생명은 불로 연단 받지 않은 쇠처럼 조금만 사용해도 무뎌지게 됩니다. 학생이 커닝해서 얻은 성적은 나중에 드러나기 마련이잖아요? 베드로가 너무 철부지처럼 행동하자 하나님께서 빛난 구름으로 그들을 덮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7:5) 하나님은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올라오시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해 주셨는데, 17장 5절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예수님의 신분도 확인해주시고 예수님의 권위에 복종하라고도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인해 주셨는데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나 무서워 엎드렸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워집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마17:7) 예수님은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됐으니 우리 힘으로 설 수 있다고 고집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이 손을 잡아야 걸을 수 있는 어린아이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도 아니고 엘리야로 대표되는 예언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죄가 있고 없고를 가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언적인 신앙은 체험이 있고 없고를 나눕니다. 신앙은 말씀이 표준이지 체험이 우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포도의 당도를 높여주듯이 ‘영광이 있기 전에는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줍니다.

3. 적용 질문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신분을 알고 있는 모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지자 천국이 임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높은 산에서 머물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만 모르는 사람은 철부지처럼 행동합니ㅏ.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36절을 통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다고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헤어져서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 적용 예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생화와 조화처럼 모습은 비슷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조화는 아무리 예쁘고 화려해도 향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화는 아무리 못생기고 볼품없어도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아무리 못생긴 호박꽃이라도 생화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한 양귀비꽃이라고 조화일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생화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향기를 풍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남편이 때로는 이웃 집 아줌마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여러분의 약점을 후벼 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향나무는 자신을 자르는 도끼날에 향기를 토해낸다고 합니다. 우리는 향나무가 도끼날에 향기를 묻히듯이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은 피의 보복을 하기 때문에 오늘도 테러의 공포에서 떨지만 악을 선으로 갚은 다윗은 사울이 죽자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예루살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원하는 사람은 고난이 없는 영광은 거절합니다. 반드시 수고의 땀방울을 흘립니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습니다. 도끼날에 향기를 묻힙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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