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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22:1-20 은금을 줄지라도
 

호주의 원주민들은 마법사가 저주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뒤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부두 죽음(Voodoo Death)'이라고 하는데 마법사가 저주해서 죽은 사람이 꽤 된다고 합니다. 선진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는데 의사가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면 환자는 절망에 빠져 삶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하는데 의사가 약을 처방하고 효과가 없을 거라고 말하면 실제로 차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말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부두 죽음이고 노시보 효과입니다. (반대로 긍정적으로 말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하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모압 왕 발락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를 지나 요단 강 동편에 있는 모압 평야에 이르자 심히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백성들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민2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부터 이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으로 이민 갔을 때는 인구가 70-75명이었는데 400-430년이 지나자 성인남자가 6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60만 3천 5백 5십 명이었습니다.(민1:46) 성인 남자 한 명당 아내가 있고 아이가 2명이 있다고 가정하면 60만 곱하기 4하면 240만 명이 됩니다. 우리 집으로 가정하면 300만 명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히 미약했으나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도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소가 밭의 풀을 뜯어 먹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사방에 있는 먹을거리를 다 먹어치울까 걱정이 됐습니다.(민22:4) 옛날에 먹고 살기 힘들 시절에는 입 하나가 느는 것이 걱정거리였잖아요?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전쟁을 하면 모압이 불리하니까 브돌에 사는 예언자 발람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모압은 오늘날로 말하면 레바논이고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이라크입니다. 거리로 환산하면 64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20km 정도가 되니까 굉장히 먼 거리였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브돌 예언자 발람을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브돌 예언자 발람이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하여 모압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민22:6) 모압 왕 발락은 부두 죽음 다른 말로 하면 노시보 효과를 알고 있었나 봅니다. 여러분 혹시 장난으로라도 자녀에게 저주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저주가 내릴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브돌 예언자 발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믿는데 고고학자들이 발람이 실제 인물이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967년 ‘프랜켄’이 이끄는 네덜란드의 고고학 원정대가 ‘데이르 알라’라는 지역에서 회반죽으로 된 석고 조각 몇 점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발람이 밤중에 신의 메시지를 받았는데 그것은 이웃이 기대하는 메시지가 아니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과 과학이 상충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성경이 비과학적이 아니라 초과학적이라 과학이 성경의 기적들을 규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압 사신들은 ‘복채’를 가지고 브돌 예언자 발람에게 이르러 모압 왕 발락의 부탁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민22:8)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브돌 예언자 발람은 모압 사신들이 먼 길을 걸어서 왔으니 일단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말씀하시면 모압 사신들에게 통보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발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듯이 설교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서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민22:12) 이것은 중요한 말씀이니 함께 읽읍시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하나님은 발람에게 모압 사신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복을 받은 자'란 수동분사는 과거에 이미 ‘복을 받았던 자’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복을 받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복을 받을 수 있듯이 우리도 이미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복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과거에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복’(삼상7:12)을 받았고 하나님이 지금 나와 동행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복’(마1:23)을 받고 있고 나중에는 주님이 준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의 복(창22:14)’을 받을 줄 믿습니다.

모압 사신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모압 왕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과 더 많은 복채를 딸려 브돌 예언자 발람에게 보냈습니다.(민22:15) 발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발람이 사신들에게 말했습니다.(민2:18-19)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은 아무리 많은 은금을 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또 발견하게 됩니다. 발람이 하나님이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았듯이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아야 합니다. 금에 이물질이 혼합되면 그것은 순금이 아니듯이 설교에 자신의 생각이 가미되면 그것은 순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하라는 것을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모압 사신들과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신들이 다시 오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또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민22:20)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나님은 지난번에는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처럼 말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다 왜 다시 가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을 알면 브돌 예언자 발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되며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발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고 그것도 가감 없이 전했기 때문에 오늘날 설교자의 역할 모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다른 본문에서는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아야 그에 대한 다면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2장 15-16절을 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모압 왕에게 갔기 때문에 그의 나귀가 미친 행동을 저지했다고 말씀합니다. 발람의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길을 막아선 것을 보고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잖아요? 이번에는 유다서 11절을 봅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친형제인 유다는 발람이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을 갔다고 말씀합니다. 발람의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이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가서 처음과는 다르게 반전이 일어나는데 발람도 처음과는 다르게 반전이 일어났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발람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신약성경은 발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구약성경과 구약성경이 다른 경우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조명아래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우선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왜 발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발람이 다시 물은 데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발람이 다시 묻자 그냥 마지못해 가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추정해 봅니다. 발람은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 은금이 탐이나 가도 되느냐고 다시 물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시기 위해 가라고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발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진실한 예언자였지만 나중에는 은금을 탐내다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발람이 진실한 예언자였지만 은금을 탐내 타락했듯이 저도 돈을 탐낸다면 타락하게 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저에게만 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은금 때문에 실족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아간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나서 은금을 감추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몰살당하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은금을 숨겼기 때문에 부부가 같이 죽지 않았습니까? 돈은 우리가 사는데 꼭 필요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우리를 타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선용하면 축복의 도구가 되지만 악용하면 파멸의 도구도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뚝이는 중심이 있기 때문에 흔들어도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돈을 인생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다면 잠깐 흔들리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발람처럼 처음에는 신실했지만 돈 때문에 나중에는 타락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아 물질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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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6:1-24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과 세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잠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울산에 계신 어떤 목사님이 군종병으로 복무할 때 중대 회식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군종병이었기 때문에 회식에는 참여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대장이 목사님에게 술을 따라주며 마시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부하자 중대장은 화가 났는지 만약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회식을 중단하고 중대원들을 완전군장하여 연병장에 집합시키겠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회식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목사님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중대원들을 기합 받게 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잠깐 포기하고 중대원들에게 분위기를 띄워줄 것인가 망설였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눈물을 머금고 중대장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벌컥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야, 너도 별수 없구나!’ 하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나 한 사람을 희생한다면 감수하겠지만 동료들까지 희생시켜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이지만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국시민의 가치관과 세상 사람의 사고방식이 상충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도 하나님이냐 세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습니다. 다니엘은 원래 남 유다의 귀족이었는데 그 당시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이 남 유다를 공격할 때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를 멸망시켰던 바벨론도 신흥 강대국인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다니엘은 비록 포로였지만 능력이 출중하다 보니 바벨론에서도 고위 관리가 되었고 페르시아에서도 고위 관리 그것도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무총리나 장관 후보자들이 인사청문회를 통해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받으면서 곤욕을 치르는데 다니엘도 국무총리가 되자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야당에서 후보자들을 샅샅이 파헤치는데 페르시아에서는 다른 고위 관리들이 다니엘의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켰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야당에서 후보자들을 검증하는 것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페르시아 사람 입장에서 포로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그래서 페르시아 고관들은 다니엘의 모든 인적사항과 경력사항을 현미경으로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는 아무 그릇됨도 없었고 아무 허물도 없었습니다.(단6:4) 다니엘은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몸가짐을 반듯하게 해야 합니다. 죄는 언제가 여러분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릅니다. 김 OO 국무총리 후보자도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다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야인으로 전학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르는데 우리가 죄를 저질러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페르시아 고관들은 어떻게든 다니엘을 낙마시켜야 하는데 아무 허물도 없자 다니엘의 신앙을 문제 삼았습니다.(단6:5) 페르시아는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다니엘을 옭아매려면 올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페르시아 고관들은 왕을 높이는 척하며 삼십 일 동안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조서를 만들었습니다.(단6:9) 왕은 이 조서가 다니엘을 잡기 위한 올가미인지도 모르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이 걸려들 일만 남았습니다. 다니엘은 신앙이냐 관직이냐를 놓고 기로에 섰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국무총리는 고사하고 사자 밥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포로 주제에 국무총리가 되더니 결국 사자 밥이 됐다고 고소해 할 겁니다. 그렇다고 관직을 선택한다면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다니엘에게 신앙은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시절에도 신앙을 지켰는데 페르시아 국무총리가 됐다고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신앙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관직을 선택하겠습니까?

다니엘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단6:10) 다니엘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숨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예 문을 열어놓고 공개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타협을 모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타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꽉 막힌 종교처럼 비쳐지지만 우리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양보한다면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겁니다. 페르시아 고관들은 다니엘을 고소했고 왕은 어떻게든 구해보려 노력했지만 왕의 도장이 찍힌 법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단6:11-15) 왕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다니엘을 구해주시기를 바라며 밤이 새도록 금식하며 날이 새도록 잠도 청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단6:16,18) 다니엘이 얼마나 왕의 신임을 받았으면 왕이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까요? 우리 크리스천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단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꼭 필요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선택했는데 하나님은 다니엘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다니엘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새벽에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이 살아있는지 물었습니다.(단6:20)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계시는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왕은 하나님이 다니엘을 살려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 바람대로 다니엘은 살아있었습니다.(단6:21-22)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되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다니엘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심히 기뻐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끌어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리라 믿었고 하나님은 다니엘의 믿음대로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왕은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그 가족들과 함께 끌고 와서 사자 굴에 던졌더니 그들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들의 뼈까지 부서뜨렸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선택해서 손해 본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면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서울 강남중앙감리교회 장로인데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16살 때 세례를 받았지만 40살이 될 때까지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아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잘 했다고 합니다. 황수관 박사는 연세대학교 교수지만 학력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대구교육대학을 나와 지방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국민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런 황수관 박사가 연세대학교 교수가 된 것은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해외 유학파도 어려운데 서울 O류 대학교 출신이 연대 교수가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전도에 불이 붙었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춘천 한림대학교에서 교수 세미나를 마치고 차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나이가 지긋한 교수님에게 무언가를 내밀며 교수로 채용해 달라고 청탁한 것이 아니라 전도지를 내밀며 "교수님 제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교수님도 예수 한번 믿어보시면 어떨까요?" "...." 그 교수님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다가 "황 교수, 내가 교회 집사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황수관 박사가 처음 전도했는데 하필이면 그 분이 교인이었습니다. 그분은 이화여자대학교 하종식 교수였습니다. 얼마가 지나 하종식 교수가 황수관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황 선생! 연세대학교에 이력서를 넣으세요." 황수관 박사는 서둘러 이력서를 냈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채용되었습니다. 황수관 박사가 돈을 주고 청탁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도지 한 장을 내밀었더니 그것이 교수 추천장이 되었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기독교 가치관을 실천했더니 하나님께서 황수관 박사를 높여주셨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건강 비결이라고 강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든 하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도 신앙을 지키고 우리가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통로를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로 섬긴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제일로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제일로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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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1:20-32:23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남과 북으로 갈라졌던 적이 있습니다. 남쪽은 남 유다라고 불렀고 북쪽은 북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는데 북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악한 왕이었지만 남 유다의 왕 중에는 선한 왕들도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31장 20절을 통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합니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히스기야 왕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이 세월이 흘러 낡아지자 대대적으로 수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유월절 명절을 성대하게 지켰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섬기던 우상들을 깨뜨리고 산당들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성전에서 봉사하게 만들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오늘날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왕이었다면 다시 말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왕이었다면 복을 받아야 하는데 32장 1절을 통해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한 후에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에게 복을 주시지 않고 고난을 주셨습니다. 그 당시 강대국인 앗수르가 남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앗수르는 오늘날로 말하면 미국이나 중국처럼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어째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않고 고난을 주시는가?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누군가의 표현처럼 ‘고난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먼저 주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기 위해 준비하는 수고를 하듯이 하나님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축복의 고속도로를 달리게 하십니다. 지난 수요일에 낮 시간에도 저녁 시간에도 포도를 사오셨는데 포도는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견뎌냈기에 탱글탱글하게 영글었습니다. 만약 햇살이 너무 따가워 빛을 차단했다면 영글지도 않았고 달지도 않았을 겁니다. 우리도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연약한 신앙인으로 머물게 되지만 고난을 이겨낸다면 강한 신앙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사택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다음 가나안 땅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유랑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나서 새 교회당을 주시려 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인지 판단하시기 위해 고난의 잔을 마시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복을 받을 만한 왕인지 아시기 위해 고난을 주셨듯이 창대교회가 복을 받을 만한 교회인지 알아보시기 위해 고난을 주셨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고난을 당하자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32장 7-8절을 통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고 백성들을 안심시킵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 히스기야 왕은 남 유다의 하나님은 앗수르의 신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남 유다를 도와주시고 남 유다를 대신하여 앗수르의 신과 싸우신다고 믿었습니다. 저도 우리교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 우리 같이 상가교회도 기존교회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새 교회당으로 입당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고생은 하겠지만 놀랍게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기다립시다. 하나님은 우리 눈앞에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돕는 손길을 보내십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바람과 파도에 압도당하지 않는다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연약한 나를 바라보지 마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히스기야 왕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32장 20절을 통해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기도합니다.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와 더불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몇 년 전에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는데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지도자가 나라를 살리고, 기도하는 목사가 교회를 살리고, 기도하는 어머니가 자녀를 살립니다. 시골에서 목회하는 어떤 목사님이 그러더군요. 그 교회는 앞뒤가 산으로 막혀있어 하늘만 쳐봤다고요. 지금 우리교회 사정도 어찌 보면 앞뒤가 막혔습니다. 옛 건물에서 나왔는데 새 건물로 들어갈 수 없잖아요? 앞뒤가 막혔으니 땅굴을 팔 생각은 하지 말고 세상적인 수단을 부릴 생각은 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마스터키입니다. 모든 자물쇠를 열수 있는 만능열쇠입니다. 기도는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풀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를 위해 놀라운 역사를 펼치실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하나님은 눈을 뜨시고 우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고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기도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창대교회가 부흥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올 초에는 아이들이 나왔고 봄에는 이정숙 성도님이 나왔고 여름에는 이연지 집사님이 나왔고 가을에는 박충기 권사님 가정이 나오셨습니다. 올 겨울에는 누가 나올지 모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기대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3기 합시다.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립시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히스기야 왕과 아모스 선지자가 기도하자 32장 21절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앗수르의 장수들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앗수르 왕은 하나님도 남 유다를 구할 수 없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는데도 장수들이 죽어나가자 당황해서 철수했습니다. 솔직히 남 유다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앗수르 군대를 물리칠 수 없었는데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그것도 천군천사가 아니라 천사 한 명을 보내서 장수들을 죽게 하셨고 세계 최강 앗수르 군대를 철군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앗수르 왕은 쫓기듯이 철군하고 나서 앗수르의 신전에 들어갔는데 그의 자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아버지를 거기서 암살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자 앗수르 군대가 철군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한 앗수르 왕도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를 대신해 앗수르 군대와 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대신 일하십니다. 대신 싸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대신해 건축헌금을 모금하시고 새 교회당으로 입당하게 히시고 봉헌하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남 유다를 구원하시자 22절-23절을 통해 주변 나라에서 하나님과 히스기야 왕을 높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더라.”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를 물리치자 주변 나라들이 예물을 가져와서 하나님께도 올려드리고 보물을 가져와서 히스기야 왕에게도 주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단지 기도만 하였지 앗수르를 물리친 것은 하나님이셨는데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도 높였고 히스기야 왕도 높였습니다. 우리가 새 교회당으로 입당하면 다른 교인들은 상가교회를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도 찬양할 것이고 우리 교인들도 수고했다고 칭찬할 겁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왕에게 보물을 주었듯이 우리 교회에도 복을 주시고 우리 교인들의 가정과 직장에도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헌신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을 도와주시고 히스기야 왕을 대신해 싸우셨듯이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도와주시고 우리교회를 대신해 건축헌금을 모금해 주실 겁니다. 우리는 그저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시고 반드시 새 교회당으로 입당하게 하시고 봉헌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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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8:15-17 자녀의 권세

영국에 사는 어떤 청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재산을 다 털어 뱃삯을 지불하고 남은 돈으로 식품을 구입했습니다. 드디어 배가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대서양을 향해 물살을 헤치고 나갔습니다. 청년은 드넓은 바다를 볼 때마다 새로운 희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때는 기분이 침울해졌습니다. 다른 승객들은 여유가 있어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먹었으나 청년은 돈이 없어 한쪽 구석에 가서 말라비틀어진 빵으로 허기를 달랬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그럴 때마다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나중에는 크게 성공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마침내 배가 미국 동부해안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선장이 청년에게 다가와 배를 승선해 준데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혹시 항해 중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청년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장은 안심하며 “그런데 왜 식당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힘없이 “뱃삯을 지불하고 나니까 음식을 사먹을 돈이 없어서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선장은 깜짝 놀라며 “손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손님이 사신 뱃삯에는 하루 세끼 식사비용이 다 포함되어 있는데요.” 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청년이 뱃삯에 식사비용이 포함 된지를 몰라 맛있는 식사를 하지 못했듯이 우리도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몰라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언제 주어질까요?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의 아들이 있다면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인데 누가 건드리겠습니까? 우리는 대통령보다 높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왕자요 공주입니다. 우리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데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시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존귀한 사람입니다. 옆 사람보고 이야기 합시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존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무슨 권세일까요? 말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무엇으로 창조하셨지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창1:3) 예수님은 말씀이셨는데 사람이 되었습니다.(요1:14) 예수님은 말씀으로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성난 바람이 그치고 사나운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막4:39)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하나님의 친자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우리나라는 친자와 양자를 차별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양자는 친자와 똑같은 권리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친자인 예수님이 말씀의 권세를 가졌듯이 하나님의 양자인 우리도 말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말의 권세를 받았으니 서로를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 옆 사람을 축복합시다. 당신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의 축복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면 하나님이 복 내려주시고 우리가 저주하면 하나님이 저주하십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인 일이 생기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축복의 말과 긍정적인 말을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인 말의 권세를 어떻게 누리며 살까요? 첫째,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7절을 통해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 가정을 불화하게 만듭니다. 모든 나쁜 일의 배후에는 마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친자인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 치자 마귀가 사라졌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마귀에게 주눅 들지 말고 마귀를 쫓아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마귀야 물러가라고 명령하면 마귀는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갑니다./ 둘째, 병이 나았다고 선포하십시오. 모든 병을 마귀가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귀는 병을 통해 장난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통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당 풍성한교회를 다녔던 서기석 성도님은 바이러스성 콧물감기를 앓아 콧물을 닦아내느라 화장지 한두 통을 금방 허비했는데 말씀에 의지해 병이 나았다고 믿고 병아 떠나라고 선포했더니 회복됐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그동안은 하나님 고쳐주세요 하고 애원했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나의 병은 나았다고 믿고 입으로 선포하면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십니다./ 셋째, 물질이 풍성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저는 개척교회 목사다 보니까 돈을 수중에 쥐고 살지 않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 4장 19절을 통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에 풍성하신 예수님이 나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을 통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드님도 내주셨는데 다른 것은 당연히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말씀에 의지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말랐던 샘에서 물이 다시 고이듯이 비어있는 통장을 채워주시더라고요.

우리는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신분이 바뀌었으니 수준도 바뀌어야 합니다. 거지처럼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왕자처럼 명령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의 권세를 가졌으니 마귀가 유혹해도 말씀으로 쫓아내고, 질병이 생길 때도 나았다고 선포하고, 가난이 찾아와도 믿고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우리 창대교인들도 포항에 사는 다른 교인들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돈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며 다니더라도, 썬 크림을 더 바르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를 외치며 목에 힘을 주고 다니십시오. 여러분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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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동에 있는 보석가게 데이몬(Damon)에는 ‘사랑은 표현입니다.’라는 문구가 붙어있습니다. 사랑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하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석을 선물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신앙도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표현하는 것은 신앙을 고백(Confess)하는 겁니다. 우리가 말로 신앙을 고백하다 보면 행동으로 신앙이 표출됩니다. 나는 교인이다 고 자꾸 말하다 보면 교인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말한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고백해야 할까요?

첫째,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0장 9-10절을 통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별 의미 없이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주님이란 예수님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종은 제 맘대로 살지 않고 주인의 뜻대로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의 뜻은 상관없이 내 원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종이 아닙니다. 종은 종다워야 합니다. 주인의 뜻을 받들어야 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다시 말해 예수님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라고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야 의로워지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릅니다. 입에서 마음으로 이어지고 마음에서 입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시인하는데 마음으로는 믿지 않는다거나 마음으로는 믿는데 입으로는 시인하지 않는다면 절반의 구원을 받습니다. 입으로도 시인하고 마음으로도 믿어야 완전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종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다 보면 행동으로 주인의 뜻을 받들게 됩니다.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우리의 고백대로 우리가 행동하게 됩니다. 말한 대로 이루어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합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가짜 약을 주고 효과가 있다고 말하면 환자는 실제 약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약이 중요하지 않고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마가복음 11장 24절을 통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입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응답됩니다. 여러분에게 질병이 있습니까? 입으로 나았다고 말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고쳐집니다. 가짜 약을 주고도 진짜 효과가 나타나는데 하물며 진짜 약인 구약과 신약을 주는데 얼마나 큰 효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여러분이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믿는다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둘째,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을 통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헌 것을 고쳐서 만든 재생품이 아니라 아예 새로 만든 신상품입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천연가스(CNG)버스가 폭발해서 시민들이 놀랐는데 또 다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조사를 해봤더니 천연가스 버스가 폭발한 것이 아니라 재생타이어가 펑크가 나면서 연기와 먼지가 분출되면서 난 소동이었다고 합니다. 재생타이어는 언제 터질지 몰라 불안하지만 새 타이어는 고속으로 달려도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재생타이어가 아니라 새 타이어로 만드셨습니다. 중고품이 아니라 신제품으로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새로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겉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울퉁불퉁한 채로 그대로 있지만 우리의 내면은 가시밭에서 옥토로 바뀌었습니다. 속사람이 바뀌면 겉 사람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입으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하면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었으니 겉 사람도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수관 박사는 서울 강남중앙감리교회 장로인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산적처럼 인상이 험악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경찰이 불심검문을 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어린아이도 사인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모님에게 받은 학대로 그리고 남편에게 받은 폭언으로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됐습니까? 가시덤불이 됐습니까? 여러분이 입으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마음으로 믿는다면 상처가 아뭅니다. 상처는 부모나 남편에게 받아서 자녀에게 돌려줍니다. 내가 고쳐야 내 자녀가 병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마음으로 믿는다면 반드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셋째, 나는 죄가 없어졌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8장 1-2절을 통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징계는 하시지만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정죄는 하지 않으십니다. 교인은 잘못할 때 돌아오라고 사랑의 매는 맞지만 비교인처럼 지옥으로 가라고 심판의 매는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죄의 사슬을 벗겨주셨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나는 죄가 없다고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이 벗어집니다. 죄책감을 떨쳐버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의 짐에 짓눌려 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1장 13-14절을 통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아들의 나라에서 속량을 받았습니다. 속량은 몸값을 받고 노비를 양민으로 풀어주는 겁니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몸값을 치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메어 있던 우리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풀어주셨습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용서했는데 우리가 자꾸 용서해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마음아파 하십니다. 요셉은 형님들을 이미 용서했는데 형님들이 자꾸 용서해달라고 하자 안타까워서 울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도 여러분이 자유하길 바라십니다. 여러분이 나는 죄가 없어졌다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정말로 죄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과 불법 체류자처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거리를 당당하게 활보하지만 불법체류자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항상 불안해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천군천사의 보호를 받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마귀가 언제 공격할지 몰라 항상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입으로 말한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주인의 뜻을 받드는 종이 됩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속사람이 변화됩니다. 내면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죄의 짐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믿는 겁니다. 여러분의 입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기적을 체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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