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소설가인 나의 知己 P언니는 습작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필사"라고 했다.

신인작가상을 탄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봐도 습작 시절의 "필사" 얘기를 많이 한다. 선배 작가들의 좋은 소설을 여러 번 베껴 썼다고.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에서 이승우도
"베껴 쓰기"를 "느리게 읽기"의 한 방법으로서 추천하고 있다.

작년 9월 암스테르담 출장 때,
시간을 쪼개 "Van Gogh Museum"에 갔었다.

Van Gogh의 초기 습작들을 보면서 난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
밀레의 작품들을 "필사"한 것이 몇 점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밀레의 드로잉을 베낀 다음에(똑 같이!)
페인트 연습을 한 작품이 몇 개나 있었다.

난 그 앞에서 오랫 동안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아.....고흐 같은 천재도 필사를 했구나!"

고흐의 밀레 필사는 내게 정말.....큰 충격이자 깨달음(?)이었다.
뭐든 혼자 뚝딱 만들어지는 건 없구나!
천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구나!

왜 자꾸 필사 얘기를 하냐면,
좋은 문장이나 그림을 베끼고 또 반복하는 건
공부에 있어서도 기본이기 때문이다.


쩍 팔리지만 내 사례를 들자면....
고등학교 때 성문종합영어 20번 봤다.
그 덕에 "토종"임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교포와 유학파들 사이에서 잘(?) 버티고 있다.

강유원도 이 책 <몸으로 하는 공부>에서
"베끼기"를 "공부하는 방법"으로 강추하고 있다.

"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플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
(중략)......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 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철학의 제문제>(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주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중략)......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중략).....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중략).....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
(p181~184)

이 책을 읽으며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번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쭉~ 읽어보겠다고 결심했다. 불끈!

아쉬운 건 <철학의 제문제>도 읽어보려고 결심했는데,
절판되었다는 거다.
인터넷 헌책방을 몇군데 검색해 봤는데도 없고,
동네 도서관에도 없다.
이런....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에 찬물을 끼얹다니!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는 사실 그닥 기대하지 않고 읽은 책인데,
일단 강유원의 시니컬한 글쓰기 스타일 자체가 재미있었고,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 유용한 tip을 많이 얻었다.

새해를 맞아 공부 한번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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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1-14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베껴쓰기...이것 좀 피해가는 법 없나요? 몇번을 시도했다 실패한게 베껴쓰기죠. 베껴쓰기는 고사하고 거듭해서 읽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근데 수선님 대단하셔요. 성문종합영어 20번!^^

kleinsusun 2007-01-14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정석하고 담을 쌓았기 때문에 성문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ㅋㅋ

사마천 2007-01-1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말이 있잖아요. 우리는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탄 난장이다. 루소가 그랬던가...
삼빡한 박사논문 하나가 나오기까지 수많은 남의 주장들을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99.99%는 밖에서 온 것이죠. 필사와 유사한.
그리고 고흐는 그림을 워낙 늦게 시작해서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좀 독창적이고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죠.

이게다예요 2007-01-1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문 종합 20번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그때부터 열정적이셨네요.^^
많은 작가들이 베껴쓰길 하더라고요. 욕심이 나서 흉내내 봤는데 전 힘들어서 못하겠던데요. 그래서 독자는 독자고, 작가는 작가인가 봐요. ^^

외로운 발바닥 2007-01-15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성문종합 20번...대단하시네요. 철학공부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과 동경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선님 글 읽고 다시 한번 의욕을 가져봅니다. 이글도 감히 쑥 퍼갑니다...;;;

moonnight 2007-01-1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문종합 20번! (난 몇 번 봤더라. 곰곰;) 저도 수선님의 정열을 본받고 싶어요! ^^

2007-01-16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20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23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29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석현 2010-08-0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중요한 정보를 얻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