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 - 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엔 유난히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취업을 위해, 학교 진학을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식 교육을 위해 등등 각각의 이유로 다양한 지방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다. 때문에 의외로 서울 토박이보다 지방 사람들이 더 흔한 도시가 바로 서울일 것이다. 나도 서울에 온 지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무섭고 신기하기만 하던 도시가 이제는 고향보다 친근한 곳이 되었다. 이 소설은 외국 작가, 그것도 평범한 외국 작가가 아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배경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도 모두 한국인이기 때문에 장소만 빌려서 쓴 것도 아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정서를 얼마나 이해해서 썼을까 싶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아마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읽었다면 당연히 한국소설이라고 생각했겠다 싶었다. 서울 도심 곳곳의 장소나 분위기 묘사가 세부적이면서 사실적이었고, 소설 속 캐릭터들도 한국적이면서 흥미로웠다. 

<빛나, 서울 하늘 아래>의 주인공 '빛나'는 전라도 어촌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혼자 유학 오게 된 소녀이다. 유일한 핏줄인 고모네 집에 머물 수 있었지만, 고모와 사촌동생 백화는 그리 만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신 거의 하녀로 부려먹으려 하고, 틈만 나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고 놀리며 욕을 한다.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던 빛나는 혼자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빛나에게 뜻밖의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다.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라는 불치병에 걸려 매일 죽을 날만 기다리는 어느 부잣집 여자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구한다는 거였다. 고모 집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돈이 급했던 빛나는 여자에게 자신이 알고 있거나,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다. 그녀의 이름은 김세리, 하지만 살로메라고 더 많이 부른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딸의 불치병을 알고는 그녀에게 모든 자산을 물려주고 동시에  자살해버렸다. 살로메는 돈은 많지만 휠체어에 앉아 한 발짝도 밖에 나갈 수 없으며, 언제나 바깥세상 이야기를 그리워하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이다. 

빛나는 살로메에게 자신이 아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빛나, 서울 하늘 아래>는 빛나가 살로메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액자소설 형식으로 들어있는 소설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완결성이 있으면서도 이야기들끼리도 얼기설기 얽혀있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6.25 전쟁으로 인한 분단 상황, 가까운 이웃끼리의 무관심, 자살, 베이비 박스, 여성 스토킹, 사기, 강간 등 다양한 소재가 담겨있고, 여기엔 빛나가 직접 겪은 이야기도 들어있다. 

빛나는 서울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기 혼자 밖에 없다고 느낀다. 살로메는 돈을 주면서 자기를 이용한다고 느끼고, 정체 모를 스토커가 자신의 뒤를 계속해서 쫓고 있음을 느끼고, 하나 밖에 없는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게 없음을 느낀다. 서울은 그야말로 광활하고 적막한 도시이고, '빛나'는 그 하늘 아래 그야말로 혼자 외로이 뜬 별 같은 존재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빛나는 알게 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훨씬 명확해 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
< 빛나, 서울 하늘 아래 p.190>

서울이 아무리 차가운 도시라고 해도 사람 사는 곳이고, 그곳엔 한국 사람 특유의 '정'이 존재한다. 저자 르 클레지오는 차가운 도시 안의 인간 소외 속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정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정'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었지만, 빛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는 알게 모르게 이웃 간의 정, 사람 간의 정이 녹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르 클레지오는 한국에서 제주와 서울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 특히 서울을 최선과 최악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한다. 
최첨단과 호화로움이 넘치는 인위적인 고층 빌딩을 최악이라 본다면, 그에게 최선은 번화가 뒤에 숨은 좁은 뒷골목과 돌담길, 도심에 위치한 아담한 사찰들, 경복궁과 청와대를 품어 안은 단아하면서도 기품 서린 북악산 같은 것들이었다. 서울의 도시가 아무리 최첨단을 달려도 보통 사람들은 일반 집에서 보통 밥을 먹으며 소소하고 바쁘게 살아간다. 모두들 자기 나름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사랑하는 이와의 사랑과 희망을 꿈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서울의 하늘 밑을 걷는다. 구름은 천천히 흐른다. 강남에는 비가 내리고, 인천 쪽에는 태양이 빛난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
<p.237>

빛나의 삶을 응원한다. 
차가운 이 도시 안에 부디 자신만의 따뜻한 둥지를 만들고 아름다운 새가 되어 훨훨 날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2-03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4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