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공교롭게도 이 책의 번역자인 주경복 교수의 재판을 어제 참관하였다.  
서울시교육감 후보였던 그는 선거법위판 혐의로 피고인 자리에 앉아있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주경복 교수를 보면서, 그리고 한편으론 괴물같은 권력을 휘두르는 공정택 교육감을 떠올리면서, 세상 참 불공평하는 생각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문명인들은 항상 활동하면서 땀을 흘리고 불안해하며 더욱더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하고, 때때로 살아 있는 상태에 놓여 있기 위해 죽음으로 내달리며, 불멸을 찾아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증오하는 세력가와 자신이 경멸하는 부자들에게 아부하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영예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비굴과 그들의 보호를 거만하게 자랑한다. 자신의 노예 상태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는 그 노예 상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감을 가지고 얘기한다.  

힘은 들어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유럽의 대신(大臣)들의 일이 카리브인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 이 게으른 미개인들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기쁨을 가지고도 위안받을 수 없는 그런 끔찍한 생활보다는 차라리 잔혹하게 죽는 쪽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카리브인들이, 왜 사람들이 그토록 애를 쓰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그들의 정신 속에서 ‘권력’과 ‘명성’이라는 단어가 일정한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또 자기에 대한 세상의 평판을 매우 중시하여 자기보다 타인이 판단해주는 것에 오히려 행복을 느끼고 만족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 모든 차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 루소(주경복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광준의 생활명품산책 탐사와 산책 4
윤광준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명품이라면 거부감이 든다.  
왜냐면 첫째, 내가 돈이 없어 못사기 때문이요. 둘째, 돈이 있어도 사면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명품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당연히 흔히 값싸게 구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명품으로 부를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 책 속의 명품은 그냥 명품이지 생활명품이라고 볼 수 없는 게 많았다.
그래서 아쉬웠다. 단, 소비욕의 대리만족을 위해서라면 읽을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이충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돈 주고 구입한 걸 좀 후회했어요. 
저자가 GQ의 편집장이길래 저는 GQ의 애독자로서 소비욕 대리충족을 위해 이 책을 샀거든요. 
예를 들어, 윤광준의 <생활명품산책>같은 책을 기대했어요.   

그런데 좀 낚였어요. 마치 소비를 비판하는 인문학 서적을 읽은 것 같아요.  
더구나 인문학 서적으로 가정하더라도 어울리지 않고, 한마디로 어정쩡합니다.  
마치, 한복 저고리에 양복 바지 입은 것처럼. 

소비잡지 편집장다운 글을 기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 - CD용 듣기와 받아쓰기
정찬용 외 지음 / 사회평론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있다. 우리학교 교장샘이다. ㅋㅋ 

우리 학교 영어 선생님이 윤독도서로 추천했다가 교장샘께 보기 좋게 '빠꾸"당한 책이다. 이유는 제목 때문이었다. 하하하. 이 코메디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해 사서 읽어 보게 되었다. 

예상대로 영어를 공부하지 말고, 배우라는 내용이었다. 즉, '읽기, 쓰기, 문법 위주의 암기'를 하지 말고, '듣기, 말하기'를 하라는 거다.  

그런데 기억에 남는 내용은 '저자가 <collins cobuild english dictionary>를 추천'한 거다. 베스트셀러 저자의 추천 덕분인지 그 사전이 엄청 많이 팔린 것 같다.  

역시 호기심에 한번 사봐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진중권, 참 부러운 사람이다. 똑똑하고 착하고 용기있고 재빠르기까지 하다니. 강준만, 유시민 때문에 실망을 느낄 때 진중권 때문에 살았다. 홍세화, 신영복, 김종철과 더불어 내 삶의 지표이다. 
  

다만 제목엔 좀 불만이다. '상스러움'은 '촌스러움'과 같이 나쁜 의미로 사용한 것 같은데, 상스러움과 촌스러움은 좋은 말이 아닌가?

책장을 접어둔 부분=============== 

사법제도 없이 사회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으며, 또 사회 질서가 필요 없다고도 믿지 않는다. 국가의 공적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곧 모든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외려 사적 폭력을 차라리 국가에 의한 공적 폭력으로 바꾸어놓은 것이 적어도 역사의 특정 시점에서는 진보적이었다고 본다. 다만 과거에는 폭력이었던 것이 제도로 바뀌었을 때에는 더 이상 폭력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것이 폭력에 대한 우리의 감성을 무디게 한다.







국가가 총자본의 이익만 대변한다는 고전적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만인의 이해를 공정하게 대변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국가란 제도화된 폭력이다. 게다가 이 폭력은 자기를 싫어하는 시장의 부름에 언제라도 동원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 사회를 보라. 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은 사장님이 어영부영 만든 구사대가 아니라, 국가에서 동원한 체계적 폭력, 즉 경찰이다.




‘힘’ 없는 ‘대화’는 공허하다. 하지만 ‘대화’ 없는 ‘힘’은 맹목이다. ‘힘’의 맹목적 찬미. 이게 좌우익 파시즘이다. 그래서 난 벌거벗은 ‘힘’의 원시적 충돌을 이성적 ‘대화’로 바꾸는 기제로서 의회주의를 옹호한다. 하지만 ‘대화’를 위해 ‘힘’을 거세하는 데엔 반대한다. 왜? 거세당한 자는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니까. ‘힘’ 없는 자와 진지하게 대화를 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노조는 있어야 한다. 국가라는 ‘독점적 권력’을 견제하는 ‘힘’으로 남아야 한다. 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




내가 존경하는 어느 자유주의자는 시장을 위해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그 대신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하자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 중에서 뒷부분은 수용할 수 있으나, 앞부분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노동조합은 수십 년의 한국 노동운동이 쟁취해낸 권리이며, 시장의 폭력에서 노동자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다. 노조의 해체를 주장한 그 자유주의자는 머릿속에 노조가 사라지고 있는 미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겠지만, 시장을 위해 노조를 해산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 히틀러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국가 못잖게 시장도 가공할 폭력을 행사한다. 이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노조는 하나의 ‘힘’으로 존재해야 한다.







홉스와 로크를 자유주의자의 선구자로 꼽는다. 이 두 사람은 동일한 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각각 상이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여기서 자유주의의 두 가지 버전이 성립한다. 로크에게 천부인권이란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절대군주의 월권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권력분립) 마련에 관심을 기울인다. 반면 홉스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가 인간늑대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자연 상태로 떨어지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그에게 권력분립이란 곧 무질서를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권력을 절대군주에게 위임하되, 군주가 경제의 영역에 개입하여 또 다른 경제 요인이 되는 것을 막는 데에 주력한다. 로크가 주로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동시에 주장했다면, 홉스는 정치적 자유보다는 주로 경제적 자유에, 즉 경제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절대군주의 간섭을 막는데 관심이 있었다.




‘자유=민주’라 생각하나 실은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경쟁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평등 없는 순수한 자유란 현실 속에선 결국 “다리 밑에서 잠잘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나아가 평등 없는 자유가 보수주의와 결합하여 정치적 자유마저 포기할 때 나치즘과 같은 또 하나의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한편, ‘민주’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이념이다. 경제적 평등의 요구가 나아가 자유를 억누르고 관철될 때 공산주의라는 극단이 성립한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고 자유와 민주를 붙여서 말할 때, 이는 위에서 말한 극단들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자유와 민주는 서로 보완해야 한다.







언젠가 베를린 한글학교에서 선생을 할 때의 일이다. 운동회에서 ‘짝짓기 게임’을 하는데, 영 분위기가 썰렁하다. 우리의 아이들과는 달리 독일 교포 아이들은 이 재미있는(?) 게임의 규칙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네 명의 아이를 남기고 “셋!”이라고 외쳤는데, 그 아이들은 하나를 떨궈내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마냥 붙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다 친구인데 누구를 떨궈내요······.” 짝짓기 게임 역시 극단적인 집단주의와 이기주의의 모순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항상 어느 집단에 속해야 한다. 하지만 잠시 후에 “셋!”이라는 외침을 들으면 떨어지면 서로 죽을 것같이 붙잡고 있던 집단을 매정하게 버리고 혼자서 자기를 구원할 또 다른 집단을 찾아 떠나야 한다.




집단과 하나가 되는 한에서만 개체는 안전하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실존들은 괴상한 집단주의 속에서만 구원을 찾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기를 집단과 동일시하려 한다. 그 집단은 작게는 교실 안의 패거리, 크게는 국가와 민족일 수 있다. 집단과 동일시에 실패하는 자는 공동체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 된다. 그러다가 희생자가 사라지면? 문제없다. 개별자들은 집단 속에서 기어이 또 하나의 ‘모난’ 놈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희생양이 선택되면, 적어도 그가 존재하는 동안은 개별자들은 다시 안심하고 살아간다.




개인이 아니라 가족을 사회의 최종단위로 보는 것은 전 세계 우익의 공통점이다. 가령 극우파 정당의 사무실에 가보라. 그 벽에는 종종 화기애애한 가족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것이 이들의 이상이다.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보수주의이나, 그 가치를 너무 중시하다가 성원의 개별성까지 지워버리는 가족주의는 분명히 전근대적 현상이다. 가족주의가 아시아만의 가치라고? 아니다. 실은 유럽에도 있었다.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 가문들 간의 전쟁 때문에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 않던가. 가족의 동반자살? 유럽에는 없는 줄 아나? 가령 나치 선전상 괴벨스. 자녀를 여섯이나 낳아서 오손도손 전통적 가족의 모범을 보이더니, 전쟁에 패하여 연합군이 다가오자 집에서 열 살도 안 된 죄 없는 애들을 데리고 ‘잇카신주’했다. 그 ‘인륜’이 얼마나 ‘따뜻’했던지, 애들이 새카맣게 타 숯덩이가 됐다.




몸이 군대를 제대하는 데에는 2년이 좀 넘는 기간이 필요하지만, 정신까지 군대를 제대하는 데에는 그보다 오랜 세월이 걸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