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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나라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남명수 옮김 / 지식노마드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사무라이'.. 이 말을 듣고 볼 때마다 나는 긴 칼을 옆에 차고 당당하게 활보하는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책표지의 그림을 보면서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무사 쥬베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올랐고, 맹인이면서 기가 막히게 칼을 잘 썼던 맹인 검객 '자토이치'를 떠올렸다. 어찌보면 하나의 신화같은 이야기로 느껴질법한 말들이 실제로도 존재했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일종의 문화적인 콘텐츠로써 자리잡았다는 그런 의미로써 생각하기도 했었다는 말이다. 수많은 권법을 내세우며 중국의 그 넓은 땅을 주름잡았던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이케가미 에이코는 단순히 사무라이라는 그 의미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 '사무라이'라는 전통적인 이미지속에서 찾아내고 싶어하는, 그리고 현재까지도 버려지지 않는 그 '사무라이'의  정신이 남겨주고 간 것들과 연관적인 일본의 문화적 상황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토지를 소유한 무인, 토지와 농산물의 지배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던 무사 '사무라이'.. 사무라이란 원래 전문가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기능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기능집단이었다. (89쪽)  일종의 성주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에 모여 살았다. 아니 그렇게 모여 살도록 만들었다. 고대 일본에는 군대가 없었다는 말을 빌어 볼 때 그들은 영지를 개간하여 경지화한 후 허락을 얻어 경작하며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은혜와 봉사의 교환 즉, 은혜를 입었으니 그를 위해 나는 봉사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은혜와 봉사의 개념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점이 참 특이하다. 거창한 말로 '나라를 위해서'라거나, 멀리 있는 '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녹봉을 주고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자신만의 '주군'을 위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관계를 명예롭게 여겼다. 자신에게 속해있는 가솔(여기서 가솔이란 단순히 자신의 가족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지를 통하여 먹고 사는 모든 이들을 일컫는다)들을 지켜주고 또한 자신에게 은혜를 배푸는 주군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줄 알았던 그들의 관계는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았을거라는 말은 지극히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사로서 무인의 명예에 대한 배경을 보게 되면 이렇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용맹심, 겁쟁이로 보여서는 안되며,  어떤 경우라도 사람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너를 좋게 보도록 신경써야 한다 라거나 의식적으로 자세를 낮추어라. 상관없는 사람일지라도 공손하게 대하라 라는 무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놀라웠다. 일반적으로 무사 즉, 무인계급이라하면 문인과는 반대적인 이미지를 풍기게 마련이다. 나쁘게 말한다면 이런 저런 생각없이 힘만을 최고로 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무라이의 배경을 보게 되면서 나는 저자가 왜 '명예'라는 말을 앞서 설명하려 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사지만, 공사의 처리에 뛰어나야 하며 건전한 판단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그 말속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단순히 무예만을 으뜸으로 치지 않고 그 무예를 다룸에 있어서의 교양까지도 그들은 잊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주군이 죽자 그 복수를 하기 위하여 2년동안이나 준비를 해 왔던 4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는 정말 사실이었을까? 그 많은 사람들이 주군을 위한 복수를 하고 죽음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자체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국가의 형태를 만들어가던 일본의 상황으로 볼 때 일종의 사병이기도 했을 그들만의 관계를 인정해주고 또한 보호해주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조선의 역사 같았으면 그 사병으로 인한 반란을 미리 염려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썼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상황들은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반란이나 반역 따위는 할 생각조차 없었으며 지배계급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자신의 군대를 보내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뭔가 다른 게 있었던거라고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강한 연대감으로 묶어놓았을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크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유교적인 관념이 일본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에게 먼저 '효'를 다하기보다 주군을 위한 '충'이 먼저였다는 일본의 신유교를 알게 되었다.  일본식 신유교는 이에 즉, 家를 번영케 하는 유일한 길은 공무에 헌신하는 거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말하자면 국가적인 논리에 따라 '충'은 공적 가치인데 반해 '효'는 사적인 가치로 여겨 '충'을 우선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일리있게 들리기도 한다.  물론 그 시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문화는 달라지기 마련이겠지만 자신의 처지에 맞게 받아들이고 수정할 줄 알았던 일본적인 시각에 왠지 부러움마져 느껴졌다.

중국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 중국에 맞는 수많은 제도들을 우리에게 접목시키려 했던 우리의 역사와는 다르게 일본은 중국식 유교사상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유교의 도덕적 특성만을 정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그랬기에 그들의 토착적 관습에 유교의 영향력이 깊게 침투하지 않았고 가족의례나 친족관습 등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교적 특징을 일본식으로 변화시켰다는 말이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그들만의 정체성을 그대로 살려둘 수 있었다는 말도 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종교적인 의미 또한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았던 듯 하다.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단기적인 욕망을 스스로 규제할 줄 알았으며 개인의 충동이나 욕망을 사회조직적으로 정의한 목적과 조화시킬 줄 알았던 사무라이의 명예문화는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사무라이 문화를 통해 바라볼 수 있었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확고한 명예심이 경쟁적인 개인성과 질서있는 의식, 그리고 성실성을 뒷받침해 주었다는 말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 영주의 직무가 단순하게 군사영역이나 정치활동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고 재산이나 자원, 인재를 등용하는 복잡한 관리체계까지도 포함되어져 있었으니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농업생산력을 개선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했으며 그들 영지내에서의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활동등을 통해 수입을 얻으려고 했다는 말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자립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음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전통이라는 말조차도 나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책을 통해서나 매스컴을 통해서 알고 있는 아주 단면적인 지식이 전부라는 말이다. 이런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그들의 내면을 알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수확도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들의 문화를 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일본인으로써 현재의 그들을 있게 해 주었던 것, 일본의 전통에 대해 도움말이 될 수 있기를 바랬던 저자의 말처럼 안다는 것은 정말 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제대로 보여주며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얕보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역자 서문의 말이 왠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런 우리이기에 정말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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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우선은 호기심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즐거운 사라>로 마광수 열풍이 불어댔을 때도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문학이라는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작가로써 표현의 자유조차 박탈당하는가 싶어 아주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 열풍은 식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종의 축복이라면 축복일테지만 그를 위해 구명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성공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장의 소개글에서  '제대로 읽어보고 평을 해달라'는 말처럼 나는 그의 작품을 한번쯤은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긴 장편의 소설이 아닌 그가 틈틈이 생각나는대로 옮겨 적었을 단편 모음이라는 말에 아마도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으리라. 꾸며진 글보다는 순간적인 느낌으로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 자신만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어리숙한 정의를 내려보면서 말이다.

<사라>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라라>를 만나본 후의 소감은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사라>를 만나보고 싶다! 는거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라>속에 <사라>가 어느정도는 살아 있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강도의 차이만이 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래도 <사라>의 그 무엇이 왜 그토록 세상을 달구었는지가 궁금하다는 말이다. <라라>속의 <사라>는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마도 사람들은 들어내지 말고 함부로 보여주지도 말라고 했던 그런 것들에 대해, 혹은 내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관음증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보지 말라고 하는 것과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굳이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사람의 이중적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던 상황이었을거라고 지레 짐작해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시끄러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표를 찍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지금같은 세상속에서 性을 이야기한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리고 그 性을 표현함에 있어 은유적이지 않고 직설적이어서 문제가 된 거라면, 정말 단순히 그게 문제였다면 세상은 너무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그가 정말 性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그렇게 살아왔든 그냥 상상속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했든 간에 그것도 아니면 그가 꿈꾸는 性생활이 그랬든간에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거다. 이 책으로 인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걱정이 되었다면 굳이 이 책이 아니라해도 청소년들에게 위해를 끼칠만한 책은 얼마든지 있을테니 말이다. 세상이 바뀌면 거기에 맞게 우리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시기상조였을 거라는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 말은 도대체 이건 뭐야? 했었다.  왜 이렇게 낯뜨거운 표현을 해야만 하는 거지? 하다가도 그럴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하지만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법이 조금 역겹기도 했었던 건 사실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해야만 그 느낌이 살아나는 것은 아닐텐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뭐랄까,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앞에서 일종의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까? 

모를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라라>의 발랄함이 읽혀지기보다는 <사라>를 잃었던 마광수라는 사람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 것 같다. <사라>로 인해 그 자신에게 생겨났던 일들에 대한 변화를 읽을 수 있었으며 자기 자신을 변호해주고 싶어하는 안타까움이 읽혀지기도 했다. 책속의 글 중에서 '<슬픈 사라>를 쓴 죄' 나 '심각해씨의 비극' 같은 글을 통해 그리고 다른 몇편의 글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은 아닐까? 하다가도 그래도 그건 아니지! 하는 그런 안타까움 말이다. 그랬기에 <사라>를 다시 <라라>로 환생시킨 것일게다. 감시와 검열에서 자유로워지고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속에서 아직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식이 느껴진다면 억지일까?  사실 말이지 지금의 젊은이들은 표현하는 데 있어서 참 대담하다. 솔직하게 자신의 욕구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도 안다. 때로는 그 표현함이 너무 쉽고 가벼운 것만 같아 안스러울 때도 있을만큼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세대이기도 하니 이런 책이 나왔다고 한들 굳이 감시와 검열이 따라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책 제목을 자세히 바라보면  '발랄한' 의 'ㄹ'이 뒤집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마음 한 켠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나는 책속에서 만날 수 있던 <라라>의 모습들을 여기에 다시 옮겨 적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그만의 생각이고 표현일테니 말이다.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가 말하는 유미주의적이라거나 탐미주의라는 말을 이해하기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조차 내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거였다. 마치도 한편의 포르노라는 정의를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다지 재미도 없다. 재미있게 읽혀졌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무색하리만치. 그래서 그럴까?  나 역시 작가에게 반대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왠지 자신만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까닭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랑만을 꿈꾸며 살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만 굳이 직설적이여야만 제대로 된 '性的'표현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표현함에 있어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살짝 감춰둠으로해서 더 아름다운 느낌을 갖게 하는 것도 많다. 어쩌면 너무나 가식적인 우리들의 모습에 칼을 대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수없이 많은 가면을 바꿔가면서 세상을 살기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체면과 겉치레의 틀에 갇혀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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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클리닉 - 비뚤어진 조선사 상식 바로 세우기
김종성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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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왔던 이야기들 중에서 정말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그 시대로 찾아가 한번쯤 확인해 보고 싶은 경우도 더러는 있었다. 장희빈처럼 죽음에 이르렀을 때의 모습이 다양하게 표현되어지는 여인도 없었을 것이다.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는 설도 있고 사약을 마시지 않으려하니 강제로 입을 벌려 들어 부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항간에는 그 앙탈이 너무 심하고 어이없어 화가 난 숙종이 문짝을 뜯어내 장희빈을  깔려 죽게 했다는 말도 있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간 어린 단종에 얽힌 수많은 일화 역시 그 때마다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면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흐름과 맥락이 TV드라마의 사극으로 잡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접했던 이야기 위주로 알려 주고자 하는 욕심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왠지 좀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얼마전에 화제가 되었던 <이산>이나 내시를 다루었다고 하는 <왕과 나>의 예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무심코 보았던 드라마의 허와 실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니 더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내시 김처선의 실제적인 성격은 이랬었다고 밝혀지는 부분이나 이산에게 칼을 들었던 화왕옹주와 정후겸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홍길동이 소설속의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적으로도 홍길동이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는 새삼 놀랍기도 했고, 이산의 여인으로 나왔던 의빈 성씨에 관한 사실도 조금은 놀라웠다. 물론 어느정도는 역사적인 사실을 모티브로 하여 그런 드라마들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말이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왕조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우리의 백성들이 일본군을 내심 환영했다는 말은 정말 놀라웠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쉽게 침입을 했지만 짐승같이 추악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민심이 험악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하고, 전리품으로 멀쩡히 살아있는 조선사람들의 코를 베어갔다던 왜놈들의 만행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서울가면 코 베간다는 말을 들어왔던 게 공연스러운 말은 아니었나보다 싶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늘상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의 역사속을 여행하다보면 분통 터지는 일도 참 많다. 충분히 우리나라가 될 수도 있었던 대마도를 놓쳐버린 부분도 그렇고, 한 나라의 왕으로써 제가 지켜내야 할 백성과 나라를 고스란히 명에게 바칠 생각을 하며 저 하나의 안전만을 도모했던 못난 왕 선조의 이야기도 그렇고, 남의 힘을 빌어 제 집안을 다스리려 했던 고종의 처지 또한 서글프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숨기고 싶었을지도 모를 역사의 허와 실을 밝혀내 제대로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책속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던 '살주계'가 사실상으로도 존재했었다는 것,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들어 굶어죽는 자가 많았던 비상시에 최하층인 노비가 구휼미로 2천석을 내놓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면천하기도 했었다는 것,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 <홍길동전>인줄로만 알았는데 채수라는 사람이 지은 <설공찬전>이 홍길동보다 앞섰다는 것 (하지만 이 소설은 최초의 금서이기도 했다는 것), 역사적으로 무능하게 표현되어지던 고종의 여우같은 속내를 조목조록 밝혀낸 부분들처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부분들도 참 많았다. 

그런 중에도 역사 연도 계산에 오류가 숨어 있다는 부분은 나의 시선을 오래도록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음력보다는 양력을 사용하는 우리의 역사적인 연도가 사실은 잘못되어졌다는 말이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갑신정변이 발생한 연도가 1884년 12월 4일과 1884년 10월 17일 두가지로 교과서에 기술되어져 있는데, 정확한 발생 연월일이 갑신년 10월 17일이고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884년 12월 4일이 된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음력과 양력의 계산착오라는 건데 그런 오류가 생긴 이유가 역사 기록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데 반해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은 양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란다. 작가의 말처럼 개인도 아닌 사회가 그런 것조차 정확성을 기하지 못한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오류의 발생은 피할 수 없다는데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연대나 연호처럼 중요한 부분을 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사극을 보면서 '저런 사건이 정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보는 사람이 얼만큼이나 될까?  TV보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어쩌다 한번씩 보게 되는 드라마나 사극은  보면서도 그저 그냥 그  흐름만 눈여겨 볼 뿐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거나 주변에서 흔히 듣고 볼 수 있는 野話 정도는 많다. 역사는 남아 있는자들에 의해 변한다고 했던가? 일단은 이기고 살아남은 자에 의해 각색되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런 까닭에 양반이나 고위층의 입을 빌려 듣게 되는 이야기보다는 아주 일반적이고 소시민적인 野話나 說話쪽에 더 귀가 솔깃해지곤 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혹시나 하고 기대했었던 것이 어쩌면 그런 시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이 어리석음을 어이할꼬?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의 한 단면 또한 뒤에 남아 기록하는 자에 의해 많이 훼손되어졌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끝까지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 나의 우매함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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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병과 최루가스가 길거리위에서 엉겨붙어 싸우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학생이라면 그런 시위 한번쯤은 해야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념이 춤을 추고 그 너울거리던 춤사위에 숨이 막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던 사람들도 있었다.  행동을 하는 사람과 그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이렇게 훌쩍 지나와버린 그 시간들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행동하는 사람들의 질서였다고나 할까?  아무리 이념만을 외쳐대고 그 이념속에 묻혀 사는 그들이었다고는 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차마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들만의 질서를 기억한다. 한쪽으로는 화염병을 던지며 한쪽으로는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 화염병의 피해속에서 피신시키고자 했었던 그들의 질서...  눈 밑에 치약을 바르면 덜 따가울 거라며 교복입은 채 출입금지였던 다방안으로 피신했던 여학생에게 다방주인이 내밀던 그 치약을 기억한다.

오현우... 행동하는 사람의 대표격인 인물설정으로 보여진다. 자신 스스로가 판사앞에서 '나는 사회주의자요' 라고 외칠 수 있었던 그의 가슴속에서 활화산처럼 솟아올랐던 그것은 '잠시만이라도 나만 바라봐주면 안되겠느냐' 던 그녀의 눈길조차도 외면해야 했다.  수배자.. 그리고 피신.. 외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정되어지지 않았던 동거는 또다른 이름의 삶을 잉태한다. 함께 있음으로 평안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사치였을까?  그의 살갗에 내려와 앉던 그녀의 사랑이 어쩌면 그에게는 바늘처럼 따가운 고통으로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랬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고통이 다시금  지나왔던 그 길을 바라보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수감되고 함께 행동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너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만의 행복을 용서할 수 없었던 남자는 결국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빗속에서의 이별.. 어쩌면 그들이 흘려야 했던 눈물이 비로 승화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숨겨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그런데 왜가니?  하던 여자의 독백이 빗속에 묻혀버리길 바랬는데 그 목소리가, 그 눈길이 빗속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겨버린다.  수감.. 그리고 17년.. 모진 고문속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간간히 전해져 오는 그녀의 그림속 아이가 그에게는 무슨 말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  세월은 참 무심하다. 이념도 행동도 그 세월속에서 무디어지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런게 아니라 그 세월이 무디어지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변해가는 게 세월일테니 말이다.

한윤희...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을 껴안을 수 밖에 없다. 어느 날 찾아 든 한 남자에게 그녀는 말했었다. 이불이 하나밖에 없지만 머물러도 좋다고. 그리고 그들은 한이불속에서 머문다. 그 시간들이 행복이라는 이름을 달고 찾아왔다고 그녀는 생각했지만 '떠남'을 전제로 해야했던 그 남자에게는 그녀의 행복조차 펌프물처럼 그렇게 쏟아져 내리고 말지.. 된장국을 끓이고 두개의 밥그릇에 밥을 담고 상추쌈을 싸서 함께 먹고 싶다는 그 소박함조차도 현실은 인정해주기 싫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오래가지 못할 그녀의 삶을 이유로 그 남자를 떠나보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방황끝에 다시 외진곳의 추억속으로 되돌아와 그림속에 자신의 시간을 덧칠해 버렸을 때 그녀의 삶은 시한부였다. 그와 그녀를 닮은 아이를 키워주던 그녀의 엄마는 아마도 시간의 그림자였을 게다. 그 시간이 커가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엄마의 생명과 아버지의 고통을 받아 먹으며 달려가고 있다.  그녀의 죽음.. 그 남자의 출소.. 다시 찾은 그곳.. 그리고 회상..

회상... 잊을 수 없었던 그녀의 여운을 찾아 되돌아 온 그들만의 정원. 너무도 오래된 정원속에서 그는 듣는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그녀의 시간들에 대해. 그리고 그 시간들이 아픔이었지만 결국 사랑이었고 행복이었다는 것을.  오직 당신밖에 사랑하지 못했노라던 그 목소리가 환영처럼 만들어낸 그녀의 영혼.. 그녀가 그의 어머니가 있는 집을 찾았을 때 가져왔던 오래된 그의 사진이 그녀의 그림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삶을 놓아버려야 하는 민머리 그녀곁에 나란히 서서. 그렇게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고 다시 둘이 되어야 했던 그들이 그녀의 그림속에서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결코 다시 둘이 될 수는 없었노라고.. 사랑은 그렇게 그녀의 가슴속에서 우물같은 깊이로 머물렀었나 보다.  그 남자, 오현우는 그녀가 남긴 두레박으로 회상속의 사랑을 퍼올릴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가버린 그 회한의 시간을 퍼올릴 수 있을까?  은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이가 훌쩍 커버려 그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그 때의 나이로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는 알아버렸다.  그가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그것은 사랑이었노라고. 그리고 이제는 그 두레박의 끈을 놓칠 수 없다고.

오래된 정원... 이 영화는 사실 너무 깊지 않았나 싶다. 보여주는 장면속에 깔아놓은 복선의 흐름이 너무 가파르다. 회상과 현실속으로 건너가는 돌다리를 건널 때 주의깊게 살펴봐야만 한다. 건너야 할 돌의 넓이와 돌과 돌사이의 간격을 잘 파악하지 않으면 물 속에 빠져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이념과 타협하지 못한 자가 겪어내야 했던 삶도, 이념과 타협하며 살아냈던 자의 삶도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 없다. 어느것도 옳다 말할 수 없으며 그르다 말할 수 없을테니.  영화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말해주고자 하는 것조차도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으니 그것은 온전히 속울음일 뿐이다.  시대가 만들어낸 이념의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변화는 우리가 겪어내야 할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든 복잡함을 떠나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단지 여자는 아주 작은 행복 한자락만을 붙잡고 싶어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그 남자, 홀연히 떠나야 했을 뿐이라고...

모를 일이다. 사랑이 왜 그렇게 엇박자를 좋아했는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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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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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하... 재미있다. 후련하다. 그리고 속시원하다. 그야말로 유쾌, 상쾌, 통쾌다. 무엇이 그토록 재미있고 후련하고 속시원한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저 공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거라는 믿음을 안겨주는 책이다. 뭐, 그렇다고 지지리 궁상으로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른들이 지나쳐왔던, 그러나 어쩌면 외면하고 싶을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슬쩍 깔아주는 그 묘미가 참 좋다.  우리네 어른들이 살아냈던 그 배경을 뒤에 업고 제 할말은 다하고 사는 우리의 청소년들을 그려냈다는 것도 또한 별미다. 그래서 이 책은 나를 새벽까지 잠 못들게 만들었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이 책이 풍겨주는 느낌은 일전에 읽었던 <완득이>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완득이와 열일곱살의 털, 송일호는 확실히 다르다. 그 주변을 천천히 보여주며 삶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던 <완득이>와는 달리 자아찾기에 도전하는 고등학교 1학년 송일호의 모습속에는 그 세월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래, 그랬었지... 그때는 나도 그랬었지... 하는 공감의 부분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불러내고 있음이다.  우리 나이에  한 때 반항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채 살았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생활에 치여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탓에 '애어른'처럼 살았다할지라도 그 속까지야 어른이 될 수는 없었을테다.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나를 찾아와 몹시도 힘들게 했었던 그 시절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처럼 이 책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참 많았다.

갓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집에 오는 길에  친구가 사준 오방떡을 길에서 먹는다는 게 부끄러워 차마 먹지 못한 채 가방에 넣어 두었었다. 집에 돌아오니 오방떡은 완전히 납작떡이 되어버렸고 그 때 그일을 친구는 두고두고 울궈먹었었다. 내가 입학했던 여학교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학교와 붙어 있었다.  남학생은 위아래 까만색 교복을 입었고 여학생은 까만 치마에 하얀 브라우스를 입어야 했었다. 교복자율화니 두발자율화니 하는 말들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까까머리에 모자를 썼고, 단발머리 혹은 종종 땋아내린 머리를 가지런히 해야했던 그 시절.. 아침 등교길이면 학생주임과 교련선생이 어김없이 교문앞에 서서 지각단속과 함께 두발, 복장 단속을 했었다. 그리고 하교길이면 남학생 여학생이 서로를 바라보며 쑥덕거렸다.  하얗게 고속도로가 나버린 남학생의 머리는 모자를 써도 가려지지 않았고, 귀밑 1cm를 넘기면 어김없이 짝짝이 머리를 해야 했던 여학생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어쩌랴... 그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볼 밖에. 그랬어도 그 시절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 짧았다.

어른이 되어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어른들이 우리들을 길들이려고 하듯, 어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 길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208쪽)

우리의 주인공 송일호.. 단지 머리가 학교규정에서 약간 어긋났다고 하여 너무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옆반 친구를 대신하여 감히 선생에게 항거를 했던 그 순간부터 범생이 일호는 가슴속에서 불현듯 일어서는 무언가를 느낀다. 이건 아니지.. 하는 일호의 의지를 보면서 그건 진정 반항이 아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른이라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제아로 몰아가는 상황이 왠지 뻔뻔스러운 우리의 삶과 일치하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다. 니가 아무리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적당히 하고 집에 가서 쉬지?...  관심을 끌고자 한 것도 아니었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도 틀에 박힌 어른들의 잣대가 싫었고, 그것에 길들여진다는 그 자체에 항의했을  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규칙과 약속을 다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 벅차다. 그렇다고 그 많은 것들을 모른 척 외면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너무 기성세대적인 시선으로만 우리의 청소년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훤히 알고 있는 그것들을 내가 편하기 위해 일부러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작금의 교육현실을 바라볼 때 개탄해마지 않을 일이다.

"송일호, 너는 방망이로 때리면 어디서 튀어 오를지 모르는 두더지 오락기 같아. 자극을 받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아무도 모르지"
"사람에게 빛깔이 있다.... 아마 그 빛깔은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215쪽)

자유를 달라고? 그건 아니었다. 자유가 아닌 자유스러움의 특성을 요구했을 뿐이다. 머리털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인격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그런 현실말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 특성을 아주 조금만 인정해 달라는거였다. 결국 제 편이 되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송일호는 승리를 했다.  두발규제에 그토록 강경하게 굴었던 교장선생 앞에서 이발사였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었다.  옛날에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린 한 학생이 이발소에 찾아와 별을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고. 그래서 그 학생의 뒷꼭지에는 별이 그려졌다고. 그리고 그 학생은 절대로 내 자식의 머리를 내 마음대로 하지는 않을거라는 말을 했었다고.  누구나 똑같이 겪어내야 했던 그 시절의 번민과  고뇌를 이미 지나쳐간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반목과 결렬만이 있을 뿐이라는 교훈을 슬쩍 내던지던 대목이다.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에 의해 많은 별들이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학생시절에 가장 부러운 것이 무엇일까? 두말 할 필요없이 빨리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는거다. 이 지긋지긋한 규율의 늪에서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는 거다.  맘대로 머리기르고 사복입고 가고 싶은데 눈치보지 않고 가는거... 그 시절에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었다. 공부하기가 그렇게 힘드냐? 지나고 보니 가방들고 학교다닐 때가 가장 속편하고 좋았다 이눔아... 지금 늬덜이 무슨 걱정이 있다고... 그랬다. 정말 지나고보니 가방들고 학교다닐때가 정말 좋았다.  하지만 그 때는 모르지. 현실의 무게는 누구나에게 무겁게 느껴질테니까. 나 역시도 그 시절의 현실은 너무나 무거웠었다.

책을 읽으면서 범생이 일호가 단단해지기 위해 치뤄내는 일종의 수련과정들이 밉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그랬든, 현실도피적인 일탈이 되었든 오랜동안 집을 떠나있었던 아버지의 귀가는 일호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알게 해 주었다. 거기에 손자와 할아버지를 묶어주었던 믿음의 끈과 아버지와 아들을 묶었던 그 질긴 가족간의 情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만큼 강하게 다가왔다. 일호와 정진의 우정도 옹골지다. 그리고 멋지다. 믿어준다는 것, 그리고 한편이 되어준다는 것은 말만으로도 참 좋다. 그 느낌만으로도 푸근하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장을 덮으며 아쉬웠던 한가지가 있다면 왠지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아버지의 가출과 귀가에 대한 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혀졌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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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8-09-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비님, 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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