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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 책이든 영화든 공연이든, 어떤 컨텐츠를 처음 접하게 될 때 '기대'하게 되는 내용이나 흐름이 있다. 우선 제목을 보고 내용을 짐작하고 책 표지나 포스터 등을 보면서 분위기를 짐작한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이미 그 작품을 접했던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어찌되었거나,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예감'이 자신의 취향에 맞을 것 같으면 그 작품을 보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넘기게 되는 것이겠다. 내가 이 작품에 처음 흥미를 느낀 것도 제목과, 표지와, 리뷰 때문이었다. '끝까지 연기하라'는 제목과 표지에서는 계속된는 거짓말과 기만, 그리고 그것을 통한 진실의 추구 등을 예감했고, 책 뒷표지에는 이 책에 숨어있는 반전이며 이 책의 내용들을 칭찬하는 각종 언론사의 찬사를 통해 (그것을 다 믿지는 않더라도) 이 작품에 어떤 '반전'이 있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또한 서점 홈페이지 등에서 작가의 필력을 칭찬하는 리뷰들을 통해서는 이 작품이 속도감있게 진행될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이 기대는 (늘 그렇듯이)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

 이 책을 처음 신간평가단 도서로 추천할 당시, 내가 쓴 추천글은 다음과 같았다. --- 이 책은 줄거리 자체는 딱히 끌리지 않습니다. 표지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만, 줄거리는 아주 많이 흥미롭지는 않아요. 그런데 리뷰들을 보니 이거,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일 것 같은 기운이 물씬물씬 풍깁니다. 이 책에 달린 리뷰들의 평이 상당히 좋은데다가, 그 평들이 또 상당히 괜찮아서, 믿고 기꺼이 추천해 볼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이렇다. 이제 한물 간 배우 토비는, 마찬가지로 한 물 가서 가망성 없는 연극을 하러 브라이턴에 가게 된다. 하지만 브라이턴에서 만난, 곧 이혼할 예정인 제니는 스토킹 문제를 토비에게 해결해 달라고 하고, 토비는 제니와 잘 해볼 욕심에 그 청을 수락하게 된다. 토비는 그저 제니와 잘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제니가 돌아올 가망은 점점 보이지 않고, 금방 해결된 것만 같던 사건은 점점 엉뚱하게 꼬여만 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추리소설'로 보자면 별점 5점 만점에 1.5~2점 정도밖에 줄 수 없다. 내용은 어느 정도 작위적이고, 특히 영매 이야기가 나오면서는 나도 모르게 흥미가 뚝 떨어지며 '이거 뭐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추리에 우연은 있을 수 있어도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초자연적 현상이라니!! 게다가 주인공은 또 어떻고? 뭔가 머리를 써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막무가내로, 뒷일은 별로 생각지도 않고 돌진하는 듯하다. (솔직히 연극 배우인 주인공이 뒷일은 제대로 생각지도 않고 무대를 막 비웠을 때는 이 사람이 직업의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의문이더라) 사건 진행에서의 현실성은 논할 여지도 없다. 결말이 그 무엇보다 뒤통수를 치기 때문이다. 이건 뭐,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이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없다. 아니, 애초에 추리소설에서 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오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제 3자(?)가 등장해서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면, 도대체 지금까지 주인공의 삽질은 왜 있었냔 말이다. 추리소설로서는 5점만점에 별 1개도 아까울 지경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거지 해피엔딩같은 결말까지!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별로 좋지 않은 의미로) 멍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이게 작가의 잘못은 아닌지도 모른다. 이 책이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잊고만 보면, 이 책 자체는 뛰어나다고는 못해도 꽤 괜찮은 작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추리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한 편의 스릴러 (혹은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이 정신없이 어떤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면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해보려고 발버둥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그런 영화 말이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속도감에 있다. 얇지 않은 두께에도 일단 읽기 시작하면 꽤 수월하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필력이 어느 정도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이 작가는 추리소설을 쓰겠다는 의도 자체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왜 출판사는 이 책을 마치 추리소설인양 포장한 것일까?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많으니까? 최근의 코드는 '반전'이니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책은 작가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그 안의 컨텐츠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판형, 자간, 글씨 크기 등등을 교정하는 것에서부터 표지, 마케팅까지...그 모든 것들이 모여 오롯한 한 권의 책을 만들고, 독자는 그 안의 내용(책의 software적인 부분)을 접하며 자연스레 그 책 자체(책의 hardware적인 부분)을 접하게 된다. 어떤 것을 파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여 어떻게 판매할 것인가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경우가 많다. 이 책은 내용보다도 마케팅이 아쉬운, 그런 작품이었다. 만약 내가 그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아무 정보 없이 이 책을 접했다면 '재미있는 책 한 권 읽었다'는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책을 덮을 수도 있었으리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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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 책을 좀 읽는다 하는 사람치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특히 장르 소설을 읽는다는 사람은, 그 호오와 상관 없이 이 작가의 책 한 권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가 높아 이 작가의 시간은 늘 화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무시하고 지나가기가 더 힘든 작가기도 하다.

  나 역시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이 작가를 알게 되어 이후 여러 작품을 접했다. 이 작가는 워낙 다작하는 작가답게(?) 작품별로 편차가 심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흡입력만은 굉장하다. 일단 한 번 이 작가의 책을 잡으면 놓기 쉽지 않다. 몰입까지 걸리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이 책을 막상 잡아보면 책의 두께에 놀라게 되지만, 그 두께가 무색하리만치 빨리 읽힌다. 일단 한 챕터가 시작되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덕분에 잠들기 전에 읽기 위한 책으로는 최악의 책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새벽 내 읽고 포스팅을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테니 말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몰입도가 뛰어났고, 오랜만에 독서하는 즐거움을 흠뻑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추리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지만, 이 책은 추리소설적인 요소는 없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현대판 동화라고 해도 될까? 고아원인 '환광원'과 이 '나미야 잡화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읽기 쉽다고 이야기가 쉬운 것은 아니어서, 여기에는 좀도둑 이야기, 올림픽을 앞두고 갈등하는 선수 이야기, 아무리 해도 뜨지 못하는 가수 이야기, 호스티스를 하려는 여자아이 이야기, 야반도주를 앞두고 있는 소년 이야기 등이 있다. 이야기는 따스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들은 차갑도록 현실적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깊이 인상에 남은 이야기는 네 번째 이야기인 '묵도는 비틀즈로'였다. 비틀즈가 일본에 내한하던 때, 그것을 보며 눈물까지 글썽이던 사촌형의 영향으로 고스케는 비틀즈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형에게 이렇게까지 영향을 주게 된 그룹에 대한 호기심으로 듣게 된 음반은 고스케를 흠뻑 빠지게 만들었고, 이후 고스케는 비틀즈의 음반을 모으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고스케는 어느 덧 야반도주를 앞두게 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나미야 잡화점 고민 우체통에 편지로 써서 넣게 된다.

  이 이야기 중에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건, 고스케가 야반도주를 하루 앞두고 아버지를 졸라 본 영화, Let it be와 비틀즈 해체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Let it be를 보는 고스케의 감정들의 묘사는 한 줄 한 줄 가만히 줄을 그어놓고 싶을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된다. '그 영화를 보면 비틀즈 해체의 이유를 알게 된대' -- 친구들은 영화에 대해 그렇게 떠들었다.

자막을 열심히 눈으로 따라잡았지만 어느 누구의 진심도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영상에서 감지되는 것은 있었다. 마음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도 직접 다투거나 하지는 않는다. 연주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일단 네 사람은 눈앞에 덜어진 과제를 해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들 이미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보였다.(중략) , 등으로 노래가 이어진다. 하지만 그 연주에서 열정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비틀스로서는 마지막 라이브 공연인데도 맴버 어느 누구도 감상에 젖는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중략) 들려오는 말로는 이 영화를 보면 비틀스가 해체한 이유를 알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서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스크린에 등장한 것은 실질적으로 이미 끝나버린 비틀스였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고스케는 그걸 알고 싶었다.

하긴 이별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아니,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이미 단절된 뒤에 생겨난 것,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변명 같은 게 아닐까. pp.268-269

 보면서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진한 회한같은 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나도 알고 싶다. 나도 고스케처럼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었다. 대개 이별의 순간이 오고서야, 그 마음이 끊기고 나서야 뒤늦게 마음이 끊긴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미 끊어진 조각을 붙들고 무력하게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되지만,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고스케는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고아원에 들어가고, 목공업자로 성공하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낸다. 이후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까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삶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뒤에 부모님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될 때 보게 된 같은 장면은 고스케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굉장히 뻔한, 반전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반전이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어쩐지 멍해져서 잠시 책장을 덮고 감상에 빠져 있었다.

  그래, 여기 나오는 이야기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일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따지자고 보면 죄다 비현실 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소개한 고스케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야반도주하는 도중 도망쳐버린 소년이 나중에 기술로 풍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도 현실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걸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읽어갈수록 느끼게 되는 건, 결국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순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 바로 그것이 기적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바로 나미야 잡화점의 진정한 기적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쉬워보이는 일, 들어주는 일 그 자체가 기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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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2-18 0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생각이 좋은 생각을 부르지 않나... 하고 생각해 봐요...

이카 2013-02-19 08:28   좋아요 0 | URL
맞는 이야기입니다^^ 늘 좋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겠어요
 
[원숭이와 게의 전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 처음 이 소설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띠지와 이 책의 선전문구 때문이었다. '바텐더 vs 5선 의원'이나, 책 뒷표지에 적힌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세상이어서는 안 돼!'라는 문구는 내 호기심을 제대로 자극했었다. 나 역시 착한 사람이 손해보는 세상은 싫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손해를 본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만이라도 좋으니까 통쾌한 소설을 보고 싶었다. 박씨부인전같은 거 말이다. 책 후미를 보면 작가도 그런 작품을 쓰려고 한 것 같은데, 다 읽고 난 뒤의 이 찝찝함은 뭘까.

  나는 애초에 이 소설을 읽을 때 어떤 기대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시민 판타지 같은 거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보통 사람드르이 복수극'이라니 얼마나 구미 당기는 말인가! 차마 대적해보기도 힘들 것 같은 거대한 조직이라거나 세력에 맞서는 개인의 승리같은 거 말이다. 그래, 그러니까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거.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나의 기대에 제대로 어긋난다. 물론, 나는 소심한 소인배지만, 작품이 내 기대와 다르다고 화를 내는 그런 종류의 소인배는 아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작품은 영 찝찝하다. 애초에 사건의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준페이는 어느 날, 뺑소니 사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 날 그 뺑소니 사건의 범인이라 자수한 사람은 자신이 목격한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준페이는 이 사건의 진범을 찾아 협박할 계획을 세우게 되고, 이 덕(?)에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얽히고 섥힌다. 잠깐, 준페이의 행동 역시 범죄 아냐? 소설 속에서 준페이 스스로 '우리의 행동도 범죄 아니냐'는 말을 언급한다만, 그럼에도 준페이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벌도 받지 않는다. 도리어 뺑소니 사건의 진범의 처지를 알게 된 준페이는 그를 감싸주려는 듯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나중에 그 사람은 준페이를 도와주기도 하고... 이야기가 뭐 이래 싶게,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되는데,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더랬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저거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로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일을 강요한다. 저 말로 작은 비리를 덮고, 저 말로 작은 부정에는 눈을 감아야 하고,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고... 지금은 나도 사회 물이 적잖이 들었는지, 어느 정도 포기를 하고 아무렇지 않게 눈 감고 귀 막고 일하고 있다만, 아직도 머리까지 다 바꾸지 못했는지 덜 막힌 입에서는 불평불만이 궁시렁궁시렁 새어나오곤 한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까지 내가 이런 '좋은 게 좋은 거'를 봐야 해? 준페이와 도모키의 협박은 유야무야 없던 일처럼 되는 거고, 결국 미나토 게이지의 형은 (본인이 선택한 거라고는 해도) 아무런 죄도 없이 교도소에 있고, 미나토 게이지 본인은 부활 무대를 제대로 치뤄내고,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도모카는 미나토를 미워하지도 않고? 뭐가 이래.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저렇게 덮어놓은 사건들은 나중에 곪아들어가 악취를 뿜으며 터져나올 것이다. 결국, 죄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변하지 않았다. 순간적인 축제에 휩쓸려 취한 것일 뿐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언젠가 같은 죄는 반복된다. 뺑소니를 보고 순간적으로 협박할 생각을 가진 그 사람. 생각 뿐이 아니라 그걸 실제로 옮기기까지 한 그 사람 말이다. 세상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옳게 된다고, 오히려 자신이 옳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그 사람이 더 옳은 사람이겠지만, 옳지 못한 사람이 된다며, '그래서'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그래서' 그 의심을 멈추고 옳다고 주장하며 전진할 뿐이다.

  .....후련한 이야기에는 독도 들어있는디(p.545)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억울할지 몰라도 아주 작은 것까지 꼬투리를 잡힐 게 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결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사람이 만드는 세상은 이전과 같은 세상일 뿐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가장 기억남는 사건은 야쿠자가 운영하던 건설회사가 도산하자 그 회사를 또 다른 야쿠자 그룹이 싸게 인수한 사건, 아주 작은 그 사건이다. 착한 사람이 손해보는 세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 책에는 착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손해를 보지 않더라. 아니, 착하지 않아서 손해보지 않는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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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보트 - 살아남은 자들의 광기 어린 생존 게임
샬럿 로건 지음, 홍현숙 옮김 / 세계사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이미 유명한,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온 라이프보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퍽 의아했던 게, 이 소재로 씌여진 소설이 지금까지 과연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첫 에피소드로 나오기 전에도, 이미 이 사건은 유명했고, 이와 유사한 사건 역시 있었으니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972년 안데스 산맥에서 비행기 사고로 조난당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인육을 먹고 살아남은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최근에 개봉한 '라이프 오브 파이'도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파이가 식인을 했을지 모른다는 암시 역시 깔려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이 책에 직접적인 모티브를 준 사건은 그 유명한 1884년의 미뇨네트 호 사건이다. 4명의 영국 선원이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남대서양을 표류하고 있었다. 미뇨네트호는 폭풍에 침몰했고, 통조림 두 캔 뿐 마실 물도 없이 표류하던 네 명은 가장 어리고 약했던 리처드 파커를 죽여서 먹으며 생을 유지했고, 구조될 수 있었다는 사건이다.

  이미 독자는 이 사실을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워낙 사건 자체가 흥미롭고, 작가의 필력이 괜찮기 때문에 책장은 쉬이 넘어간다. 나처럼 이 책을 자기 전에 잡으면 졸음과 애써 싸워가며 밤새 읽어버릴 수도 있겠다. 특히, 새벽에 은근한 배고픔과 겨울의 추위까지 겹치면 묘하게 배 안의 상황이 은근히 실감이 나며 더욱 책 속으로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아무래도 워낙 유명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보니, 책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은 별로 없다. 남은 것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 정도인데, 이 작품이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를 기대해 볼 법도 하다. 워낙 소재 자체가 흥미롭다보니, 그 덕을 본 것도 많지만, 어찌 보면 새로울 것 없는 소재로 책을 끝까지 흥미롭게 끌고가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재앙-혼란-공포 그리고 분노 - 진실, 이렇게 네 챕터로 되어 있는데, 특히 3번째 챕터인 공포 그리고 분노에서 마지막 챕터인 진실로 넘어가며 의도적으로 시점을 과거에서 현재로 바꾸며 궁금증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은 '이것봐라?'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처녀작이어서 욕심을 낼 법도 한데, 그것을 잘 절제하는 모습에는 슬쩍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아무래도 실화 자체가 자극적이다보니, 그 과정을 더 극단적으로 몰아갈 법도 한데, 식인 사건을 제비뽑기를 통한 살인 사건으로 의도적으로 약화(?)시킨 것 역시 이 작가의 앞으로를 기대되게 만드는 점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호는 침몰했고, 구명보트에 탄 39명의 사람은 이제 생존을 위한 운명 공동체가 된다. 당연한 수순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악화될수록, 그 안에서 사람들은 여러 유형으로 갈리게 된다. 이 중에서도 처음부터 강력한 리더쉽을 자랑하던 선원 하디, 끝까지 신앙을 이야기하던 부제와 현학적인 이야기를 하던 싱클레어, 하디와 대립하며, 입으로는 도덕을 말하고 자상해 보이지만, 실은 냉정하고 차가웠던 그랜트 부인과 해나, 나약해서 늘 울부짖고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던 메리 앤과 마리아, 아들만 보호하려고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던 안야 정도가 중심 인물이라 하겠다. 빼어난 미모로 좋은 남편감을 잡아 결혼(?)하여 뉴욕으로 가던 주인공은 사건 한 가운데서 이 모든 사람들을 지켜보며, 이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이 소설은 두 가지 면으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주인공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되는 인간의 면면들을 보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굉장히 흥미롭다. 특히 이후 권력의 양 축을 형성하는 하디와 그랜트부인의 대립이 본격화하면 할 수록, 사람들의 개성은 도드라진다.(주로 나쁜 의미로 그렇다) 사실 여기 모든 사람들의 목표는 '생존'이다. 그것도 모두 함께 생존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만이 생존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3~4명도 아니고, 39명이나 되는 인원이 함께 모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아 살아남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되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동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거의 모든 행동들인 듯 싶다. 하디는 객관적 수치/자료를 들이밀며 냉혹해 보일만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리더쉽을 보여주고, 그에 비해 그랜트 부인은 보다 영악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위안을 주고, 여자/남자 대립을 은근히 조장하고, 여론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빌붙는 메리 앤이나 마리아의 모습은 짜증스럽기는 해도,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가정 하에선은 효과적일 수 있을 것도 같다.(읽으면서 내내 짜증스러워, 주인공이 메리 앤인가 마리아에게 '지금 죽는 게 낫다'고 속삭일 떄는 나도 모르게 동조했지만...) 주인공 역시 한없이 순한 피해자만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돈 많은 남자에게 접근해서 남자를 낚아 채 결혼을 하고, 결혼했다는 증거를 확보한 뒤 화려한 생활을 즐기려고 했던 사람이며, 오히려 보트 내에서 가장 영악했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가능한 눈에 띄지 않음으로써 보트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출륭하게 생존해냈다.

  그런데 오히려 주인공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면 생각해 볼 수록, 이 소설의 텍스트를 그 자체로 신뢰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이 이후 재판을 받게 되면서 과거 라이프보트 사건을 회상하여 쓰는 기록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재판과정에서 강해 보이던 대령마저도 (주인공 입장에서는) 완전히 엉뚱한 증언을 확신에 차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장 주인공과 주요 인물들간의 증언도 엇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강렬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극한 상황에서의 기억은 왜곡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된다. 따라서 주인공의 '서술'이라는 형식을 빌고 있는 한, 라이프보트 내의 사건은 절대 객관적일 수가 없다. 게다가 주인공은 약혼녀까지 있는 남자를 꼬시기 위해 일부러 그 며칠 동안 굽이 부러진 구두를 신고 그 남자 주변을 얼쩡거렸을 정도로 영악하고 머리가 좋은 여자이다.(물론, 처음에는 돈을 보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어도 나중에는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글쎄다) 메리 앤이 줄기차게 주장한대로, 주인공은 정말로 남편을 통해 돈을 주고 라이프보트에 탑승했을 수도 있고, 주인공은 자고 있었다고 주장한 그 때 정말로 깨어 있었을 수도 있다. 주인공에 비하면 끝까지 아무런 연기나 연출 없이 강한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결국 유죄 판정을 받고 마는 그랜트 부인이나 해나 부인의 모습에서 일말의 진실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할 정도다.

  결국 이 소설은 어떤 것이 진실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어찌되었거나, 하디는 의도적으로 살해되었고, 일부는 생존했으며, 또 일부는 죽었다. 주인공이 의도적으로 감춘 부분은 끝내 드러나지 않고, 드러낸 부분에서도 모호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장이 엇갈리는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엇갈려 있다.


 "저 없이 선생님이 답을 찾으셔야 할 거예요."
그는 내 말에 좌절한 나머지, 만년필을 너무 세게 내리눌러서 그가 강박적으로 메모를 했던 작은 공책에 큼직한 잉크 얼룩을 만들고 말았다. 다행히 콜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에, 모든 것을 명확히 밝히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과 순진함, 그리고 모든 것을 알려고 드는 어린아이 같은 욕구를 큰 소리로 비웃지는 않았다. - p.333

 

 이 소설의 결말은 어찌보면 명확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결말 이후의 생각은 결코 단순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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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2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함미라 옮김, 최혜란 그림 / 보물창고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핵은 폭발했고,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이 책은 핵이 폭발한 이후 4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한 아이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실 그렇게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게 청소년 도서용으로 나왔다는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책은 청소년 권장 도서가 될 만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들은 나름대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테니까.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이런 책이라면 술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 정확히는 맞긴 맞았다. 이 책은 일단 잡으면 그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읽힌다. 요즘 확연히 짧아진 내 집중력으로도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여운은 길어서 며칠이 지나도록 책 생각이 났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아, 이렇게 글로 그 감정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사실 이 이야기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묵시록적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영화고 만화고 소설이고 넘쳐난다. 이미 나도 몇 차례나 그런 이야기들을 봤고. 그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재미를 보장해 주기는 하지만, 대부분 뻔한 쪽으로 흘러간다. 극악해진 생존환경, 서바이벌 게임, 그리고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대부분 이런 때 인간성은 바닥을 드러내고,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는 식의 묘사가 이어진다. 뭐, 작가에 따라서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애라거나 사랑, 다시 움트는 생명 등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미리 말하건데, 이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일찌감치 이 책을 덮기를 바란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핵겨울만큼이나 차가운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는 화자가 어린 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이나 그 현실은 차갑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작가는 이런 희망이라거나 따스한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었음이 틀림없다.

 원인은 모르지만, 핵이 폭발했다. 아무래도 4년이나 원조도, 구호의 손길도 오지 않은 걸 보면 핵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핵이 떨어진 이후 그 지역에서 생존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처음에는 생존 그 자체에 기뻐하던 사람들은 이내 생존의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전쟁이나 쓰나미같은 극단적인 상화잉 발생했을 때 살아남는 것과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것,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일까? 때로는 그 재해 앞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들이 가장 나은 게 아닐까? 그러면 적어도 그 이후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고, 죽음보다 더할지도 모르는 생을 이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극한 상황이 되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약한 자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그 사실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헌신적으로 남을 돕던 사람들도 이내 자신을 챙기게 되고, 시체며 달린 팔다리에 구역질을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시체 치우는 사람이 올 때까지 시체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무덤덤해진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던 주인공의 어머니도 자신의 가족을 잃고, 점점 더 어려운 상황이 되자 아이들에게 눈을 돌려버린다. 식량을 훔치는 어린 아이를 때려죽였다고 자랑하며, 다른 아이도 죽이겠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나오는 사람이다. 인간성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그 인간성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던 것은 도리어 어린 아이들이었다. 불구가 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아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더 어리고 더 힘든 아이들을 돌보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자신들을 지켜나갔다. 가장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돌본 것도 불과 12살이던 주인공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은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버린다.

  희망 없는 세상이다. 주인공과 그 가족만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바라는 독자의 바람도 우습다는 듯, 불행은 주인공 가족에게도 공평하게 찾아온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누나가, 동생이, 엄마가 차례차례 죽어간다. 이런 세상에서 잉태된 아이는 얼굴이 없고, 아버지는 그 생명을 조용히 죽음 속에 묻는다. 그들은 눈 속에서 피어난 파란 싹을 보며 희망을 갖지만, 이내 그 싹이 누렇게 시들어 버린 것을 보게 된다. 4년이 흐른 뒤, 질서가 찾아오지만, 죽음이 떠나간 것은 아니다. 다만 속도를 늦춘 것 뿐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지만, 그보다 많은 수가 죽어나간다. 그나마 태어난 아이들도 정상인 아이들은 거의 없다. 살아서 태어난 아기들조차 기형아이거나 장님이거나 농아거나 저능아다.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이나마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만 결국에는 죽고 말 것임을 모두가 안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죽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주인공은 담담하게 말한다. 마치 '오늘은 비가 오네요'라고 말하듯, 그렇게 담담하게. 마지막이 되면, 작가는 주인공의 목숨 역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점점 더 많은 수의 머리카락이 빗에 딸려나온다. 주인공의 누나가 죽기 전 그랬듯이 말이다.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에 익숙해진다.

이제 학교에는 40명의 아이들이 있다. 연말까지는 학생 수가 37명쯤으로 줄어들 것 같다. 세 명의 아이들에게서 다시 원자병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세 번째는 베르벨이다. 크라머 아줌마가 죽은 뒤 데려와 지금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집 꼬마 베르벨, 이제 그 아이가 우리와 함께 산 지도 2년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그 아이와 함께 지내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다. 아주 힘든 이별이 될 것 같다.

곧 한 학급이 문을 닫는다. - pp. 217-218.

   이 희망 없는 세계에 희망이 있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주인공의 마지막 말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희망을 버린 세상에서, 학교가 세워지고,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고마워하며 식량을 나눠준다. 처음에는 어른이 가르치던 학교는 아이들이 선생이 되어 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친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결국 세상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이들은 아이들을 가르친다.

나는 가르치는 게 좋다. 선생님이 되기엔 아직 어린 나이이고, 가르치는 것도 배우지 못했지만 말이다. (중략) 나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읽고, 쓰고, 계산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너희들은 빼앗거나, 도둑질하거나, 죽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들은 다시 서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도움을 줄 줄 알아야 한다. 너희들은 서로 대화하는 법을 배워 당장 치고 박고 싸우기보다는,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함께 어울려 찾아 내야 한다. 너희들은 서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너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너희들의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 되어야 한다. 비록 그 세상이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쉐렌보른에 남은 최후의 아이들이니까. -pp.218-219.

  이 말이 책을 덮고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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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1-27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드룬 파우제방 님은, 아이들과 청소년을 사랑하면서 글을 쓰는 할머니예요.
이분은 늘 아이들과 청소년이 삶과 세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며
아낄 수 있기를 빈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청소년책으로 나왔지요.
참 아름다운 이야기이지요. 슬프면서 아름다운.

이카 2013-01-28 01:02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고 여운이 길어 리뷰들을 찾아보는데, 이런 책이 청소년문고로 지정되어 있다니 놀랍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읽히고 싶지 않다는 말도 있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런 책이야말로 아이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해 볼 수 있지않나 싶었어요. 제가 아직 아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아이다운 생각으로 써내려간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좋은 책이었어요.

숲노래 2013-01-29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꽤 예전부터 한국말로 옮겨졌고, 보물창고 판은 새로 나온 번역이에요.
구드룬 파우제방 님이 쓴 다른 청소년문학을 읽어 본 분은,
'독일어권' 청소년문학에서 이만 한 주제 다루는 일이란
아주 흔하고 마땅한 줄 헤아리리라 생각해요.
<첫사랑>이라는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포로 이야기를 다룬답니다.
중남미 소작농 이야기도 쓰시고, 노인부양 문제 이야기도 쓰시고,
지구평화 이야기도 쓰시고... 이분 작품 세계는 참 넓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