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보트 - 살아남은 자들의 광기 어린 생존 게임
샬럿 로건 지음, 홍현숙 옮김 / 세계사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이미 유명한,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온 라이프보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퍽 의아했던 게, 이 소재로 씌여진 소설이 지금까지 과연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첫 에피소드로 나오기 전에도, 이미 이 사건은 유명했고, 이와 유사한 사건 역시 있었으니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972년 안데스 산맥에서 비행기 사고로 조난당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인육을 먹고 살아남은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최근에 개봉한 '라이프 오브 파이'도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파이가 식인을 했을지 모른다는 암시 역시 깔려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이 책에 직접적인 모티브를 준 사건은 그 유명한 1884년의 미뇨네트 호 사건이다. 4명의 영국 선원이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남대서양을 표류하고 있었다. 미뇨네트호는 폭풍에 침몰했고, 통조림 두 캔 뿐 마실 물도 없이 표류하던 네 명은 가장 어리고 약했던 리처드 파커를 죽여서 먹으며 생을 유지했고, 구조될 수 있었다는 사건이다.

  이미 독자는 이 사실을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워낙 사건 자체가 흥미롭고, 작가의 필력이 괜찮기 때문에 책장은 쉬이 넘어간다. 나처럼 이 책을 자기 전에 잡으면 졸음과 애써 싸워가며 밤새 읽어버릴 수도 있겠다. 특히, 새벽에 은근한 배고픔과 겨울의 추위까지 겹치면 묘하게 배 안의 상황이 은근히 실감이 나며 더욱 책 속으로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아무래도 워낙 유명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보니, 책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은 별로 없다. 남은 것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 정도인데, 이 작품이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를 기대해 볼 법도 하다. 워낙 소재 자체가 흥미롭다보니, 그 덕을 본 것도 많지만, 어찌 보면 새로울 것 없는 소재로 책을 끝까지 흥미롭게 끌고가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재앙-혼란-공포 그리고 분노 - 진실, 이렇게 네 챕터로 되어 있는데, 특히 3번째 챕터인 공포 그리고 분노에서 마지막 챕터인 진실로 넘어가며 의도적으로 시점을 과거에서 현재로 바꾸며 궁금증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은 '이것봐라?'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처녀작이어서 욕심을 낼 법도 한데, 그것을 잘 절제하는 모습에는 슬쩍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아무래도 실화 자체가 자극적이다보니, 그 과정을 더 극단적으로 몰아갈 법도 한데, 식인 사건을 제비뽑기를 통한 살인 사건으로 의도적으로 약화(?)시킨 것 역시 이 작가의 앞으로를 기대되게 만드는 점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호는 침몰했고, 구명보트에 탄 39명의 사람은 이제 생존을 위한 운명 공동체가 된다. 당연한 수순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악화될수록, 그 안에서 사람들은 여러 유형으로 갈리게 된다. 이 중에서도 처음부터 강력한 리더쉽을 자랑하던 선원 하디, 끝까지 신앙을 이야기하던 부제와 현학적인 이야기를 하던 싱클레어, 하디와 대립하며, 입으로는 도덕을 말하고 자상해 보이지만, 실은 냉정하고 차가웠던 그랜트 부인과 해나, 나약해서 늘 울부짖고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던 메리 앤과 마리아, 아들만 보호하려고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던 안야 정도가 중심 인물이라 하겠다. 빼어난 미모로 좋은 남편감을 잡아 결혼(?)하여 뉴욕으로 가던 주인공은 사건 한 가운데서 이 모든 사람들을 지켜보며, 이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이 소설은 두 가지 면으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주인공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되는 인간의 면면들을 보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굉장히 흥미롭다. 특히 이후 권력의 양 축을 형성하는 하디와 그랜트부인의 대립이 본격화하면 할 수록, 사람들의 개성은 도드라진다.(주로 나쁜 의미로 그렇다) 사실 여기 모든 사람들의 목표는 '생존'이다. 그것도 모두 함께 생존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만이 생존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3~4명도 아니고, 39명이나 되는 인원이 함께 모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아 살아남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되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동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거의 모든 행동들인 듯 싶다. 하디는 객관적 수치/자료를 들이밀며 냉혹해 보일만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리더쉽을 보여주고, 그에 비해 그랜트 부인은 보다 영악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위안을 주고, 여자/남자 대립을 은근히 조장하고, 여론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빌붙는 메리 앤이나 마리아의 모습은 짜증스럽기는 해도,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가정 하에선은 효과적일 수 있을 것도 같다.(읽으면서 내내 짜증스러워, 주인공이 메리 앤인가 마리아에게 '지금 죽는 게 낫다'고 속삭일 떄는 나도 모르게 동조했지만...) 주인공 역시 한없이 순한 피해자만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돈 많은 남자에게 접근해서 남자를 낚아 채 결혼을 하고, 결혼했다는 증거를 확보한 뒤 화려한 생활을 즐기려고 했던 사람이며, 오히려 보트 내에서 가장 영악했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가능한 눈에 띄지 않음으로써 보트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출륭하게 생존해냈다.

  그런데 오히려 주인공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면 생각해 볼 수록, 이 소설의 텍스트를 그 자체로 신뢰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이 이후 재판을 받게 되면서 과거 라이프보트 사건을 회상하여 쓰는 기록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재판과정에서 강해 보이던 대령마저도 (주인공 입장에서는) 완전히 엉뚱한 증언을 확신에 차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장 주인공과 주요 인물들간의 증언도 엇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강렬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극한 상황에서의 기억은 왜곡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된다. 따라서 주인공의 '서술'이라는 형식을 빌고 있는 한, 라이프보트 내의 사건은 절대 객관적일 수가 없다. 게다가 주인공은 약혼녀까지 있는 남자를 꼬시기 위해 일부러 그 며칠 동안 굽이 부러진 구두를 신고 그 남자 주변을 얼쩡거렸을 정도로 영악하고 머리가 좋은 여자이다.(물론, 처음에는 돈을 보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어도 나중에는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글쎄다) 메리 앤이 줄기차게 주장한대로, 주인공은 정말로 남편을 통해 돈을 주고 라이프보트에 탑승했을 수도 있고, 주인공은 자고 있었다고 주장한 그 때 정말로 깨어 있었을 수도 있다. 주인공에 비하면 끝까지 아무런 연기나 연출 없이 강한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결국 유죄 판정을 받고 마는 그랜트 부인이나 해나 부인의 모습에서 일말의 진실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할 정도다.

  결국 이 소설은 어떤 것이 진실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어찌되었거나, 하디는 의도적으로 살해되었고, 일부는 생존했으며, 또 일부는 죽었다. 주인공이 의도적으로 감춘 부분은 끝내 드러나지 않고, 드러낸 부분에서도 모호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장이 엇갈리는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엇갈려 있다.


 "저 없이 선생님이 답을 찾으셔야 할 거예요."
그는 내 말에 좌절한 나머지, 만년필을 너무 세게 내리눌러서 그가 강박적으로 메모를 했던 작은 공책에 큼직한 잉크 얼룩을 만들고 말았다. 다행히 콜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에, 모든 것을 명확히 밝히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과 순진함, 그리고 모든 것을 알려고 드는 어린아이 같은 욕구를 큰 소리로 비웃지는 않았다. - p.333

 

 이 소설의 결말은 어찌보면 명확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결말 이후의 생각은 결코 단순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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