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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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뮤지컬을 감상하러 다니던 때를 떠올려본다. 덕분에 많은 뮤지컬 넘버들을 알게 되었고 좋아하는 곡들도 많아졌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여러 넘버들도 그 중의 하나다. <The Phantom Of The Opera> 라던가 <Think Of Me> 등을 즐겨 듣는다. 다만 <오페라의 유령>은 공포물이 아님에도 이 음악의 도입부가 여러 공포물에 차용되어서인지, 아이는 첫 소절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덕분에 여름이 되자 시원함을 느끼겠다며 공포게임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면 도입부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종종 떠올리게 된다. 아직도 놀라려나. 




오페라의 유령

Le Fantome De L'opera

가스통 르루

소담출판사



크리스틴이야 워낙 사라 브라이트만의 목소리가 유명하고, 팬텀은 개인적으로 뮤지컬 배우 라민 카림루가 연기하는 팬텀 목소리를 좋아한다. 라민 카림루의 목소리를 같이 들으며 뮤지컬의 원작 소설을 읽는다. 



국내초연(2001년) 뮤지컬 프로그램과 함께 찍어본 소설 「오페라의 유령」



파리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해골 같은 얼굴에 장의사처럼 까만 옷을 입은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존재에서 비롯된 사건들이 계속 벌어진다. 소설의 초반은 추리소설처럼 전개되며 독자의 흥미를 끈다. 흉측한 외모, 괴팍한 성격의 팬텀(유령)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이런 모티브는 <미녀와 야수> 라던가 <파리의 노트르담> 등 옛 이야기나 다른 소설에서도 자주 만나볼 수 있는 설정이다. 그럼에도 '사랑' 이란 이름의 감정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크리스틴을 사이에 두고 팬텀인 에릭과 라울 드 샤니 자작의 벌이는 대결 구도는 로맨스 소설로 느껴지게도 한다. 


맞아요. 크리스틴.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정령도 아니고 유령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에릭입니다. 


- p266




이럴 수가. 뮤지컬도 보고 영화도 봤건만 그저 내게 팬텀은 '팬텀' 이거나 '목소리' 였다. 팬텀의 이름이 에릭이었다는 것을 원작 소설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음악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리 이외에도 외부 세상을 완전히 잊게 하는 효능이 있어요.'(p270) 라던 크리스틴은 오페라 극장에서 어떤 목소리와 대화를 한다. 그 어떤 목소리는 '한 숨결로 두 극단을 동시에 결합시키는 목소리처럼 더할 나위 없이 넉넉하고 웅장하면서 달콤하며, 의기양양하면서도 은밀하며, 섬세하면서도 힘이 넘치며, 매혹적이면서도 당당한 노래'(p209)를 부르는 존재다. 음악을 사랑하고 느끼며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노래를 듣기만 해도 자신의 음색을 한층 드높일 수 있을 정도인 목소리다. 크리스틴은 그 목소리에게 음악을 배웠던 것. 그러나 여러 사건이 진행된 후 그가 크리스틴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크리스틴은 이렇게 대답한다. 


공포예요! <중략>


저는 그를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싫어하지 못해요. 라울, 제가 어떻게 그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지하 호숫가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에릭을 상상해 보세요. 에릭은 자책하고 자신을 저주하며 제게 용서를 빌었어요. 그는 자신의 속임수를 자백했어요. 그는 저를 사랑해요! 저에게 비극적이면서도 엄청난 사랑을 바쳤어요! 사랑 때문에 저를 납치한 거예요! 사랑 때문에 저를 지하에 가두고 함께 있지만, 어디까지나 저를 존중하고, 제 앞에서 벌벌 기고 신음하며 울먹여요. 제가 벌떡 일어나 당장 빼앗은 자유를 돌려주지 않으면 그를 경멸할 수밖에 없다고 했더니, 놀랍게도 선뜻 저를 풀어줬어요. 




크리스틴은 '음악천사' 로 다가온 남자가 흉칙한 외모와 비틀린 마음을 가진 '인간'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뮤지컬로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는 에릭의 사랑이 지고지순해보이고 안타까워보였다. 크리스틴이 그의 가면을 벗기고 얼굴을 확인한 후 공포에 질리는 것을 보며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원론적인 생각조차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미 사랑하던 사람이 있던 크리스틴에게 에릭의 집착적인 사랑은 분명 부담스럽다. 게다가 비틀린 마음의 에릭은 크리스틴을 납치, 감금하지 않는가. 원작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좀 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리 '사랑'으로 미화를 해봐도 잘못된 방식이다. 


그때서야 저는 가면을 벗긴 행동이 초래한 끔찍한 결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어요. 괴물이 내뱉은 말만 생각해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저는 제 발로 영원한 포로가 된 셈이에요. 저의 모든 불행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어요. 그는 사전에 충분히 경고했는데...... 제가 가면에 손만 대지 않는다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이고 제게 말했는데, 결국 거기에 손을 대고 말았어요! 저는 제 경솔한 행동을 저주했죠. 


- p284



문득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동화 <푸른 수염>이 떠오른다. 차가운 푸른색의 눈동자와 푸른색의 수염을 가진 푸른 수염은 결혼한 아내에게 모든 방의 열쇠를 주며 한 방만은 열지 말라고 한다. 호기심에 그 방을 열어본 아내는 그동안의 다른 부인들의 시체를 발견한다. 자신이 열지 말라는 방의 문을 연 부인들은 모두 살해되었던 것. 이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도 언급된다. 크리스틴이 라울이 잡혀있는 방의 열쇠를 찾기 위해 에릭의 가방을 빼앗았을 때 그는 "난 호기심 많은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 당신은 '푸른 수염' 이야기를 알고 있지? 조심해야 할 거야."(p466) 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나도 사랑만 받는다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양처럼 온순해질 거고,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할 거야.


- p452




에릭의 이 외침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흉측한 외모로 태어나 부모, 가족,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에릭은 인간에 대한 어떤 의무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해 알려줄 이들이 없었기에 어떤 범행을 저질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증오심으로 타올랐던 것. 그런 그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꿈꾸며 사랑을 갈구하지만, 끔찍한 수단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현실은 가혹하다. 



이야기의 결말은 원작 소설로 읽으니 훨씬 더 좋았다. 뮤지컬과 영화보다 좀 더 섬세하게 서술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는 매력적이다. 무대에 등장하지 않은 원작 소설의 여러 이야기들 또한 작품에 대한 풍부한 감상을 이끌어낸다. 뮤지컬도 좋았지만 원작소설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023년에 다시 뮤지컬로 공연 예정이라는 소식에 더욱 즐거워진다. 이번에는 더욱 더 감정선에 집중하며 즐겁게 감상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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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행성 1~2 - 전2권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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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1,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평범한 집고양이었던 주인공이 '인류를 구하고 인간 세상 최고의 도시, 나아가 전 인류를 대표하는 부족들이 모인 총회의 의장이 될 뻔했던 순간'을 기록한 『행성』 세트, 그리고 더 나아가 『고양이 시리즈』 는 시리즈의 마지막에서 이 시리즈의 정체를 드러낸다. 에필로그에 따르면 주인공 바스테트가 집사를 통해 회고록 형식의 글로 남긴 것일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바스테트가 화자가 되어 1인칭으로 서술된다.

첫 번째 책은 평범한 암고양이 시절의 나, 역사와 과학에 눈을 뜨게 해준 피타고라스와의 만남 그리고 내가 시뉴섬에 세운 최초의 인간-고양이 연대 공동체에 대한 얘기야.

두 번째 책에는 보다 큰 공동체를 다시 시테섬에 만들게 된 사연, 내가 제3의 눈을 이식받게 된 과정 그리고 그걸 통해 인간의 지식에 접근하고 인간들과 소통에 이르게 된 이야기가 담겨 있어.

세 번째 책은 대서양을 건너와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 과정과 티무르의 쥐 군단을 무찌르기까지의 우여곡절에 대한 이야기야.

- 행성2권, 에필로그 p300

바스테트의 이야기를 부연해보면 첫 번째 책은 『고양이』, 두 번째 책은 『문명』, 세 번째 책은 이번에 읽은 『행성』 이 된다. 세 시리즈를 차례로 읽어온 나는 바스테트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동물?) 들의 저마다의 이야기들과 성격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했었다. 마지막까지 궁금해지는 건 역시 쥐들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하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구하게 되는 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의 특징인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의 발췌 페이지들이, 이야기의 흐름에 어떻게 연결되어 등장하는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또한 감상의 포인트가 된다.

바스테트의 회고록으로 생각해보면, 이 세계의 여왕이 되고자 했던 바스테트의 성장담 또한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이다. 바스테트는 '내가 꿈꿔 온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할 거야.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마침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거야.'(p302) 라고 염원한다. 그녀가 꿈꾸는 건 고양이의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지구의 모든 종이 소통하는 세상, 그리고 어떤 종으로 태어났든지 중요한 존재임을 서로 인정하는 세상이다. 독자와 함께 팬데믹을 통과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더욱 바라게 된 세상일 것이다.


*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제공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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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2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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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鼠類) 연합, 즉 알카포네와 티무르들의 작전을 알게 된 프리덤 타워의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여러 작전을 세워보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다양한 불화가 표출된다. 바스테트는 자신이 티무르와 협상을 해보겠다고 나선다. 티무르는 바스테드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한다. 


- 세상의 모든 책과 음악과 사진과 영화가 들어있는 ESRAE(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확장판) USB를 나한테 줄 것

- 제3의 눈을 무선으로 쓸 수 있는 조그만 동글을 나한테 줄 것

- 인간들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나를 비롯한 쥐들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 p108



서로 속고 속이는 협상의 과정은 치열하며,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바스테드의 활약은 눈부시다. 결국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되고, 고양이-인간 공동체는 보스턴 다이내믹스 공장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행성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열린책들




『행성』 의 주인공 고양이 바스테트도 매력적이지만, 중간 중간 언급되는 바스테트의 어미 고양이도 매우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스테트는 종종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라고 언급하며 엄마의 말들을 들려주는데 그 말들이 상황마다 어울리는 말들이다. 바스테트 또한 '돌이켜 보니 엄마는 정말 대단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실천력까지 뛰어났지.'(p29) 라면서 '엄마가 남긴 말들은 내 삶의 좌표가 된다'(p102) 라고 생각한다. 


남을 도와주는 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야. 상대가 입으로는 도와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도움을 바라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 왜 그런지 알아? 자신이 처한 상황과 일체화했기 때문이야. 자신이 역경과 맞닥뜨린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누가 그 역경을 없애 주겠다고 나서 봐. 그러면 더 이상 자신이 만들어 낸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잖아. 남을 돕기 전에 먼저 잘 생각해 보렴. 상대가 자기를 도와주는 너를 용서해 줄지.


- p29




티무르와의 협상의 과정에서는 고양이 피타고라스의 말을 떠올리며 한 걸음 성장하기도 한다. 초반의 고집불통이고 자신만 생각했던 바스테트가 함께 하는 이들을 통해 점점 변해가는 모습이 이 소설의 한 축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네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다 너를 위한 것이야. 이 시간과 공간을 네 영혼이 현신을 위해 선택한 차원이야. 네가 사랑하는 이들과 친구들은 네가 가진 사랑의 힘을 깨닫게 해주지. 네 적들과 네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너의 저항력과 투쟁력을 확인하게 해주지. 네가 부닥치는 문제들은 네가 누구인지 깨닫게 해주고. 


- p101, 고양이 피타고라스의 말 중에서




로봇 고양이들이 지키고 있는 보스턴 다이내믹스 공장에 도착한 바스테드와 인류연합. 이곳에서도 인류는 여러 집단간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결국 그랜트 장군으로 대변되는 무력 집단의 주장에 따라 뉴욕의 쥐들에게 핵폭탄 투여할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핵폭탄을 터뜨린다는 뜻은 그 장소 또한 포기하는 것임에도 먈이다. 바스테트는 인류를 돕게 되지만 핵폭탄이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1권에 비해 2권의 서사 진행속도는 빠르다. 여러 갈등 요소들을 초반에 대부분 서술한 터라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는 모습들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만 카타르시스적 결말이 아닌 씁쓸함을 남기는 현실적 결말에 가깝다. 


인간과의 '말'로 하는 소통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바스테트는 '글'로 소통을 시도한다. 미래세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집사인 나탈리에게 필경사를 해달라고 부탁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렇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마침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 바스테트의 '글'은 『행성』 을 포함한 고양이 삼부작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어쩌면 시간을 거슬러 와서 조금 일찍. 그동안 바스테트와 여정을 함께 한 독자들은 지구란 행성의 지속 가능한 행복을 고민해보게 되지 않았을까. 나 또한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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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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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을 읽고 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작가에 대해 안쓰러움을 동반한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무엇인가 작가의 비밀을 공유받고 있다는 느낌에 왠지 작가를 공감해주고 이해해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였었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은 이번에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 를 읽을 때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자기 고백적인 내용과 문체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달려라 메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단편 『도쿄 팔경』 에서 작가는 십 년간의 도쿄생활을 그때그때의 풍경에 내맡겨쓰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제법 점잔 빼는 얼굴을 한 삼실 줄 남자' 가 된 그는 '청춘에 대한 결별 인사로서, 아무한테도 알랑거리지 않고 쓰고 싶었다'(p88) 이라고 고백하고도 있다. 책 속에서 H라고 언급된 전부인 오야마 하쓰요와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처녀작인 <추억> 이라던가, 스스로 유서라고 불렀던 <만년>, H와 온천으로 죽으러 갔을 때의 경험을 담은 <우바스테> 의 작품들이 나온 배경들을 알 수 있게 된다. H와 헤어지고 다시 중매로 결혼한 후 조금이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보내던 그는 스스로를 '한 사람의 원고 생활자'(p113) 라고 표현한다. 



후대에서 '서른 살의 다자이 오사무는 결혼을 계기로 인생과 문학 모두에서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평한다. 질풍노도의 청춘을 뒤로하고 가장이자 직업 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다자이의 문학 세계는 이 시기에 한층 다채로워졌다고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


결혼한 이후에도 그는 여러 내연녀들을 만났다. 덕분에 나는 자신의 치졸함을 감추지 않는 그의 자기고백들이 스스로의 방탕함에 대한 교묘한 자기합리화처럼 읽혀질 때도 있다.  「비용의 아내」 를 읽다보면 소설은 픽션이나 작가의 삶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술 때문에 엄청난 빚을 지고 늘 바람을 피우는 방탕한 소설가 오타니에게서는 작가의 모습이, 그런 못난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감싸안는 아내는 다자이 오사무의 부인 이시하라 미치코가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말년의 다자이 오사무와 3명의 아이들을 보살폈건만 다른 여성과 동반 자살하는 모습을 봐야했던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비용의 아내」 는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일본 영화가 떠오른다. ( 2009년은 다자이 오사무 탄생 100주년이라 영화, 애니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작가를 기린 듯 하다. ) 원작을 읽은 후 함께 감상해도 즐거운 시간이 될 듯 하다. 



표제작인 「달려라 메로스」는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일본의 국민소설이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을 원전으로 한다. 주인공인 메로스는 포학한 폭군 디오니스 왕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붙잡히고, 여동생의 결혼식을 위해 처형 전 사흘의 여유를 부탁하게 된다. 왕에게 자기 대신 친구 세리눈티우스를 인질로 데리고 있으라고 하고 떠났다가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돌아온다. "달리는 거야! 신뢰받고 있으니까. 달리는 거야! 제시간에 도착하는지, 못 하는지가 문제가 아냐. 사람 목숨도 문제가 아냐. 난 어쩐지 훨씬 엄청나게 거대한 무언가를 위해 달리고 있어!" (p65)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이 다자이 오사무와 친구인 단 가즈오 사이에서 있었던 '아타미 사건' 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친구와 술을 마시던 다자이 오사무가 돈이 다 떨어지자 돈을 구해오겠다고 떠나놓고서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 기다리다 지친 친구가 다자이 오사무를 찾았더니 그는 돈을 빌리려던 스승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내자 "기다리는 사람이 괴로울까,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괴로울까?"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문장은 2009년, 일본에서 다자이 오사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애니메이션화한 일명 <푸른문학 프로젝트> 속  「달려라 메로스」 의 프롤로그로도 등장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부유한 집안의 십일 남매 중 열째로 태어났다.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동안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돈 많은 지주 가문이어서 오는 죄책감, 의지박약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 부정이나 패배의식, 인간에 대한 자조와 사회에 대한 분노 등을 재료로 삼아 문학으로써 승화시켰다. 이는 패전 이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지금까지 일본의 국민 작가로 크게 인정받고 있다. ‘데카당스 문학’ 의 대표 작가로도 불린다. 위키에 따르면 데카당스(Décadence)는 단어 자체는 '퇴폐', '쇠락'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한 문예사조에서 '퇴폐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것'을 지칭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전후 혼란해진 일본 사회를 반영하는 문학을 일컫는 말로, 전후 세대의 실존적 허무를 다룬 소설들이 포함된다. 기존의 사회 규범이나 도덕에 대항하고자 하는 경향이란 면에서 전체주의, 군국주의를 강요했던 당시 일본사회에서 개인의 실존을 이야기하는 것은 꽤 '데카당스' 적이었나보다. 


<혹부리 영감>, <우라시마 씨>, <카치카치산> 등을 포함한 「옛이야기」 편은 작가의 각색으로 더욱 재미있어진 듯 하다. 용궁에 다녀온 우라시마씨가 마치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 같은 용궁 선녀의 선물을 여는 순간 순식간에 삼백 살이 되어버리는 <우라시마 씨> 이야기 속에서 "세월은, 인간의 구원이다. 망각은, 인간의 구원이다" 라며 "일본 옛이야기는 이처럼 깊은 자비심이 있다" (P189) 라는 문장에 담긴 작가의 유머에 함께 웃었다고 할까. 


 「달려라 메로스」 에 담긴 단편들은 원작 소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른 컨텐츠들이 많아서 더욱 즐거운 독서가 된다. 단편집이기에 출퇴근 길에 짧게 한 편씩 읽기에도 좋았던 소설집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접하는 이도, 이미 다자이 오사무의 팬인 독자에게도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 더욱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집이기도 하다. 이 책을 선물해준 책친구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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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율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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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시대와 현실 속에서 각자에게 맞는 행복과 사랑은 무엇일까. 여성 작가로 최초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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