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시선 303
강성은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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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헤라자데, 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중에서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
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
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
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
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
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
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
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
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
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
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
험적인 이야기 어느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 줄
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삭일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 시집 첫 번째에 수록된 시다. 책으로 말하면 서문에 해당하는데, 강성은의 첫 시집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형식적으로는 연갈이, 행갈이 없이 한 덩어리로 쭉 써내려가는 시들이 많다. 내용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어둠과 슬픔인데 그것을 동화적 모티프를 차용하여 풀어내고 있다.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같은 표현은 역설적 언어유희임과 동시에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우리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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