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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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엄마가 7년 전 췌장암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 과정을 곁에서 함께 하고 지켜보았다. 엄마는 그 1년이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엄마의 그 고통 덕분에 나는 성인이 된 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는데도 나는 그때 엄마가 죽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4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따뜻한 도시에 살고 있는데도. 엄마는 죽어 돌아간 것이 아니라, 살아 돌아갔다.




-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47쪽





- 수개월 동안 나는 그녀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내가 잃어버린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나의 딸이었던 것처럼. 66쪽





-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111쪽





-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5쪽





- 내가 거주하는 곳은 나의 무거운 마음 안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행복하다.

무거운 마음 안에서 사는 걸 방해하는 모든 일을 견딜 수가 없다.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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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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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일 위암 투병 끝에 별세한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다시 읽는다.



진주에 가고 싶다.

진주에 가면 그가 공부했던 경상대학교에 가고 싶다.

경상대학교에 가면 그가 강의를 들었을 국문학과 강의실 의자에 앉고 싶다.

그리고 시집을 읽고 싶다.



진주에 가고 있다.

뮌스터로 가고 있다.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까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마치 꿈꾸는 것처럼, 20쪽)



"저기도 세월이 있다네 일테면 마음의 기름 같은 거"

"그때도 그랬죠 뿔이 있으니 소라는 걸 알았죠 갈기가 있으니 말이란 걸 알았죠/ 그렇다면 몸이 있으니 마음이라는 걸 알았나" ('무심한 구름', 32쪽)



"마음끼리 헤어지기 싫어할 때 견딜 수 없는 몸은 마음으로 들어온다"('사랑의 불선', 33쪽)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먹고 싶다' 44쪽)



"동심원들 안에서 사람의 마을은 천천히 돌아가네"

"멈춘 나무 사이에서 멈추지 않는 자전거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한 그루와 자전거가 똑같이 멈추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천천히 멈추면서 한 그루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한 그루와 자전거',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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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리커버 특별판. 페이퍼백) 애거서 크리스티 리커버 컬렉션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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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 황금가지, 2018

 

 

 

니거 섬에 모인 열 명의 남녀가 한 사람씩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때마다 열 개였던 흑인 도기 인형이 하나씩 사라진다. 어릴 때 즐겨 부르던 동요 ‘열 꼬마 인디언’이나 이상의 시(詩) 「오감도」에 나오는 도로로 질주하는 ‘아해’처럼.

 

그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지인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관여된 사람들이다. 살인죄나 과실치사로 처벌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이르게 한 정황이 있거나 죽음에 일말의 도덕적 책임이 있는 이들이다. 그들을 심판하려는 U. K. 오웬이라는, 신 같은 존재가 배후에서 사건을 조종한다.

 

알려지지 않은(Un-Known) 오웬은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여 “법이 처벌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공명정대한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려 한다. ‘열 꼬마 검둥이 자장가’의 노랫말처럼 열 명의 사람들은 다 죽는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네’

 

이 소설은 초반부에 ‘열 꼬마 검둥이 자장가’를 던져놓고 독자에게 이미 결말을 제시한다. 순서만 모를 뿐 독자는 열 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 씩 죽어나가 결국 이 섬에는 아무도 없게 된다는 결론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고립된 섬에서 범인은 이 섬에 들어온 열 명 중에 있고, 살해의 과정에서 독자들은 저마다 범인을 추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범인의 치밀한 전략을 해설해 놓았다.

 

또한 이 소설은 철학적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정의의 이름으로 섬에 들어온 이들을 심판하는 자의 사적 집행, 자력구제는 허용될 수 있는가? 만약 이를 허용한다면 국가가 오랜 세월 정립해 놓은 사법체계, 즉 판결과 집행 절차를 개인이 휘두르는 결과가 된다. 법적인 잘못은 없어도 도덕적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 한 광신적 도덕주의자가 단죄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일까? 충분히 찬반양론으로 의견이 나뉠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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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글쓰기 - 남과 다른 글은 어떻게 쓰는가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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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에 이은 저자의 세번째 책이다. 앞의 두 권이 청와대 연설비서관과 대우 비서실에서 일했던 경험을 녹여낸 책이라면, 이 책은 글쓰기 강연자와 글쓰기 작가로서 생각하는 노하우가 담겼다. 물론 그 전제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이유, 동기 유발, 글쓰는 자세 등이 담겨 있다.



여타의 글쓰기 책 몇 권과 저자의 위 두 책을 본 사람이라면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새로운 방법론이나 노하우는 없다. 글쓰기가 그렇다. 단번에 목적지를 향해 날아갈 수 없다. 다만 글쓰기를 위해 심리학이나 뇌과학이론을 차용하는 점, 글쓰기가 중도에 막혔을 때 책의 목차나 강의를 활용한다는 것, 장난감 블록처럼 여러 개의 문단을 만들어 놓고 이리저리 구성해보는 방법 등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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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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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사람



튜브에 바람을 가득 넣고 폴짝 뛰어, 바닷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파도는 수유 쿠션을 베고 잠든 아기를 깨우지 않을 만큼 잔잔하고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라면 좋겠습니다만, 튜브가 풍선이나 훌라우프 반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바람을 넣느라 머리가 쨍, 하거나 자꾸만 무너지는 후프를 끌어올리는 일, 반지를 밀어넣다가 손가락이 부르트는 일도 상상일 뿐이니까요 그렇다고 생각을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은 '불꽃'을 생각합니다 '불꽃' 뒤엔 으레 '놀이'가 달라붙곤 하지요 하지만 나에겐 '놀이'가 애당초 없기에 '불꽃'이라는 낱말 뒤에 붙일 낱말을 생각합니다 그 낱말이 풍선이나 훌라후프 반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잠시 부풀었다가 힘이 빠지고 한 평도 안되는 허공의 울타리에 갇히고 동전보다 눈동자의 끈이 나를 묶는 일은 매한가지입니다 '상처' '흉터' 같은 낱말도 그럴싸 하겠네요 우리는 모두 사그라드는 운명을 타고 태어납니다 튜브나 풍선 훌라후프 반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언젠가는 쪼그라들고 바닥에 내던져지고 얇은 껍질이 벗겨지는 운명입니다 다만 흔적은 남기는, 불꽃이 사라진 뒤의 하늘을 사랑합니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서 섰을 때 구겨진 몸과 허리를 두르는 검은 띠와 햇볕이 손가락에 남긴 환한 그림자를 사랑합니다 문득, 나의 전생은 매미였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날이 있었습니다 허물을 벗고 유충이 되어 나무를 기어오르는 매미, 그 매미의 전생은 눈이 어둡고 지느러미가 긴 심해어였다는 확신이 든 날이 있었습니다 수 년을 물속에서 땅속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을 상상하고 귀를 기울이다가 물밖에서 보름을 사는 물고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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