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돌 숨비소리
신경림 외 지음 / 걷는사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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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 꽃잎이 떨어진 길을 걸었다. 아기띠를 매고 캥거루처럼 조심조심 걸었다. 제비꽃은 얼었고 한낮인데 아득히 어두웠다. 아직 차가운 봄바람이 떼어놓을 듯 달려들었다. 앞서 간 그이는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린 걸까. 출발점에서 만나자고 했던 그이의 말을 잊어버린 걸까. 잘게 부서진 두려움이 피를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아 한다. 아기는 비눗방울 속에서 푸른 잠을 잔다.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가 날아간다. 참억새 무성한 길에서 접어든다. 바람을 타고 우리를 부르는 것은 누구입니까. 아기는 쌔근쌔근 잔다. 이마에 땀이 난다. 잠이 바람이 밀리고 있다. 종점이고 원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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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
밴디 리 엮음, 정지인.이은진 옮김 / 심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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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트럼프 현상)은 트럼프가 그동안 보여준 언행에 대해 정신분석전문가, 정신의학자 등이 자신들의 임상경험과 실제 트럼프를 겪으면서 느꼈던 실례를 들어 트럼프를 진단하고 있다. '억제되지 않는 극단적 현재 쾌락주의'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자기애성 인격장애' 증상을 보인다는 서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가 '여우처럼 미친 척하는 것' 혹은 '진짜 완전히 미친 것' 둘 중 어느 것이든 그것이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섬뜩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잠재적인 시한폭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제2부(트럼프 딜레마)는 '골드워터 규칙' 때문에 정신의학자들이 트럼프에 대한 직접적 진단 시도를 자제해왔거나 그 사실을 모른 체 해 온 사실을 언급한다.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신부 앞에서 오늘 저녁 특정인을 죽일 거라는 고해성사를 했을 때 신부가 그 사실을 수사기관에 알려야 하는지, 비밀유지의무를 지켜야 하는지와 같은 의무의 충돌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책의 전문가들은 골드워터 규칙을 비판하는 입장과 그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외부에서 트럼프의 언행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우회하기도 한다.



3부(트럼프 효과)는 트럼프 당선과 그의 정치적 언행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미국인들의 증상과 그 치유방법, 트럼프가 여전히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 안보,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미국 대통령에 관한 문제라 우리 국민과 동떨어진 문제라고 가벼이 여길 수 없다. 남북, 북미 간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고 한미 FTA같은 사안에서도 트럼프의 결정과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민에게 앞으로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나르시시즘 점수가 높을수록 탄행을 당하거나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고, 하급자들의 비윤리적 행동을 용인하며, 도둑질하고, 규칙을 왜곡하거나 위반하고, 탈세하고, 혼외정사를 벌일" 확률도 높았던 것이다.'(94쪽) 같은 구절을 보자. 국정을 농단하고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신과 친인척 등 가까운 이들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고, 그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법을 어겼음에도 반성없는 대통령의 모습은 남일이 아니다.



타자를 통해 나와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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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남성, 남성성, 그리고 사랑
벨 훅스 지음, 이순영 옮김, 김고연주 / 책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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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법원 조직은 사기업에 비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 초반에 남성에 대한 군가산점제가 폐지되면서 여성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시험에 합격했다. 최근 몇 년동안 남녀 비율은 거의 비슷해졌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도 장려하는 추세이고, 휴가와 휴직으로 인한 불이익도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남자공무원들의 육아휴직도 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5급 이상의 관리자 직군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현재 추세로 볼 때 15년에서 20년 정도 지나면 상당수 여성이 관리직군에 편입되면 조직문화가 또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시간만 지나면 양성평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가? 가장 보수적인 조직은 결국 사회적인 분위기와 구성원의 의식변화에 영향을 받아 정책을 사후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남성인 내가 이 책에서 말하는 '가부장적 남성성'(미국의 '제국주의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와는 조금 의미는 다르겠지만)을 버리고 '온전함(intergrity)'와 상호성과 성평등성을 고양하는데 답이 있을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듯,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이론이 아니다. '페미니스트 남성성'을 갖춘 남성성을 갖추면 성장과정부터 지금까지 남자들에게 금기시 되어 온 것들, 예를 들어 울음을 터뜨리거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대중 앞에서 표현하는 것 등을 비롯해 보다 적극적인 인간으로 재사회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도 피해자 프레임이 아니라, 여성은 남성들(아버지, 남편, 아들, 친구)과 함께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므로 남성들의 감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기도 하며 이에 적극 동의한다.



두려움과 강압은 사랑과 공존할 수 없다. 분노 대신 사랑으로 망가진 관계의 울타리를 세우면 상실과 강박으로부터 우리 모두 온전함과 안전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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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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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정신과 의사였던 저자의 책이라, 수많은 임상실험과 결론에 이르는 과정일 것이라 예측했으나 내가 틀렸다. 전혀 관련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첫 챕터가 '다윈에게 꽃의 의미는?' 이었다. 꽃은 암수술을 다 가져서 자가수분한다는 통념이 깨어지는 과정과 "수컷과 암컷의 생식기를 모두 가진 식물이 다른 식물의 구애를 받아들일까?"로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고가 점점 확장된다.



두 번째 챕터인 '스피드'는 속도와 시간에 관한 철학적인 에세이 혹은 문학적인 평론의 느낌을 줄 만큼 문장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밖에 무척추동물의 정신세계, 프로이트가 신경학에 심취한 시절, 표절, 모방과 창조, 기억과 망각 등의 문제를 의학적 관점 뿐 아니라 생물학, 심리학, 철학, 문학, 음악에까지 접목시킨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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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데이비드 스미스 지음, 필 에번스 그림, 권예리 옮김 / 다른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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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을 읽으면 가장 좋겠지만 경제학 전공자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수식을 동원하지 않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노동가치설, 즉 실질적으로 추상적 노동이 곧 가치다,라는 주장을 이해하기 쉽게 서술한다. 이 책의 특별함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함축하는 명제를 적절히 제시해 준다는 점이다.







'화폐 보유자와 노동력의 판매자가 만난다'는 이 단 하나의 전제 조건은 세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96쪽), 마르크스가 발견한 것은 노동력의 가치가 노동생산물의 가치보다 더 즉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123쪽) 불변자본이 커지면 경제 위기의 위험이 증가한다!(137쪽) 같은 명제들을 이해하고 익힐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다른 해설서나 원전에 접근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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