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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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체험을 말한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를 온전히 상상력으로 그려 내는 존경할 만한 작가가 왜 없겠느냐 마는, 적어도 대다수의 작가는 개인적인 체험을 질료 삼아 글을 뽑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책 표지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와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그의 사진을 통해 그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 어딘지 몽환적인 분위기, 도시적인 외모, 예술가다운 섬세함 그런 느낌들이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그의 어느 부분에서 흘러 나온 것일까? 독자와 부딪치는 장면마다 부싯돌처럼 섬쩍지근한 불꽃이 튀는 맵찬 글의 맹아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는 도시 이해할 수 없는 쑤퉁이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쌀"은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저리고, 맵고, 쓴 그래서 소리를 내어 따라 읽다 보면 입안이 얼얼한 그런 이야기 말이다.
주인공인 우룽은 홍수에 모든 것을 잃은 고향 펑양수를 떠나 와장가로 흘러든다. 와장가라는 도시에서 그가 처음 느낀 소회는, 온기없이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공포이며, 생존을 위해서라면 짐승처럼, 단지 살기위해서만 생각해고 행동해야 한다는 절망감이었다.  

주인공이 대홍기 쌀집, 도시 문명으로 상질될 수 있는 곳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온갖 멸시를 당할 때마다, 발가락을 잃고, 눈을 잃을 때마다 점점 아귀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명을 택한다는 것, 근대화의 환상을 갖는다는 것이 무방비한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필요 이상의 것들을 향한 욕망, 도시에 들어선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잉된 욕망은 심지어 열다섯 쯔윈의 옷마저 벗겨 버리니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점점 피폐해져 가는 농촌, 사람과 돈으로 넘쳐나는 도시. 그렇지만 도시의 부유함과 현란함은 지독히 냄새나는 것들 위에 세워진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음을, 작가는 아바오와 뤼대감의 죽음과 우룽의 문드러지는 육신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책의 제목이자 끊임없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쌀"은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에 밀려난 모든 것들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룽이 떠나온 고향 펑양수가 곧 쌀이며, 떠나왔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 또한 쌀이며, 타락한 육체를 정화하는 것 역시 쌀이며, 몸 속으로 매일 집어넣지 않으면 안되는 것 역시 쌀인 것이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쌀이 은은한 달빛속에서 희미하게 흰빛을 뿜어내고 있었다."(112쪽)면 그 맞은편에는 와장가가 있었고, 우룽과 대홍기 쌀집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쌀"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악취가 풍기고, 악랄하며, 인정사정 보지 않는것들 뿐이다. 즉, "쌀"이 문명 이전의 것이라면, 쌀을 가둔 "쌀집"은 문명의 상징이고, 대홍기 쌀집과 와장가의 사람들은 결국 문명이 낳은 사생아들인 것이다.

쑤퉁은 이 소설에서 인간의 욕망을 살과 뼈를 발라내듯 집요하게 그리고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것이 독자에 따라 흥미로울 수도 있고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인 문체는 책을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훌륭한 장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독서를 하는 동안 나 역시 비릿하고도 선선한 쌀냄새가 그리웠다. 우룽처럼 배가 고픈 적이 없는 나에게도 쌀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쌀"이라는 소설은 부지불식간에 머리카락 빠지 듯 내안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소설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내 영혼에 새겨진 상처들이 흰쌀처럼 가볍고 희어져 어두운 밤하늘에 둥실 떠오르기를 나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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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10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로서는 도저히 따를수 없는 굿바이님(책읽는 부족민들 거의)의 독서편력.
쑤퉁, 그저 마음 속에 이름만 담아둡니다.

굿바이 2009-12-11 15:04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가 저에게 독서편력이라고 하면, 물론 우리 조카는 아직 편력이라는 말을 모르겠지만, 그나마 이해가 될까, 동우님이 그리 말씀하시면 민망할 뿐입니다.^^


후니마미 2009-12-1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 주 전 쌀의 인류학 이라는, 일본작가가 쓴 책을 읽다 덮었는데
문학으로서 같은 맥락을 더듬었을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웬디님의 방에서도 보고 온 책 제목입니다.
이혼지침서 라는 책에서 쑤퉁의 이름을 익혔는데
꽤 심각한 일을 꽤 가볍게 이야기해 버리는 재주랄까
문체에 그런 힘이 있다고 느껴졌었어요.

근대화의 물살이 너무나 빠르다 보니
지난 것들,, 빠져나가는 것들에 대해 성찰할 틈도 없이 보내곤 하는데
저도 이제부터 잡아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들이
쌀과 같은 것, 우리의 삶이었으나 변하고 말아 원형을 잃은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막연히 그렇습니다
앞으로 보려고 하는 게 그렇다 보니, 소설 제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곧 사서 일게 될 듯 하군요

굿바이 2009-12-11 15:09   좋아요 0 | URL
쑤퉁 작품을 몇 권 봤는데, [제왕의 생애], [쌀], [눈물] 다 좋았습니다. 독자를 살살 다루지는 않지만, 작가가 인간을 보는 시선이 저는 좋습니다. 개념적으로 보지 않거든요. 당위같은 것들로 부터 자유로운 작가입니다. 철저하게 실존을 다루는 작가거든요. 흔치 않은 작가입니다.

웽스북스 2009-12-28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언니언니 이주의 리뷰에요. 한턱쏘세요.
(만원받았을텐데 막 쏘래 ㅋㅋㅋㅋㅋ)
 
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
마이라 산토스 페브레스 외 14인 지음, 클라우디아 마시아스 엮음, 우석균 외 6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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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자유롭고 대담하게 그려낸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열다섯 명의 작가의 작품을 담고 있다. 그 중 마이라 산토스 페브레스, 에드문드 파스 솔단, 앙헬 산티에스테반 프라츠,크리스티나 리베라 가르사, 페드로 앙헬 팔로우의 단편은 읽는 도중에도, 읽기가 끝난 후에도 도통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글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리라. 아름다워서 약오르고, 대담해서 기죽고, 황홀해서 씁쓸한. 

     
 

별안간, 그를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데려다놓은 바로 그 우연에 의해 날카롭게 베인 상처 같은 그런 존재. - 코끼리에 관한 우화, 페드로 앙헬 팔로우

 
     
     
  그것이 코끼리를 본 마지막 오후였다. 하지만 자신을 삼킨 진흙탕에 자신의 열정을 수장시키면서 부르짖던 그의 사랑의 절규는 지금도 들린다. 그렇지 않아,수사나? - 코끼리에 관한 우화, 페드로 앙헬 팔로우  
     
     
 

나는 순진하지 않아. 그리고 아마 너도 그럴 거고.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이미지, 되고자 하나 될 수 없는 이미지의 덫에 걸려 있다는 점이야. 그래서 어떤 일은 말 못 하고, 어떤 의혹은 인정하지 못하고, 의심은 가도 듣고는 싶지 않은 그 모든 일을 서로 크게 떠벌리니 않는 한 우리 둘 사이는 좋아.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면, 기를 쓰고 각자의 비밀을 지켜야만 해. 누군가 입을 열면 마법은 깨지고 말 테니. - 원격사랑, 에드문드 파스 솔단

 
     
     
  예전에, 이 모든 것 이전에, 중국 여인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을지도 모르는 남자는 회오리바람 앞에 멈추어 섰을 것이다.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일종의 현기증)(끝도 없이 추락하듯이)(끊기듯이 이어지는 고통). 그리고 곧 어린 시절 이런 종류의 회오리바람-작지만 급작스럽게 수직으로 불어닥치는-은 악마가 나타나서 무언가를 훔쳐 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한눈에 모든 것이 들어왔다. 악마, 악마의 몸, 한 여인의 허리를 감아올리는 악마의 두 팔, 왈츠.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 지상으로부터 떠오른 발. - 마지막 기호, 크리스티나 리베르 가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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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쪽으로 가라 김소진 문학전집 5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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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분명해지는 일이 내심 거림칙하였으나 그 수위를 조절할 사이도 없이 그렇게 정말 나는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유연한 외피를 갖고 있어야만 '삶'이던 '앎'이던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어찌 이렇게 딱딱해져 버렸을까. 위기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위기에 몰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생경한 구호만큼 극적으로 선을 그었던 몇 몇의 작가들을 다시 읽기로 했고 그 처음을'김소진'과 함께 하기로 했다. 그가 나의 첫 손님이 된 이유는 무담시 쳐놓은 멍청한 경계에 그가 가장 가깝게 걸쳐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소설[바람 부는 쪽으로 가라]는 짧은 소설들의 모음집이다. 인물과 배경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작가의 일부를 짐작할 수 있건데 그는 [좋은 사람]이었을 것 같다.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그를 평가하는 이유는 왠지 그는 '앎'과 '삶'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 살고 그리 글 쓰는 일이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수없이 지켜 봤기에 작가의 의지와 노력이 고왔다.  

사는 일이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만나는 일이자 고통을 견디는 일이 되어 버린, 그래서 버티기를 잘 하기 위해 세속적인 위로들과 쉽게 결탁해 버린 오늘, 작가의 위로는 세속적인 위로들에 맞서기에는 힘이 없어 보이고, 세속적인 위로의 '대안'이 될 수도 없을 것 같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작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아마 '좋은 사람'이 옮기고 증폭시킬 수 있는 '두근두근 에너지'가 아닐까 싶다.  

바람 부는 쪽이 어디인지 알아 버린 그래서 미련하게 덧문을 닫은 내게 잠시나마 어렴풋이 덧문이 없던 시절을 사유하게 만든 작가의 책 한 권. 고마운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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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10-1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엔 KSO? ㅋㅋㅋ

굿바이 2009-10-1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은 KYS라오. ㅋㅋㅋ

웽스북스 2009-10-14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

굿바이 2009-10-15 21:46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

민정 2009-10-14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아 김소진.
고등학교때 정말 열심히 좋아했던 작가였는데 말이죠.
자취집을 몇번 이사하면서 이리저리 잃어버린 책들중에 이 작가의 책이 여러권인듯.
정신을 차려보니 한권도 안남아있는걸요.
요즘들어 김소진의 글이 막 그리워라 하고 있었는데
언니는 내마음을 어찌 아셨을까~

굿바이 2009-10-15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나, 우리 민정이가 열심히 좋아했던 작가였구나.
정신을 차려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더라. 요즘 절감하고 있단다.
아~ 정신줄 놓고 싶은 이 참담함이여!
 
객수산록
김원우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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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 단정한 문체, 그 무류(無謬)의 사실증언벽, 그 해박한 박람강기의 적절한 현시성, 더불어 그 항목별 관지(關知)의 연쇄를 마냥 즐길 수 있음은 앎의 광대무변에 스스로를 유폐시켜 몰아의 경지를 누림에 다름아니었다.」-객수산록 p.281  

그래서였을까, 작가의 다섯 편의 중편은 모두 시대정신(한국의 근대화와 물질만능주의를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면)이라는 씨줄과 현실세계의 반푼이들을 날줄 삼아 아주 촘촘히 짜낸 결이 고운 한 편의 직물같았다. 또한 그 직물 위에 그려넣은 무늬들이 참담할 정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이라서, 직공의 손재주에 탄복하다가 이내 목덜미 어디쯤이 서늘해지고 목구멍이 칼칼해졌다. 무엇엔가 떠밀려 살아온 자들의 헛헛한 심정과 핑계있는 억지는 말로해서 알아지는 일도 아니고 말로 한다고 변할 일도 아니지만, 급기야 점입가경의 기괴함으로 구질구질해진 시절과 타협할 의지가 없는 작가는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유유자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쓸 수 밖에.

다섯 편의 중편에는 비슷비슷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대학교수, 작가, 바람난 아내 혹은 남편들...어찌보면 등장인물들의 폭이 좁다 싶지만 사람 마음 쓰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임을, 프렉탈 현상이 브로컬리에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도 수긍이 간다. 물론 등장인물을 채색하는 그의 미감이, 뭐랄까 권위적인 구석이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쇠를 잡는 듯해 마뜩짢은 것도 사실이다. 사실 글쓴이의 미감이 작품으로의 몰입을 종종 방해했지만, 그저 불편하다고 할 수 밖에 전체적인 완결성을 보면 책잡을 일은 아닌 듯 싶다. 문장의 강단으로 보나 담백한 감성으로 보나 더러 눈에 띄는 괴팍함으로보나, 이맛도 저맛도 아닌 실험적인 음식 앞에서 난감했던 기억이 있던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읽는 이를 조금 괴롭히는 권위적인 미감이야 눈 감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뿔사! 이렇게 쓰고 보니 어찌 김원우와 김훈은 닮았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현실이라는 외피를 도외시한 주체는 거의 퇴행성 정신장애일 뿐이며, 그렇다고 해서 편의주의적 현실 추수주의자는 주체성의 일정한 미달이라는 결격 사유만으로도 일찌감치 스스로 옷을 벗는 게 타당하다」-모기발순 p.412 

돌아보면 지천에 널린 군상이다. 어느 쪽이거나 때로는 두 쪽 모두 다 이거나. 물론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지 않냐고 따지고도 싶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다. 매우 다양한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쳐도 세상에 '모 아니면 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덜어 낼 것들을 좀 덜어내고 정신을 차리면 어려울 일도 아니다. 작가도 아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거다. 풍토가 그렇다고 스스로를 위무하고 무신경해지다 보면 자발적으로 무능해짐과 동시에 통렬하게 후회할 일만 남게 된다는 것을. 

「무력감, 귀찮음, 상실감, 허전함, 박탈감, 게으름, 낭패감, 맥빠짐, 실족감, 엉거주춤, 구속감, 옥죄임, 의무감, 안달복달, 언어가 부족한게 아니라 심기가 언제라도 만화경처럼 희번덕거린다 」-무병신음기 p.124

어찌 알았는지 요즘의 내 심중을 가을햇살 아래 무말랭이 말리듯 쫙 펼쳐 놓았다. 수분이 빠지고 꼬들꼬들해지니 볼품은 없지만 윤곽은 확실해진다. 글쓴이의 냉소와 통찰력이 여간 거슬린다. 몹쓸! 그렇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그것이 글쓴이의 점잖은 비명임을. 

어느 덧 신체적 무병에도 신음소리가 절로 나는, 가을이다. 김원우의 소설은 가을에 읽어야 제맛이라고 다소 맹문이같은 사족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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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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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10페이지 4번째 줄. [당신은 그렇소?]라는 물음에, 그 물음이 무엇이었는지와 무관하게, 나는 [그렇소]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라고 말하는 주인공을 흉내낸 것은 아니다. 어느덧 나는 불편해진 모든 것들에 대해 단답형으로 그것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한껏 풍기며 대꾸해 주시는 시니컬한 귀차니즘 환자가 된 셈이다. 그러니 누가 뭘 물어본들 적어도 대답 만큼은 주인공 스트릭랜드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툭~뱉어놓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좀 더 서사적으로 표현하자면 살기 위해 나의 달을 수장시킨 셈이다. 

그러니 달을 잃은 나는, 작가가 보여주려 한 고갱의 삶 혹은 유사 고갱의 모습에 이제는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분명 20년 전쯤에는 그 뜨거움에 덩달아 뜨거워졌고 흡사 스트로브와 같은 자세로 스트릭랜드의 삶에 자발적 헌신 내지는 뜨거운 찬사를 보냈고 더 나아가 특정한 행위들을 비난하기 보다 무엇이 그를 말 달리게 하는지 그 내면을 들여다 보고자 했었는데 그 꺼지지 않는 무모한 열정과 인내 그리고 호기심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제는 그저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안녕~]을 고하니 참으로 세월이 약인지 독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의 주인공이 천재 화가였는지 아니면 그저 난해하거나 괴이한 화가였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철저하게 이기적일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고맙다. 물론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 모든 예술적 위업이 달성되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가 누구에게 빚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스트릭랜드의 천진한 이기심을 탓하는 것은 [뭐 묻은 뭐가 뭐 묻은 뭐에게]흘리는 눈흘김이 아니겠는가. 

나의 달은 어느 강 속에 잠겼지만 그 빛을 다 잃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순도 높은 예술적 욕망에 사로잡힌 그들 앞에서 여전히 조금은 서성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단언컨데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첫째는 귀찮고 둘째는 다시 강 속에 빠진 달을 잡으려 허둥대다 어느 오라비처럼 유명을 달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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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니마미 2009-07-30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드디어 마감날 하루 앞두고 원고 접수 해주셨습니다
짝짝짝...
바쁜 일 겹칠 때 이런 거 겹치면 애초 가졌던 기대와 즐거움도 사라지게 마련이거늘
그래도 올려주셨네요. 책읽는 부족들, 글이면 글, 매너면 매너 부족함을 찾을 수가 없어요

대개의 공통된 의견이 스트릭랜드의 달이 예전과 달리 느껴진다는 거였는데..
저는 어느 분 독후감의 댓글에도 썼지만
오히려 스트릭랜드처럼 살 수 없었고
그렇게 모든 걸 버릴 만큼 내부에서 올라오는 정열이 없는 자신을 들여다 보니까
이제야말로 스트릭랜드에게 눈흘기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돌아봐도 볼 거 없고
앞으로 기대할 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어, 어쩌면 나도 이렇게 살고 싶었던 때가 있었지
하는 생각이 철없던 때의 낭만으로 여겨지는 건 아닐까요?
살아보니 알겠거든요
이 몸의 달은 그리 높이 뜨지도 밝지도 않고
늘 구름낀 하늘 저 편에서 빛 한 번 제대로 못 내는 것 같아서요.

부족들 중 맨 처음의 독후감도 박수 받지만
마지막 독후감이기에 다시 한 번 박수 크게 쳐 드립니다.

박슴도치 2009-07-30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안녕하세요. 이제서야 안부를 남기네요.
실은 모임 참여하고 RSS 리더에 부족민들 블로그 저장하면서 두세번씩은 들렸는데
이제서야 안부를 남기니 궁색한 손끝이 부끄럽습니다.

세상의 맛을 조금 본 사람들에게는 스트릭랜드가 곱게 보이지 않는가봅니다.
저는 광기로 치부해버린 그 예술혼(?)이 십년 이십년이 흘른 뒤에는 어떻게 재평가 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제 여름다운 날씨가 찾아오니 변덕이 다시 발동하여 선선했던 어제가 그립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잠시 쉬며 더운 날씨에 지친 심신에게 휴식이라는 포상은 어떠신지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굿바이 2009-07-31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니마미님

꼴찌하고 박수 받기는 초등학교 달리기 시합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래도 좋다고 웃고 있습니다.

책을 덮고도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남는 것은 저 역시 저를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솔직하지도 못하니 불편하고 또 불편합니다.

굿바이 2009-07-3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슴도치님

그렇죠. 곱게 보이지는 않죠. 그런데도 여전히 뭔가 부럽기는 하단 말입니다.
여전히 쓸데없고 근거없는 피해의식들이 제게 남아 있나 봅니다.

워낙 추운거 싫어 하는 사람인데도 오늘은 좀 덥다 싶습니다.
저녁에 맥주나 마셔볼까 합니다^^

민정 2009-07-31 23:0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언니 나두 맥주 한잔~

웽스북스 2009-08-01 10:20   좋아요 0 | URL
어제 그 행운은 제가 잡았지롱요 ㅋㅋ

민정 2009-07-3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에게는 있었는지 있었을는지도 모르는 미미한 달의 존재이므로 일단 모른척 해두고,
언니가 묻어버린, 아니면 강에 빠트린 그 달이 어쩐지 새삼스럽게 아쉬워져서 입맛만 쩝쩝.

그렇지만 또다시 생각하면 지상세계에 언니가 있어서 만나게 된 것이니
그또한 나에게는 좋은 일... ㅎㅎㅎ

나는 이래도 저래도 좋으니 그냥 맥주나 한 잔 얻어먹고 즐기렵니다~

심샛별 2009-08-0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올라오는 독후감을 읽을 때마다 책을 새로 꺼내서 읽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요?
굿바이님의 달을 보고 갑니다.

굿바이 2009-08-0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정! 한국에 오면 맥주는 "짝"으로 사줄 수 있으니 걱정마시오^^
물론 그때까지 내가 강변에 살면 안주로 한강의 야경도 제공할 수 있소.
그러니 오시오^^
참으로 보고싶소~


굿바이 2009-08-0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샛별님!
이번 민음사 책 읽기가 저도 신납니다. 아마 다음 책도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재미들이 쏠쏠할 것 같고, 다른 분들의 리뷰도 흥미로우리라 짐작됩니다.


동우 2009-08-05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의 저 진솔한 고백.
옛'나'의 달에 대한 달뜸의 헛됨에 고개를 주억거리시면서 또한 '달'에의 열정이 아쉬운..
하하, 굿바이님.
그러합니다. 이 시절 뉘라 달 잡으려 강에 뛰어 들겠어요.
그러나 굿바이님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굿바이 2009-08-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왠지 동우님은 강에 뛰어 들었던 분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서울 하늘 죽입니다!

후니마미 2009-09-27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9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명절 리듬을 타야 하니
장에 가서 이것 저것 먹을 거리도 사야 하고
선물도 사야 하는 저희로서는 맘부터 서둘러지는 시간이 되었네요

그런데도 추장인고로, 9월 마감에 앞서 독후감 올리시라
피켓 들고 나타났습니다
굿바이님께서는 이번 9월에 어떠셨는지?
책 읽을 시간이 하나도 없어서 넙치는 읽다가 말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이번 달의 주제는 넙치를 잡아먹자 쪽이니까
그리고 그 잡아 먹는 방법이 뼈까지 오드득 잘 씹어서 먹자가 아니고
요걸 회를 쳐봐 구워봐 는 칼 든 자의 오만과
뭐 이렇게 생긴 것을 고기라고 이름을 달았냐 라는 등
독자로서의 자만심과 독자로서의 권력을 마음껏 부려보는 쪽에서
잡아 먹자 이니까
맛없어서 못 먹었다 이런 단 한 줄의 독후감도 촌철살인의 문장이 되는 바

** 알아서 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