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71 | 7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당신에게 좋은일이 나에게도 좋은일입니다 -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밝혀주는 15가지 이야기
안철수, 최재천, 이윤기, 강만길 외 12인 지음 / 고즈윈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밝혀주는 15가지 이야기'라는 표지 문구를 달고 있는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입니다』는 국내의 저명한 15명의 지식인들의 상생과 공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이다. 생명과학자, 숲해설가, 기업가, 환경론자, 문명 탐험가, 역사가, 건축가, 소설가 등에 이르기까지 15명의 집필자들은 다양한 방면과 각도에서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는 지식인들 각자의 가치관과 문체로 설파하는 다양성 존중의 외침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차 있는 한국인의 습속에 물들어 있는 내 자신을 냉철하게 반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꽤 반가운 만남이었다. 

  단일민족국가 대한민국은 오랜 기간동안 동일한 민족과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것에 익숙지 않은 습속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철저한 입시 위주의 공교육은 획일적이고 주입적인 교육을 양산했다. 그렇기 때문에 '왜(Why)'라고 질문하고 의심하는 학습력은 길러지지 않고, 그에 따른 창의력이나 토론력은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을 뽐내고 있는 형편이다. 더나아가 이러한 배경은 '다름(diffrene)'과 '틀림(wrong)'의 정의에 대한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내 주장과 다른 남의 주장은 수용하기 힘든 사회 구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회 의사 결정의 현주소는 물론, 사회적 담론에 대한 일반인의 토론 수준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비관용 문화를 그대로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한국인의 속도 문화는 그 어떤 나라보다 경쟁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960년부터 40년간 경제의 구매력 관점으로 14배 성장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속도는 영국의 5배, 미국의 4배에 달할 정도로 급속도였다. 서구 선진국들이 백 여 년이 넘게 걸린 일을 40년 만에 해치우느라 선전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적지 않았는데, 극심한 이기주의와 경쟁주의의 만연이 그것이다. 불과 40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상승하기까지의 놀라운 속도를 보여주었던 가속 엔진은 어느덧 힘을 다했는지 GDP 2만 불의 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KTX의 속도로 달렸던 속도계는 왜 2만 불 앞에서 걷기 수준으로 전락한 것일까? 

  길을 지나가는 이에게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국가는 어디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열에 아홉의 답변은 동일할 것이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존재가 우리들 머리 속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국한지 230년에 불과한 초짜 나라 미국이 그 짧은 기간동안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집약적인 의견은 바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에 기인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서로 다른 사상, 체제, 이념, 신앙, 출생지, 성징, 피부색 등에 대해 배타하지 않고 그것을 존중하며 공존하고 상생하는 문화, 그것이 유일무이한 초강대국 미국이 존재하는 추동력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2,000여 년 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초강대국이었던 로마도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유니버셜 세계였다. 속주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또 그 주민들을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 인정해 주는 체제는 로마 제국이 주도하는 평화 체제,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건설하는 동기가 되었다. 사실 이러한 관찰은 한국사에서도 여실히 목도된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강력한 힘을 가졌던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였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였고, 그 다양성의 존중과 상생이 초강대국 고구려를 지탱한 힘이 되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시선의 렌즈를 대한민국으로 돌려보자. 여와 야가 끊임없이 반목하며, 국회는 대통령을 존중치 않고, 정부와 언론이 전쟁을 일쌈으며, 노와 사가 계속해서 대립하는 대한민국의 관용 문화의 수준을 재설계하지 않고서는 GDP 4만불은커녕 3만불조차도 머나먼 당신이 되리라 단언한다. 이제 국가적 에너지가 한 개인의 역량이나 개인과 개인의 경쟁주의를 통해 효율이 발휘되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리더십보다는 멤버십이, 독점보다는 나눔이, 집중보다는 네트워킹이 중시되는 '관계'의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21C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임을 갈파하고자 한다. 

  책의 제목을 생각한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정말 멋진 문장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와 같은 속담이 없어질 때, 대한민국의 미래는 한층 높은 수준으로 도약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미래와 희망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제목의 의미를 곱씹는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콩 세알의 삶 

생명농사 지으시는 농부 김영원 님은
콩을 심을 때
한 알은 하늘의 새를 위해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들을 위해
나머지 한 알을 사람이 먹기 위해
심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만주 들판에는 삼전(三田)이 전해오는데
일제 때 쫓겨 들어간 우리 조상님들이
눈보다 속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논을 3등분해
하나는 독립운동 하는 데 바치는 군전(軍田)으로
또 하나는 아이들 학교 세우는 데 학전(學田)으로
나머지 하나는 굶주림을 이겨내는 생전(生田)으로
단호히 살아내신 터전이 바로 삼전인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오늘
내가 번 돈
나의 시간
나의 관심
나의 능력
어디에 나눠 쓰며 살고 있는가요

지금 나는 콩 세알의 삶인가요
삼전의 뜨거움, 삼전의 푸르림,
셋 나눔의 희망을 살고 있는가요. 

<p. 100, 박노해 《나눔의 희망》>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제들의 중국사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 돌베개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황제(Imperor)'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두가지 면이 공존한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전자가 강하다는 것,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 신성한 것 등으로 정리된다면, 후자는 폭정, 잔인한 것, 백성들의 고통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재위하는 황제가 성군일 경우 백성들은 행복하고 국가는 태평성대를 누리지만, 폭군일 경우에는 온갖 피바람이 일어나면서 백성들의 찢어지는 고통이 발생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B.C. 200년 즈음에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이후 약 2,000년 동안 중국사는 황제의 역사였다. 하나의 왕조가 탄생될 때마다 상상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이며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속에서 대략 200여명의 황제들이 2,0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중화민족사 연구회 회장인 사식(史式)은 『황제들의 중국사』를 통해 진시황제 이래 2,000년의 중국역사를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의 존재를 통해 관통하고 있다.  

  저자 사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통념과는 배치된 의견을 제시한다. 역사는 오로지 사실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성공과 실패로만 역사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결과보다는 동기 차원에서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응당 맞는 얘기다. 우리가 학습하는 과거의 역사 자체가 승자의 역사일 수 밖에 없음은 자명하기에 과정론적으로 역사와 인물을 천착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은 심히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지나친 과정 중심의 역사 해석은 역사의 긴 줄기라는 측면에서 역사의 인과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어떤 과정으로 인하여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는 역사의 인과성은 역사 자체를 넓고 깊게 보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역사적 통념을 전복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은 그 논거가 지엽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강해서 읽는 내내 적잖은 부담이 발산된다.  

  예컨데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논하지 말라는 강렬한 문장을 시작으로 유방과 항우를 비교한 저자의 주장과 논거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항우는 진실된 사람이요, 훌륭한 장군이요, 양심이 있는 영웅이다. 하지만 유방은 출생이 미비한 천민이요, 전쟁을 모르는 자요, 은혜를 모르는 소인배다. 그런데 어떻게 유방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저자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용인술'에 기인한다. 저자는 항우의 단점은 사람을 잘 쓰지 못한 것이었고, 유방의 장점은 사람을 잘 쓴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유방의 용인술은 항우와 비교하여 유방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비꼬고 있다. 하지만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을 얻고 다루는 것이야말로 인간만사에 있어 성공과 실패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인식할 때, 유방의 승리는 당연한 인과성의 순리라 할 수 있다. 항우라는 개인이 가진 장점과 그것에 대한 개인적 흠모를 표현하는 것은 뭐라 할 수 없으나, 그 주관적 잣대를 논거로 승자와 패자의 역사적 인과성을 무시하며 일반적 통념을 전복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는 진시황제가 평생 남에게 통제당하며 살았던 황제라고 주장하며 이런저런 논거를 즐비하게 늘어 놓는다. 또한 뛰어난 전략가였던 조조에 대한 주관적 비방도 강렬하게 내뿜는다. 더욱이 '정관의 치'와 '개원의 치'로 대변되는 중국사 최고의 태평성대를 일군 당태종 이세민과 당현종 이융기의 존재감마저 건드리고 있다. 새로운 접근방식과 해석은 좋은 것이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객관성을 잃을 때에는 접하는 이에게 설득력을 얻기 힘든 법이다.  

  황제의 자질을 평가하는 저자의 일관된 잣대는 <덕성>과 <도덕성>으로 함축된다. 황제는 정직하고, 양심이 있어야 하며, 인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진시황부터 옹정제까지의 15명의 중국황제들을 다루면서 오직 덕과 도덕의 기준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물론 덕성과 도덕성을 갖춘 군주가 좋은 군주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의 어느 나라의 역사보다 개국과 망국이 많았고, 그에 따른 왕조 교체가 빈번할 수 밖에 없었던 중국 황제사 2,000년의 특질을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왕조 교체의 반복된 혼란상, 그리고 진시황 이래 계속되어진 절대적인 권력만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봉건주의 사회라는 점을 곱씹는다면 덕과 도덕의 잣대로만 한 영웅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저자가 언급한 <도덕성>의 잣대를 작금의 시대로 들이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위정자들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도덕성은 매우 중요한 정치인의 자격요건이 된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직하지 못한 자가 어찌 국민과의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겠는가? 실수한 대통령은 용서할 수 있어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미국 유권자들의 정치 철학은 지구상에서 가장 민주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한 대통령을 갖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의 존재감을 정갈하게 대변하고 있다. 

  저자는 과거 중국의 군주제도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듯하다. 서양과는 달리 별다른 견제장치가 없었던 중국식 황제 제도는 결과적으로 전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강력하게 피력한다. 사실 그렇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속성이 있기에 세계사에서 가장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가졌던 중국 황제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고통과 불행의 2,000년 역사를 만든 동기가 되었다. 극소수의 성군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혼군이나 폭군이었던 중국 역사 2,000년은 인간이 힘과 권력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교훈이 된다. 

  저자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지나치게 주관적인 영웅 해석이 되어버린 책이지만,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를 통해 2,000년의 중국 역사를 관통한 점, 그리고 몇몇 중국 황제들에 대해 인지하고 있던 일반적 통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 점에 대한 신선한 시도와 용기는 반갑기만 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특질, 일인 절대 권력 체제의 허구, 중국식 황제 제도에 대한 모순 등은 21세기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에게 여러가지 각도에서 다양한 사유를 하게 한 주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의 중국식 절대 봉건사회를 이름만 들어도 번쩍하는 몇몇 황제들의 존재감을 통해 관통하고 싶다면 사식의 『황제들의 중국사』 는 적잖은 흥미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부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의 조그만 나라 시에라리온은 내게 낯설지 않다. 몇 년 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한비야 씨의 책을 통하여 그 나라가 겪은 참상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구 약 5백만 명의 작은 나라이자, 평균 수명이 25~35세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나라이며, 인구 대비 신체 장애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 그리고 인구 대비 난민 수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정보가 머리속 기억 저장소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시에라리온이 그런 프로파일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동기에 있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10년의 내전에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함과 인권 말살이 이 작디 작은 국가에서 십 여 년이 넘도록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시작된 그때...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책 표지>
 

  열두 살의 나이. 과연 열두 살의 내 초상은 어떠했을까? 영원히 정지해 있는 내 삶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 본다. 열두 살이면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다. 동네 개천에서 가재와 개구리를 잡고, 공을 차고 놀며, 팽이 돌리기와 딱치치기에 몰두했던 열두 살의 초상이 떠오른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이스마엘 베아는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인간이라는 동일한 종족으로 동시대에 태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점을 외면하듯 나의 열두 살과 그의 열두 살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상대적인 차이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절대적 기준의 차이이자,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 당한 어린 소년의 처절한 아픔이요, 상처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군과 반군의 수 년에 걸친 전쟁을 통하여 시에라리온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지옥이 되었다. 정치적 의사와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의 머리를 베고, 마을 주민들과 마을을 전부 불태우고, 아들들에게 자기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하고, 시끄럽게 운다고 갓난아기들을 반 토막을 내고,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갈라 아기를 끄집어내 죽이는 등 인간으로서, 아니 짐승이라도 할 수 없을 만한 짓들이 일어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어른들의 엽기적이고 광기 어린 행태속에서 어린 아이들은 두려움의 데드 수치를 넘어서는 비정상적인 황폐한 영혼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소년병>이라는 것이 조직되어 아이들끼리 죽이고 죽이는 살육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시에라리온은 지옥 중에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처참하다. 

  이웃 마을에서 열리는 장기자랑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선 이스마엘과 그 친구들의 기나긴 여정은 뜻하지 않은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피폐함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총과 칼로 무장한 소년병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부모와 이웃을 죽인 원수들 밖에 없다. 가는 곳마다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두르는 어린 아이들의 생생한 장면을 읽어 내려가면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일렁거리며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라면 시에라리온에 태어난 것. 고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이길 포기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몸 속에서 들끓는 전율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지극히 어린 나이에 못 볼 것을 보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야만 했던 이스마엘은 자신의 에세이를 통하여 아픔과 상처, 회복과 희망의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스마엘은 AK-47을 들고 사람 죽이는 일이 물 마시는 일보다 쉬운 것이라 외치며 환호한다. 더 나아가 지치고 상처받은 심신을 위로받고자 코카인과 마리화나 등의 마약을 친구로 벗삼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지옥같은 곳에서 구원받고, 치유받으며,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이스마엘을 아껴주고 보듬어준 간호사 에스더를 통하여 이스마엘은 <사랑>이라는 인류 최대의 가치를 경험하게 되고, 점점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스마엘에 대해 에스더가 보여준 관심과 사랑은 이스마엘이 안정감을 누리고 회복할 수 있는 추동이 되면서 따뜻하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잠시 내가 살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으로 생각의 시선을 돌린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단 3년 사이에 400만 명이 목숨을 잃을 만큼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잔인한 전쟁을 겪은 나라. 이 전쟁으로 제조업 시설의 절반과 철도의 75% 이상이 파괴된 폐허의 나라. 1961년 연간 1인당 소득이 82달러로, 당시 가나의 1인당 소득인 179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 하지만 그 이후 40여 년의 시간차를 넘어 GDP 2만불,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자랑스런 대한민국. 그 어떤 칼이나 총으로 위협받지 않고 두 발 뻗고 잠 잘 수 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행복지수를 부여했던가? 열두 살의 어린 소년 이스마엘이 겪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말살을 목도하며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누리고 있는 내 자신을 동시에 목도한다. 그리고 새삼 감사를 사유(思惟)한다. 

  비단 시에라리온뿐만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곳은 적지 않다. 정치적인 이유로, 또는 가난과 기근으로, 또는 질병과 무지의 이유 등등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좁게는 우리 주변의 질병과 가난과 장애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외된 이웃들, 넓게는 시에라리온을 위시하여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소외민족들까지 제법 인간답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들을 돌아보고 보듬어야 할 의무가 있음은 자명하다.  

  <인권>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권은 그 어떤 사람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고결한 것이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라는 의무를 부여받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인간이 함께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평화를 이루고 지향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평화, 그리고 단지 우리 시대만이 아닌 영원한 평화를 말이다. 우리가 이 작은 행성에 공존하고 있는 이상, 같은 공기를 마시며 동일하게 2세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인간>들이란 사실을 직시하자. 그리고 바로 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생각하자. 이 권리는 절대 명제다.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인간도 이 명제의 카테고리 밖으로 벗어나서는 안된다. 이는 개인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가치이자, 동시에 신이 인류에게 질문하고 있는 명제이기도 하다. 더욱이 오직 인간만이 이런 아름다운 지구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과 특권을 선사받은 유일한 종족이기 때문에 이 절대 명제를 완성키 위한 생명수 또한 인간 자신에게 있다.
 

어릴 적에 할머니는 나에게 하늘이 자기를 쳐다보고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는 말을 걸어준다고 하셨다. "언제나 하늘에 모든 것에 대한 답과 설명이 있단다. 고통이든, 괴로움이든, 기쁨이든, 혼란이든, 뭐에 대해서든 말이다." 그날 밤 하늘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p. 244>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르토벨로의 마녀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스포일러 없음.
※ 다소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서평을 썼음. 그 시각의 농도는 심히 옅은 편이지만 읽는 이에게 알레르기 반응이 없기를 기도할 뿐.

 

신을 향한 인간의 천착은 끊임이 없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신에 대한 갈증의 농밀함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알고, 경험하며, 믿는 수많은 종교의 이면에는 신을 찾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이 담겨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종교성은 어쩌면 인류역사의 마지막까지 계속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신과 인간은 언제나 공존한다는 명제에 동의하게 된다. 이를 풀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전지전능한 신의 절대성은 시간의 구속을 초월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현재의 시간대에서 통합된다. 반면 철저하게 시간에 구속된 인간은 항상 현재로 존재하는 신과는 다른 시간의 성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즉, 신은 언제나 현재의 시간으로 존재하면서 과거의 인간을 만나고, 현재의 인간을 만나며, 미래의 인간을 만난다. 

  2년 만에 새로운 장편소설을 들고 돌아온 파울로 코엘료는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 신의 여성성을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모성의 근원과 그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고, 이 사회가 왜 신의 여성성을 속박해왔는지 묻고 싶었다, 라고 말하는 작가 코엘료의 고백에서 신을 향한 인간의 목마름, 그리고 신과 공존하고 있는 현재적 인간을 새삼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코엘료 자신의 의지가 철저하게 반영된 듯, 그의 신작 『포로토벨로의 마녀』는 우리가 흔히 인식해왔던 신의 남성성과 배치된 여성성으로서의 신을 조명하고 있다. 권위적이며 공의적이고 규범적이라는 기존의 신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제시하며, 자애롭고 보듬어주며 희생적인 신의 다른 면을 부각하면서 대조한다. 아테나라는 한 여인의 짧은 삶을 통해 그동안 감추는 것이 미덕이었던 여성성에 대한 강렬한 찬사를 발산하고 있다.  

  역사는 남성적 가치를 지향해왔다. 역사적으로 동서를 막론하고 지구상의 모든 종족과 국가는 여성에 인색했다. 여성의 존재감은 아예 없거나, 또는 있거나 말거나, 또는 보다 발전된 공동체에서 남성을 돕는 존재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여성의 존재감은 중세를 넘고, 19세기의 페미니즘 태생의 시기를 넘어, 작금의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남녀평등이 당연한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인식될 정도로 진보했다. 코엘료는 마치 지난 수 천 년 동안의 여성의 빈곤했던 존재감을 보상해줘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피력하듯, 인간 여성에 대한 찬가는 물론, 남성에게 독점된 잃어버린 신의 정체성의 반쪽까지 건드리고 있다.  

  포르토벨로의 마녀인 아테나의 삶은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진다. 춤을 추고 글을 쓰며 자신의 공백을 확인하면서 그것을 채워가는 그녀의 행동은 기묘하지만 다분히 철학적이다. 소설의 중반부 이후 마녀로서의 본격적인 아테나의 신성이 발휘된다. 아테나의 인성과 아야소피아라는 신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녀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며 제자를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기존 종교(기독교)의 전통과 규범에 얽매이지 말 것을 주장하며 극도의 이단성을 발산하는 아테나의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환호와 분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기존의 것,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것, 진리라 여겼던 것에 대한 아테나의 도전은 자신의 수제자 앤드리아에게 그 역할을 넘기며 죽음으로 마무리 되는 것으로 소설 안에서 일단락된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코엘료가 소설의 창작 목적으로 언급했던 '신의 여성성 탐구'라는 외연적 동기는 <사랑>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내포적 목적을 수식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이 갖는 가장 강력한 힘의 표준어인 <어머니>라는 단어는 <여성으로서의 신>과 동의어로 소설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어머니의 자비로움과 편안함이라는 모성적 사랑을 신의 성품에 반영하여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난 또다시 생각했다. 어쩌면 파울로 코엘료는 신의 여성성을 탐구한 것이 아닌, 사랑과 자비라는 있는 그대로의 신성 그 자체를 탐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남성과 여성, 암컷과 수컷의 개념은 그것을 창조하고 구분한 절대자에게는 구속할 수 없는 개념이다. 신의 신성, 즉 신적인 성품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로 구분되거나 특징 지을 수 없다는 얘기다. 방향이 바뀐 것이다. 거꾸로 신의 성품이 남성과 여성으로 존재하는 인간에 녹아든 것이며, 그것은 철저하게 일방통행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신의 의지며 주권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 그리고 신이 선(善)하다는 것까지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집어 넣은 당신의 작업에 겸허하게 되는 동시에 신성을 남성성이냐 여성성이냐 하는 등의 기준으로 들이대지 못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성은 차원을 논할 수 없는 절대적 상위개념이며, 남성과 여성은 신 안에 구속된 종속적 하위개념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된 방향성을 확인하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파울로 코엘료의 하나님 탐구와 사랑에 대한 천착은 매우 감미롭고, 충분히 아름다우며, 결코 가볍지 않다. 다시각적 인터뷰 형식과 극적 반전이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가슴 두근거림과 긴장감을 제공하며, 어렵지 않으면서 충분한 무게를 함의한 문장을 통해 신과 사랑을 탐구한 파울로 코엘료의 기술에 나는 심히 매료되었다. 쏟아지는 아포리즘의 홍수속에서 하나님과 사랑과 여성과 나 자신을 동시에 사유(思惟)할 수 있도록 한 코엘료의 언어 연금술을 상찬하며 별 다섯 개를 흔쾌히 던진다.
 

오늘날의 사회는 "모든 것은 설명 가능하다"는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는 우리가 세상에, 또 우리 자신에게 완벽하게 투명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그 속엔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어떤 공백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신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p. 398, 작가후기>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력서
나카무라 코우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 <이력서>라는 양식은 전혀 낯설지 않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준비하면서 대략 백여 통에 가까운 이력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본 프로파일은 물론이요, 학력과 경력과 자격 등의 내 자신의 현주소를 최대한 그럴듯하게 수없이 써내려갔던 당시 취업준비자의 마음가짐은 과히 대단한 열정과 비전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었음을 회고한다. 

  나카무라 코우의 '새로운 시작 3부작'의 첫 번째 시리즈 『이력서』는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력서의 통념과는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인 한자와 료는 취직을 하기 위한 통과의례절차에 불과한 이력서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며 기념하는 새로운 이력서를 창조한다. 누나의 친구를 만나는 것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심야에 체조를 하며 우연찮게 만난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료는 자신만의 이력서를 채워가고 있다. 

  인간은 꽤 오랜 시간을 산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80년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면 긴 시간이기도 하다. 80년이라는 거대한 인생의 항해 앞에 불과 하루라는 시간의 길이는 초라해 보일 따름이다. 나무가 모여 숲이 이뤄지듯이,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차지한다. 그렇기에 단지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일 분이라도, 그 시간은 매우 소중하며 낭비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대한 조악한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에 대한 존재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망각하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비록 작고, 짧고,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의 편린들로 소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겸허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행복하고 리드미컬해 질 것이다. 

  작은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 하나도 내가 이룬 <이력>임을 자각하며 나만의 이력서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력서』는 하루가 지나면 또 다른 이력이 발생하고 또 하루가 지나게 되면 새로운 이력이 발생하는, 그런 소소한 이력의 편린들이 우리네 인생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잔잔하게 얘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비록 리듬감이 없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진 않지만, 쉽고 편안하고 잔잔한 문체로 인생의 부분적 시간들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반갑진 않지만 나쁘진 않은 소설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71 | 7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