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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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은 모두 다른데 텍스트적 관점에서 크게 두 개로 나누면,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있고 산문―소설도 산문의 한 형태이지만 여기서는 수필(에세이) 정도의 소개념으로 산문을 칭함―을 잘 쓰는 작가가 있다. 시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제외하자. 산문가는 거의 소설을 쓰지 않지만 소설가는 가끔 산문을 쓴다. 그중 소설과 산문 모두 잘 쓰는 부류가 있다. 하루키나 김훈과 같은 작가는 소설과 산문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정작 소설보다 산문을 더 잘 쓰는 작가도 있다. 김연수를 꼽을 수 있겠다. 반면 소설가일 수밖에 없는 작가도 있다. 오직 소설가일 때 빛나는 작가 말이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소설가 공지영이다.

 

그렇다. 공지영은 천상 소설가다. 나는 그녀의 모든 소설에 감동했고 그녀의 모든 산문에 무감했다. 소설은 훌륭했고 산문은 별로였다. 그녀의 소설은 한결같이 읽기 쉽고 대중적이다. 쓸데없이 무겁지 않고 거들먹거리지 않는 솔직함으로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지만 어두운 곳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약자들의 처절한 삶과 힘(권력) 있는 자들의 고약한 위선에 대해 추적하고 고발했다. 문학에 대해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한 소설가 조정래의 말이 진실이라면 공지영은 문학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증명해가고 있는 작가이다. 그래서 나는 공지영을 좋아한다.

 

공지영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평생 먹을 욕을 최근 몇 년 동안 다 먹고 있는 느낌이다. 조국 사태 후 그녀가 쏟아낸 진영 논리식 목소리가 시발점이 된 것 같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투표 잘합시다'라는 글을 게시하여 한 시민단체로부터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그녀의 삶을 저리도 요란하게 만들었을까 우려하지만 작가는 우선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그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은 어렵지 않게 추스를 수 있었다.

 

예술의 모든 장르가 그러하듯이 고통과 허무를 통해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걸까. 공지영의 신작 소설 『먼 바다』는 정말이지 끝내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인 '첫사랑'을 그린다. 발군의 감성적 묘사와 유려한 문체는 이 소설을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와는 다르게 읽히게 하는 동력이다. 소설은 현재의 미국과 40년 전의 한국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두 주인공의 기억을 소환하고 조합한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과거의 진실이 들추어지며 긴장감이 누적되는 흐름은 땀이 날 정도다. 결국 두 인물의 희미하고 불분명한 기억은 소설적 절정을 통과하며 명징해진다. 결국 소설의 끝에 도달했을 때 긴장은 종결되고 독자는 농밀한 감동을 선사받는다.

 

미국에서 의자 사업을 하는 '그' 요셉과 안식년으로 미국 여행을 온 독어독문학과 교수 '그녀' 미호는 첫사랑의 기억을 추적해가는 두 주인공이다. 작가는 3인칭 시점으로 둘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적으로 추적한다. 4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을 연결해 준 매개는 '페이스북'이라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다. 40년 전 박정희와 전두환을 비판하고, 광장에 나가 민주주의를 외치고,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경멸했던 '그'가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의자 사업가가 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괴리를 작가는 유심히 포착한다. 다만 포착할 뿐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것과 애써 싸우지 않는다. 하나의 소설적 배경으로 지긋이 물러나 있을 뿐이다. 이제 작가도 운동권 담론에 매몰된 과거 순진한 시절의 공지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시종 두 인물의 기억을 추적한다. 둘의 기억은 조각나 있다. '그'는 '그녀'가 가장 궁금해했던 것을 잃어버렸고, '그녀'는 '그'가 가장 강렬해했던 것을 잃어버렸다. 둘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잃어버린 기억의 시간이었다. 이는 소설의 제목과 웅숭깊게 연결된다. 소설은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난다. 소설의 앞과 뒤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먼 바다'는 두 인물이 함께 공유한 공간적 배경이자 잃어버렸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었던 추억을 회복한 초월적 상징이다. 그렇기에 바다는 멀어야 했다. '먼 바다'여야만 했다. 그들이 다시 만나 진실을 확인한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그러한 것처럼, 멀고 길어야 했다.

 

결국 이 소설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기억은 절대 우주의 시간을 전복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시간의 일차월성과 무관하게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영장으로서의 인간적 생명력은 그 절반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잊힌 것은 잊힌 대로 의미가 있고 잊힌 것이 다시 복기될 때는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다. 두 주인공이 뉴욕 맨해튼의 9·11 메모리얼 파크에서 보게 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버질이라는 사람의 다음 시구절은 이러한 내 사유를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재청한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한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처음이라는 것과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에 있다. 처음이라는 건 '사실'의 세계이고 기억된다는 건 '이상(理想)'의 영역이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다는 사실은 한 인간으로서 삶의 종국에 이를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이상이다. 그렇기에 첫사랑을 '이루어지지 않은 아쉬운 기억' 정도로 갈음하는 건 적절치 않은 정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꿈이 있고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이상이 있기에, 그리고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와 현실을 더욱 냉정히 성찰할 수 있기에 말이다. 즉 첫사랑은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비된 나를 천착하는 아름다운 소환이요, 이후 사랑의 가장 순수한 시금석이 되는 경이로운 추억의 숙성이다. 이러한 첫사랑의 생명력을 아름답게 탐색하게 한 것만으로도 소설 『먼 바다』는 훌륭하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추신'으로 붙인 문장이 자못 이색적이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슬프지만 이 소설은 당연히 허구이다"라는 추신을 남겼다. 소설의 정의가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라는 점을 주지한다면 소설의 생명은 당연히 '허구(fiction)'에 있다. 작가도 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불필요하게 저런 끝맺음을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난 잠시 생각했다. 혹 지난 몇 년 간 작가 자신이 진실과 관련하여 지난한 싸움을 했다고 반추하며 스스로 지쳐있어 그런 건 아닐까. 즉 극한의 자존적 외로움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감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작가에게 조언하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독자는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몽매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추가로 작가에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제언하겠다. 소설로 말하는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작가가 작품 바깥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할 때마다 문학적 생명력은 소멸된다.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동시에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가가 광장에 나가는 시대는 종말했다. 87년 체제는 끝났다. 이제 대한민국은 절대로 과거 독재 정권 때로 돌아가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진영 구도가 남았을 뿐이다. 여기에 선악을 대입하고 '옳고 그름'을 외치는 순간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는 점증되고 서로 간 신뢰는 결핍된다. 그 선봉에 소설가 공지영의 이름이 없기를 바란다. 부디.

 

서평을 정리하자. 작품 소개보다 작가를 향한 잔소리가 많은 조잡한 글이 됐다. 정말 잘 쓴 훌륭한 소설인데 그만큼 객관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솔직한 내 심정을 보태느라 글이 장황해졌다. 정리하자면 신작 『먼 바다』는 정말 잘 쓴 소설이다. 그 자리에서 한달음에 완독했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첫사랑은 내용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숭고하다는 것을 소설가 공지영은 이 한 권의 소설로 아름답게 들려준다. 최근 읽은 한국소설 중 최고다. 오래간만에 읽은 수작이다. 읽지 않은 사람은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기 바란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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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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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심윤경이다. 한국소설도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가는 많지 않다. 나에게 그 최전선은 박민규와 김애란이다. 그다음으로 김별아와 권지예가 있다. 그리고 심윤경이 있다. 나는 10년 전 출간된 연작소설 『서라벌 사람들』을 통해 그녀가 한국 소설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문학적 진화를 이뤄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후 소급해서 읽은 장편소설 『달의 제단』과 『이현의 연애』를 통해 단 번에 심윤경의 포로가 되었다.

 

소설가 심윤경이 일곱 번째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신간 『설이』는 성장소설이다. 그의 처녀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당시 못다 쓴 성장소설의 보완 혹은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일정 부분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소설은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 '설이'의 성장을 테마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통해 발견되는 한국 사회의 들끓는 교육열과 경쟁의식, 그것이 발산해내는 잘못된 가족의 모습과 비인간성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관통한다. 마치 소설판 '스카이 캐슬'이라 할 정도로 신랄하다. '좋은 대학'에 대한 전 국가적·전 가족적 로망에 함몰된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을 소설가 심윤경은 초등학생의 순수한 눈을 통해 가감 없이 고발한다.

 

소설은 함박눈이 내리는 새해 아침 보육원의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설이가 열세 살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설이를 구조한 보육원 원장은 설이가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훌륭한 교육뿐이라 믿고 우리나라 최고 부유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초등학교로 전학시킨다. 설이는 세 번의 입양과 파양을 당하고 함묵증(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 내면의 병)을 갖고 있지만 자존감 만큼은 허물어지지 않은 ‘되바라진’ 아이로 성장한다. 그 바탕에는 보육원 ‘이모’의 조건 없는 사랑이 있다. 설이가 흠잡을 데 없는 가정처럼 생각했던 시현이네 집에 들어가 살아보고 나서 얻은 전회와 같은 후회와 깨달음은 흥미롭다.

 

소설의 각 인물은 작가가 말하려는 각각의 캐릭터성을 잘 표상한다. 특히 설이의 이모는 친부모나 친이모가 아니면서도 계산 없는 따뜻한 가족애를 부어주는 진정한 사랑의 정수를 상징한다. 비록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서 대단한 선물과 지원을 해줄 형편은 못 되지만 소소하고 일상적인 테두리 안에서 설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그녀의 사랑이야말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한다. 설이가 그토록 흠모하고 부러워했던 시현네 집에서의 가족에 관한 경험은 이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대비되면서 부모의 역할과 가족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웅숭깊게 질문하게 한다.

 

소설에서 시현의 아빠, 즉 '곽은태 선생'은 가장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잘 나가는 소아청소년과 원장으로서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병을 잘 다스리는 최고의 의사다. 돈도 많고 이쁜 아내를 두었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성공한 중년 남자의 표상처럼 보인다. 설이는 이모와 함께 병원에 갈 때마다 곽 선생의 팬이 되어 그를 흠모하고 그를 아빠로 둔 시현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설이가 그의 집에서 목격한 가족의 내막은 밖에서 자신이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곽 선생의 실상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오직 공부 외에는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설이는 곽 선생에게 질문한다. "시현에게 왜 그러셨어요?" 이에 대한 곽 선생의 답변은 우리 시대 모든 부모들이 겪는 모순과 고민을 함의하고 있다. "내 아이니까"

 

단언하건대 대한민국은 '스카이 캐슬'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가장 단단한 권력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이 학벌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기 자식을 올곧고 자유롭게 키운다는 건 어마어마한 도전이다. 작가 심윤경 자신도 소설 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사촌기 자녀의 격렬한 갈등기를 겪느라 6년간 글을 쓰지 못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소설가 이전에 현실 부모로서 녹록지 않은 일상의 고충을 털어놓은 것이다. 자식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5살 아이에게 영어와 한문을 주입시키고, 이곳저곳으로 수없이 이사를 다니고, 아빠의 무관심을 미덕으로 여기고, 수백만 원대의 사교육을 집행하는 이 정신 나간 광기의 현상이 과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

 

소설은 부모의 욕망으로 들끓는 용광로와 같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즉 부모로서 자식에게 부어줘야 할 것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새삼 성찰하게 한다. 설이의 이모는 이 작가적 질문의 소설 속 현현이다.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주어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예뻐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이모의 모습은 행복한 가족과 부모의 이기심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다단한 함수관계에 경종을 울리는 메신저라 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본질적으로 그 어떤 욕망과 이기심도 들어서지 않아야 할 가족의 원형, 참 부모의 진정한 자격, 즉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잘 짜여진 구성, 재미있는 이야기, 예쁜 문체, 쉽게 넘어가는 호흡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이다. 심윤경의 소설은 모든 작품이 살아있는 개별적인 완결성으로 깔끔한 뒷맛을 남기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 더욱 농밀하고 밀접한 시선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자녀교육'과 '부모사랑' 사이의 난해한 방정식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는 소설이다. 결코 녹록지 않은 외부의 도전 가운데 자식을 키우는 이 땅의 모든 부모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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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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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공지영의 열두 번째 장편소설 『해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겁다.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 최상단에 올랐다. 불매 운동, 평점 테러 등의 좋지 않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발간 이틀 만에 초판 6만 부가 매진되었다. 최근 모 정치인 스캔들 관련 발언이나 SNS 활동 등이 이슈가 되어 여러 매체에 작가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어 왔다. 더욱이 이번 소설의 소재 때문에 '아군에 칼을 겨눴다'며 정치적, 이념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에 그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거부한 채 작가 공지영이 『높고 푸른 사다리』 이후 5년 만에 출간한 신작 장편소설 『해리』에 깊이 침잠한다.

   『해리』는 인터넷신문 기자 '한이나'가 여러 경험을 통해 의문의 사건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악이 실제는 집단의 악을 구성하거나 대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근원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았다. 한 신부의 법적, 도덕적 일탈 하나조차 처리하지 못한 채 조직의 권위와 이미지를 덮기 위해 거짓으로 일관하는 가톨릭 교구의 추악한 단면을 꼬집었다. 장애인 복지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헌신하는 듯하지만 실상 온갖 비리와 부패로 점철되어 있는 사회활동가와 정치인들의 추한 모습도 담았다. 겉으로는 선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내밀한 곳에서는 여러 형태의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종교와 시민(복지) 단체를 고발함으로써 주변의 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냉정하게 조명해야 한다는 점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 소설은 10년 전 출간된 장편소설 『도가니』와 연결되어 있다. 『도가니』의 배경이 된 안개의 도시 ‘무진’이 또다시 소설의 시공간이 됐다. 『도가니』의 주인공 '서유진'도 재등장하여 중요한 조연의 역할을 담당한다. 『도가니』의 주요인물 장 경사가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온갖 불편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점도 비슷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서양 격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작가는 선의를 위협하는 악의 카르텔이 얼마나 간사하고 조직적인 형태로 우리들 가까이에서 안개처럼 스며들어 있는지를 소설로 형상화한다. 

   작가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작정한 듯 소설 속 악의 양대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이해리'와 '백진우'의 악행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악녀 이해리는 선함을 가장하고 끊임없이 가면을 바꿔 쓰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카멜레온과 같은 인물이다. 가톨릭 신부 백진우는 진보와 신앙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이해리를 배후조종하며 악행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야만인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개인의 엽기적인 악행의 퍼포먼스와 이를 구조적으로 보완하고 피드백하는 공동체적 악의 카르텔의 모습에 구토가 나올 정도다. 중요한 포인트는 그 악행들이 선의 이름으로 내밀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우리 사회의 최전선에서 정의와 진리를 부르짖어온 가톨릭, 인권단체, 기자를 지독한 악행의 실재로 묘사했다. 물론 이러한 작가적 허구(설정)가 완전히 백지에서 펼쳐진 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실화를 기초로 했다. 예컨대 천주교계의 비리와 성폭행 사건, 인권 유린 논란이 불거졌던 대구 희망원 사건, 불법 시술과 아동 학대 혐의가 제기됐던 전주 목사 봉침 사건 등의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통속적으로 선과 진보, 정의와 민주주의의 편에 서있다고 수렴되어온 세력을 구조적 악행이 날 것으로 야만화된 모델로 치환했을까. 그것은 바로 악의 '성질'에 있다.

   과거 진보를 표방한 자들의 반대에 있던 세력의 악행이란 대개 단순하고 가시화된 것들이라고 작가는 규정(전제)한다. 악의 형태와 물리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악이 존재하는 화학적 구조에 관한 것이다. 즉 저들의 악이 쉽고 명확한 그 무엇이라면 이들의 악은 어렵고 복잡하게 엉켜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편'이라는 이념적, 공동체적, 암묵적 카르텔에 함몰되어 그것을 포착하고 인정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작가의 이러한 의도를 특정 세력에 대한 비판 내지는 고발로 수렴하지 않는다. 보다 넓은 천착에서 가능성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나 자신, 내 주위,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적 문제 제기가 소설의 소재가 된 가톨릭과 장애인 단체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곤란하다. 선과 정의를 외치는 모든 개인과 공동체에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인류사의 무수한 악행들은 그 사례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불행한 역사는 용기 없는 시대의 산물이었다. 사상과 이념, 종교와 이해관계를 떠나 잘못은 오직 잘못으로만 풀이되어야 한다. 어쩌면 작가 공지영은 선악(善惡)을 인식함에 있어 현상이 본질을 전복하고 각색이 내용을 압도하는 불편한 현실과 그것을 굳이 끄집어내기 싫어하는 일부 사람들의 구조적 위선에 대해 경각을 던지려 했을지 모른다. 난 이 소설을 그렇게 이해한다.

   소설에서 간간이 포착되는 작가의 실험적 장치가 인상적이다. 최근의 SNS 시대를 십분 반영하여 페이스북 디자인을 그림 형태로 표현했다. 악의 두 모델 이해리와 백진우의 SNS 발언을 페이스북의 시각적 외관 그대로 소설에 구현한 것이다. 두 인물의 위선에 찬 거짓말을 주로 페이스북 형태로 차용한 것은 SNS의 악의적 기능, 즉 가짜뉴스와 거짓정보의 재생산 기능과 확산 능력을 비웃고자 하는 작가적 경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주요 연도와 사건, 실명이 그대로 등장하는 것 또한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세월호', '이명박근혜', '최순실', '대통령 탄핵' 등의 단어가 수시로 등장하는데 이는 소설은 허구로 쓰여진 이야기지만 강렬하게 현실과 일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작가의 의도된 동시대적 의지로 풀이된다. 즉 소설 『해리』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의 이야기'인 것이다.

   반면 한 편의 소설로서의 한계와 아쉬움을 지적한다. 과연 2권짜리로 늘어져 쓰일 만큼의 서사였는지 의문이다. 소설의 얼개는 단순하다. 주인공 이나가 해리와 진우의 악행을 추적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기본 뼈대다.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현재적 위기를 이나의 과거 상처에 겹치기 위해 회상 신이 자주 등장하지만 소설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일차원적 시간의 흐름에 크게 이탈하지 않는다. 소설의 분량은 반드시 무게와 넓이를 증명해내야 한다. 작품이 지닌 사유의 무게와 서사의 질량을 받쳐내지 못하는 분량은 독자를 힘들고 짜증나게 하기 때문이다. 앞부분은 흥미진진하지만 뒤로 갈수록 서사가 늘어지는 느낌이다. 특히 주인공 이나가 소설의 끝 무렵에 다다라서 갑자기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회복의 동기를 찾는 장면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작가가 긴 분량을 감당하지 못한 채 급하게 이야기를 마치며 독자에게 답을 요구하는 듯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작품 바깥의 얘기를 해보자. 최근 공지영 작가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녹록지 않은 것 같다. 대개 이념적으로 진보의 가치를 공유하는, 즉 같은 편이라 여겼던 사람들에 의한 비판인 듯싶다. 반면 보수적 스탠스에 있는 몇몇 지식인들은 공지영이 드디어 혼돈에서 벗어났다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이렇게 우스운 광경이 벌어진 데에는 공지영 자신의 책임이 크다. 나만의 개인적 신념인지는 모르겠으되, 나는 작가가 작품 바깥에서 본질과 무관한 언행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을 경계한다.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이 문학의 해석(수용)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소설가로서 공지영이 보여준 여러 발언과 행동, SNS상의 흔적 등은 낯뜨겁기 그지 없는 것들이었다. 작가로서의 정제와 절제가 아쉽다. 아끼기에 하는 말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작품 평과 함께 작가를 향한 애정이 뒤섞여 산만한 글이 되었다. 소설 『해리』는 문제작이다. 각 파편들은 실화를 기초로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실화라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한 긴장감을 전제하고 있는 소설이다. 중요한 건 메시지다.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고매하거나 심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차분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능력은 순전히 작가 공지영의 역량이다. 나 자신, 내 주위, 우리 주변에 구조적으로 악의 가능성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 것만으로도 소설 『해리』는 읽어볼 가치가 있다. 종교, 정치, 이념과 무관하게 누구나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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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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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국회의원이 대통령에게 책선물을 해서 화제가 됐다. 공중파에서 특정소설을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삼는 경우는 드물다. 언론의 유별난 찬사도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딸을 가진 아빠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떠드는 지인의 권유가 제법 매섭기도 했다. 서점가에서는 '김지영이 하루키를 눌렀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시대 대중의 정서를 공유하는 책이라면 읽어두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한국식 페미니즘에 거리를 두고 있는 나에게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그렇게 들어왔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기 때문에 줄거리는 다루지 않겠다. 아주 짧게 요악하자면 82년생 김지영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82년에 태어난 한 여성의 성장스토리가 소설 이야기의 본류이다. 각 장은 시대별로 나눠져 있고 주인공이 특정한 연령에 도달할 때마다 당시의 시대성과 포개어진다. 암울한 인생의 현장이 추적되고 들추어진다. 소설 전체를 포괄하는 전제는 이렇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이라는 곳은 여성이 살아가기에 힘들고 좌절하고 공포스럽다는 것이다. 김지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과 외부의 시선에 놀라고 불평하며 좌절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겪고 느낀 한국적 현실은 어둡고 침울하며 착잡하다.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다.

   솔직히 얘기하자. 나는 이 소설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간 많은 문학작품을 읽어왔지만 <82년생 김지영>은 냉정히 말해서 평균 미달인 소설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추어야 할 정형적인 측면에서 어설프고 형편없는 작품이다. 소설로서의 이야기적 흥미, 서사의 전개방식, 인물의 매력과 전형성, 인물간의 갈등구조, 보편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설득력 등 어느 것 하나 단단하거나 세련되 면을 발견하기 힘들다. 우리사회의 단면적 마이너리티를 오직 작가 주관의 연역적인 입장에서 조각하여 보편성의 담론으로 무리하게 연결짓는다. 그렇기에 작가적 주관을 제외하고는 소설의 모든 요소가 생명력을 잃고 허공을 멤돈다. 작가적 총론과 소설적 각론은 서로 조합하지 못한 채 어긋나고 균열된다.

   이 소설의 유의미성을 문학적 체계와 구조보다 메시지 자체에서 발견하려는 독자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메시지에도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전하려는 주제는 일관적인데 비해 인물간의 갈등과 상황의 전개는 몹시 어색하다. 가장 큰 문제는 작가의 과한 설정 오류에 있다. 작가의 주제의식에 이야기의 파편이 강제적으로 짜맞춰져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은 무리한 묘사가 즐비하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성급하게 일반화했다. 작가는 단적인 사건을 일방적으로 보편의 함수관계에 등치시킨다. 또한 개별 인간의 문제를 남녀간의 대치적 상황논리로 대입한다. 작가의 독선적인 이분법은 소설 전체에 흐르고 있는 가장 고약한 전제다.

   작가의 편협한 상황묘사는 소설 곳곳을 빼곡하게 채운다. 가령 작중에서 김지영이 회사에 첫 면접을 보러가는 장면이 있다. 그날의 택시기사에 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첫 손님으로 여자를 안 태운다는 원칙은 그 택시기사 개인의 잘못된 성향이지 남자들의 문제는 아니다.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고 이를 비밀스럽게 돌려보는 사무실 남직원들의 모습 또한 그렇다. 그것은 단순한 범죄자의 모습이지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설정이 아니다. 제일 가관은 소설 말미에 있다. 김지영이 유모차를 끌고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주변의 30대 남직장인들에게 맘충이란 소리를 듣는 장면이다. 김지영은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전율하며 한탄한다. "내가 오빠 돈을 훔친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장면을 배치한 걸까. 그것이 흔한 모습인가. 자연스러운가. 대부분의 여성들이 주변에서 쉽게 맞딱드리는 보편적 일상인가.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극단의 예―혹은 특별한 사례를 작가는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남용했다. 각 장면마다 무리한 설정에 기대서 핍박받고 공포스럽고 좌절하고 혼란스러운 여성상을 이 시대의 보편성으로 부각시킨다. 작가의 오만한 작위성에 토가 나올 정도다.

   소설에 묘사된 여러 사례들은 개별적으로는 사실을 지적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개별이 하나의 총체적 사실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 김지영이 대한민국 모든 여자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지영의 일면은 공유할 수 있으나 김지영의 전체는 상당히 독특하기 때문에 보편성이 조각난다는 얘기다. 소설을 읽는 내내 김지영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종일관 불공평하다고 징징대는데 그렇다고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면서 오직 불평과 포기로 일관한다. 80년대 이전생들 여성이 대부분 그렇게 산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지영이 이 나라 모든 여자를 대변하는 듯한 그런 억지스러운 태도가 역겹고 짜증난다. 오히려 작가의 지나친 작위적 설정으로 인해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김지영의 표상성은 힘을 잃고 소멸되어 간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 소설에 공감을 갖는다고 한다. 그 공감을 무시하거나 기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 공감의 디테일(내밀성)에 나는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그들 중에서 '진짜 김지영의 삶'을 산 이는 얼마나 될까. 김지영의 일면이 아닌 김지영의 전체, 즉 오롯한 김지영 말이다. 남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의 적도 남자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이 세계를 함께 경영하는 평등한 존재로서의 주체자이지 서로간에 경멸하고 기각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 소설의 굴곡된 논리 때문에, 즉 작가와 같은 이분법적 선입견에 함몰된 세계관으로 인해 우리사회에 여혐과 남혐이 번지고 꼴페미와 한남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서로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참으로 안타깝고 혐오스럽다. 

   삶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꼭 여자라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힘들고 고단하다. 남자는 남자대로의 고민과 무게가 있고 여자는 여자대로의 고충과 번민이 있다. 양성평등은 만고의 정의다. 하지만 지나친 약자의식에 젖은 '피해자 코스프레 페미니즘'은 그 어떤 생산적인 것도 추출할 수 없다. 우리시대의 페미니즘은 오직 급진주의 여성해방론으로 일관해왔다. 세계의 여러 문제들을 '핍박받는 여성'이라는 용암으로 녹여버렸다. 남녀 사이의 이분법적 구도로 사회문제를 편재해왔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이 힘든가. 이해한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이유로 한국사회에서 남자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 그것도 함께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논리대로라면 '82년생 김정훈'도 우리사회 곳곳에 존재하게 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본래적으로 고단한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징징대지 말라.

   이런 편협한 소설에 나약하게 감상되어 세상을 삐뚤고 굴곡지게 바라봐서는 곤란하다. 그럴 시간에 가족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이웃과 성실하게 교제하며, 자신의 일과 여가에 열심히 땀흘리는 것이 보다 값지고 보람찬 일일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세상은 원래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하다. 생생한 삶의 한복판에서 천국이 없다고 투덜대서야 되겠는가. 루돌프와 싼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어른됨의 본질이다. 진정한 행복은 바로 이 사실을 용기있게 관통하는데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작가의 삐뚤어진 사고방식에 중심추를 잃어버린 <82년생 김지영>은 외연만 요란할 뿐 실상 고약하고 부족하고 불쾌하기 그지없는, 과히 형편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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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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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영화 <오두막> 개봉을 기념해 소설을 다시 읽은 후 과거에 올린 서평을 수정 편집해서 쓴 것임을 밝힌다. 소설의 내용과 메시지를 감안할 때 전적으로 기독교 관점의 서평일 수밖에 없다. 읽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을 안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안다'의 의미는 인격적인 교제까지를 포함한다. 내가 언급하는 '하나님'이라 함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즉 삼위일체의 신神을 말한다. 여섯 살 때 교회에 속해 있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그후로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 또한 서리집사의 직분으로 교회에서 이런저런 봉사와 헌신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해 완벽한 인식이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은 온전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성과 절대성을 실존 자체에서 본인 스스로 내재하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 부족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세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지금 이 순간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는 한 가지 뚜렷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질문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인간의 행복을 원하시는 사랑의 신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한 사람이 승리하고 선한 사람이 패배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선과 승리, 악과 패배 사이의 방정식이 정방향이 아니라 역방향으로도 굴곡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사회 곳곳에서 엄연하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불가해하기만 한 '불공평' 혹은 '부정의'라는 테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신앙을 흔들어 왔는지 모른다. 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왜 선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승리를 한단 말인가. 이게 과연 공의의 하나님과 부합할 수 있는 일인가. 깊은 사념이 내 신앙을, 아니 어쩌면 우리 세계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도전을 가해온 것이 사실이다.

   소설 『오두막』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라는 강렬한 문장을 띠지로 두르고 있는 이 소설은 악과 양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 윌리엄 폴 영(이하 '윌리')은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련한 필력으로 개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소설은 윌리가 자신의 친구인 매켄지 앨런 필립스(이하 '맥')의 고백을 대필해나가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맥의 막내딸 미시가 캠핑장에서 유괴되어 살해된 사건을 통해 맥이 겪는 슬픔과 분노, 기적과 회복,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맥이 딸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확인한 '오두막'이라는 공간은 맥의 '거대한 슬픔'을 완전한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치환적 시공간이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결국 이 소설의 제목 '오두막'의 상징성을 내밀하면서도 함축적이게 하는 요인으로 드러난다.

   맥이 시각적으로 목도한 하나님의 형상은 기존의 인간적 상상력을 전복한다. 성부 파파는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는 중동계 남자의 모습으로, 성령 사라유는 아시아계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왠지 수염이 있고 연세가 있으며 백인의 형상을 띨 것이라는 쓸 데 없는 인간의 과도한 상상력에 조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3차원 과학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불가한 존재다. 단 우리 삶 곳곳에 각기 다양한 의도와 모습으로 역사하시며 섭리하실 뿐이다.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단순화하자. 이 소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관계성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감 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제도와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위로를 건네려는 하나님의 수고를 '오두막'이라는 표상의 시공간적 장치를 통해 작가는 아름답게 녹여놓는다.

   작가는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한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시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키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함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선연히 구분되는 고유특질을 드러낸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먼저 신을 찾아나섰다. 오직 기독교만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았다.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고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먼저 찾아나섰다. 무엇보다 신의 차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직접 들어오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한 인간 쫓기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사상이 종내 '사랑'이라는 거대한 선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고결함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

   오두막에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에 눈물을 짓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밀하고 실재적이며 파워풀하다. 악의 승리는 하나님 역사의 사실성에 대한 증거 불충분 요건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악은 선의 결핍일 뿐이다. 하나님은 분명 맥의 딸을 살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 하셨다.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하나님의 고민은 철저히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게 될 때 비극이 시작된다. 몰이해에서 야기된 의심과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짓는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인간은 신의 차원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절대 고차원의 하나님이 저차원의 인간을 향해 발산하는 사랑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낮은 차원에서는 완전히 읽어내기 힘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신을 이해하려 할 때 신의 차원을 전제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손실의 사유적 상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단언한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관계에서는 가깝고 차원에서는 멀다.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가 신과 인간인 것이다. 이 소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과 상치성을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통해 아름답게 들려줌으로써 재미와 감동을 모두 확보했다.

   이야기 전체적으로 소설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야기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작가가 의도한 서사의 구조 또한 감동을 배가시킨다. 작가는 뒷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철저히 자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픽션임을 고백한다. 맥은 실존인물이 아니며 모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딸을 잃은 한 남자가 오두막에서 며칠동안 삼위의 하나님과 대면하여 지낸다는 이야기가 황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기적은 믿음 안에서 현실이 된다. 작가의 가공인물인 맥의 고백을 작가 자신이 대필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이 소설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부담없이 읽힐 수 있는 넓은 공간성을 확보하는 부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처를 받고 위로를 얻고자 한다. 인간의 고통과 신의 위로가 만나는 오두막이라는 상징적 공간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바로 그곳인 것이다.  

   어떤 소설은 별 다섯 개로도 부족하다. 『오두막』은 별 만땅으로도 호평이 차지 않는 소설이다. 감동적인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좋은 소설, 소름이 돋도록 감동을 주는 소설은 흔치 않다. 또한 이를 평가하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오두막』은 매우 잘 쓴,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소설이다.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난해한 교의를 다양한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편안하고 부담없도록 상징화한 부분이 돋보인다. "상처와 치유라는 상반된 성질의 것이 결국 동일한 곳에서 치환된다"는 거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깊은 감동의 모멘텀이다. 

   이런 소설은 혼자 읽기에 아깝다. 최근에는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치유를 선사하고 있다. 감동의 파장은 타자과 함께 나눌 때 지수적이 된다. 좋은 소설은 반드시 추천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오두막』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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