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코틀러의 굿워크 전략 - 세상과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 함께 성장하라!
필립 코틀러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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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케팅의 아버지’,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거장’, ‘세계적 마케팅의 대가’, ‘경영사상가등 여러 수식어가 붙는 필립 코틀러의 신간이 나왔다. 필립 코틀러의 <굿워크 전략>은 그의 마케팅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볼수 있지만 분명 독특한 면이 있다. 내가 보았을 때 두가지 면에서 이 책은 여타 다른 저자의 책과 차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 마케팅의 대가이며, 경영에 포함되어있는 마케팅을 좀더 예리한 이론화와 경영사상으로 한차원으로 끌어올린 구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은 피터 드러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마케팅중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대한 면에 대해서 집중해서 다룬다는 것이다. 기업의 이미지와 상품을 팔기위해서 여러 가지 마케팅의 방법들이 있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부분에서 기업과 소비자와 사회의 윈윈 전력에 대해서 세련되고 사례중심으로 다룬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보니까 공동저자가 두명이나 있다. 데이비드 헤스키엘과 낸시 R. 리 가 그들인데 이들도 모두 경영과 마케팅의 전문가들이다. 필립 코틀러의 전작들은 깊고 넓은 차원에서 그의 마케팅과 경영전략을 서술했다면 이번의 책을 읽어보면서 크게 달라졌다고 느꼈던 것은 철저하게 사례중심, 연구중심이 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자료들이 많이 제시되었고 각 기업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써 마케팅했던 전략들이 매우 구체적인 자료로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러한 자료들은 바로 두 사람의 공저자들이 담당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매우 체계적이고 매우 잘 다듬어진 책이다. 이 책은 생각보다 매우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굿워크 전략>의 핵심단어를 꼽으라면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기업들이 사회와 연계해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전략적으로 6가지를 제시하는데 이 책은 바로 이 6가지 사회적 책임 마케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구체적인 기업들의 사례와 표를 중심으로 쓰여져 있다. 6가지 구체적인 전략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익 캠페인 : 고객들 설득하여 회사가 지원하는 공익에 참여시킨다.

둘째 공익연계 마케팅 : 제품 판매와 소비자 행동을 토대로 공익에 기부한다.

셋째 기업의 사회 마케팅 : 행동 변화 캠페인을 지원한다.

넷째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 공익에 직접 기부한다.

다섯째 지역사회 자원봉사 : 직원들의 시간과 재능을 기부한다.

여섯째 사회책임 경영 프랙티스 : 사회적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경영 프랙티스를 변화시킨다.

 

이 책 <굿워크 전략>은 이 여섯가지의 내용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설명하는 것이 전부이다. 매우 체계적이고 전략적이고 정보중심적이다. 두 사람의 공동저자의 합류로 인해 세련된 마케팅의 체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의 기업의 목표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그 전략적 목표를 수정하고 있다. 오래동안 기업의 목적은 단지 이윤추구라고 했다. 물론 이윤추구는 기업의 목표에 있어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업이라는 거대 조직은 그 영향력이 너무나도 크다. 그래서 조금씩 경영 이론가들은 기업의 목표가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이론에서 그 방향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한 나라와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주는 기업이라는 존재는 그 영향력의 크기에 비례하여 일정한 사회적 기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엄청나게 깊이 들어와있는 기업들은 이제 경제적인 이익이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단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그러나 기업은 단순한 윤리도덕적인 조직이 아니라 이윤을 내어야 할 조직이기에 이러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이윤을 창출하는 것을 적절하게 조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마케팅과 연결시켜 기업과 소비, 그리고 사회가 서로 윈윈하는 전략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책은 여러기업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회적 책임과 마케팅을 연결시키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또 이 책에서도 많은 부분을 언급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기업이 바로 스타벅스이다.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은 이러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중요한 발언을 했다.

 

스타벅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사결정의 토대가 되는 가치는

기업의 사명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 영감을 불어넣고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고객 한 분, 음료 한 잔, 이웃 한 사람에게 온 정성을 다한다.“

40년 동안 우리는 윤리적 가치에 의거해 커피 원두를 구매했고, 원두 재배 농가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방식으로 그런 가치관을 지켜왔다. 또한 매장이 있는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매장을 운영하며 환경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그런 가치관을 지켜왔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CEO

 

스타벅스의 CEO 하워드 슐츠의 경영철학에 따라서 스타벅스가 단순히 커피라는 상품을 파는 기업을 넘어서 가치와 공유와 공존을 파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윤리적 기업이 되는 목표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일환으로 스타벅스는 환경에 전략적 초점을 맞춘다. 종이컵 재활용에 대한 시스템적 사고 접근을 위해 ‘MIT 조직학습학회와 손을 잡고 재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낭비하지 않고 종이컵들을 따로 모으기 시작했고, 커피를 내리고 남은 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거름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던 손님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찌꺼기를 포장해서 원하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퇴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사회공헌 활동을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청소년들에게 환경에 대한 사랑과 환경 보호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설립된 비영리 단체인 어린이환경유산재단Children’s environmental heritage foundation’에 많은 보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사회 자원봉사를 위해 중국 상하이 민항구에 그린이웃 조성하기를 지원했고, 친환경적 사업을 위해 미국친환경건물위원회의 에너지 환경 설계 리더십, LEED표준을 사용하고 이 인증을 획득하여 스타벅스가 친환경적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이러한 이 책에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스타벅스는 사회와 기업이 함께 공존할 때 매출 또한 급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예시되었다

 

이제 기업은 소비자와 사회와 함께 공존하며 생존해야 한다.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서 악착같이 이윤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기업이 윤리적 사명을 다할 때, 즉 소비자와 사회를 향하여 착한 일을 할 때 이것이 곧 기업의 굿워크 전략Good work strategy’이 되어서 기업과 소비자와사회가 함께 공존하는 고도의 효율적이면서도 착한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내용이다. 이제 커피를 사먹어도 그 커피가 공정한 거래를 통해서 들어왔는지, 아프리카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댓가가 주어지는지가 언급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기업이 착한 일을 하면 소비자는 당연히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착한 기업,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이윤을 높여줄 것이다. 기업들도 단순한 ()’가 아니라 ()’ 돌아갈 때 이가 따라온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연구라고 생각한다. 선함을 따라갈 때 이익이 함께 따라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이익을 좇지말고 선함을 좇을 때 두가지를 함께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생전략도 함께 배울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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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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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파란만장하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래도 평탄한 편은 아니였고, 나름대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수성가라고 해봐야 뭔가 거창한 성공이나 부를 누린 것은 아니고 나의 환경에 비해서 반듯하게 그리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편이다. 나의 삶을 뒤돌아보면 초등학교 6학년때 했던 신문돌리는 아르바이트가 가장 처음한 일인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친구하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신문을 돌렸다. 돈을 벌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냥 일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의 그 경험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몇가지 장면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때는 상당히 작은 편이였다. 그렇게 작고 이쁘게(?) 생긴 아이가 새벽에 일어나서 신문을 돌리는 것이 새벽녘에 일어나 일상을 시작하는 어른들에게는 참 딱해 보였나보다. 그래서 어떤 가게에서 신문을 돌리면 가만히 있어보라고 하고서는 과자나 먹을 것을 주셨다. 그리고 길거리를 가다가 회사에 출근하는 아저씨들은 남은 신문을 사갔는데 거스름돈은 받지 않으셨다. 어린 나는 그러한 경험이 무척이나 신이 났고 한달치 월급을 받을때는 무척이나 들떠서 떡볶이나 평소에 먹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사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뭏튼 그때 나는 순진했고 사회에 대해서 몰랐지만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뭔가 안타까워하는 듯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삶이 팍팍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른들은 어린나이에 현실에 내몰린듯해 보이는 어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진로가 정해지지 않았던 나는 어떤 소속감이 없던 상태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직장을 잡고 돈을 벌고 있는데 나는 뒤쳐진다는 생각, 알바나 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스스로가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게 진로를 정해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뒤로도 필요한 비용을 벌기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전국을 돌며 전화기지국에 있는 에어컨을 고치는 일, 우유배달, 식당 서빙, 식당 음식배달, 심지어는 신종 의약품 실험대상이 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나로써는 당연한 일이였지만 코에 튜브를 꽂고 몇일동안이지만 인간 마루타가 된 기분은 이루 말할수 없이 묘상했다. 그길로 그 알바는 그만두었고 대학원을 진학해서도 학비를 벌기위해 이런저런일을 많이 했다.

 

지금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현실의 팍팍함은 그때보다 더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워킹 푸어들을 수없이 양산하는 이 사회에서 의식주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어쩌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되어가고 있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인간의 조건>을 쓴 저자 한승태는 그러한 생활 전선에서 분투하는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자신의 경험을 엮어서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웬지 서글프고 암담한 현실이 느껴졌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누구라도 대수럽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들이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꽂게잡이 배선원이나 양돈장 똥꾼처럼,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날것의 모습들. 그들이 지내는 숙소는 어느정도 크기인지, 여름엔 얼마나 덥고 겨울엔 얼마나 춥게 생활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배경과 어떠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저자는 꽂게잡이 선원으로 편의저과 주유소 직워능로 돼지농장 일꾼으로 자동차 부품공장의 공돌이로 일하면서 느낀 평범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을 경험하고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6장에서 퀴닝(queening)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저자의 가장 중심적인 생각을 들어낸다. 퀴닝은 체스 용어로 졸이 한칸씩 움직여 상대편의 끝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여왕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에 신분상승의 의미로 퀴닝이라고 붙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처지가 여왕으로 상승하기를 기대한다. 하루먹고 사는 처지에서 넉넉하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우받는 직분으로 상승하기를 꿈꾼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퀴닝을 꿈꾸는 것은 하나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 매일을 달린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회적인 구조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간간히 퀴닝할 수 없는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문제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골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형편과 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므로 그들 또한 인간적인 삶과 신분상승을 꿈꾸고 있는 소박한 소망을 보여주고 있다. 팍팍한 삶은 개인의 노력부족일까 아니면 사회구조의 문제일까?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던져주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저 음지에서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자들을 한번을 돌아보라고 독려한다. 그리고 그들도 퀴닝(queening)을 꿈꿀 수 있도록, 아니 퀴닝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조용하게 말하고 있다.

 

먹고사는 것. 아마도 인간의 삶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건강한 개인이 설수 없고 건강한 개인이 설 수 없다면 건강한 사회도 설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안타깝고 퍽퍽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감추어진 아픔이 드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네 이웃들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책이였다. 시장에서 추운데 앉아서 생선을 하나더 팔려는 아주머니, 정류장 옆에서 군밤을 팔면서 고마워하는 아주머니, 지하철 안에서 껌을 팔면서 애틋한 눈빛으로 팔아달라고 애원하는 분들...그냥 지나칠 타인이 아니라 함께 팍팍한 현실을 돌파해야할 이웃으로 한번 더 시선을 돌아보아야 할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이따위인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쓸모없는 놈이라며 손가락질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수의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의지의 결핍이 아니라 희망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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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자유케 하라 - Set Yourself Free
로버트 D. 하이들러 지음, 방원선 옮김 / WLI Korea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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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세상을 바라보는 커다란 관점을 세계관(worldview)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어울어져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체계적이고 총체적이든 아니면 파편적이고 단편적이든 누구든지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눈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세계관(worldview)라고 한다. 이 세계관을 좀더 종합적으로 분류해보면 몇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나는 크게 두가지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두가지의 부류는 나만의 분류법이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두분류로 나누는 것이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나는 세속적인 방식이요, 또 하나는 종교적인 방식이다. 세속적인 방식은 이 세상에 보이는 현실이 모두인 유물론적인 방식이요, 또 하나는 내세를 믿는 종교적인 방식이다. 나는 플라톤처럼 이 세상은 이데아의 그림자요, 참된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이 현실 가운데는 무엇가 다른 초자연적인 세계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눈에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음을 믿는다. 그것을 사차원적 세계라고 하든, 영적인 세계라고 하든 별 상관은 없지만 성경을 믿는 그리스인으로써 이 현실안에 다른 차원인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믿는다.

 

이 책 <너 자신을 자유케 하라>라는 책은 두 번째 세계관으로 쓰여진 책이다. 즉 이 현실 세계속에는 또 다른 차원인 영적인 세계가 있고, 현실 세계와 영적인 세계는 상호 작용을 하며 대립하기도 한다. 저자 로버트 하이들러 박사는 뛰어난 성경교사이면서도 복음의 영적인 권위를 믿고 경험하는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받는 영적인 공겨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매뉴얼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력에 대해서 어떻게 스스로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매우 성경적이고 실제적으로 싸우고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영적인 존재, 즉 사단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사단의 권한과 능력이 분쇄되고 무장해제 되었지만 실제적인 공격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들면 2차 세계대전때 연합군이 ‘D-day'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쳤고 전쟁의 승리는 이미 이때 결정되었지만 그 사이에 격렬한 작은 전투는 있엇다. 마찬가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 존재의 권세를 모두 무장해제 시키고 해체시켰지만 작은 영적 전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강건하게 설수 있는 실제적인 영적 전략과 무장방법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공격에서 무장해주는 가장 좋은 방어는 바로 의로운 삶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공과 의를 행하고 정직함 가운데 거할 때 우리를 둘러싸는 의의 방패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를 행할 때 이 의의 방패는 균열이 생기고 영적인 공격을 허용하는 구멍이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에서 영적전쟁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의의 흉배를 붙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의의 흉배는 가슴을 보호하는 장비인데 바로 그 장비가 정의이다. 바른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우리의 흉배가 되어 보호받는 방패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존재가 공격 발판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려준다. 교만, 거짓, 용서치 못하는 마음, 영적오염, 조상의 죄등이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공격하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깊은 성경적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단순히 일차원적인 현실만이 존재하는 것의 모든 것이 될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자들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성경이 참된 인간과 세상의 길을 제시하는 참된 진리임을 믿는 나에게 이 책은 인간의 몸과 영혼 모두가 안녕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길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세상은 모든 것이 유비(類比)될 수 있다. 인간에게 몸과 영혼이 있듯이, 자연에도 물질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것이 있을 것이다. 만물은 그렇게 서로 유비(類比)될 수 있도록 되어있고, 그래서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유비를 문학을 통해서 특히 ‘시’를 통해서 그 신비와 비밀의 일말을 조금 비춰주는 것이다.

 

우리들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린도후서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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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팀 켈러 지음, 장호준 옮김 / 복있는사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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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어떤 이끌림으로 읽게 되는 특별한 책이 있다. 이 책은 어떤 이끌림과 인도하심을 받은 특별한 책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참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었고 그것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갈구 하고 있었다. 최근에 내가 복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이번에 복음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자 마음먹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인도하심을 구했다. 몇주전에 지인들을 만날 일이 있어서 분당 약속장소로 갔다. 제일 먼저 도착하여 그곳 근처 서점에서 책을 보며 돌아보고 있었는데 넓은 가판대에 중간에 있었던 이 작은 책을 집어 들었다. 난 책을 들면 항상 앞뒤 표지의 글과 앞뒤 날개의 글을 읽는다. 그곳에 있는 내용은 책의 핵심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글을 읽는데 바로 이게 내가 찾던 책이라는 느낌이 왔다. 정말 65쪽 밖에 안되는 작은 책자이지만 이 책안에 복음의 핵심이 정확하게, 그것도 현대적인 적용과 진술로 매우 탁월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바로 사들고 그 다음날 다 읽었다.

 

성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구원의 행위를 포괄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복음을 믿는 것이고 교회는 이 복음을 가르치고 복음을 실천하는 하늘의 에이전시(agency)이다. 현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과 멀어져 세상의 지탄을 받고있는 것은 진정한 복음에 대한 피상적 이해와 현대문화와의 타협으로부터 오는 복음의 변질이 바로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성경을 읽으면서 정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복음을 이해하고 그곳 가운데 침잠하고 그 복음을 누리고 그 복음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리라 믿는다.

 

이 책은 '티모시 켈러'라는 현대의 주목받는 한 목회자이자 기독교 변증가가 쓴 책이다. 우리 시대의 유명한 신학자들로부터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핫'한 목회자이기도 한 티모시 켈러는 미국 뉴욕의 한 복판에서 현대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던지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서 정직하게 답변하여 기독교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적 유물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며 인간이 가야할 유일한 소망의 길이라는 것을 놀라운 지성으로 변증하며 목회하고 있는 분이다. 나는 소식으로만 들었지 이분의 책은 처음이였다. 이 책을 다 읽고 새로운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이자 복음적 목회자를 발견한 기쁨이 컸다. 그래서 이분의 책을 뒤져서 다른 책도 읽기 시작했다. 그의 변증능력은 성경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면서도 시의적절하고 논증의 태도는 예의바르고 세련되어 있다.

 

이 작은 책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는 복음안에서 자아의 문제에 집중한다. 현대문화와 성경은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다르게 진단한다. 프로이드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에 대한 놀라운 발견은 인간의 심리와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밝혀 주었고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준 것은 사실이다. 현대 심리학은 언제나 자기긍정과 자신감과 자존감을 인간 존재와 관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보루(堡壘)로 여기고 그것을 존중한다. 그러나 복음안에서 말하는 인간의 '자아'는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것과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갖는다. 이 책은 바로 복음안에서의 '자아'가 현대문화에서 말하는 '자아'와 어떻게 다른지 매우 설득력있고 세련되며 적절하게 논증할 뿐 아니라 복음안에서 있는 참된 자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므로 인간의 존재됨과 존엄성 그리고 참된 자유는 복음안에서 올바른 '자아'로 회복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 고린도전서 본문은(3:21-4:7) 어떻게 자존감과 자아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전통적인 문화나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말하는 자기이해의 방식과는 아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16

먼저 그는 현재 인간의 '자아'의 상태를 진단한다. 그는 인간의 원래 본성적 상태가 바로 교만이라고 말한다. 교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브리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원래의 상태보다 부풀어져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본성적 상태는 스스로의 작은 자신의 실체보다 훨씬 더 커보이고 위대해 보이려고 하는 작위적인 상태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인간 자아를 부풀려져 보이게 하는 상태를 공허함, 고통, 분주함, 나약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인식할때 실존적 유한한 상태를 감추기 위해서 자기를 부풀리는데 이것은 빈약한 실체를 감추려 함으로 공허한 상태가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고통하게 되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활동으로 채우려고 분주하게 되고 그 실체는 나약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존의 존재가 아니요 의존의 존재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자존적 존재라 되려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부풀릴 수밖에 없는 교만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기위해 여러 가지로 채울려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노력은 원래로 돌아가야할 큰 배경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을 말하고 자신감을 말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부풀리는 것 뿐이다.

 

그리고 저자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참된 복음안에 있는 정상적인 자아의 상태에 대해서 매우 탁월하게 진술한다. 바울은 성경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나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유로운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회복되어야할 인간 '자아'의 상태인 것이다. 인간은 외부의 판단에 의존하여 스스로를 그럴듯하게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포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이나 자신의 판단에 노예가 되어 자신도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간다. 언제나 심판대 앞에 선 피고인 처럼 아무런 권한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판단에서 자유하였다. 그는 자신을 의식하지 않았고 세상의 참된 진리에 따라서 스스로를 움직여 나아갔다. 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했으면, 진실로 자신으로부터 자유하였다. 그러면서 어떤 인간보다 가장 열정적이며 사랑스럽우며 존귀한 인간이였다. 바로 바울의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새로워진 자아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현 상태는 비정상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자유한 자아는 부패하였고 교만이라는 질병이 자아에 침투하여 하나님과 멀어져 대적하며 비참한 실존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현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실존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고 어렴풋이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진단하긴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상태에 대한 진단은 유보되고 있는 것이 현대 문화에서 인간 자아의 진단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이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안에 돌아갈 때 가장 온전한 인간 자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복음은 가장 위대한 소식이지만 또한 감추어지고 버려진 소식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이 복음을 주셨으면 우리가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일때 가장 자유하고 존엄하며 지혜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나님의 복음을 이 작은 책자가 이렇게 깊고도 넓게 담아내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들이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말이다. 바울은 그 열정으로 세계의 문명을 유럽에 실어날랐다. 이 시대에 진주와 같은 복음이 돼지우리에 던져지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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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일단 제목이 참 흥미롭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이 제목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두가지이다. 내가 몽테뉴를 잘 알지 못하고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 제목을 보면서 참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제목이 잀아적이여서 참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거창한 '론'이나 '학'이 아닌 고양이를 제목으로 삼고 자신의 친근한 일상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를 풀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몽테뉴라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자신을 사유의 재료로 삼아서 거창하게 철학이라기 보다는 삶의 에세이를 써내려간 사람이였다. 그리고 이 몽테뉴를 저자 솔 프램튼은 그의 한걸음 한걸음을 따라다니면서 몽테뉴가 가졌던 삶의 흔적들과 고민들은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16세기 철학자인 몽테뉴의 저서 <에세>를 바탕으로 그의 삶, 취향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도 분석해 내고 있다. 그렇다고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친근하고 유려한 문체로 들려주고 있다. 나는 아직 몽테뉴의 관한 책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지식도 거의 전무하다. 특히 이 책이 주로 참고하고 정리하고 있는 몽테뉴의 대표작 <에세>에 대해서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얼마만큼 몽테뉴에대해서 잘 드러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할수 없지만 이 책이 나처럼 몽테뉴를 몰랐거나 아직 <에세>를 읽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에세>로 가는 하나의 길목이 되어둘 것이고, <에세>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정리와 재현의 의미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몽테뉴라는 인물에 대해서 매우 친근감있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이 책만 읽어도 그가 어떠한 인물이였는지에 대해서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우아하고 현명하며 진지하고 사색적인 인물이였고, 일상의 비루함과 소중함을 함께 알고 있었던 사람이였다. 고전적이며 사색적인 인물이라고 할까.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는 16세기 프랑스로 그 당시 시대적인 풍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전쟁이 있었던 시대였다. 몽테뉴가 보기에 그 당시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와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 정신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만드는 사상이였다. 이러한 배경을 지나면서 그는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고 특히 자신의 개인사에 있어서 불행한 일들을 많이 겪었기에 그는 진정한 회의주의자가 되었다. 몽테뉴의 첫딸은 태어난지 불과 두달 만에 죽었고, 남동생은 테니스 공에 맞아 죽었으며, 가장 친한 친구였던 라 보에시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역병에 걸려 죽었고, 존경했던 아버지도 오랫동안 신장결석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러한 고뇌와 개인적인 불행은 몽테뉴가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스토아철학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죽음 이후의 초월적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운 삶의 철학자가 되었다. 이렇게 삶의 철학자가 된 몽테뉴는 자신을 사유의 재료로 삼으로 자신의 삶을 따라가 평범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사유의 단상들을 길러올리고 그것을 기록하여 자신의 일생의 대작인 <에세>를 완성시켰다. 그 당시 근대적 철학사상이 문을 열기되었는데 특히 데카르티의 사상이 모든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확실성에 바탕을 두면서 인간의 이상과 사물을 분리시키며 근대를 열어제쳤다면 몽테뉴는 시대적 주류 철학이였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오히려 확실성이 분리를 낳고, 그 분리가 폭력과 인간의 불행을 낳는다고 보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몽테뉴 사유의 위대함과 주류 철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보듬고 통합하는 삶의 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인간됨이 강하게 부각됨을 볼수 있었다. 이러한 친근하고 통합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바로 제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고양이를 보면서도 인간과 동물을 분리시키며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서 신비하게 섞여 서로에게 주체적 영향을 미치는 그의 통합적이고 따뜻한 사유 방식을 알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 당시 주류 시대적 분위기와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였다.

 

이러한 그의 인간적이고 통합적 사유는 무자비하게 신대륙을 점령한 에스파냐인들을 비난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돈과 계급에 따른 차별이 없었던 원시부족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는 것에서도 그의 사유는 잘 드러난다. 몽테뉴는 그 당시 유럽인들의 탐욕이 얼마나 크고 무자비했는지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그는 참으로 삶을 사랑하고 따뜻한 사상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포도주와 여행을 좋아했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기록'에 집착했다. 매우 사소한 것까지도 적는 바람애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16세기의 자세한 분위기를 알수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그는 확실성의 시대에 차이를 존중했으며 그 차이에서 오는 모호함과 불확실을 즐겼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는 21세기 사상의 단초를 엿볼수 있다.

 

저자 솔 프램튼은 계속해서 16세기 근데의 주류 사상가였던 데카르트와 몽테뉴를 비교하여 몽테뉴가 강조한 존재의 중요성, 자아의 중요성, 현재의 중요성, 일상의 중요성들을 계속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까 참 따뜻해진다. 몽테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친구로 삼기에 좋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나를 친구로 받아들여줄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떤 계기로 인해 몽테뉴가 신봉했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더 오래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라는 회의론에서 벗어나, '철학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는 죽음의 철학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과 주체로서의 확실성을 담보로하는 '자아'가 아니가 개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참된 삶과 사유가 어떠해야 하면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늘 자신을 초월하는 곳에서 맴돈다. 두려움, 욕망, 희망은 자꾸 미래로만 향하도록 우리의 등을 떠밀어, 더 이상 자신에게 미래가 없을 경우에도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가 생각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현재에 대해 느끼거나 생각할 시간을 놓치게끔 만든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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