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간다
나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결말은, 소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토록 긴 여운을 줄 수 있는 거라고. 다른 결말이었다면 그 소설을 내가 이렇게까지 좋아할 순 없었을 거다. 그래서 오래전, 그 소설의 후속편이 나왔을 때, 읽지 말까..를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든 읽었지만.
그런데 며칠전 다시 읽은 새벽 세시의 결말은,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나는 이미 후속편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그 뒤의 이야기를 읽어야만했다. 그렇게 어제 배송되어진 《일곱 번째 파도》를 읽는데, 아아, 나는, 답 없는 레오에게 집착하는 에미가 되어서... 몇 장 읽지도 않은 채로 눈물이 났다. 이미 보스턴으로 가버린 레오에게 메일을 보내보지만, 시스템 관리자로부터만 답장을 받는 거다. 얘랑은 연락 안돼..하면서. 새벽 세시의 나는 '레오'라는 남자를 사랑하는 '에미' 였는데, 일곱 번째 파도의 나는, 이미 어떤 선을 넘어가 버린 것 같다. 에미가 나의 현실이 되었고 내가 에미가 되었고, 그렇게 날 두고 떠난 레오에게 계속 말을 거는, 그런 에미가 되어서... 초반부터 눈물이 ㅠㅠ
(자, 이제 스포일러 팡팡 터집니다!!!!!)
그런 에미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레오로부터 답장을 받는다. 보스턴에 가있는 9개월동안, 레오는, 현실을 살았다면서, 그래서, 현실의 여자친구를 만들었단다. 파멜라...
파멜라...
아, 이름부터 너무 육감적이야.... 싫어........아무 잘못도 없는 파멜라가 싫어. 파멜라를 싫어할만한 이유는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파멜라가 나에게 잘못한 거 진짜 1도 없어. 파멜라는 심지어 나의 존재 조차도 몰라. 그런데 나는 파멜라가 끔찍하게 싫다. 파멜라라니... 파멜라는 나의 존재도 모르고, 그러므로 나에게 해를 끼친 게 1도 없고, 잘못한 게 1도 없는데, 나는 파멜라가 너무 싫어.... 신경질나! 울고 싶어! 눈물나!
왜?
나는 에미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에미니까!! 나는 레오의 옆집 여자가 아니라, 에미니까! 레오의 동창1이 아니라, 에미니까!!!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쉐키가....파멜라를 사랑한대!!! 파멜라랑 사귄대!!!!!! 그러니까 내가 눈물이 나, 안나!!!!! 훌쩍 ㅠㅠ
일곱 번째 파도에서의 에미는 굉장히 레오에게 집착한다. 도대체 왜이러나 싶을 정도로 집착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집착했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그렇게 집착할 수 있었던 건, 그녀 자신이 뭘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레오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에미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니가 원하는 게 뭔데? 니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는거야?' 하고. 에미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고,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기 위해 액션을 취한다. 대답없는 메일을 계속해서 보내고, 답을 보내라고 재촉한다. 끊임없이 기다리고,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바를 레오에게 알린다. 그런 한편,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걸 싫어하고, 자신이 무얼 싫어하고 무엇을 끔찍하게 생각하는지를 당당하게 밝힌다. 새벽 세시에서 자신의 남편인 베른하르트가 레오에게 보냈던 이메일을 알게 된 에미는, 당연히 분노한다. 내가 분노한 그 이유로, 에미도 분노한다. 나는, 내가 결혼했어도, 내 남편의 소유가 아니며, 너희들은 나를 '소유할 수 없고!', 자신이 아무리 레오를 사랑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한다. 비록 정신과 상담을 받을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기 위해 애를 쓴다.
레오,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당신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배신당한 느낌, 물건이 되어 팔려버린 느낌이에요. 내 남편과 애인이 나 몰래 협정을 맺다니! 둘 중 한 사람이 나를 생상하게 느끼고 싶다면 다른 한 사람이 특별히 눈감아준다고요? 그러고 나서 한 사람이 영원히 사라져주면 다른 한 사람이 나를 영원히 갖는다고요?
어디서 주운 물건인 양 한 사람은 나를 원래 소유주인 내 남편에게 돌려주고, 다른 한 사람은 일종의 보상금으로 환상 속 인물과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만남', 성적 모험을 허락하는군요. 정확한 분배, 완벽한 이별, 비열한 계획이에요. (p.150-151)
나는 에미의 이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준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분노는 마땅한 것이며, 표현되어져야 했다. 또한, 자신이 한 짓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레오와 베른하르트를 그려준 것에도 매우 고맙다. 자신들이 한 짓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걸 스스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작가인 다니엘 글라타우어에게 매우 고맙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사랑해서' 한 짓이라고,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저지른 짓이라고 아무리 변명해봤자, 자신이 한 짓이 옳지 못한 행동이란 걸 알고 있다.
일전에, 《비를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을 읽으면서도 썼었지만, '내가 혼자 하는 고민'에 대한 답은 한계가 있다. 고작해야 내가 생각하는 선에서만 답이 나올 뿐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고민을 풀어나가고자 하면, 그 답은 내가 생각해내지 못한 부분에서 나올 수도 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아주 좋은 답.
레오는 에미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은, 에미의 곁을 떠나는 거였다. 에미를 두고 떠나는 거. 그리고 이제, 시간이 아주 흐른 후에, 자신이 다른 여자를 사귀고, 그 사귀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므로 노력하고 있는' 이 때에, 자신이 뭘 잘못한건지를 알게 된다. 내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아한 부분이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자기가 아는 장면.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적절한 때에 언제나 정확한 답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모두 시행착오를 거치니까.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니까.
레오, 당신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야.
나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길을 택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 자신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어요. 유감이고 불행이에요. 기회를 놓쳤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p.242)
자, 이 미안함은 어디에 가 닿을까? 레오는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하려고 해봤지만, 자신이 내내 에미랑 살고 있었음을, 내면에 에미를 간직하고 있었음을, 힘겹게 인정하고 만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고? 자신이 파멜라를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다. 레오의 이런 실수는, 이미 나 역시 현실에서 해본 바가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누군가의 옆에 있었던 일. 그렇지만 결국은, 그래서는 안됐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
파멜라가 이곳으로 오기로 한 거죠. 그런데 내가 그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에미 당신이랑 보냈어요. 그사이에 내가 공간을 떠나 누구 곁에 있었을까요? 에미 당신 곁에 있었어요. 내가 나의 비밀스러운 내면에서는 누구랑 살았을까요? 에미 당신이랑 살았어요. 언제나, 오로지 당신과 함께 였어요. 그리고 내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환상에 등장하는 하나의 얼굴 또한 당신 얼굴이었어요. (p.334-335)
레오는 에미를 선택하지 않기 위해, 에미를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랑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최선이었으며 응당 그랬어야 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면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고, 그 내면은 자꾸만 수시로 레오와 파멜라 사이로 끼어들며 튀어나오려고 한다. 매일 파멜라와 섹스할 순 있었지만, 파멜라가 닿을 수 없었던 어떤 지점이 레오에게 있었다. 레오는 에미에게 가기 위해서는 베른하르트가 있다고 자꾸만 생각을 했고 의식을 했으므로, 자신이 느끼는 진짜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에미는, '베른하르트의 에미'가 아니다. 에미는, 에미다. 에미는, 에미 자신이다. 에미는,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있고, 자신을 치료하려 하고 있고, 자신의 원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려 하고 있고, 정확히 자신이 어느 지점에 서있는건지를 자꾸 보려고 한다. 그래서 에미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바 대로를 실행할 수가 있다. 에미는, 기다린다. 에미는 기다리지 않는다. 에미는 끊임없이 다가서고, 집착하고, 기다리고. 기다리지 않는다.
아무리 당신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얘기할 테니 두고 보라고 해도 이제 나는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알고부터 나는 줄곧 기다렸어요. 최근 이 년 반 동안 기다린 게 그 전 삼십삼 년 동안 기다린 것의 세 배는 될 거예요.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기다렸어요! 기다리는 데 질렸어요. 정말로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요. (p.327)
레오는 이제 '베른하르트 없이' 에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Aw:
에미, 나는 기꺼이 당신과 함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30초 뒤
Re:
무엇을요?
40초 뒤
Aw:
앞날을. (p.374-375)
아아, 그래서 어찌되었냐고? 이들이 어찌 되었냐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된거냐고?
그건 책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아주 좋은 독서였다. 처음엔 울면서 시작했지만, 그리고 분노도 화르르 타올랐지만, 그러나 좋은 독서였다. 몇 년전에 그저 에미로 읽었을 때보다, 지금은 '에미인 나'가 읽어서 더 좋은 독서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아주 아주 좋은 독서였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독서였지만, 때로는 말하지 않는 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 아침엔 공대생 출신의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공대생 판타지가 있다는 것을 고백했다. 그러니까 일전에 공대생 前애인을 사귀면서, 수학 노트 같은 거 사진 찍어주면 좋아했던 일 같은 거. 그와 나는 얼마나 달랐는지(나는 개구리가 되어 볼 수 있었다니까?), 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가 고통을 수치화 시킨다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니까 아프다고 하면,
-설마 1부터 10까지?
-응.
그렇다. 내가 고통스럽다고 했더니, 다정한 나의 공대생 前애인은, 고통을 1부터 10까지라고 했을 때, 어느 지점인 거냐 물은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거기다 대고 또 얌전하게, '어제는 7쯤이었는데 오늘은 4쯤이야' 라고 대답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하다가 또 빵터졌네. 그래서 오늘 대화한 사람이 '그게 좋냐' 물었는데, 나는 '어 난 너무 좋았어' 이러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랬더니 그건 페티시 같다고 했다. 아아, 어쩌면 그런건지도... 나의 페티시...뭐지....역시 나는 변태인건가.....그렇지만, 누구나 가슴속에 변태기질 조금쯤은 가지고 있는거잖아요?
아무튼지간에, 나는 지금 세상에서 일곱 번째 파도가 제일로 좋다.
음..아무 맥락 없는 글을 써버리고 말았군.
뭐, 내가 언제는 맥락 있는 글을 썼나...
아침에 출근하는데 8살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꺅 소리지르며) 타미야!!!!!
-이모 어디야?
-이모 회사 가는 길이야. 타미는 학교가?
-아니, 지금 일어났는데?
-아 그래?
-응, 이모 끊어.
-타미야! 전화 왜 했어?
-이모 보고싶어서.
꺅 >.<
아, 너무 소중하다. 보고싶을 때 보고싶다고 전화하고, 보고싶다고 말하는 존재. 진짜 너무 소중하고 아름답다. 소중해 ♡ 일어나자마자 이모한테 전화하는 조카라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소중해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기대치, 의도, 목적. 정사는 즐기려고만 하죠. 함께 지내기는 언젠가 정말 아름답게 같이 살기 위해 함께 머물고자 하는 거예요. (에미,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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