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끔직한 사건이었어. 내장이 모두 파열된 데다가 온몸에 화상 흔적이 있었지. 자수한 사람은 같은 반 친구 네 명이었어. 그들은 얌전한 표정으로 부모에게 끌려왔지. 그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건 피해자에 대한 속죄의 눈물이 아니었어. 경찰에 체포되어야 하는 자기 신세가 한스러워 흘린 눈물이었을 뿐이지. 녀석들은 자기를 불쌍하다고 생각한 거야. 그 녀석들 얘기를 듣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어. 왜 친구를 죽였는지 아나? 게임 소프트웨어를 빌려주지 않아서야. 게임 말이야, 게임. 스위치를 누르면 삐리링 소리가 나는 장난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고등학생이나 된 녀석들이 장난감을 빼앗기 위해 싸움을 벌이고, 사람까지 죽이다니. 녀석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찬 다음, 기절한 친구에게 불을 붙였다고 하더군." (p.67-68)
















성폭행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그 가해자를 충동적으로 죽였고, 그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들은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눈다. 


일전에 제부와 남동생과 술을 마시며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왕따의 피해자들도 고통이 극심하지만, 가해자도 철이 들고나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내가 그때 왜그랬을까,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나는 다른사람에게 고통을 줬어, 하는 생각으로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 고통 클텐데, 그러니 지금 다른 학생들을 왕따시킨다거나 폭력을 휘두른다거나 하는게 진짜 자신을 위해서도 하지 말아야 할 짓인데, 라고. 그러자 제부랑 남동생은 내게 동시에 말했다. 그건 극소수라고. 철이 들고 자신의 가해를 뉘우치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대체적으로는 잊고 발뻗고 자거나 더 나쁜 짓을 저지른다고. 내가 말하는 경우라면 사실 그런 가해자가 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거다. 나는 그들에게 정말 그럴까? 라고 의심스런 대꾸를 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보니, 나는 '이상적인 도덕'을 꿈꾸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미성년자라고, 청소년이라고 해서 그들의 범죄를 가볍게 벌주고 갱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말, 과연, 도움이 될까. 이 책을 읽으면서 회의가 밀려드는거다. 후아-



"그들의 행위에 대한 제재는 정당한 장소에서 정당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야 합니다. 매스컴이 사람들의 여론을 유도해서는 안되지요. 그들은 어차피 사회적 제재를 받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우리 어른들은 그걸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쓸데없이 사회적 제재만을 확대하면 그들의 갱생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왜 모르시죠?"

"저희는 그 제재 부분이 약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지금의 소년법으로는 도저히 현실에 맞게 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뭔가 오해하고 있군요. 소년법은 미성년자를 재판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잘못된 길로 나아간 미성년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거죠."

"그러면 피해자 입장은 어떻게 되죠? 그들의 고통은 누가 보상해 줍니까? 가해자를 도와주는 게 올바른 일인가요?" 

(중략)

"어, 어떻게 속죄하게 만들 거죠?"

"그건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그게 참된 속죄라고 생각하니까요. 자기가 저지른 죄를 발판으로 삼아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사회에도 ‥‥‥."

아유무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런 게 속죄가 되죠?" (p.379-381)



딸아이를 성폭행으로 잃은 아버지가 가해자를 죽인다. 성폭행 동영상 속에서 딸아이의 모습을 확인한 이상, 그에게 가해자를 죽이는 것 말고는 다른 목표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세상을 향해 말한다. 자신은 살인죄를 저질렀으니 자수를 하겠지만, 자신의 딸을 죽인 다른 범인 한 명을 마저 죽이겠다고. 가해자들은 아직 십대의 미성년자들이었고,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범죄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철이 없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을 만큼 잔인하게 피해자들을 유린했다. 심지어 그런 범죄를 여러차례에 걸쳐 저질렀기 때문에 피해자 역시 여러명. 이런 청소년을 '갱생'하는 게 가능할까. 잔혹한 방법으로 딸아이를 잃은 아버지가 '네, 그들의 갱생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그들의 남은 인생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실제로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들은 '그래도 미성년자인데'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책속에서도 아이를 가진 아빠가 '만약 당신자식이 당했다면' 이라는 물음 앞에 '그렇게 되면 가해자를 죽여버리겠다'고 하는거다. 그것이 '내 일'이 되는 이상 도무지 진정도 할 수없고 가해자의 '갱생'따위를 바랄 수도 없게 된다. 갱생이라고? 갱생이 되면? 그 다음은? 


물론, 가해자를 고통스럽게 죽인다고 해서 죽었던 내 딸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도 그걸 알기에 복수가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허무하다고 해서 그 가해자를 이대로 소년법에 의지해 가벼운 처벌만 받게 한 채로 둘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는 암묵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받는다. 


'안데슈 루슨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의 《리뎀션》을 읽고나면 사형제도의 헛점을 알게 된다. 그 헛점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나는 이 두 작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므로 사형 제도를 반대한다는 표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만약 이것이 '내 일'이 된다고 했을 때도 여전히 그 생각을 고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부모이고, 그리고 《방황하는 칼날》에서의 아버지들이 보았던 영상을 보게 된다면, 나는 거기에다 대고 '사형을 반대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그 새끼를 죽이려고 이를 악물지도 모른다. 폭탄을 끌어안고 그에게로 뛰어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피해자의 아버지도 나와 같았다. 그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압니다. 저도 예전에는 당신처럼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법은 인간의 나약함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p.281)



처음에 이 책을 구입하고 남동생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주었는데 남동생이 몇장 안읽고 내게 되돌려주었다. 나 이거 못읽겠어, 하며. 왜? 아, 난 이새끼들 못보겠어..라고 하는거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던 상황이므로 알겠다, 라고만 답하고 다른 책을 권했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갈등했다. 읽지말까..아, 너무 힘든거다. 위에서 언급한 '안데슈 루슨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의 《비스트》도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몇 장 안읽고 팔아버렸었다. 아동 성폭행범의 입장에서 기술되는 첫부분 때문에. 아, 진짜 너무 힘들어서 못읽겠는거다. 이 책, 《방황하는 칼날》도 미성년자 범죄자들이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부분들에서 진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아, 이래서 남동생이 못읽겠다고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포기할까, 싶어졌다. 그렇지만...그렇지만......이야기의 끝을 알고 싶었다. 이새끼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를.


책의 내용은 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지만, 이 책을 읽은 건 잘한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아니다. 너무 '자극적' 이다. 또한 그 내용이 힘들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할 수도 없다. 다만, 그가 하는 말을 우리는 귀기울여 듣고 우리의 생각도 입밖으로 내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또한, 그가 틈틈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무거운 것들이 아님에도 묵직하게 자리잡기도 한다.



별안간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지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다. 사람은 커다란 기계에 있는 하나의 톱니바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계에서 톱니바퀴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p.60)



이 '톱니바퀴' 이론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의 오래전 작품 《용의자 x의 헌신》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도 하나 없는 존재라고 해서 그가 '죽어도 되는' 존재인 건 아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그 역시 분명히 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라고. 그의 이 이론은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에마가 남자였다면 이렇게 끔찍한 꼴을 당하진 않았을 텐데.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여자아이를 가진 부모가 불안한 마음으로 매일을 보내야 하는 세상이 이상한 것이다. (p.128)




















사실 '이사카 코타로'는 《골든 슬럼버》하나 때문에 계속 믿고 있다. 그 뒤에 읽은 다른 작품들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닌데도 '이사카 코타로라면 골든 슬럼버의 작가니까!' 하게 된달까. 아주 오래전에 읽은 《사신 치바》는 치바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말고 별달리 생각나는게 없었지만, 이 책은 '죽은 딸아이에 대한 복수'라는 설정 때문에 읽고 싶어졌다. 만약 그 이야기를 이사카 코타로가 한다면 다를 것이다, 하는 생각 때문에.


달랐다. 이 책속에서 딸아이를 잃은 아버지 역시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위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처럼 '자극적'이지 않다. 덜 자극적이고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하다. 아마 거기에는 복수라는 큰 개념을 맞닥뜨린 주인공 옆에 다른 사람들이 있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그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딸을 잃은 부모가 복수하려는 범인은 사이코패스인데, 사이코패스에 대해 그토록 공부를 많이 한 등장인물이, 막상 그를 죽일 기회가 와도 번번이 놓쳐버리는 것이 지극히 인간답게 느껴졌다. 충동적으로 그를 죽이는 것도, 실수로 자꾸 그 기회를 놓치는 것도, 모두 인간이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



옆으로 시선을 옮기니 테이블 위에 작은 비디오카메라가 놓여 있다. 머리에 피가 오르고 가슴속 기름에 거품이 인다. 카메라와 마이크는 취재하는 자들의 오만한, 전지전능의 상징이다. 폭력과 똑같은 강제력이 있다.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 세례를 받으면 발언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고, 카메라에 잡히면 부주의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들이대는 쪽 인간들은 안전지대에서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과도 닮은, 여유작작한 태도를 보인다. 위험하지 않은 장소에서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며 주물럭댄다. (p.134)



크- 카메라의 폭력성에 대해서라면 이사카 코타로는 그의 다른 책 《가솔린 생활》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 아, 무릇 사람이란 그렇구나. 하고 싶은 말은 어떻게든 주구장창 하게 되어있는거야. 히가시노 게이고의 톱니바퀴, 이사카 코타로의 카메라. 나는 어떤 얘기를 주구장창 하고 있을까? 아, 다시 돌아가서.




"냉담한 두뇌를 가진 사람 하나한테 우리 너무 쉽게 농락당하네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사코 씨도 분명 조종당하고 있겠죠." 도도로키 씨도 그랬었다.

"나머지 스물네 명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예?"

"스물다섯 명 중 한 명이 지배게임을 한다며.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러니까 거꾸로 세면 스물네 명은 너희들 쪽이잖아. 그렇지?"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바 씨가 말하려는 게 뭔지 이해가 갔다. 1대 24라면 24인 쪽이 우세한 게 아닌가 하고 묻고 싶은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가 봐요. 책에도 나와 있는데, 숫자상으로는 아슬아슬해요."

"스물다섯 명 중에 겨우 한 사람인데?"

"밀그램의 실험이라는 게 있는데."

미키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내가 아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실험 결과가 충격적이어서인지 다양한 책에서 걸핏하면 인용되고 있었다. "잘난 사람이 지시를 하면 순순히 복종하게 된다는."

"대충 말하자면 그렇지."

학자가 한 인물에게 기계를 조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계를 조작하면 다른 사람이 전기충격을 받게 되어 있었다. 실험자들은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망설이면서도, 권위 있는 학자가 '더 세게'라고 명령하니 열 명 중 여섯이 그 말에 따랐다. 실제로 전기충격은 거짓이었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연기였지만, 어쨌든 '사람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권위 있는 사람이 명령을 하면 반 이상이 그 말에 따른다'는 게 증명됐다. 또한 '명령을 거부한 사람은 죄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도 입증됐다. 그것이 밀그램의 실험이었다.

"사이코패스를 다룬 책에서도 그 실험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 스물다섯 명 중 한 명이 사이코패스라 쳐요. 나머지는 스물네 명이죠. 그런데 그중 6할은 '명령을 받으면 복종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인 거죠. 계산하면 열네 명이죠."

"사이코패스까지 더하면 15대 10이 되네."

"그 책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었어. '양심이 있는 인간에게 승산이 없지는 않지만 불리하다.'"

"그렇군."

"더구나,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인데, 15대 10이 된 시점에서 이미 10은 열세예요. 따라서 열세인 쪽 사람들이 공포나 불안감 때문에, 아니면 유리한 편에 붙자는 생각으로 저쪽과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죠. 합리적인 판단과 계산이 가능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반수가 그렇게 한다면 20대5가 돼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기는 하지만 23대 2가 되는 상황도 상상 못할 게 없었다.

"그렇군." 치바 씨가 대꾸했다. "그런데 실은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지인과 나눈 적이 있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뭐죠?"

"그럼 왜 이 세상이 혼조 같은 인간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은 걸까?"

"예?"

"지배게임에 강한 인간이 살아남는다면 다른 인간들은 모두 멸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듣고 보니 그러네요." (p.328-329)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한 사람은 존재한다.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공감능력이 없는 마음 상태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더 강한자는 존재하고, 그 강한자의 말을 복종하는 사람들도 있다. 냉담하고 지배게임에 능한 사이코패스가 25명 중에 한 명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 한 명은 아니더라도 그의 말을 따르는 한 명일런지도 모른다. 고통을 당하는 쪽에 내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치바의 의문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그 강한' 존재와는 다른, 반대쪽의 인간들이 세상에는 더 많을까? 나는 아직 읽지 않은 책, '스티븐 핑거'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유를? 냉혹하고 잔인하며 감정도 없는 존재들 사이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아직 우리가 더 많은 이유를 이 책이 설명해주지 않을까, 하고.

















결말까지 이르렀을 때 좀 더 현실적인 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일런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는 메세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사카 코타로 쪽이 좀 더 좋다. 힘들고 잔인하게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세워주는 느낌을 이사카 코타로가 준다. 이사카 코타로 식의 권선징악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혼조의 수명을 연장해준 가가와에 대한 원망도, 아, 나중에 이르면 울컥, 하게 되는 것이다. 신은 가끔, 제 할 일을 하는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연의 순리가 그러한지도 모르겠고. 물론 제 할일을 '가끔' 한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문제이지만.




출근길에 이사카 코타로의 책을 다 읽고 출근하자마자 다다다닥 페이퍼 쓰고 있는데 상사가 들어와서 중간에 글쓰는 걸 멈춰야 했다. 크- 나는 어디에 써두고 정리했다 옮기는 스타일이 아니라 생각날 때 삘 받아서 다다다닥 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런식의 끼어듦은, 물론 내가 무얼하는지 모르고 끼어들려는 의도도 없었겠지만, 상대방의 말을 끊는 것과 똑같이 빡치는 경우다. 으...말할 때 끊지 말고 글 쓸 때 끼어들지마!! 으르렁-



이사카 코타로 책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기도 해서 나는 이사카 코타로의 책을 하나 더 사서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사신의 7일》책 뒷날개에 보니 이런 책이 있던데.
















얼마전에 사신의 7일을 나보다 먼저 읽은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친구에게 '히가시노 보다는 이사카쪽' 이라고 말했고, 친구도 그렇다고 했다.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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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0-22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주인공 처럼 복수를 하고 싶어도 할 능력이 없죠. 현실에선 성인이된 소년범죄자의 과거를 밝히는 쪽이 오히려 처벌받게 되니까요.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피해자보다 범죄자의 잊혀질 권리가 우위에 있는 게 부조리한 현실이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대부분의 무력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없겠지요. 위안이 되고자 쓴 글이 아니라 문제를 드러내고자 쓴 글이라 그런 듯해요.

다락방 2014-10-22 10:47   좋아요 1 | URL
책을 보고나서 영화도 볼까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나니 영화를 볼 수가 없겠더라고요. 영화는 아무래도 책보다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제기한 문제를 바깥으로 끄집어내 얘기해보는 기회가 생길수도 있었을 법한데, 음, 이건 제가 너무 이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또. -_-
이 문제제기는 고맙죠. 자극적이라 힘들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이래도 너네는 갱생을 말할 수 있겠어?`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니네가 말하는 갱생은 지극히 이상적 도덕일 뿐이라고` 하고 말이지요. 그런점에서 히가시노의 말은 충분히 들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남의 일`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서니데이 2014-10-22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하게 되는 자신이, 어느 입장에 놓이느냐에 따라 같은 문제도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되구요. 이걸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부터가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요. 때로는 그런 것들, 다수 의견이기 때문에 옳다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때가 있으니까요, 길게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14-10-23 08:41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서니데이님. 어느 입장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섣불리 우리가 가진 생각을 강하게 주장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상황에 따라 내가 한 말을 번복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