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들 창비세계문학 2
리처드 라이트 지음, 김영희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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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가 왜 죽였는지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이유를 말하려면 자신의 삶 전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메리와 베시를 죽인 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게 무엇인지 결코 누구도 이해시킬 수 없다는 바로 그 생각과 느낌이었다. 그의 범죄는 밝혀졌지만, 그것을 저지르기 전에 그가 느꼈던 느낌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죄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삶이었던 그 깊고 숨막히는 증오를, 원치 않아도 품을 수밖에 없던 증오의 느낌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죄를 인정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전달할 수 있을까? (pp.431-432)

 

 

 

 

내가 만약 이 한 권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뉴스에서 범죄자를 다룰때 그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가졌을 것이다. 잔인한 범죄에는 그에 맞는 형벌을 가해야한다고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한 사람의 범죄자가 저지른 범죄가 사회적 문제때문일수도 있다고 말했던 사람들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어떤 '죄'를 저지르기까지는 그 사람의 삶이 형성된 과정과 시간이 있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축적된 경험과 쌓였던 분노.

 

 

이 책 속의 흑인 청년 비거는 마음 속 깊이 분노를품고 있었다. 그 분노가 언제고 폭발할 것 같아서 자신이 두려웠다. 자신 안에 분노가 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런 분노로 인해 백인 여자를 죽이려고 계획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방 하나에서 네 가족이 함께 살았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것도 힘겨웠다. 그가 그 자체로서의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거리를 방황해야했다. 물론 그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비행기를 몰아 보고도 싶었고 군인이 되고도 싶었다. 사업을 하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흑인에겐 이 모두가 허락되지 않았다. 백인들은 그들에게 교육을 받으라고 했으며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단, 그들-백인들-이 정해놓은 구역 안에서만.

 

 

 

물론 그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는 백인들이 있었다. 비거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했던 돌턴 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흑인들의 청년 회관에 탁구대를 기증하고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경계선 바깥의 땅에서만 흑인을 거주하게하고, 그들로부터 높은 임대료를 받는다. 그것이 관습이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이득이었으니까. 임차인과 집주인으로서 흑인은 더 가난해지고 돌턴씨는 더 부자가 됐다. 그런 그가 일자리를 주고 기부금을 냈다고해서 흑인의 삶을 이해했다고 보여질 수 있을까? 그를 마냥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비거의 변호를 맡은 맥스 변호사는 돌턴을 향해 '점잖은 돌턴 씨는 돈을 기부함으로써 자신의 기분은 달래보려 했다(p.552)' 고 말한다. 나는 돌턴을 보면서 작년 연말에 보았던 뉴스를 떠올렸다. 뉴스에서는 삼성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얼마냈는지 말하고 있었다. 감히 내가 만져볼 수 없는 큰 금액이었고 그 금액은 재작년보다 더 늘어난 금액이라고 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것, 힘이 센 쪽이 약한 쪽을 억압하는 것, 차별을 하고 언론을 장악하는 것. 이 모두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었다. 나는 내가 만약 오래전의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이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당연한 듯 흑인을 노예로 삼지 않았을까. 나는 그 때 세상이 내게 보여주던 신문 기사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았을까. 그 때 신문의 이런 기사가 실렸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을까.

 

 

이곳 남부에서 우리는 흑인이 분수를 지키게끔 단호히 조치하며, 좋은 뜻으로건 나쁜 뜻으로건 백인 여자 몸에 손이라도 닿을 시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흑인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상상하고 불만을 품을때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은 시민들이 직접 법을 대신해 말썽을 부리는 검둥이 한명을 본보기로 삼는 것이다. (p.393)

 

 

지금 보면 이렇게 무섭다고 느껴지는데, 내가 그 당시에 이 기사를 봤더라도 이것이 선동적이고 편견을 조장하는 무서운 기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난 흑인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매일매일의 고된 일상을 당연하다 여기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을까? 나는 비거처럼 분노를 간직한 채 그것을 터뜨리는 것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원망하기는 했을 것 같다. 지금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그랬던것처럼.

 

 

"신문에서 매일 사람들에게 증오를 불어넣는 판국에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 마음을 바꾸겠다는 겁니까?" 잰이 물었다.

"하느님께선 바꾸어놓으실 수 있지요!" 목사가 열을내며 말했다. (p.405)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펜을 들었다. 그리고 밑줄을 긋고 그 밑에 이렇게 낙서했다. '그렇다면 그동안엔 왜?' 이 세상을, 흑인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하느님이 바꾸어놓을 수 있다면 대체 왜 그동안엔 바꾸지 않았던 것일까? 어떻게 하느님을 원망하기 보다 믿을 수 있을까? 백인도 믿는 하느님을, 백인과 흑인을 만들어 둔 하느님을, 죽으면 우리 모두가 같은 곳에 갈 거라는 하느님을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 죽어서는 같은 곳에 갈 수 있는데 살아서는 같은 곳에서 살면 안되는걸까? 하느님말고는 전혀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하느님을 원망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걸까?

 

 

 

책은 처음부터 조마조마하게 읽힌다. 그러다 결국 이글이글 분노가 타오른다. 흥분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특히나 흑인들도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비거에게 다가가고 악수를 하고 같이 밥을 먹자고 청하는 메리와 잰을 볼때는 그들의 그런 서투른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삶 전체를 억압 받으며 살아온 사람에게 갑자기 손을 내밀어 우리는 달라, 너도 같다고 생각해, 라고 말하며 그런 행동을 부담스러워하는 비거로 하여금 자신들과 동석하게 만들다니. 그들의 의도가 선했다한들, 그 순간의 비거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은게 아닌가. 그들이 생각한 건 그들 자신의 기분이나 만족감이 아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해서. 비거는 훗날 그때의 자신이 '비굴한 개가 된 기분(p.489)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지막 맥스 변호사의 변호에 대해서는 할 말도 많고 의욕도 충만해져서 오히려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 같아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다. 나는 그가 최선을 다해 싸웠다는 것을 안다.

 

 

 

 

책에 실린 작가연보를 보면

1926년 멤피스 도서관은 흑인에게 책을 대출해주지 않아 백인 동료의 이름을 빌려 책을 봄. (p.658)

 

 

라고 되어있다. 작가인 리처드 라이트는 실제로 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책을 읽었고, 어쩌면 그래서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 백인에게 또 흑인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상상만 해볼 뿐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소설이 왜 쓰여져야 하는지를 알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처음 소설이란 걸 읽게 됐을 때, 그 때 소설은 내게 그저 재미를 주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게 소설은 다르다. 재미와 이야기를 주고 감동을 준다. 세상에 일어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말해준다.

 

무엇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하나의 눈에 보이는 사건 뒤로 길고 긴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하나의 범죄는 한 인간이 저지르는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가 저지른 것일 수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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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1-1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인데, 그 소설 속 현재가 1928년이고 멤피스와 멀지 않은 남부예요. 흑인에 대한 일상적 차별, 유대인에 대한 미움, 공산주의자에 대한 무조건적 증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조소. 20세기 소설의 4분의 3은 여기에서 나온 듯 해서.. 마음이 쓸쓸하네요.

다락방 2013-01-14 09:50   좋아요 0 | URL
오, 드림아웃님, 이 책도 그래요. 흑인에 대한 일상적 차별과 유대인에 대한 미움, 그리고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까지 이 책에 다 나와요. 언론에서는 전 국민이 공산당을 미워해야 한다고 선정적인 기사를 내보내죠. 물론 흑인에 대해서도 그렇구요. 어휴, 읽으면서 어찌나 답답하고 무섭던지요. 그 시대를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견디며 살아온걸까요..

다락방 2013-01-1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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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1-1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글에 추천이 (이것밖에)없다니 이상하군.

moonnight 2013-01-16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네번째 추천은 저예요. ㅠ_ㅠ

얼마전에 영화 '헬프'를 봤어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 시대에 살았더라면 대다수의 백인들과 다르게 흑인들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다들 그러니까,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 자체가 마비된 사람들을 보니, 영화라도 너무 무섭게 느껴졌어요.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맞아요. 정말 좋은 리뷰입니다. ^^

다락방 2013-01-18 12:18   좋아요 0 | URL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문나잇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을 대할수 있었을까, 를 생각해보면 도무지 자신이 없더라구요. 그러면서 그 시대에 그 사람들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문나잇님, 이 책이 좋은 책입니다. 읽어보세요. 우리는 하나의 사건뒤로 숨겨져있는 길고 긴 사연이 존재함을 알 수 있어요. 제게는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이었어요.

이진 2013-01-1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글에 추천이 없다니 이상하군요.

차별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것이죠. 아픈 것이기도 하구요. 굳이 흑인뿐만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 차별아니겠습니까. ㅠㅠ 저는 조선시대만 생각하면 울컥해요. 핍박받은 여성들을 떠올리면 더욱요. <채홍>을 읽어서 그런 걸까요.

다락방 2013-01-18 12:2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사실 저는 추천이 별로 없다니 이상하군, 하고 제가 댓글 단 게 나름 유머였는데 아무도 웃어주지 않아서 뭔가 자뻑에 빠진 여자사람이 된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네, 차별은 흑인에게만 가해진건 아니죠. 여자에게도 성소수자에게도 유대인에게도 가해졌었죠. 그것이 폭력적이란 것을 가하는 당시에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것이 주는 폭력성에 다들 취하는 것 같아요. 한참 시간이 지난후에야 알 수 있으려나요. 당시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