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토끼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1학년때 나의 물리선생님은 본인이 결혼한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었다. 웃으면서 말씀하시긴 하셨지만, 나는 열 일곱 살, 어린 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수 있어서 놀랐다. 물리 선생님은 빨리 그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고 했다.


"사실 재니스도 나만큼이나 자기 부모를 견디지 못해요. 부모한테서 얼른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 나하고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p.191)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결혼의 이유들중에 '부모로부터 벗어나기'는 꽤 많은 퍼센테이지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의 물리선생님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결혼을 결심했던 이유는 잊은채로 자신이 새로 만든 가족들과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느꼈을까? 자신에게 주어졌던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만큼 자신이 만든 가족들 틈에서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혹시 지금쯤 하지는 않았을까? 이 책속의 래빗이 그랬던것처럼.


한 남자가 일상과 가족에게 권태를 느껴 집을 나간다. 그의 주머니에는 얼마만큼의 돈이 있고 찾아갈 곳도 있다. 자신의 아내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여자를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자신의 집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로운 삶을 꾸리면서 그는 친구를 사귀고 운동도 한다. 

일상이 지리멸렬하다고 느끼고, 늘 함께하던 소중한 사람들이 꼴도 보기 싫어지는 것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감정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끔 그럴때가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누구나 한번씩 느껴본 만큼,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이 사람들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열망 또한 불끈불끈 생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휙- 집을 떠나는 것이, 또 이곳을 떠나 다른곳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나'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면, 혹은 내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라면,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훌륭한 방법이 되는것은 아니다. 남자가 집을 나간 순간 남자의 아내는 남자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멍청한 여자가 되고(실제로 그녀가 멍청한지는 차치하고), 그런 사위를 둔 장모는 홀로 된 딸 때문에 속을 끓여야 하고, 남자의 부모는 그 아이가 그렇지 않았는데 여자를 잘못 만나서라고 화를 내고, 동네 목사는 그런 그가 언젠가는 돌아올거라며 남자의 식구들을 상대한다. 동네 목사는 또다른 성직자로부터 '니가 할 일은 기도지 그들을 만나 그의 변명을 해주는 일이 아니다'라는 잔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목사도 화가난다. 그러니까 남자가 그동안 지내왔던 일상을 버리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화를 내고 욕을 먹는 사람이 한 두사람이 아닌거다.



내가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내가 속하게 되는 곳은 한 두군데가 아니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또 그들중 몇몇과는 꽤 오랜 친분을 유지하기도 하며 또 그들중 몇몇과는 소중한 감정을 나누게 된다. 그러다가 그 관계속에서 빠져나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이의 불행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이 책속의 남자도 그것을 알고 있다. 아니, 그 과정들 속에서 그걸 깨닫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이 될 배짱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대가를 치러준다는 거야." (p.214)



아마도 그것을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알고 있기 때문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에 비해서 모든걸 버리고 훌쩍 도망가버리는 사람이 현저히 적은걸지도 모른다. 그것을 책임감이라 부르든 뭐라 부르든, 내가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나 대신 대가를 치러줄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남자는 자신이 정착했던 곳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불편함과 상처를 줬다. 물론 그들도 남자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그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알지도 못했고 그 따위것에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는 무책임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상황을 뒤에 던져두고 모질게 앞만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남자는, 새로운 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을 잠깐동안이지만 떠나야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에게 또다른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나는 항상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하는 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왔다.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라고.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렇다면 그들이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나이기를 포기해야 하는걸까? 만약 남자가 그렇게 사라져버린 듯 도망치는게 아니라 '어쩌면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를' 사람들을 앞에 모아두고, '나는 이제 지쳤소, 그러니 이자리를 박차고 떠나려 하오' 라고 말했다면, 그랬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들은 '오냐 그래 그럼 너는 너 자신이 되렴' 하고 그를 놓아줬을까? 누군가는 너에게 무슨일이 있는거냐고 계속해서 지나친 관심을 보였을거고 또 누군가는 떠나지 말라고 울었을거고 또 누군가는 떠나라고 말은 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자는 결국은 떠나지 못한채로 어제와 같은 삶을 어제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없이 이곳에서 사라져버리는게, 그렇다면 가장 좋은 선택이었을까? 만약 다른 사람들을 선택했더라면, 그들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다면 나는 떠나지 않은채 이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생 참 쓰다, 고 생각했던 건 반복되는 일상과 늘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해 권태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그 권태가 있기 훨씬 전에 설레임과 매혹과 사랑이 존재했었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이다. 차마 벗은 몸을 보여주지 못하는 수줍은 아내가 거기 있었고, 남자의 어린 시절이 찬란했었다고 증명해주는 친구들이 거기, 권태 이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친구가 내게 자신의 사랑을 끝내면서 '시간은 사랑을 못나게 만든다'는 말을 했던적이 있다. 시간은 찬란했던 순간을 권태 뒤로 감춰버린다. 인생이 참말로 쓴맛을 가져다 주는건 또한, 이 사람들을 새로운 사람들로 바꾸고, 이 환경을 새로운 환경으로 바꿔도 지금의 설레임이 영원하지는 않을거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달아나고 도망가고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 언젠가는 또다시 지금 갖고 싶었던 삶에 대해 지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그 순간이 올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달콤함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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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1-12-2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내 주위 사람들까지 생각하기엔 머리와 가슴이 하나밖에 안되서 힘들어요.
우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니깐.

다락방 2011-12-21 11:56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레와님. 내가 나 자신을 찾는일, 혹은 내 행복을 찾는일이 내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기도 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얽혀있기 때문에 나 하나만 쏙 빠져나오는 일이 무척이나 힘들어요.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레와님.

2011-12-21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1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1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2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3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1-12-2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 참 쓰다...

삶의 권태는 순식간에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힘들고, 그때마다 생각을 전환하고 새롭게 하는 것이 힘들고...

다락방 2011-12-22 22:32   좋아요 0 | URL
삶의 권태는 순식간에 찾아오고 그럴때 인생은 참 쓰지만, 그것이 극복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래전의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서 박미선이 남편인 박영규의 모든게 꼴도보기 싫어진거에요. 그래서 미칠려고 하는데 며칠 시간이 지나니 다시 애정이 살아나서 웃고 함께 지내더라구요. 어쩌면 어떤 시기라는게 있고, 그 시기를 견뎌낸다면 괜찮아지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마노아 2011-12-2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과 6펜스가 생각났어요.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락방 2011-12-22 22:33   좋아요 0 | URL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일 수 있다는게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아요, 마노아님. 그건 쉽지않은일인가봐요. 알지만 새삼스럽네요. 그러게요.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poptrash 2011-12-22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아직 안 읽었어요. ㅜ_ㅜ

다락방 2011-12-22 22:33   좋아요 0 | URL
뭐에요!! 그런데 왜 나를 재촉했어!!!!!!팝님 나빠요!!!!!

BRINY 2011-12-2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줄을 읽고 놀랐습니다.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이유로 빨리 결혼한 친구가 있었거든요. 몇번의 위기를 넘기다가 지금은 그냥그냥 가정 꾸리고 삽니다만... 그런 이유로 결혼을 택한 사람들이 제법 있군요. 전 그저 집을 나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좋다는 대학가고 열심히 안정된 직장 찾아서 돈 벌었습니다.어떤 걸 선택하던간 인생이란 ...

다락방 2011-12-22 22:35   좋아요 0 | URL
결혼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이유들은 특히 더 많이 공통되기도 한것 같아요. 줌파 라히리의 단편에서 여자는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거든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왜 너는 그 남자와 결혼하려 하는거냐고 묻자 그녀는 `모든게 정리될 것 같아서` 라고 말해요. 그 느낌이 뭔지도 알겠더라구요.

어떤 선택을 하든 쉽지않고, 책임을 지는것들도 분명히 존재하죠.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그 선택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할 것 같아요. 인생이란 결코 쉽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