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 게이의 몸에 대한 고백 혹은 기록을 읽고 있다.

록산 게이는 키도 190센치나 되고 몸무게도 많이 나간다.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갔을 때는 200키로가 넘었다고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그녀는 열두살 때 '크리스토퍼'라는 같은 학급 남자아이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의 친구들 앞에서, 그리고 그의 친구들로부터도. 열두살에 친하게 지낸 남자아이로부터 집단 강간의 피해자가 되다니. 록산 게이는 이 일을 기록하며 그의 이름을 가명으로 '크리스토퍼'라 명하는데, 나는 읽으면서 그의 이름을 본명으로 써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굳이 가명으로 해서 지금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살고 있을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거다.


일전에 정희진 쌤 강연에 갔었을 때, 가장 무서운 건 '외로움'이란 말을 들었었다. 나는 록산 게이의 이 책, 《헝거》를 읽으면서 외로움이 가장 무섭구나, 떠올린다. 록산 게이가 '아닌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크리스토퍼와 계속 만났던 것은, 학교에서 아는척 해주는 누구도 없을 때, 학교 밖에서 크리스토퍼가 친구(라고 그녀는 느꼈다)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 조차도 학교에서는 록산 게이를 아는 척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방과후에 만나 함께 지냈고, 그 시간동안 록산 게이는, 크리스토퍼가 시키는 걸 모두 하게 된다. 그걸 하지 않으면 그마저도 잃을까봐. 학교에서 인기 좋은 남자아이가 나의 친구가 되어주는데, 그녀에게는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도 없고, 그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에 누구에게도 말못할 비밀을 키워나간다. 그렇게 록산 게이의 외로움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던 크리스토퍼는 친구들까지 데리고와 그녀를 강간하는 것이다. 열두 살의 크리스토퍼가 열 두 살의 록산 게이를.



록산 게이는 그 이후 먹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자신의 몸을 크게 더 크게 부풀려 안전해지고 싶어한다.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부모님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 일을 제 안으로 숨기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내가 나를 그렇게 망가뜨렸다, 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 그럴 때 록산 게이를 위로해주는 건 음식 밖에 없었다. 먹는 행위. 그리고 먹는 것에서 오는 쾌감. 먹을 때 음식은 그녀에게 쾌감을 줬고, 그 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몸이 자꾸 자꾸 더 커지면서 그녀는 남자들로부터 안전하다 느낀다.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는데, 그 후에 이십대와 삼십대 사십대를 거치며 그녀가 자신의 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또 어떻게 느끼는지가 차분히 기록되어 있다. 많은 부분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고 또 그녀의 갈등에 공감하면서 책을 읽어가고 있는데, 그런 한편 '크리스토퍼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십대에 친구들과 함께 여자아이를 집단 강간한 크리스토퍼.

그는 그 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십대 후반에는? 이십대에는? 삼십대에는? 그리고 지금은?

인기 많은 남자아이가 인기 없는 여자아이를 자기 멋대로 이용한 것이 잘못이라는 걸, 그 때는 몰랐을까?

알기 때문에 그는 학교 에서는 그녀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다고는 인지하지 못해도,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 떳떳하지 못하다는 건 알지 않았을까?

그 뒤로 록산 게이는 학교에서 걸레로 소문이 나는데,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자신이 잘못한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면, 그 후에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을까?

그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록산 게이는 자신의 십대 후반을, 이십대를 몽땅 망가진채로 보냈다고 생각하는데, 크리스토퍼는 어땠을까?

다른 사람의 육체를 제멋대로 하는 것을 지속했을까?

그는 범죄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반성하고 있을까?

도대체 크리스토퍼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그는 어떤 성장과정을 거쳐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어떤 모습으로 지금을 살고 있을까? 감옥에 있을까?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까?

나는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일로 크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쥐죽은 듯 사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록산 게이가 지금 이렇게 큰 작가가 되어있는 걸 보고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설마, 더 높은 어떤 위치에서 명예를 가진 채로 더 큰 힘을 폭력으로 행하고 있진 않을까?



크리스토퍼,

너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었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니?

잘....살고 있니?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 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정희진 추천사中, (p.9-10)

당신이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오직 당신의 몸만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때론 낯선 사람들에게 공공 담론의 대상이 된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었을 때, 감량을 했을 때, 혹은 그대로 유지했을 때도 어느 누구나 당신 몸의 비평가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비만의 위험성에 대한 각종 통계와 정보를 코앞에 들이미는데 마치 당신은 뚱뚱할 뿐만 아니라 멍청해서 당신 몸의 실치에 대해, 그 몸을 최대한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착각에 빠져 있는 줄 아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당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이런 비평들은 항상 ‘염려‘라는 말로 포장되곤 한다. 그들은 당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는다. 당신은 곧 당신의 몸이고 결코 그 이상이 아니며 당신의 몸은 그보다 더 못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p.145-146)

<비기스트 루저>는 뚱뚱함을 반드시 파괴해야만 하는 적이자, 근절해야만 하는 전염병으로 보는 프로다.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은 오만 가지 방법으로 통제와 징계를 받아야 하고, 그 통제와 징계를 통해 비만인들을 더 인정받을 만한 사회 구성원으로 재탄생시켜야 한다. 그들은 살만 빼면 행복을 찾을 수가 있는데, 이 쇼에 따르면, 그러니까 이 사회의 문화적 관습에 따르면, 행복이란 오직 날씬함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기스트 루저>같은 쇼와 이를 모방한 여러 쇼를 볼 때마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우리에게는 없는 힘을 달라고 빌게 된다. "너무나 인간적인 이 몸을 가져가시고 당신이 의도하는 그 몸을 주세요." (p.153)

이 여성은 그동안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스스로를 위한 최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우리에게 설파해왔다. 그러나 2015년 윈프리는 4000만 달러를 투자해 웨이트 워처스의 주식 10퍼센트를 사들여 이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다. 이 브랜드의 광고 중 하나에서 오프라는 말한다. "올해 당신 인생 최고의 몸매를 만들어보세요." 이 문장에 담긴 함의는 현재 우리의 몸매는 우리의 최고의 몸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코 절대로 그렇지 않다. 60대 초반의 억만장자이며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인 오프라조차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나 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몸에 관해 이 문화가 보내는 해로운 메시지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어도, 우리는 날씬하지 않으면 만족하거나 행복할 수 없다. (p.163-164)

비만 비하는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며 때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의견으로 가장해 뚱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충격적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들을 괴롭히면 살을 빼게 될 거라고, 몸 관리를 하게 될 거라고, 그것도 아니면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 의사 자격증이라도 가진 것처럼, 비만과 관련된 건 강상의 문제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한다. 이 박해자들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 우리 몸이 통제 불능이고, 사회를 거역하고, 뚱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자기들이 우리를 정의의 길로 이끄는 사도라고 생각한다. 무척이나 이상하고 잔인한 시민 의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뚱뚱하다는 이유로 나를 모욕할 때 나는 앙심을 품는다. 나는 완고해진다. 날 모욕하는 이들에게 침을 뱉어주기 위해 더 뚱뚱해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앙심의 유일한 피해자가 나 자신뿐이라 해도.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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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을 읽는다는 것
    from 마지막 키스 2018-04-12 10:00 
    나는 비만이 장애인 것은 몰랐지만 내 사이즈는 내가 특정 장소에 갈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한다. 나는 너무 많은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항상 공간에 어떻게 접근할지 생각한다. 엘리베이터가 있을까? 무대까지 계단이 설치되어 있을까? 계단이 몇 단일까? 난간이 있을까? 이 질문들은 장애인들이 세상으로 나왔을 때 하게 되는 질문과 달지 않았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 우리가 장애가 아닐 때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
 
 
psyche 2018-04-16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으면서 한국이었다면 지금쯤 크리스토퍼의 본명이 뭐고 지금 뭐하는지 다 까발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록산이 직접 인터넷에서 찾아보잖아요 그놈을요. 그 심정이 이해가 되고, 또 너무 아팠어요.

다락방 2018-04-16 09:10   좋아요 0 | URL
네, 학교에서 인기 많은 백인 남자아이 였으니, 뭔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저도 생각했거든요. 나중에 찾아보고 알아주는 대기업의 관리자가 되었다는 걸 알고 참 ..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요? 그리고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평온하고 부유한 일상을 누리고 있을 것 같아서 답답해요. 그리고 제가 나서서 다 까발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