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너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비만이 장애인 것은 몰랐지만 내 사이즈는 내가 특정 장소에 갈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한다. 나는 너무 많은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항상 공간에 어떻게 접근할지 생각한다. 엘리베이터가 있을까? 무대까지 계단이 설치되어 있을까? 계단이 몇 단일까? 난간이 있을까? 이 질문들은 장애인들이 세상으로 나왔을 때 하게 되는 질문과 닮지 않았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 우리가 장애가 아닐 때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지를 알게 해준다. (p.332-333)



















나는, 지하철에 앉아있던 누군가 일어나 자리가 생겼을 때, 그 자리가 좀 좁게 느껴지면, '내가 앉으면 좀 낑기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마 앉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앉도록 내버려 둔다. 나도 앉고 싶었지만, 내가 앉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좀 더 좁게 앉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거다. 그러면 내 욕망을 내려놓는다. 굳이 거기에 앉아 내 앉고 싶음을 실현함으로써 내가 덩치가 크다는 것을 인지하게 하고 싶지 않은 거다. 굳이 그걸 알게 해서 무얼해. 나는 아주 많이 내 몸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인정하지만, 가끔은 내 몸이 이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동작을 취하고자 할 때, 혹은 어디에 가고 어디에 앉고자 할 때, 어떤 옷을 입으려고 할 때, 내 몸이 날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우는 종종 있다. 세상의 많은 부분이, 거의 대부분이 '날씬한 여자'를 기준으로 모든 것들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처럼 날씬하지 않다면, 모든 것에서 나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 보는 만큼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날씬한 여자들보다 덩치가 더 큰 여자들이 예쁜 옷을 고를 확률이 적다는 것을 안다. 이 만큼이 내가 경험한 세계이니까. 그런데 나는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고도비만인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조차도 날씬하지 않으면서 늘상 다이어트를 해야하지 않나? 라고 생각했고, 그러나 실제로 나는 내가 이 육체로 살아가면서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피나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덩치가 작은 여자도 아니면서, 고백하자면, 아주 오랜 시간 비만을 혐오해왔다. 아주 뚱뚱한 남자 앞에서 뚱뚱한 남자가 싫다고 말한 적도 있다. 아, 나는 얼마나 무지하고 무례했던가.



록산 게이는 키도 크지만 덩치도 아주 크다. 스스로가 고도 비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고도 비만인으로 사는 삶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말한다. 아주 많은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보다 훨씬 많이 '불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의자가 그랬다. 의자에 앉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앉는 일. 대부분의 의자는 팔걸이가 있고, 그 팔걸이를 들어 올릴 수 없다면, 그녀는 그 의자 안에 자신을 구겨 넣어야 했다. 억지로 구겨 넣고나면 당연히 몸에 멍이 들었고 또 아팠다. 비행기를 타면 두 좌석을 예약해야 했고, 안전벨트도 맞지 않아 항상 안전벨트를 연장할 수 있는 '벨트 익스텐더'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공중 화장실에서 변기가 무너질까봐 엉덩이를 들고 일을 봐야했고, 강연을 가서는 계단이 없는 단상에 올라갈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서 체중계에 올라가면 숫자가 더이상 올라가지 않았고 그래서 간호사들을 당황시켰다. 이 불편함과 수치심은 연결되어 있어, 그녀는 자주 울었다. 병원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그녀는 소리없이 울었다. 자신이 뚱뚱하기 때문에 운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소리죽여 울어야 했다.



나는 이 고백들을 읽으면서 '이건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여러차례 하게 됐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에 살고 있고, 같은 사람인데, 모든 것을 할 때 더 불편한 삶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던 거다. 육체적으로 불편하면서 그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일. 이상하잖아? 휠체어가 오를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 장애인들을 위한 특별한 복지인 게 아니듯이, 큰 좌석을 만들고 더 긴 안전벨트를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닌가. 왜 뚱뚱한 사람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벨트 익스텐더를 가지고 다녀야 하나. 왜 밥을 먹으러 가기 전에 그 식당의 의자는 어떤지 미리 체크를 해야 하나. 일상 생활에 이토록이나 불편을 가지고 온다면, 이건 세상이 모두 비만을 혐오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비만 혐오가 세상에 만연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세상이 나서서 '뚱뚱한 니 책임이지' 라고 하는 건, 이건 너무 잘못된 거 아닌가? 왜 사람을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아프게 하는 거지? 이건..세상이 잘못한 거잖아? 이건 너무 부조리하잖아?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우리는 몸에 대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이런 사례들을 접하다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니가 살을 빼면 되잖아!"



그런데, 그게 정답일까? 이 세상이 정해놓은 평균 사이즈에 나를 맞추는 일. 그렇게 살아야 살기가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평균사이즈도 만들어야 하는 일. 그게 과연 온당한 답일 수 있는 걸까? 세상의 '보통의 사이즈'에 맞춰야 무리없이 살 수 있으니, 그렇게 만들도록 하라는 게, 그게... 답일까? 그보다는 내가 어떤 체형을 갖고 있어도 살기에 무리가 없는 쪽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닌가. 모두가 '니가 뚱뚱해서 불편한거야' 라고 비만을 혐오하는 게 잘못이지 않나. 너무 말랐다는 게 드러나지 않게 너무 뚱뚱한 게 특별하지 않게, 어떤 체형이든, 키가 작든 크든 뚱뚱하든 말랐든, 우리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닌가? 왜 뚱뚱한 게 수치스러워야 할까? 왜 뚱뚱한 건 수치스러워야 하고, 죄를 짓는 기분이고, 불편한 걸 의미하는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진짜 .. 뒤통수 한 대 크게 얻어맞는 것 같았는데,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 역시 뚱뚱한 사람들을 보며 '그러니까 살을 빼면 되잖아?'를 생각했을 것이다.


맙소사..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비만을 혐오했던 내가 싫어진다 진짜. 부끄럽다...

아 너무 대충격이다 지금...




여러분. 책을 읽자. 책을 읽고 더 많이 생각하자. 주변을 둘러보자.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부분에서 나는 한참이나 뒤쳐져 있음을, 이렇게 책을 읽다가 깨닫는다. 부끄럽다. 정말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

하아-



비만 비하는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며 때로는 그럴듯해 보이는 의견으로 가장해 뚱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충격적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들을 괴롭히면 살을 빼게 될 거라고, 몸 관리를 하게 될 거라고, 그것도 아니면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 의사 자격증이라도 가진 것처럼, 비만과 관련된 건강상의 문제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한다. 이 박해자들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 우리 몸이 통제 불능이고, 사회를 거역하고, 뚱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자기들이 우리를 정의의 길로 이끄는 사도라고 생각한다. 무척이나 이상하고 잔인한 시민 의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뚱뚱하다는 이유로 나를 모욕할 때 나는 앙심을 품는다. 나는 완고해진다. 날 모욕하는 이들에게 침을 뱉어주기 위해 더 뚱뚱해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앙심의 유일한 피해자가 나 자신뿐이라 해도. (p.214)






어제 친구가 내가 좋아하는 재이슨 스태덤이 나오는 영화가 개봉할 거라고 <메갈로돈>의 예고편 링크를 보내주었다. 나는 '아니 대체 상어 영화에서 이 사람은 어떤 액션을 보여줄 것인가' 궁금했는데, 어쨌든 봐야지. 그리고 집에 와서 이것에 대해 남동생과 대화했다.



"야, 재이슨 스태덤이 <메갈로돈> 이라는 상어영화에 나온대. 봐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기서 상어로 나온대?"



아 빵터졌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동생 넘나 좋은 것. 마이 러브...





어제 김치볶음밥 먹고 싶다고 했더니, 오늘 아침 아빠가 김치볶음밥을 해두셨다. 고맙다고 말하고는 한그릇 먹었는데, 아오, 더 먹고 싶은 거다. 그래서 한그릇을 더 퍼왔다.


"아빠, 김치볶음밥 맛있어서 한그릇 더 펐어. 하염없이 들어가네. ㅋㅋㅋㅋㅋ"

"하염없이 들어가면 하염없이 먹어. 그러면 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우리 아빠의 이런 면은 정말 넘나 좋은 것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분명 커피가 잔뜩 있었는데..텀블러 가득이었는데...다 어디로 간걸까...어디로 갔니? ㅜㅜ

지난 몇 년간 전문가의 도움이 있으면 내 피트니스가 향상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퍼스널 트레이너와 몇 차례 운동을 하기도 했다. 요즘 나와 같이 운동하는 트레이너는 티제이라는 이름의 인디애나주 토박이인 청년이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형에 믿기 힘들 정도로 강건한 육체를 갖고 있다. 그의 삶 자체가 피트니스라 할 수 있다. 그는 말 그대로 건강의 화신으로, 젊음과 건강으로 빛이 나고 이 세상을 자기의 무대로 만들고 싶다는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는 단백질의 원천인 닭가슴살의 신봉자로, 곁들이는 소스로는 무지방이거나 칼로리가 낮은 머스터드를 추천한다. 그의 식생활을 들을 때마다 그와 그의 미각이 불쌍해진다. 그가 음식을 정말 맛있게 해주는 양념이나 향료를 하나도 모르고 있을까 봐 진심으로 걱정된다. (p.186-187)

나는 두려움을 잘 다루지 못한다.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밀어내려 했다. 나에게는 인간적인 약점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나는 늘 이대로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p.313)

2014년 10월 전까지는 더 잘하려고 녹초가 되도록 밀어붙였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녹초가 되어버렸고 그래도 끈질기게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이며 나 자신을 슈퍼휴먼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에는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마흔이 되면 몸이 먼저 말한다. "그렇게 안 해도 돼. 자리에 앉아. 야채도 먹고 비타민도 먹어야지." 발목이 부러진 이후의 삶에 대한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다. 아마 그중에서도 가장 심오한 깨달음은 치유란 그다지 거창한 것이 아니고, 먼저 내가 내 몸을 돌보고 나의 몸과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 사실일 것이다. (p.317)

《타임》지 기사가 난 후에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아버지는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니?" 나는 대답했다. "아빠, 난 무서웠어요.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될까 봐."
열두 살 때는 내게 일어났던 그 일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었던 그 아이와 했던 그 짓들 때문에 결국 그와 그의 친구들이 나에게 그 짓을 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 이후의 모든 일이 전부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p.319-320)

그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기업의 관리자였다. 그럴듯한 직함을 갖고 있었다. 여전히 똑같은 거만한 얼굴 표정,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은 내 것이야‘하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p.322)

그의 직장에 찾아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다가 집까지 미행을 하면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집의 어떤 방에서 자고 있을지 알아낼 것이다. 결혼은 했는지, 아니는 있는지, 행복한지 궁금하다. 좋은 남편이자 아빠일까? 같이 어울렸던 그 남자아이들과 아직도 연락을 할까? 혹시라도 그대 그 시절을 이야기하거나 혹시 내 이야기는 할까? 그가 나에게 그 친구 이름들을 알려줄지 궁금하다. (p.323)

내가 아는 모든 여자는 평생 동안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나는 내 몸을 편안하게 느끼지 않지만 그렇게 되고 싶고 그런 쪽으로 노력을 하고 있다. 내 가치가 오직 내 몸에 달려 있다는 해로운 문화적 메시지를 버리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지고 다니던 그 모든 자기혐오를 무효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어떤 공간에 들어갈 때 고개를 똑바로 들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면 나도 눈을 마주 보려고 노력 중이다.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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