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제임스 러브록 지음, 홍욱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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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오늘날 외면할 수 없는 기후위기와 인류세 논의를 살펴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 가이아(Gaia)”. 특히, 신기후체제에 관한 라투르의 후기 저작들은 약간의 변용을 거치긴 했지만, 바로 이 가이아 개념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이아라는 이름 자체는 윌리엄 골딩이 작명한 것이지만, 이 가설의 저작권은 이 책의 저자인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1919~2022)과 진화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2011)가 공동으로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러블록이라고 읽는데 왜러브록으로 표기할까? “마구리스라고 안 하고 마굴리스라고 표기하면서? “마구리스가 구린 것처럼 러브록이란 표기도 구림). 러브록은 작년(2022)에 자신의 103세 생일에 영면하였다. 장수하셨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유명을 달리한 거장들이 참 많다. 러브록, 라투르, 그리고 마이크 데이비스… (내가 존경하는 맑스주의자 데이비스에 대해 추모 서평을 쓰고 싶은데 쓸 수 있을까? 당분간은 못 쓸 듯…)


린 마굴리스와 제임스 러브록 - 가이아 여신상 앞에서


1. 가이아

가이아 가설의 공동저작권자이긴 하지만, 러브록과 마굴리스의 출발점은 정반대다. 마굴리스가 현미경을 통해 겨우 살펴볼 수 있는 세포 안의 물질들에서 시작한다면(https://blog.aladin.co.kr/eroica/13739842), 러브록은 달에서 망원경을 통해 본 지구의 모습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18, 35, 47, 144 247, 286). 이처럼 두 거장 간의 마이크로와 매크로의 대화가 가이아 가설을 구성하게 된다.  



가이아는 대기, 해양, 지표면의 암석 등과 밀접하게 결합된 모든 생물체들로 구성되는 초생명체(superorganism)”(17-18), “지구의 생물권,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실체”(51-52),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총합체”(52, 256). “능동적 조절시스템”(75, 123, 159), “각 부분들이 갖는 가능의 합보다 훨씬 커다란 능력과 속성을 지닌 복잡한 협조 체제의 네트워크”(78) 등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가이아의 주요한 세 가지 속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248~249).

 

1)     가이아는 지상의(terrestrial)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하도록 주위 환경 조건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2)     가이아는 중요성이 서로 다른 부분들로 이뤄져 있다곧 핵심부에는 꼭 필요한(vital) 기관들이, 주변부에는 소모성(expendable)이거나 있어서 좋을 수는 있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redundant) 기관들이 있다.

3)     가이아가 나쁜 방향으로의 변화를 감지하면, 사이버네틱스의 원리에 따라 반응한다.

 

이 중 1) 3)은 가이아가 생물의 번성에 적합하도록 행성의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일종의 능동적 조절 체계로 기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1)의 논리는 러브록이 가이아를 지구 생태계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이를 위해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실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비판을 유발하였다. 2)의 규정은 이 책 뒷부분에서 러브록이 전개하는 논의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 가이아 안에서 인간의 기능, 중요성, 의미, 역할에 관한 것이다.

 

2. 가이아는 존재하는가?

러브록은 지구가 자기조절적 체계라는 생각을 “1965년 어느 날 오후 갑자기떠올렸고(25), 1967년에 가설로 확립했고(49), 1970년대 초 가이아라는 이름을 골딩으로부터 선사받았으며, 그 후 몇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고, 1974년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해서 1979년에 초판을 출판하였다. 여러 사람의 관심을 받았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과학계는 이 가설에 대해 냉대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1994년부터 지구에 대한 전체론적(holistic) 접근방식이 부상하면서이제 이 이론은 과학계의 승인을 기다리는 후보 이론이 되었다”(16).

 

우리가 오감을 통해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상정할 때에는 그것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존재가 설명될 수 있는 감각할 수 있는 다른 대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관념도 이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러브록이 가이아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왜 가이아라는 개념이 필요했을까? 45억년 전 지구가 생겼고, 이 곳에 생명체가 등장한 것은 35억년 전이다. 이후 태양이 방사하는 열에너지의 양, 지구 표면의 형태, 대기권의 화학적 조성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기후는 거의 변화가 없이 평균 기온 섭씨 10~20도를 유지해 왔다(49-50, 71). 지구의 대기에 산소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억년 전쯤인데, 이는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기존의 생물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이었지만, 생물들은 그 변화에 적응하여 이 살인적인 침입자를 유쾌한 친구로바꿀 수 있었고, 대기 중 산소가 차츰 증가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21%에서 더 올라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84-85, 216-217). 생물은 바다에서 처음 탄생하였고, 이는 바닷물의 염분 농도가 6% 이하임을 뜻하는데, 그 이후 차츰 감소해서 수억년 동안 오늘날과 같은 3.4%를 유지하였다(178~188). 기후, 대기 중 산소의 비중, 바닷물의 염도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은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무언가의 개입이 없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존재할 수 없는 화학적 비평형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비평형 상태의 항상성(homeostasis)은 오늘날 생물의 번성에 적합한 조건을 이루는데, 러브록은 그 이유를 가이아의 존재에서 찾고 있다(52, 128, 282-285).

 

그렇다면 이 가이아 가설이 도전한 기존의 관점 또는 우리의 상식이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관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과학적 지식이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대기, 바닷물의 농도, 평균 기온을 모든 생물이 번성할 수 있는 이상적이면서도 정상적인 조건이라고 가정하는데, 지구에 이 조건이 어느 순간 갖춰진 다음에야 비로소 생물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초에 지구가 생겼을 때뿐만 아니라, 그후 바다가 생기고, 그 바다에서 생물이 처음 생겼을 때에 지구의 조건은 오늘날과 완전히 달랐다. 생물이 점차 번성하면서 산소도 늘어나고, 바닷물의 염분 농도도 줄어들었다. 곧 생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 출현한 시기와 비슷한 삶의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생명활동이 배제된 채, 지구가 생명의 존재를 준비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생물들이 대기, 해양, 암석 등과 함께 삶에 적합한 조건들을 능동적으로 만들어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명체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이 비평형 상태가 잠시 존재하고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 왔다는 것은 생명체가 대기, 해양, 암석 등과 함께 복잡한 피드백 루프들을 작동시켜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동적 조절체계처럼 작동해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3. 가이아는 의도와 지능을 갖고 있는가?

항상성과 능동적 조절이 작동했다면, 가이아가 그야말로 대지의 여신처럼 의도와 지능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가이아 가설에 대한 과학자들의 비판은 이 점에 집중되었다. 이 책 앞에 실려 있는 2000년에 다시 쓴 서문(15-16)에서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했던 의도가 과학자들의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이 비판에 대해 러브록이 방어를 제대로 못한 것 같다는 인상이 든다. (물론 내가 러브록의 다른 책들을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이러한 오해에 대한 교정은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210~220)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구는 인간의 의식과 같은 것은 없지만 생리적으로 조절되는고유감각 체계(proprioceptive system)을 갖고 있고, 이것이 사이버네틱스 원리가 작동하게끔 하는 스위치가 된다는 것이다. 공 능동성과 의식은 다른 것이다.

 

사이버네틱스 원리를 구성하는 복잡한 음의 피드백 루프들(negative feedback loops)이 하나하나 규명될 때마다 가이아 가설은 이론의 지위에 더욱 가깝게 다가설 것이고, 현재의 지구시스템 과학은 이 가설에서 이론으로의 도정을 걷고 있는 학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4. 가이아와 인간

마굴리스와 러브록의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이 참 대수롭지 않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지구는 자신의 항상성 유지에 더 중요한 부분과 덜 중요한 부분을 갖고 있다. 러브록이 보기에 지역적으로 제일 중요한 현장은 지상에서는 열대우림이며, 해양에서는 대륙붕이다. 생명체 중에서는 인간보다는 바다나 습지에 사는 미생물들이 항상성 유지에 더 결정적인 역할을 유지한다. 이 지점에 가이아 가설의 두번째 비판 대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멀게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본 프로타고라스의 관점, 가깝게는 사물의 가치를 그 사물의 인간적 유용함으로 판단하는 근대 공리주의(utilitarianism)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인간은 이런 방식의 사고에 젖어 있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은 좋다.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먼저, 그 하찮은 인간 따위가 만들어낸 환경 오염(79-80, 84, 216, 238)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 핵실험이나 방사능 폐기물도 그리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62-63). 또 러브록은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도, 그리고 그 저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환경운동도 싫어한다(27-28, 10-11, 281). ? 비과학적이면서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말 잘하는 운동권 싫어하는 이과 천재 같은 느낌이다. 그가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일까? 올해 후쿠시마 방사능 폐기물이 바다로 방류되면 이제 해산물을 과연 먹을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는 비과학적인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러브록이 인간이 유발하는 환경오염을 가이아가 다 해결해줄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 위험을 경고한다. 이 점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고,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 같다.

 

가이아 가설은 우리 행성의 안정된 상태는 인간을 매우 민주적인 실체인 자신의 부분, 또는 그 안에서의 파트너로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282, 번역수정)

 

러브록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해서 어떤 생물들은 의식적 사고, 지각 능력, 인식적 예지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284). 이러한 지능은 통상 살아 있는 생물의 속성이다. (물론 지능에는 여러 단계가 있을 수 있다는 러브록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생물뿐만 아니라 AI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이아도?

 

이에 대해 러브록은 가설 수준의 추론을 제시한다. 지금과 같은 복잡한 방식으로 여러 정보를 수집, 저장,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인 인간이 어쩌면 가이아의 신경계와 두뇌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284~285). 이는 곧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이 단지 우리들의 것만 이 아니라 우리가 가이아와 함께 공유하는 것임을 뜻한다(287). 러브록은 에필로그의 끝부분에서 인간이 사실은 우리 자신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실체, 곧 가이아의 역동적 부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제안한다(287).

 

5. 가이아와 에이와(Eywa)


책을 읽기 시작한 다음에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 물의 길>을 보았다. 그리고 복습삼아 전편도 제대로 보았다. 따라서 책을 읽는 내내 <아바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판도라 행성의 여신 에이와는 아마 가이아에서 나왔을 것 같다. 모든 생명체들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시스템의 부분으로 보는 나비족(Na’vi)의 모습은 에필로그의 말미에서 러브록이 그리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동일하다. 나비족이 에이와의 부분이면서 그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가이아에 길들여질 수 있으리라(287).




흥미롭게도 러브록은 인간이 이러한 역할을 다할 수 없다면, 그 역할을 할 다른 후보로 우리보다 훨씬 더 커다란 두뇌를 가진 거대한 해양성 표유류들 가운데 하나인 고래를 꼽는다(287-290). <아바타: 물의 길>에서 지구에 온 인간이 자신의 노화방지에 특효인 고래 뇌의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를 살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전 나비족의 단결투쟁뿐만 아니라, 보통은 행성 생명계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에이와의 분노를 유발한다



인간 너머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인식을 너머 교감한다는 것은 필멸의 존재인 나뿐만 아니라, 유적 존재인 인간 자체의 재정의를 수반한다. 다르게 보이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기온이 널뛰기하는 올겨울 특히 의미있는 독서였다. 쉽게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더 큰 살아있는 것의 부분이며, 그 안에서 다른 살아있는 것들과 공생하는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가이아란 바로 이러한 부분적 연결들의 총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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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교양 도서라서 그런지 직역보다는 의역이 많다. 도움이 되는 역주도 있지만, 역자의 개입이 좀 거슬리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역자는 러브록이 가설(hypothesis)”이라고 쓴 것을 자꾸 이론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분명 오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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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 신기후체제의 정치
브뤼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 / 이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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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브뤼노 라투르 (1947~2022)

2022109일 라투르가 췌장암으로 영면하였다. 딱히 그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올해가 가기 전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했다. 지난번 녹색 계급의 출현리뷰 쓸 때만 해도 이 세상 사람였는데, 리뷰 올리고 열흘쯤 뒤에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좀더 다정한 리뷰를 썼어야 했다. 사실 그 리뷰 쓰고 나서 뭔가 켕기는 게 남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좀더 풀어보고 싶었다. 각을 세우기보다는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1. 1990년대: 새로운 역사의 시작

1990년대초 역사의 종말로 불리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이 새로이 시작된 역사를 함께 구성하는 세 가지 현상을 지목한다. 그것은 1) 탈규제, 2) 불평등의 폭증, 3) 신기후체제 또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기후변화 부정론이다(17, 29, 40, 42). 글로벌화의 부정적 결과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이 현상들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반복되어 왔는데, 2010년대 중반 이후의 세 사건들 -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이주의 급증 - 도 이 세 현상의 복합적 현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하나의 위험이다(29). 이 사건들은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글로벌화가 약속했던 보편성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례들은 2022년말의 뉴스에서도 계속 꼽을 수 있다. 코로나19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애플과 테슬라의 중국 공장 가동 중단, 영국의 난민 르완다 이송계획, 그리고 프랑스 노인의 쿠르드족 총격 살인사건 등도 신기후 체제역사의 한 장면들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들은 모두 지금 머무는 이곳에서 두 발 뻗고 편히 지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의존할 것이 마땅치 않다. 근대화를 통해 남의 땅을 빼앗던 이들이 딛고 서있는 땅도 이제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26). 라투르는 이를 발밑에서 땅이 꺼지는 느낌으로 표현한다(27-28). 이제 우리 모두 딛고 의지할 땅이 필요하다. 그런데 새 땅은 이제 없다.

 

2. Global, Local, 그리고 Terrestrial

라투르의 근대가 원래 의미대로의 역사적 시대 범주가 아니라 사회/자연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뜻하듯, 글로벌과 로컬도 규모(scale)의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가고자 하는 지향, 그들의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유인자(attractor), 직선적 벡터의 양 끝(그림 1, 49, 52~57)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p. 302)에서 네트워크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것들로 취급되었던 로컬과 글로벌이 이 책에서는 그림 1부터 6까지 모두에 출현하는 유인자들이다. 로컬과 글로벌은 근대인의 단선적인 시간의 화살이라는 가상적 선분의 두 점, 곧 유토피아이다. 근대인들(또는 그들의 시간의 화살)은 로컬을 등 뒤로 한 채, 근대화의 전선을 밀어붙이면서 글로벌 쪽을 향해 질주해왔다. 그런데 애초 글로벌화의 장밋빛 약속(글로벌화 플러스)은 지켜질 수 없었고, 대신 서두에서 살펴본 글로벌화의 부정적 경향들(글로벌화 마이너스)이 명약관화해지면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로컬-마이너스로의 질주 역시 확산된다(54). 트럼프주의는 이 정반대로의 두 질주들을 통합하려 하면서 비현실로 이륙하려고 한다(60~61). 라투르는 트럼프주의가 지향하는 네 번째 유인자를 외계로 Out-of-This World”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제안하는 세 번째 유인자를 그것의 대극에 자리매김한다. 라투르가 제안하는 the Terrestrial은 인간의 행동이 펼쳐지는 환경 또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66).

 

역자는 the Terrestrial대지”, “대지인”(83)으로, terrestrials대지의 것들”(120, 128)로 번역한다. “글로벌”, “로컬은 음차해도 독자들의 이해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반면, “테레스트리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판단을 존중하지만, 덕분에 한국 독자들은 “-al”로 끝나는 라임의 맛을 볼 수는 없다. 그런데 the Terrestrial에는 인간, 비인간, 지구의 생명막(가이아), 곧 러브록적 행위자 모두가 들어가서 수중 존재는 배제하는 것 같은 그냥 "대지"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사람만을 가라키는 "대지인"도 좀 그렇고... 어쨌든 좋은 번역어는 아닌 것 같다.

 

3. 정치생태학의 실패

앙드레 고르와 알랭 리피에츠.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프랑스의 정치생태학자들이다.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에서 정치생태(political ecology)로의 전환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계몽된 맑스주의자들 중 일부가 걸었던 도정이다. 라투르는 이들이 환경 이슈들을 공공 생활의 핵심 의제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근대인들의 시간의 화살이라는 덫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침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를 만들어 방향을 재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73~77). 라투르가 the Terrestrial이라는 새로운 극을 제안하는 이유는 정치생태학이 나침반 바늘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와 이로 인해 가능해질 새로운 좌표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그 극을 지목했을 뿐, 이를 정치적 행위자로 엄밀하게 정의하지 못했으므로, 그 극으로의 실제적 이동에 실패했다(72, 85). 다른 세 극들이 토포스 및 땅과 토지가 없는 장소로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면, the Terrestrial은 국경과 정체성을 초월하면서도 지구와 토지에 결부된 새로운 세계-만들기(worlding)이다(82). 따라서 이는 스케일의 전복과 시공간 경계의 파괴를 수반하며, 글로벌도 로컬도 아닌 대기적(atmospheric) 스케일에서 펼쳐진다(132).

 

4. 칼 폴라니 비판

라투르는 정치생태학이 결합시키고자 하였던 두 흐름 사회주의와 생태학 이 사회문제와 생태문제의 양자택일이라는 궁지에 빠졌기 때문에 실패했고, 이 결과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지 못했다고 평가한다(86). 사회주의는 생태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정치생태학은 사회주의의 배턴을 이어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의 역할을 서로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이다(96). 지난 70년의 거대한 가속(the Great Acceleration) 시기 동안 자본주의는 변하였지만, 사회주의는 변하지 않았고, 생태주의는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따라서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은 폴라니의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않았고, 거대한 부동성(the great immobility)만을 보였을 뿐이다(85).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일종의 이론적 보완책으로 생각하였던 폴라니가 비판된다. 그는 시장자유주의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였고, 시장화에 저항하는 사회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고, 계급 갈등이 아닌 강력한 저항의 힘을 예상하지 못하였다(85, 91). 폴라니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생태학을 매개로 하여 맑스주의 일반으로 확장된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만큼 충분히 유물론적이지도 않고, 리얼리스트도 아니다(91, 95).

 

5. 생산시스템의 사회적 계급 vs. 생성시스템의 지구사회적(geo-social) 계급

맑스와 폴라니, 그리고 그 후예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생산시스템, 사회계급, 사회문제였다면, 라투르는 생성시스템, 지구사회계급, 지구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차이는 18더욱 커지는 생산 시스템생성 시스템사이의 모순에서 주로 논의되는데, 녹색 계급의 출현에 실린 김환석의 라투르의 정치생태학과 슐츠의 새로운 계급이론의 표에 간략히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요약하지 않겠다. 이 책 16~17절에서는 양자가 기반하고 있는 자연관의 차이가 소개되는데,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생산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자가 자연을 갈릴레오적 객체들로 채워진 우주로서의 자연으로 보았다면, 생성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후자는 이를 러브록적 행위자들(Lovelocian agents)”로 이뤄진 과정으로서의 자연으로 파악한다(110, 115). 전자가 지구를 많은 행성 중의 하나로 멀리서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후자에게 지구는 거주지/서식지로서 그 안에서 다른 생명들이 함께 공동생산하는 것으로서 온전히 유일한(wholly singular) 것이다. 행위성(agencies)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 곧 전자의 관점이 객체들(objects), 심지어 자원들로 파악한 것들에게도 주어진다. 우리가 일부를 구성하는 이 지구가 바로 라투르의 제3,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인 것이다. 지구는 바로 나의/우리의 유일한 거주지이므로, 갈릴레오적 객체들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중립적 입장이나 거리두기는 불가능하다.

 

[이 책의 역자 박범순은 geo-social지리-사회적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김환석은 이를 지구사회적이라고 번역한다. 김환석의 번역이 옳다. 김환석 선생의 글은 이번에 다시 보았는데, 그 글이 후기로 실려 있는 녹색 계급의 출현뿐만 아니라, 이 책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친절한 안내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 책의 이해가 녹록치 않은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6.

나는 2022년에 슐츠와 공저한 (아마도 그의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책인) 녹색 계급의 출현2017년에 나온 이 책보다 먼저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를 무척 힘들게 읽었지만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전에 나온 그의 STS 저작들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으며, 신기후체제에 대한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저자의 새로운 저작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전에 내가 잘못 이해했던 것들을 교정하게 되고 또 새로운 의문들이 생기는 경우, 나는 그에 대한 지적 흥미가 더 자라남을 느낀다. 지금 내가 그렇다.

 

이 책을 읽은 후에야 녹색 계급의 출현에서 녹색계급이 맑스주의처럼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사적 방향이란 것이 다름아닌 the Terrestrial였고, 이것은 글로벌과 로컬의 상상적 벡터 바깥에 놓인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그 책의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3966311#Comment_13966311)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세 가지 질문거리를 썼는데, 그 중에서도 다음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을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는데,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19(133)에서 라투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지구에 있는 것들에 대한 대안적 기술을 답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것의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국왕이 제출토록 한 진정서의 예를 들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신분들의 불만과 고충들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다종다기한 불만들을 왕정이냐 공화정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총체화하기 전에 있었던 자신의 거주지에 대한 구체적 기술이 이 진정서들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활성체들(animate beings)의 거주지의 세부적 사안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곧 그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진정서들처럼 다시 구체적으로 현황을 점검하자고 제안한다.

 

대지 유인자(Terrestrial attractor)의 출현과 서술이 과연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할 수 있을지가 ... 의문이다. 세계 질서가 있으려면 현황을 점검해서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가 먼저 있어야 한다”(138).

 

여기에서 라투르는 분명히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려면, 그 이전에 우리가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에 대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분명 라투르는 수행(performance) 이전의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 어디에 행위자를 따라가는충실한 기술이 있느냐고 물어봤던 나의 질문은 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라투르는 분명히 “‘대지의 것들을 따라가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124). 그렇다고 이 질문이 마냥 라투르를 왜곡한 것이라고 무지한 내가 잘못했습니다하기도 힘든 것이 라투르는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선례를 들 뿐, 지구라는 공동 거주지에 거주하는 모든 행위자들과 활성체들(? 움직이는 존재들?) 또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에 대해 세세히 기술하지 못하였다. 또 이제는 아예 할 기회가 없게 되었다.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은 구체적인 기술을 제안하면서 끝났고, 녹색 계급의 출현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졌지만, 정작 두 저작을 매개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 곧 그가 강조했던 지구와 행위자들에 대한 구체적 기술은 누락된 것이다.

 

내가 다른 두 질문들에 담았던 생산 시스템의 사회계급과 생성 시스템의 지구사회계급 간의 관계나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의문은 그 때보다는 다소 물렁물렁해져 뾰족한 끝이 닳았다. 이 문제들에 관해서는 언제고 여유를 갖고 라투르의 다른 글들과 그의 동료들의 저작들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물이 좀 따뜻해진 걸까? 내 눈이 좀 밝아진 걸까?

 

라투르는 이 책을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썼다는 말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가 얘기했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얘기할 차례라는 말로 끝맺는다(19, 149). 라투르도 대화를 하고자 했던 것일까? 단지 여전히 근대인의 귀를 가졌던 내가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배배꼬인 프랑스 지식인의 혼잣말로 간주한 것일까? 근데 이제 좀 듣고 싶어진 것 같은데...

 

Adieu, Bruno! Adieu, 2022!!

 

<2022. 12. 31. 추기>

남은 자투리들 몇 개: 

1) 미주 44, 54, 55에서 현재의 생태사회주의적 저작들을 비판하는 것 같은데, 좀 자세히 써주지... 무슨 혼잣말 같아서 더 궁금증을 유발한다. 

2) 라투르는 폴라니를 비판하지만 결국 생산 시스템이 생성 시스템 안에 파묻혀 있는(embedded) 것이라는 폴라니의 문제틀로 귀환하는 것 아닌가?

3) 미주 70, 74에서 언급되는 필립 데스콜라의 Beyond Nature and Culture나 라투르의 Politics of Nature, Facing Gaia, 그리고 스탕게르스의 책들도 좀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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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12-30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글을 읽다보니 온정이 느껴집니다. 라투르의 열정에 에로이카님의 정성까지...

에로이카 2022-12-31 12:09   좋아요 1 | URL
초원님, 온정이요? 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한 해 잘 정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초원 2022-12-31 21:23   좋아요 1 | URL
라투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셔서 감사드렸어요. 동의하지 않는 주장에 대해서도 여러 경로로 논증하려는 모습이 타인을 인정하는 온정으로 느껴졌구요.
그런데 두 번째 자투리는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기도 하던데요.

몇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新年이 되는군요.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하시길 바래요.

에로이카 2023-01-01 18:50   좋아요 0 | URL
아.. 네.. ^^ 초원님,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라투르 너무 읽기 힘들어서 저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리뷰에 그 흔적이 남았나 보네요... 상호포섭은 누군가의 개념인가요? 아니면 그냥 일상적인 용법에서의 의미인 건가요?

초원 2023-01-03 08:08   좋아요 1 | URL
홀리즘이었던 것 같은데요, 세르의 상호포섭 개념으로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관점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 중에 라투르도 있었던 것으로 ... 봉지 넣기 비유가 설득력이 있었어요. 그 막연한 기억에 더해서 에로이카님의 출중한 해설을 읽다보니 안다는 착각이 생겼네요.

에로이카 2023-01-0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세르요.. 공부하고 싶은데 뭐부터 봐야할지 모르겠는 학자였어요. 세르의 상호포섭, 봉지넣기.. 기억해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3-01-05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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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르 귄의 사유는 깊고 넓고 따뜻하다. 여름에 읽은 책인데, 한 해가 저물어갈 때쯤에야 리뷰를 쓴다. 지난 주말에 바로 쓰고 싶었는데 김장 담그느라 못 썼고, 주중에도 일(과 월드컵) 때문에 잠시도 짬을 내기 힘들었다. 리뷰를 하기 전에 다시 빠르게 넘기며 초점을 잡는데 또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특히 1986년에 발표한 세 글 -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 <여자/야생>, <캐리어백 픽션 이론> -이 돋보인다. 원래 두 주제에 초점을 맞춘 하나의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마음을 바꿔 주제별로 두 개의 리뷰를 작성해야 할 것 같다. 두 번째 것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첫 번째 리뷰는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에 관한 것이다. 이 책에는 소설판 장바구니론”(292~301)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1.

이 책의 발행일이 2021910일로 되어 있는데, 내가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고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를 쓴 것이 그보다 열흘 남짓 빠른 829일였다. 처음 읽은 해러웨이의 책이었고, 그 책에서 르 귄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몰랐다고 별볼일없는 사람이 아니다. BTS 팬들은 그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우리 말로도 그녀의 여러 작품이 번역된 유명한 SF 작가였는데, 그때 난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73~81)에서 르 귄의 이 글을 라투르, 마굴리스, 스탕제르 등의 논의와, 그리고 신의 트릭(God’s trick)”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낸다. 그때는 아직 이 책이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음경 이야기(prick tale)”라는 유머를 질식시키는 극악무도한 번역 때문에 이 글의 원문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반 동안 (스탕제르는 엄두를 못 냈지만,) 라투르, 마굴리스, 르 귄의 글들을 짬짬이 읽어 왔다. 해러웨이가 르 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처음에는 해러웨이를 이해하기 위해 르 귄을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르 귄은 (이런 비교가 참 속물스럽지만) 어쩌면 해러웨이보다 더 훌륭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에 관한 독보적인 이 짧은 글(한글로는 10페이지, 영어로는 6페이지)을 내가 몇 번이나 읽었을까? 열 번은 조금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에 넘어갔던 한 구절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라는 제목으로 완성될 책을 계획하고 있었을 때 공책에 용어사전(Glossary)”이라는 제목을 썼다. 당시 울프는 색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재창조할 생각을 했다. 이 용어 사전 항목 중에 영웅주의는 보툴리즘(botulism)”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울프의 사전에서 영웅은 보틀(bottle)”이다. (bottle)이 영웅이라니, 혹독한 재평가다. 나는 이제 그 병을 영웅으로 제시하려 한다"(294).


이것은 무슨 말일까? 그 분야에 무지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들어봤다. 읽은 것은 없다. 그런데 그녀가 영웅담(heroism)을 보툴리즘으로, 영웅을 병으로 재정의하려고 하였다니. 출처가 어디인지, 맥락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르 귄의 이 책은 출처에 대해서 보통 미주를 달아 놓았는데, 유독 이 구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마리가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보툴리즘을 구글링한 끝에 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1983)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내가 종종 이용하지만 장서가 그리 대단치 않다고 여겨온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이 책의 53쪽에서 르 귄이 언급한 부분을 찾아냈다(https://blog.aladin.co.kr/eroica/14114280). 그런데 내용이 별 것 없다.

 

Soldier = Gutsgruzzler. Heroism = Botulism. a Hero = Bottle” (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 p. 253)

 

울프가 자신만의 노트에 남긴 이 짧막한 생각의 파편을 보았을 때, 르 귄은 궁금했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그리고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짧지만 빛나는 위대함으로 가득찬 이 글을 써낸 것이다.

 



2.

르 귄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사회계약론자들 홉스, 로크, 루소 등 처럼 채집사회에서 수렵사회로 넘어가는 일종의 자연상태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농업이나 문명이 시작되기 전의 시대, 일주일에 15시간 정도 일하면 충분히 생활을 꾸릴 수 있던 시절이다. 여자들은 아기를 보며 야생귀리를 까던 시절, 아기도 없고 노래나 별 다른 기술도 없던 남자들은 심심해서 나가서 매머드 사냥을 한다. 남자들은 상아와 고기만 갖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수렵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까지 갖고 돌아온다. “액션으로 가득찬 영웅담. 이제 아이를 보며 야생귀리 까는 이야기는 목숨을 걸고 매머드를 찔러 죽이고 마침내 전리품을 짊어지고 귀환하는 액션 히어로 이야기와 비교가 될 수 없다.

 

르 귄은 이들의 영웅담에 들어 있는 때리고 찌르고 두들길 길고 단단한 도구”, “그 멋진 크고 길고 단단한 물건잎사귀, 박껍데기, 조개껍데기, 그물, 가방, 멜빵, 자루, , , 상자, 용기, 담는 것, 그릇같은 물건을 담을 용기”, 무엇인가를 담는 물건을 의미하는 병을 반정립시킨다(294-295). 막대기, , 창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릇이나 병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이야기, 곧 뉴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담는 도구는 단검이나 도끼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것이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피셔가 인간진화의 캐리어백 이론이라고 부른 것이고, 울프가 남긴 실마리를 르 귄이 재탄생 시킨 것이다.

 

르 귄은 제국주의적인 본성과 통제불가능한 충동을 다스리기 위해 법을 만드는 영웅들의 액션 스토리의 특징을 세 요소로 정리한다(298-299). 1) 한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 후의 다른 시점의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의 화살의 서사, 2) 갈등 중심의 전개, 3) 남자 영웅(he)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르 귄은 이 셋 모두에 반대한다. 첫째, 처음, 중간, 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리(48~49, 73)는 마치 시작 이전과 끝 이후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가정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작 이전에는 전편들(prequels)이, 끝 이후에는 속편들(sequels)이 존재한다. 이 시간의 화살에 우로보로스의 형상이 반정립된다. 둘째, 중요한 것은 관계이고, 갈등은 그것의 한 종류일 뿐이므로 모든 관계를 갈등으로 환원할 수 없다. 셋째, 소설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people)이 있어야 한다.

 

르 귄은 소설을 시간의 화살이나 승리라는 결과를 갈등 끝에 쟁취하는 전투가 아니라, 자루나 가방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는다. 의미를 품는다. 소설은 약보따리이며 그 속에 담긴 것들은 서로와, 그리고 우리와 특별하고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방 속에 집어넣으면 영웅도 토끼처럼 보이고, 감자처럼 보일 것이다. 바로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다”(299).

 

뾰족한 것으로 찔러 죽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로서의 소설이라는 르 귄의 관점은 SF의 재정의로 이어진다. 기술과 과학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무기가 아니라, 문화의 장바구니로 다시 정의하게 되면, SF는 리얼리즘보다 덜 신화적인 장르로서 기묘한 리얼리즘이지만, 기묘한 현실이다”(301). 우리의 세상은 거대한 자루이고, 그 안에는 여러 존재들의 관계가 맺어졌다 풀려난다. 이 세상은 새로 태어날 것들의 자궁이며, 이전에 있던 것들의 무덤이며, 남자뿐만 아니라, 야생귀리를 잔뜩 따서 담고 그 씨앗을 뿌리는 이들, 그 와중에 포대기로 업은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노래와 아이들의 농담이 다 들어 있다. 이 얼마나 기꺼이 잠겨 쉬고 싶은 편안하고 따뜻한 목욕물인가?


3.

이렇게 르 귄은 영웅이 길고 단단한 막대기를 휘두르는 영웅담(heroism)을 무언가를 담는 그릇의 보툴리즘(botulism)으로 대체한다.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울프의 노트에 나온 뜻모를 수수께끼를 이렇게 풀어내다니,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어낸 오이디푸스보다 위대한 인간, 더 닮고 싶은 인간 아닌가?

 

르 귄은 같은 해에 작성된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언어, 힘의 언어인 아버지말(father tongue)과 학교에 들어가기 전 배웠던 어머니말(mother tongue)을 대조시키면서, 후자는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 “언제나 침묵 언저리에 있고, 자주 노래 가장자리에 있는 언어, ... 이야기들을 전하는 언어로 정의한다. 이 언어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벌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263~264).

 

나는 이 문장들에서 어떤 경이를 느낀다. 그 경이를 아버지말에 오염된 나의 무딘 언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내 배꼽을 만져볼 뿐. 인간이라면, 곧 배꼽을 갖고 있다면, 어머니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들어 왔던 말이고, 이미 할 줄 아는 말이기도 하다. 어머니말을 쓰는 비중을 늘리고, 그 말이 적합한 상황에서 그 말을 쓰고, 가끔은 아버지말을 어머니말로 번역도 하고, 번역 와중에 아버지말이 놓친 것들에 대해 어머니말로 실컷 이야기해야 하겠다.


4.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73~81)두번째 밀레니엄의 겸손한 목격자, 여성인간 앙코마우스를 만나다6(448~453)에서 이 캐리어백 픽션 이론을 발판삼아 아버지말과 어머니말을 넘나들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보여준다. 철학적인 배경지식이 없다면, STS에 관심이 딱히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해러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리다나 라투르가 아니라 르 귄에서 시작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해러웨이를 전공하거나 번역하는 이라면, 르 귄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황당한 창조적 오역들을 피할 수 있겠다 싶다.

 

5. 딴 얘기 하나, 김장

일주일 전 김장을 했다. 전날 장보다 감기가 걸렸다. 오전부터 시작한 김장 노동은 자정이 가까워졌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쪽파를 까면서 내 엄지와 검지는 팟물이 들어 흑록색으로 바뀌었다. 입은 계속 투덜댔지만 손은 쉬지 않았다. 씻고, 까고, 채썰고, 자르고, 나르고, 버무리고, 설거지하는 것이 무한반복되었다. 허리가 휘도록 일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다. 일어나거나 앉을 때마다 아이구구구하는 소리가 계속 저절로 나왔다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이런 게 야생귀리를 따고 까는 일이겠구나. ^^ 그러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마음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김장이 엄청난 노동이지만이 노동은 착취당하는 노동이 아니다. 가격으로 수량화되는 '교환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김치라는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한곧 나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분되지 않는다온전히 나를 위한 노동이다새벽이 되어서야 끝난 김장 끝에 김치냉장고에서는 김치가 익고 있다.



허리는 이제 다 나았지만, 감기는 아직 안 나았고, 터진 엄지손톱 양쪽 끝 살들도 그대로다. 액션 영웅담인 월드컵을 보는 시간도 16강전 진출로 연장되었다. 배꼽 있는 인간에게 이 액션 히어로물은 오락물일 뿐이다. 반면 끊임없이 내가 씻고 채우고 비우고 날랐던 김장매트, “다라이”, 김냉 저장용기, 김치 냉장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삶의 일부였다


이제는 김장하시기에는 기력이 없으신 어머니와 김장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동생들에게 갖다 주니 좋아 한다. 나의 노동의 산물인 김치가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값을 매길 수 없는(priceless) 선물이 된다. 별로 재미없지만 배꼽달린 사람의 삶은 이런 것이다. 어머니말에 별 재주가 없는 나는 이렇게밖에 못 쓰지만, 르 귄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젊은 르 귄들이 유려한 어머니말로 유치한 파워레인저 이야기들을 가방 속 토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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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 (Hardcover)
Brenda R. Silver / Princeton Univ Pr / 198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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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브레인스토밍의 흔적이 담겨 있는 총 67권의 공책에 필기한 내용을 브렌다 실버가 정리해서 1983년에 펴낸 책이다. 


운 좋게 도서관 보존창고에 이 책이 있었고, 도서관 시스템이 전자정보화되기 전에 입수한 책인지 표지 뒷면에는 대출기록카드가 꽂혀 있는데, 이전에 빌려간 이가 아무도 없는지 깨끗하다. 2022년 11월의 나를 위해, 아마도 오직 나를 위해, 아무도 찾는 이 없었을 이 책을 오랫동안 고이 보관해준 도서관에게 고맙다. 내가 찾고 있는 구절에 대해서 아무런 페이지 정보가 없어서 어제 저녁부터 한참을 뒤적이며 찾다 드디어 발견! 


버지니아 울프 전공자가 아니라면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 책을 찾아본 이유가 있지. ㅎㅎㅎ



창작을 위한 사유에는 단어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을 Gutsgruzzler로 대체하는데, 이 단어는 뭐라고 옮겨야 하나? 

내장폭식자? 순대러버? 

영웅담(heroism)은 병 이야기(botulism)로, 영웅(hero)은 병(bottle)으로 재정의된다.

그러나 울프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남겨놓지 않았다. 



르 귄도 이 페이지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툴리즘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준다. 

그게 뭔지는 다음 리뷰에 써주마. ㅋ

이 노트북에 있는 몇몇 스케치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완성된 저작에 나름대로 녹아 들어가게 된다. B.1절에는 새로운 단어들에 대한 탐색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를 다른 말로 바꾸려고 한다. 이는 『3기니』에서 작가가 반전 투쟁을 통해 남성과 여성 간에 새로운 단결이 탄생했음을 축하하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태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녀는 "폭군, 독재자"라는 단어들도 똑같이 시효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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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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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 책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읽은 책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라투르의 단독 저작이 아니라 니콜라이 슐츠와의 공저이기 때문일 수도, 비교적 친숙한 주제인 계급을 다루기 때문일 수도, 또는 번역이 무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투르는 별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물이었는데, 신기후체제 하의 새로운 계급 형성의 문제를 다룬다는 말에 도저히 외면하기 힘들었다.

 

1. 계급투쟁: 기술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개념

엄밀한 분석과 주장이라기보다는 단상들의 메모이다. 저자들은 계급투쟁 개념의 기술적(descriptive)이면서 수행적인(performative) 성격에 주목한다(16).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이 성격을 잘 보여준다. 1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탄생, 성장, 국가권력의 장악, 자본주의의 세계화, 상업공황, 프롤레타리아의 탄생과 성장에 이르는 과거와 현재의 훌륭한 역사적 기술이다. 2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는 처음에는 기술로 시작되지만 역사적 경향을 식별해내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재배열하면서 현재부터 미래에 이르는 투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2장과 마지막 4장은 일종의 투쟁의 시나리오, 그것에 맞춰 투쟁을 지도하고 수행(perform)해야 하는 대본이다. 공산당 선언의 이러한 수행적 성격에 주목했던 하트와 네그리는 맑스가 그랬듯 자신들의 제국도 도래할 계급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녹색 계급의 출현공산당 선언에 필적할 만큼 훌륭한 분석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논의들이 있고,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공산당 선언도 교리문답 같은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리라는 견실한 초고가 있었기 때문에 명확히 쓰여질 수 있었다. 짧은 단편 영화라기보다는 영화 예고편 광고 같다. 내용을 살펴보자.

 

2.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저자들은 녹색계급이 존재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맑스주의만큼은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녹색계급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맑스주의적 시나리오처럼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의 생산과 재생산에 대해 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22-23). 그러나 바로 여기에 두 개의 단서를 덧붙인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에 대한 것이다. 첫째, 이제 물질은 맑스가 분석했던 인간의 재생산과 관련된 의식주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비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곧 분석대상으로서 하부구조의 경계가 확장되어야 한다. 둘째, 오늘날 생산체계가 파괴체계와 같은 말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지구의 자연을 생산을 위해 추출해야 하는 자원이 아니라, 거주가능 조건으로 사유해야 한다(26). 곧 생산에 대한 배타적 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 토지, 화폐는 원래 상품이 아니었다는 칼 폴라니의 논의에 접목된다. 사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생태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폴라니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은 많은 생태사회주의자들 제임스 오코너, 미카엘 뢰비 등 이 오래 전부터 하던 이야기라 새로울 것은 없다.

 

그나마 새로운 것이 있다면, 생산이 거주가능조건의 파괴와 동일시되는 임박한 파국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를 멈출 수 있는 동원은 지지부진하다는 사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이를 극복할 필요성의 제기이다. 맑스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면서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던 라투르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 차가웠던 물이 조금은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생산 체계(system of production)는 생성 체계(system of engendering)에 둘러싸여 있다는 인식론적 지도를 그리면서, 다른 계급들이 생산관계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이를 제한하고자 하며, 이제 계급 갈등이 생산체계 내부(1)뿐만 아니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의 인터페이스(2)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34-35). 이 제2열의 투쟁에서 녹색계급은 지구 차원의 거주가능성 문제를 중심으로 옛 계급들과 충돌하면서 자신의 긍지를 끌어낸다(38-39). 이 서술은 분명 기술적이기보다는 수행적이다. 곧 그러기를 바라고, 저자들이 그렇게 되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바램과 다짐이 투영된 말이다.

 

이 형성 중인 녹색계급은 행위 지평을 생산의 외부로, 또 한 나라의 외부로 넓혀나가야 한다. 이 녹색계급이 대립하는 근대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는 계급들은 과거로 회귀하려 하는 것이므로 반동적이고,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고자 하는 녹색계급은 진보적이며 해방적이다(43). 여기에서 저자들은 해방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이들의 해방은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해방이 아니라, 비로소 무언가에 의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의 해방이다. 자유라는 이상은 발전(development)의 끝에 놓인 채 전진할수록 더 물러나는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envelopment), 곧 거주가능조건에 편안히 몸을 맡긴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전자가 생산 안에서의 사고라면, 후자는 생성 안에서의 사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성 안에서 우리는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더 좋다. 인클로저 운동이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고자 울타리를 친 것이었다면, 이제 이 해방하는 속박은 자연이 인간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50-52). 이제 진보는 시간의 화살을 따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체계 둘레를 감싸고 있는 생성체계로 사방팔방으로 분산하는 것이 된다(60).

 

그렇다면 누가 녹색계급을 구성하는가? 7장에서 잠재적 구성원들이 제시된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토착 민족, 미래 세대, 지식인, 종교가 녹색계급을 구성 중이지만, 정작 그 계급은 자신이 잠재적으로 다수파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곧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긍지가 없다(73). 상황이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라투르와 슐츠는 이 상황을 돌파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축 계급으로서의 긍지를 얻을 수 있을까? 저자들은 그람시의 진지전개념을 빌어온다. 이러한 차용은 두 가지 맥락에서 이뤄지는데, 하나는 미래의 기동전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서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객관적이익 심지어 그것이 생태적 이익이라고 해도 -에 매달리지 않고, 매번 문화 전체를 휘저어 섞어야 다른 계급들을 설득시켜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헤게모니 계급으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모방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81-82).

 

녹색계급이 쟁취하고자 하는 권력은 어떤 권력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9장의 제목으로 들어가 있는 질문인데, 여기에 대한 충실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녹색 계급의 주제는 일국의 영토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지구(global? earth?)정치에 속하기 때문에 권력 획득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장치를 차지해야 하며(97), 풀뿌리부터 건설되는 정당이 필요하다(103). 그래야 투표할 수 있다. 근대화와 글로벌화의 국가가 아니라 생태화를 추구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녹색계급의 정당은 아마도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현대의 군주로서 지도를 수행하는 당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칼 슈미트의 논의를 연상시키면서 동지와 적을 새롭게 구분하며, 기존의 계급제휴를 붕괴시키고,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에도 뭔가 역할을 하기는 바라는 것 같다(111-112). 또 언젠가 올지 모르는 뜻밖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113). 그런데 그 당의 이미지, 또는 짙은 안개 속에서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녹색계급의 모습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삐에로(112, 97)라면? 맥이 빠지면서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반전이 있을 수도 있지. 그 삐에로가 허당이 아니라,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로 변신하여 모든 기후악당들을 심판하는 시나리오가 가능도 할 수 있겠다만... 글쎄... 이 맥빠짐은 무엇일까? 내가 그저 우리가 잠재적 다수임을 확신하지 못한 채 한탄과 불평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104).

 

3. 부록

이상이 100쪽 남짓의 분량으로 쓰여진 76개의 메모를 정리하고, 아주 약간의 느낌을 덧붙인 것이다. 출판사가 이 분량만으로는 책을 내서 가격을 매기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역자 후기를 포함하여 다섯 편의 짧은 글들이 더 실렸다. 이 중에서는 미셸 세르의 자연계약론을 소개한 역자 후기와 슐츠의 계급이론을 소개한 김환석의 글이 볼 만하다.

 

4. 단상과 의문

라투르 책 치고 쉬워서 좋았지만,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약간의 단상과 의문을 글로 적어 남긴다. 라투르와 슐츠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녹색계급에게 우리가 함께 싸우면 기후변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긍지, 곧 집합적 효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글이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와는 별도로 나는 이 의도가 좋다. 그토록 맑스주의를 싫어했던 라투르가 계급투쟁을 선동하다니. 장하십니다! 좋습니다! 나도 힘을 합해 싸울게요!



 

그런데 이것이 단지 바이럴 효과를 노리는 일종의 카피캣 마케팅이 아니려면, 몇 가지 지점이 좀더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먼저 저자들은 계급투쟁을 생산체계 내부의 기존 계급투쟁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간의 투쟁으로 분류하는데, 두 투쟁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사회적 계급과 지구사회적 계급에 대한 슐츠의 구분(140) 역시 양자를 추상적으로 범주화할 뿐이다. 물론 슐츠의 글을 직접 다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양자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둘째, (난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라투르의 기존 저작들과 이 프로젝트의 정합성과 갈등의 지점이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라투르는 네트워크는 으로 이뤄진 것인데, 맑스주의자들은 추상을 통해 이 선들의 네트워크를 으로 인식하여 세계를 절대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이해하였고, 이 면을 한 번에 뒤집으려던 맑스주의의 프로젝트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고 조롱한 바 있다(우리는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다, 294-311). 그런데 그것이 생성체계가 밖을 감싸고 있는 생산체계의 이미지든, 슐츠가 표로 정리한 두 계급의 구별이든 추상의 산물 아닌가? 또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내가 라투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하고, 그 오해의 뇌피셜이 자가발전한 꼬투리 잡기일까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녹색계급은 해방을 지향하는 좌파이지만, 그저 반자본주의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21),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길게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개인의 호오를 떠나서 자본주의에 대한 녹색계급의 입장은 무엇인가?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계급투쟁을 수행할 정당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해봤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언급 자체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좌파가 가능한가? 내가 구닥다리라서 이런 말을 하는가? 자신이 녹색계급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며, 이런 팜플렛을 쓴 저자들이 회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녹색 계급의 출현공산당 선언에 비교될 만한 대단한 글은 아니다. //코 아니다! 이것이 무언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글이라면, 그 도래할 것은 새로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녹색 계급(ecological class) 자체라기보다는, 이 계급에 대한 새로운 연구일 것이다.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과하다 싶은 맑스에 대한 맹목적 충성 때문에 지루했다면, 반대로 이 글은 맑스의 계급 이론에 대한 선택적 단순화 때문에, 그리고 라투르가 이전에 맑스주의에 대해 써댄 말들 때문에 그리 후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짧고 쉽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답을 주기보다는 더 많은 물음표들을 제기하게 만든 책이다. 물론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내가 너무 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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